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65)

꼬리를 무는 기적-1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는 벌써 9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윤도는 누운 채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허벅지에 대고, 배에도 대보았다. 얼음의 느낌은 없었다. 그제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시 손가락을 보았다.

꼼지락꼼지락!

자유롭다.

그렇다면 어젯밤에 일어난 일은 꿈이 아니었을까? 자기 맥을 짚었다. 잘 모르겠다. 중은 자기 머리를 깎지 못하는 법.

대충 세수를 하고 지소로 나갔다. 창승과 어촌계장, 그의 사촌이 보였다.

“어, 채 선생...”

어촌계장 사촌이 알은 체를 해왔다.

“이거 가지고 얼른 나가세요. 꾸물거리다가 큰일납니다.”

창승이 내민 건 진료의뢰서였다. 실어증 환자를 육지의 큰 병원으로 보내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채 선생이 괜찮을 거라고 했는데...”

사촌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섬사람들. 큰 병원이 부담이다. 그러니 웬만하면 몸으로 때우려는 습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윤도의 말이 맞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 같았다.

“아니, 지금 누구 말을 믿는 겁니까?”

창승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어젯밤에 침 맞고 가서 많이 좋아지셨어요. 목소리도 거의 돌아왔고...”

“나 참, 침이 큰 병을 막습니까? 잔말 말고 배 들어오면 얼른 가세요. 그마나 바람이 잠든 걸 다행으로 아시라고요.”

창승이 사촌을 떠밀었다. 사촌은 윤도를 바라보다 별 수 없이 항구로 나갔다.

“어이, 채 선생.”

주변 사람들이 사라지자 창승이 윤도를 쏘아보았다. 입에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폴폴거렸다.

“네?”

“말조심해서 해. 실어증에 대해 알기나 해?”

“한의학에서도 실어증은 배웁니다.”

“맛이나 보는 수준?”

“아직 술이 덜 깨셨군요.”

“뭐야?”

“가서 쉬시죠. 술 냄새 많이 납니다.”

윤도가 돌아섰다. 술주정까지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어이, 내가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아무튼 말 조심하라고. 뭐? 문제 없을 거라고? MRI 찍어봤어? 고작 침 한 번 찔러보고 그런 소리를 해? 그러다 잘못되면? 섬사람들이라고 소송 안 거는 줄 알아? 주제를 알아야지. 침도 제대로 못 놓는 주제에...”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말조심하라고. 우리가 여기 오고 싶어서 왔어? 사고 없이 있다 가야지.”

“어우, 두 분 또 왜 그래요?”

세희가 다가와 둘을 말렸다. 지소 앞에는 환자들이 와 있는 상황. 의사들이 각을 세우는 것도 꼴 사나울 것 같아 참았다. 게다가 윤도는 진료를 봐야했다.

첫 번째 환자는 김 양식장을 하는 할머니였다. 나름 윤도의 단골이다. 그녀는 약보다 침을 좋아했다. 실력이 없어도 가끔은 궁합이 맞는 환자가 있다. 그게 이 할머니였다. 오늘은 기침이 심했다. 어제 양식장 단속을 하느라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잘 부탁해요. 선상님. 쿨럭.”

할머니가 눈깔사탕 하나를 내밀었다. 그녀는 늘 그랬다. 사탕물기를 좋아해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그러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딱 하나를 꺼내놓는다.

가래가 보이는 기침에 호흡이 편하지 않은 환자.

어떻게 보면 흔한 감기환자에 속한다. 합곡혈과 손목의 태연혈에 침을 놓으면 된다. 고황수혈과 폐수혈, 선수혈에는 뜸을 뜬다.

어젯밤...

윤도는 어젯밤 일을 생각했다. 아직도 선명한 느낌의 혈자리들. 침으로 넣고 뽑으며 조절이 되던 혈자리의 기세들. 그게 오늘도...

‘될까?’

긴장을 숨기며 맥을 짚었다.

‘오 마이 갓.’

윤도의 손에 짜릿한 무엇이 전해왔다. 바다 깊은 곳에서 물고기가 물었을 때 느끼는 낚싯줄의 그 맛에도 비할 바가 아닌 그것...

맥...

느껴졌다.

어젯밤의 그 느낌...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져 오는 섬세한 정보들. 윤도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이 맥을 짚고 저 맥을 짚었다. 기세가 다 달랐다. 윤도가 침을 골랐다. 이번에도 장침이었다.

“채 선생님.”

