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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
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 밤이 궁금해. 꼬맹이 탐정 나오는 애니매이션을 말하는게 아니라. 누구 하나 얼어서 죽지 않았을까 궁금하는 거다. 새까만 밤이 지나가고 검푸르게 해가 밝아오기 시작하면 밖으로 나가기가 죽는 것 보다 싫다. 옷을 잔뜩 껴입고 밖으로 나오면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도 폐 속으로 밀려들어와 춤을 추는 이 지독한 추위에 몸이 절로 떨린다.
나와서 얼마 있지도 않았는데 입김이 마스크 밖에 얼어붙기 시작한다. 갑판으로 가까스로 기어나온 나는 속으로 온갖 비명을 지르면서 천천히 조타륜으로 향하고. 그 장면을 바라보는 선원들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해진다. 가만히 있어도 바람이 씽씽 불어오는 이 극지의 바람 속에서 바다의 날개가 속도를 올리면 그거만큼 상쾌한 상황도 드물겠지.
선원들도 그냥 다시 흑단목이 들어있는 선원실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만이 있겠지만 어찌 되었던 갈 길은 가야한다.
그런 마음으로 가르시아 해에서 위도를 높이기 시작한 시간이 삼 일이 지났다. 위도가 조금씩 높아질 때마다 아침에 일어나서 경험하는 추위는 항상 새롭게 다가온다. 얼음으로 만든 면도칼을 누가 내 옆에서 던지는 기분이다.
러셀의 검을 잡고 천천히 돌리자 모두가 눈을 질끈 감았다.
"..."
출력이 이상한데. 손이 얼어서 그런가. 나는 러셀의 검이 가르키고 있는 속도를 확인해보았다. 25노트. 하지만 이 속도는 기껏해야 10노트 언저리다. 무슨 일이 일어난거냐. 배의 뒤통수에서 뿜어지는 물의 출력이 너무 떨어지는데.
나는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보다가 안색을 바꾸고 선원들을 보았다.
"가서 물대포 한 번 쏴봐!"
나의 지시에 선원들이 꿈지럭거리면서 물대포로 향하기 시작하고 내가 그 모습을 보다가 마스크를 살짝 벗고 외쳤다.
"나 지금 빡치기 일보 직전이니까 빨리 움직여! 바닷물로 목욕하고 싶냐!"
설마...
선원들이 물대포를 당기자. 턱, 하는 소리와 함께 아무 것도 나가지를 않는다. 그걸 보고 있던 선원들이 이게 뭔 상황이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본다. 로제와 마리아도 예외는 아니고. 나는 허허허 하고 웃다가 다시 마스크를 쓰고 털썩 주저앉았다.
"... 막혔다 시발."
이 배에서 따듯한 곳이라고는 지금 흑단목들을 가져다 놓은 선원실과 항해사실, 선장실이 전부다. 나머지 배의 구간들은 식을만큼 식어있겠지.
바다의 날개에서 물을 퍼올려서 보내는 과정에, 그 내부의 온도 때문에 물이 갈 곳이 막혀버린 것이다. 바다의 날개 뒤에 달려있는 메인은 물이 지나가는 곳이 꽤 커서 얼어붙은 사이사이로 물이 아직 발사되는 모양인데. 나머지 부분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지.
바다의 날개가 가진 물대포의 수압에도 불구하고 발사가 안되는 걸 보면, 수압이 높아지기 전에 그러니까 물을 퍼올리는 입구 쪽이 얼어붙어버린 모양이다. 그래도 싸구려 철 파이프 같은 걸로 만든 건 아닐테니까 설마 동파야 일어나겠느냐만. 사실... 일어 났을 수도 있다. 그러면 진짜로 바다에 마리아가 손을 담궈서 셀키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오는데.
그건 그때가서 생각할 일이라고 해도 지금 가장 중요한건.
바다의 날개 이동 속도가 확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10 노트면 메일 세일만 펴고 항해사는 갤리온 수준의 속도다. 추위가 바다의 날개의 아킬레스 건을 썰어버린 것이다.
나는 아아악 하는 비명소리 같은 고함을 질렀다. 내 설명을 듣고 나서 마리아가 한 마디 했다.
"저위도로 내려가서, 녹이고 올까?"
응급 조치다. 그래봤자 이곳으로 오면 다시 얼어붙기 시작 할 테니까. 게다가 녹았을 때에 물대포에 물을 보내는 기관들이 동파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잖아. 나는 마리아에게 고개를 슥 젓고는 말했다.
"어차피 물대포들은 포기해야 합니다."
아직 작동은 되는 뒤편의 추진력만 어떻게든 살려놓으면 된다. 어찌 되었던 간에 물은 한없이 0도에 가깝지만 영상이고. 계속해서 틀어놓으면 동파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추울 때 수도곡지 열어놓는 것 처럼 바다의 날개를 잘 떄도 1노트 정도로 약간의 속력을 내게 한 다음 닻으로 묶어놓는게 최선이겠지.
날씨도 추워서 돌아가시겠는데 바다의 날개까지 이 모양 이 꼴이니 참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나는 난간을 방한화 코부분으로 팍 까고 머리를 감쌌다.
"아아악 나는 병신인가! 추운데 오면 당연히 얼어붙겠지!"
멍청한 새끼! 나는 그렇게 외치고는 조타륜을 슬쩍 조작해서 방향을 바로잡고 천천히 움직이는 배를 보면서 후우 하고 심호흡을 했다.
"우리 식량 충분하겠습니까?"
