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를 무는 기적-2
퇴근 후, 윤도는 어촌계장 사촌집으로 납치 되었다. 실어증을 고친 어머니가 극구 윤도를 모신 것이다. 창승까지 같이 초대할 자리지만 그가 거절했다. SSS급 닥터라고 힘주는 그가 끼고 싶을 리가 없었다.
그는 S대 출신에 S대학병원 인턴을 한 Special한 닥터라는 SSS급 우월감에 쩔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S대학병원과 쌍벽을 이루는 SS 병원의 진료부원장까지 그의 삼촌이었다.
“아유, 어서 오세요. 우리 채 선생님.”
어머니가 나와 윤도를 반겼다. 그 사이에 목소리는 더 좋아져 있었다. 식사 자리에는 어촌계장과 더불어 이웃 사람 몇도 동석을 했다.
“최고입니다. 육지 의사들도 그 얘기 듣고 놀라더군요.”
사촌이 엄지를 세워보였다.
“별 말씀을...”
윤도가 겸손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우리 섬 의사가 뇌질환은 아니고 정신적 충격인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하니까 눈이 휘둥그레지더라니까요. 그렇죠, 어머니?”
사촌이 어머니에게 동의를 구했다.
“맞아. 젊은 한의사라고 하니까 아주 쓰러지기 직전이더라고.”
어머니가 팔을 걷고 나섰다.
“아이고, 우리 성님, 이제 살았네. 어제까지는 빌빌거리더니...”
“그랬지. 우리 막내가 이혼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억장이 무너지잖아? 내가 그 새끼를 어떻게 낳았는데. 산통 때문에 죽을 뻔한 고생을 했잖아? 그런데 막상 걱정이 되다가도 내가 말을 못하게 되니 겁이 덜컥 나잖아? 내가 살아야 그걸 또 어떻게 돌봐주지 내가 쓰러지면 어쩌겠어?”
“그럼 우리 채 선생이 마음 병까지 고쳐버렸네?”
“맞다. 이렇게 용한 분인 줄도 모르고 동생이 지난번에 뭐라고 했지? 뭐 돌팔이?”
어머니의 시선이 파마머리 아줌에게 향했다. 한 달 전쯤엔가 윤도에게 침을 맞았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에이, 그때는 진짜로 그랬는데... 침을 맞으니 다음 날 더 아프고...”
아줌마가 울상을 하며 윤도를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저도 사람이다 보니 실수를 했을 수도 있지요.”
윤도는 스스로 자수의 길을 택했다.
“아이고, 이 인품 좀 보라지. 우리 막내 딸 정화가 이런 양반에게 시집을 갔어야하는데...”
어머니가 윤도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길만큼이나 푸짐한 음식들이 권해졌다. 해산물을 비롯해 뭍에서 사온 한우까지 총동원되었다. 아주 작정하고 장까지 봐온 모양이었다.
“선생님, 온 김에 이것 좀 봐주세요. 이게 월출산에서 딴 거라고 몸에 좋다길래 어머니 드리려고 샀는데 혹시 중국산인지...”
사촌이 차가버섯을 내밀었다.
약재...
한두 가지가 아니다. 좋은 한의사라면 물론 좋은 약재를 보는 눈을 가져야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의원에 있을 때 모든 약재는 한약 약재상에서 가져왔다. 게다가 다 절단되고 건조된 상태가 많았다. 그렇기에 본초학 실습 몇 번 마친 윤도에게 자연 상태 약재의 상중하품을 나누는 일은 무리였다.
그런데...
약재를 보는 순간 윤도 눈과 코에 따뜻한 기운이 저절로 돌았다. 거기 취해 버섯을 집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차가버섯의 약향이 휘돌며 약재의 이력이 한눈에 읽혀졌다.
‘응?’
윤도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또 웬 헛것일까? 물을 마시고 다시 한 번 차가버섯을 보았다.
[원산] 러시아 재배
[약재수령] 7년
[약성함유등급] 下下품
[중금속함유] 미량
[곰팡이독소] 무
[약재사용여부] 가능
[용법 용량] 기존 복용법 참조
[약효기대치] 下下
“......!”
윤도가 주춤 물러섰다. 마치 QR 코드를 들이댄 듯 약재의 주요기원이 느껴진 것이다. 물론 본초학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예를 들어 본초학에 나오는 ‘우황’을 보자면,
[기원] 소의 담낭결석을 건조한 것. 막질을 제거하고 그늘에서 말린다.
[성미] 서늘하고 독은 없으며 맛은 쓰다.
[귀경] 심, 간경.