세희가 태클을 걸어왔다. 좀처럼 쓰지 않던 장침을 거푸 잡고 있는 것이다. 어젯밤에는 분위기가 이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훤한 대낮. 하지만 윤도는 세희의 주의를 무시했다. 잘못 집은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혈자리를 짚었다. 장침이 태연혈 깊숙이 들어갔다. 윤도는 침을 조절했다. 피부 안으로 살짝 들어가 기를 통하게 하고 두세 번에 나눠 침을 밀어 넣었다. 침은 경거혈까지 도달했다. 그건 세희도 몰랐다. 그렇게 혈자리의 최적 활성을 찾는 윤도였다. 시침의 마무리에는 침을 반 바퀴 돌렸다. 자극을 받은 혈자리가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 느낌이 윤도 손 끝에 고스란히 전해왔다.

윤도의 시침은 합곡혈과 태연혈에서 끝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거기서 끝났을 시침. 그러나 맥과 혈자리의 진단으로 가슴 쪽 혈자리가 약해진 걸 알았다. 또 하나의 장침이 내관과 공손혈로 들어갔다. 혈자리를 조율하자 할머니의 숨소리가 편안해지는 게 보였다.

“아이고, 가슴이 시원하네?”

침을 맞은 할머니가 좋아했다.

“다행이네요.”

“세상에... 우리 채 선생이 점점 용해지나봐. 기침도 멈추고...”

“오늘은 너무 무리하지 말고 좀 쉬세요.”

“알았어. 우리 채 선생이 하라면 해야지. 기분이다. 이거 하나 더.”

할머니가 사탕을 하나 더 꺼내놓았다. 뒤에서 지켜보던 세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채 선생님.”

“예?”

“중국에서 침 배운 거에요?”

“예...”

“언제는 침은 한국이라더니... 아무튼 진짜 명의가 된 거 같아요.”

“고맙습니다.”

윤도는 대충 넘기고 말았다.

두 번째 환자는 작은 어선을 모는 40대 후반의 오 선장이었다.

“어구 정리 거들다 허리를 삐었는지 굉장히 아프네요. 아니면 디스크든지...”

그는 통증이 심했다. 침대에 눕는 것도 힘든 상태였다. 허리를 눌러 상태를 보았다.

“아으, 거기요.”

선장이 비명 섞인 소리를 냈다.

‘또 장침?’

세희의 관심은 침에 있었다. 이번에는 호침이었다. 윤도는 환자 팔꿈치 안쪽의 척택혈에 침을 꽂았다. 침은 쑥 들어갔다가 조금 나왔다. 거기가 최적이었다. 그곳에서 전체 경맥의 반응을 살폈다. 맥에서 느낀 이상이 있었다.

“......!”

복부의 혈자리에서 전해온 반응을 감지한 윤도 눈빛이 흔들렸다.

‘적취?’

적취는 덩어리를 말한다. 한방이든 양방이든 인체의 적취는 바람직하지 않았다. 신경을 집중했다. 위치는 췌장 쪽이었다. 확인을 위해 환자의 눈을 보았다. 눈알이 노랬다. 한숨을 숨기고 위중혈과 인중혈에 시침을 더했다.

“어때요?”

침을 뽑으며 물었다.

“아직도 좀 아파요.”

“알았습니다."

윤도의 손이 다시 장침을 잡았다. 주변의 국소근육을 반대손으로 눌러 긴장을 풀었다. 그런 다음 장침을 꽂았다.

“짜릿한가요?”

“아직은...”

“이제 짜릿할 겁니다.”

윤도가 침 끝을 살짝 돌려 밀어넣으며 물었다.

“어, 맞아요. 짜릿...”

“많이 아프면 말씀하세요.”

윤도의 침이 조금 더 기세를 올리며 혈자리 자극을 했다.

“지금요, 아파요.”

“알았습니다. 좀 심한 거 같으니 반대편도 침을 놓겠습니다.”

또 하나의 장침을 밀어넣은 윤도. 시간이 꽤 지난 후에 발침을 했다.

“허리 움직여보세요.”

“어!”

몸을 움직여본 오 선장 표정이 밝아졌다.

“편하네? 아까는 허리가 부러질 듯 아프더니...”

“내일 침 한 번 더 맞고 육지병원에 좀 다녀오세요.”

“육지병원은 왜요?”

“최근 소화가 잘 안 되고 체중이 줄었지요?”

“예... 워낙 고기가 잘 안 잡혀서 기름값도 못 건지다보니...”