내가 찍어준 경로로 움직인다면. 지금 이 속도로 갔을 때 못 해도 한 달은 돌아다녀야 할 텐데. 마리아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 여기 물고기들이 살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고기가 안 살면 펭귄이나 극지곰 같은 것들은 다 굶어 죽게? 추워봤자 바다 아래는 영상이니까. 물고기는 다 살아서 숨쉰다고.
나는 추위로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는 바다를 바라봤다. 저 멀리에 슬쩍 슬쩍 보이는 잿빛의 대지들과 새하얀 눈과 얼음들, 푸른 바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사이다 1리터를 원샷한 것 같은 청량한 기분이 몸을 감싼다.
뒤질 것 같은 추위. 우리의 배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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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와 마리아가 로제를 만나고, 가르시아 해에서 게르하르크를 엿먹이고, 북쪽으로 올라가서 덜덜 떨고 있는 동안에 로른 해에서도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더 쉽 중 하나인 검은 어금니의 함장이자, 카멜롯 왕국의 제독이었던 바리스가 검은 어금니의 함장 만을 맡게 되고, 제독의 역할은 그랜트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로만은 해적 소탕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한 동안 더 아이리 공화국의 제독을 겸임할 수 있었지만. 해적과의 싸움 이후에 거의 곧바로 이어진 싸움에서 그랜트에게 크게 패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아이리 공화국에 남아있는 해군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던 로만은 자신의 제독으로써의 직위를 사퇴하게 되고, 그 뒤로는 메이너스 군항을 담당하고 있던 에밀 메이너스가 맡게 된다. 아직까지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아이리의 함선들은 모두 에밀 메이너스의 손에 들려 있었으니, 아이리 공화국에서는 별 다른 차선책이 없었다.
미나는,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는 로만을 도우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 제독."
로만이 그 말에 픽 웃으면서 갈고리를 가볍게 저었다.
"더 이상은 제독이 아니지 않나. 웨스트우드 항해사."
그 말에 미나가 고개를 숙인채로 묵묵히 짐을 나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만이 한숨을 쉬었다.
"레이먼드의 잘못도 아니고, 그 여해적의 잘못도 아니지. 내가 전쟁에서 진 이유는 서툴렀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나."
해적들과의 싸움에서는 간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고. 이번에 있었던 그랜트와의 싸움에서는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면 충분하다. 그렇게 로만은 스스로 결정을 짓고 다 정리된 짐들을 슥 바라봤다.
"에밀 메이너스라..."
혼자 탄식하고 있는 와중에, 미나가 로만에게 말을 건네었다.
"저는, 당분간 휴식을 가지려고 합니다."
미나의 말에 로만이 미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온갖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섞여서 날뛰고 있었다.
"... 레이먼드에 비하면 저는 한참 부족합니다. 나중에, 그 남자를 따라잡으려면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레이먼드, 라는 단어를 말하는 미나의 어투에는 분명히 강한 증오와 욱신거리는 상처가 느껴지고 있다. 척 보면 레이먼드를 죽여버리고 싶어하는 것 같지만. 그 흉터가 계속해서 곪아가고 피가 흐르는 까닭을 알고 있는 로만에게는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어쩔 수 있겠나.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닐진데. 미나에게 레이먼드는 스승이자, 원수이자, 친구이자 배신자니까. 그 모순된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 나름대로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미나의 정신력이 대단할 뿐이다.
"보자, 오늘 오전까지는 내가 아직 제독의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로만은 빠르게 서류에 글을 쓰고 싸인을 해서 미나에게 넘겨주었다.
"그대는 1년 정도 안식을 가지도록 하게. 그 동안에는 뭘 하든 그대의 자유네."
핑계는 적당히 꾸며 놓으면 될 일이겠지. 미나는 그 서류를 받아들고 경례를 했다.
"감사합니다."
일을 다 마치고 나서, 미나는 밖으로 나가고. 로만은 혼자 남아 가만히 자신이 일하던 공간을 손으로 쓸어보면서 쓰게 웃었다.
그리고, 로크 발미온은 자신의 딸 로제가 남기고 간 편지를 슥 훑어보았다.
큰 표정 변화는 없었다. 그는 그런 남자니까. 이제 와서 딸이 가출했다고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돌아와 다오 하거나, 어디 위험한 데 가서 잘못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는 일반적인 부모로 변할 리는 없다.
그는 자기 딸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써놓은 편지를 읽고 나서 서가로 걸어가 두꺼운 책을 한 권 꺼냈다. 가문의 족보. 그걸 슥 쓰다듬은 로크는 책장을 펼쳐서 로제의 이름을 찾아낸 다음, 그걸 들고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깃펜을 꺼내고, 붉은 잉크를 꺼낸다. 펼쳐진 책에 들어있던 로제의 이름 위를 깃펜이 두 번 스치고 지나간다.
로크는 깃펜을 다시 내려놓고, 족보를 덮은 다음 종이를 꺼내서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로제 발미온을 공식적으로 가문에서 제명하는 내용에 관한 서류다. 4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카멜롯 왕국에서는 전례가 없고, 계급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들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적게 사용된 그 행위를. 로크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하고 있었다.
이 서류가 카멜롯의 왕에게 보고 될 것이고. 어차피 로크의 손 위에서 놀고 있는 왕은 로제 발미온을 발미온 가문에서 제명하는 걸 허락할 것이다.
"이걸로, 발미온 가문에는 후계자가 없어져버렸군."
이제 와서 후처라도 들여야 하는 건가. 로크는 귀찮다는 듯이 쯧 하는 소리를 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족보를 조심스럽게 서가에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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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