“가셔서 췌장 검사 좀 받아보세요. 이 부위를 체크해 달라고 하시고요.”

윤도가 췌장의 끝부분을 살짝 눌러주었다.

“이상 있어요?”

“약간 안 좋은 거 같은데 미리 체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어휴, 요즘 암이 많아서...”

선장이 한숨을 쉴 때 창승이 지소에 들어섰다. 이제 숙취가 가신 모양이었다.

“채 선생, 췌장이 어떻다고?”

선장이 나가자 창승이 안광을 뿜었다.

“작은 적취가 있는 거 같아서요. 확인이 필요합니다.”

“뭐?”

“적취요.”

“지금 명의 흉내내는 거야?”

“아닙니다.”

“그런데 왜 선장님 겁주고 그래? 침이나 맥으로 췌장염이나 췌장암도 알 수 있나?”

“알 수도 있지요.”

“채 선생 같은 초...?”

창승이 뒷 말을 흐렸다. 말줄임표에 숨은 말은 ‘초땡이’였다. 윤도도 짐작할 수 있었다.

“확인해야 합니다. 복통도 있고 황달도 보이고요.”

“선장님은 원래 간이 좀 안 좋아요. 게다가 술 많이 드시고요.”

창승이 목소리를 늘이며 빈정거렸다.

“제 말 믿고 가보세요. 아셨죠?”

윤도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환자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허리를 귀신처럼 낫게 하니 안 믿을 수도 없고... 그렇잖아도 부속품 때문에 뭍에 나가야하니까 한 번 가보죠 뭐.”

선장은 윤도 말을 들었다.

“허!”

선장이 나가자 창승이 냉소를 뿜었다. 선임이자 지소장의 권위를 무시 당했다는 표정이었다.

“이봐, 채 선생.”

“말씀하시죠.”

“뭐 잘못 먹었어? 아니면 중국 사고로 너무 충격을 받아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말씀이 지나칩니다.”

“뭐가 지나쳐? 대체 왜 갑자기 설레발이냐고? 솔직히 뭐 알고나 이러는 거야?”

“의사가 돼 가지고 질병을 보고도 침묵하란 말입니까?”

“두 분 또 왜 이래요?”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세희가 둘 사이에 뛰어들었다.

“은 선생님, 우리 채 선생 지금 제 정신입니까?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아요?”

“지소장님.”

목소리가 높아질 때 지소 문이 열렸다. 들어선 사람은 어촌계장의 사촌과 그의 어머니였다.

“선생님.”

사촌이 소리쳤다.

“병원에 들렀던 겁니까?”

창승이 물었다.

“예, MRI까지 찍고 결과보고 왔습니다.”

“뭐랍니까?”

“채 선생님 말이 맞았어요. 뇌에는 이상이 없다고 그냥 가라던데요?”

“......!”

사촌의 설명을 들은 창승의 눈동자에 불벼락이 스쳐갔다.

“그거 확실합니까?”

“그럼요. 세 번이나 물어본 걸요. 채 선생님 말 들을 걸 괜히 지소장님이 등을 미는 바람에 진료비만 수십 만원 깨졌어요. 어휴, 아까워라.”

“......”

“고맙스니다.”

어머니가 다가와 윤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약간 어눌하기는 해도 어제보다 훨씬 나은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가셔서 푹 쉬세요.”

윤도가 그녀 손을 잡았다. 완전히 똥색이 된 창승의 얼굴은 보지 않았다. 사실 창승의 기분 따위는 별 관심이 없었다. 윤도가 원하는 건 자신의 진단확인이었다. 분명 뇌질환 쪽은 아니었던 실어증. 하지만 굳이 육지 병원에 가서 MRI까지 찍는 통에 확인이 된 셈이었다.

사촌과 어머니는 몇 번이고 인사를 남기고 지소를 나갔다.

“세상에...”

세희도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이제는 우연이 아니었다. 걸핏하면 컴플레인이나 민원을 유발하던 윤도. 그 때마다 환자를 달래느라 얼마나 고생한 세희였던가? 그런데 어젯밤부터 상황이 변했다.

‘중국에서 대체 뭘 배웠길래...?’

갸우뚱해진 세희 머리는 한동안 제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그 사이에 윤도가 창승에게 손을 내밀었다. 덕분에 윤도의 진단이 오진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 데 대한 인사였다. 창승은 그 손을 뿌리치고 자기 진료실로 가버렸다.

“다음 환자 받으세요.”

윤도 목소리가 쩌렁 보건지소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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