[효능 및 주치] 청열해독, 인후종통, 소아경풍, 중풍구금...
[해설] 임산부는 사용에 주의하고 소아는 소량을 사용하여야 한다.
[수치] 잡질을 제거하고 곱고 보드랍게 만든 가루로 사용한다.
[용량과 용법] 0.15-0.35g
[금기증] 임신부는 삼가 조심해서 사용하고 실열증이 아니면 복용을 금한다.
세 번째 나오는 귀경은 약재가 특정한 장부(臟腑)와 경맥에 선택적으로 작용하여 치료 효능을 나타낸다는 말로 인경이라고도 한다. 윤도에게 보이는 분석표는 본초학에 비하면 현대적으로 정리된 느낌이었다. 현대에는 원산지와 중금속 검출 등이 문제가 되는 까닭이었다.
본초학에 비해 자세한 건 등급과 기대치. 보여지는 표에 따르면 上上품에서 下下품까지 모두 9등급이나 되었다. 上上 上中 上下, 中上, 中中, 中下, 下上, 下中, 下下...
윤도가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차가버섯이 하품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하품 중에서도 최하품인 下下라니...
하긴 냄새도 별로였다. 러시아 수입산이라 그런 건 아니었다. 한약재 중에는 국산이 아니어서 더 좋은 재료들이 있는데 차가버섯도 그 중의 하나다. 왜냐면 차가버섯은 북위 45도 이상의 나라에서 나온 게 약성이 더 좋은 까닭이었다.
극냉지역에서 자란 차가버섯은 다른 지역의 것에 비해 바깥 껍질의 색이 더 시커멓고 윤기가 난다. 틈새도 깊고 표면 모서리도 매우 야생적이다. 버섯에서 그런 조건은 엿보였다. 하지만 사촌이 내민 버섯은 수령 7년짜리였다. 차가버섯은 15년 이상 자란 걸 상품으로 친다.
하지만!
그걸 윤도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잠깐만요, 제가 서울 약재상에 한 번 물어봐드릴게요.”
윤도가 사진을 찍었다. 그런 다음 경동시장의 한약 약재상에 문의를 했다. 한의원에 있을 때 안면을 튼 한약 전문가였다. 잠시 후에 전화가 왔다.
“러시아산이고 한 6-7년 묵은 거 같은데 자연산은 아니고요. 보관상태하고 수령으로 보아 하품입니다.”
“하품 중에서는?”
“하품 중에서는 괜찮은 데요?”
설명을 들은 윤도는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맙소사였다. 눈과 코로 느낀 게 거의 사실로 판정되는 순간이었다. 빗나간 건 약성에 대한 것 뿐이다. 하지만 정밀분석을 한 게 아니니 차이가 날 수도 있었다.
“상품은 아니라네요. 차로 끓여드시고 비타민도 많이 보충하세요.”
실어증은 비타민 부족으로도 올 수 있다. 설명을 하면서도 윤도는 버섯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침에 이어 약재를 보는 능력... 이런 능력이라니...
‘오 마이 갓.’
마구 음식을 집어먹고 관사로 돌아왔다. 대도시라면 김영란법이 어쩌고 하겠지만 섬에는 그런 법이 없었다. 오히려 거절하면 괘씸죄로 몰려 왕따가 될 판이었다.
커피 한 잔을 타들고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한의서가 가득했다. 그 중간 쯤에서 산해경을 뽑아냈다.
산해경.
윤도와 함께 살아 돌아온 책이다. 함께 가져간 동의보감과 침구경험방, 황제내경은 중국에서 휴지가 되었다. 가만히 손가락을 보았다. 얼음마디가 들었던 것 같은 느낌은 확실히 사라졌다. 그리고 방금 알게 된 눈과 코... 아직은 확인이 필요한 일이지만 기막힌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돌연 가드 레일을 들이박고 허공에 떠버린 명의순례버스. 그리고 검은 헤이싼시호에 처박힌 버스. 그곳에서 비몽사몽 보게 된 어린 아이. 그 어린 아이에게서 쏟아져 나온 은침을 닮은 시린 빛들...
하지만 그건 환상이었다. 살아남은 여섯 한의 중에 그걸 본 사람은 오직 윤도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가방에서 나온 네 권의 책. 다 젖은 가운데 신기하게도 멀쩡하던 산해경... 윤도는 책 사이에 끼워둔 얇은 거울을 뽑아들었다.
‘응?’
거울을 보던 윤도의 동공이 출렁 흔들렸다. 거울이 달라보였다. 그동안 두어 번 꺼내봤던 거울. 진짜 물을 부어놓은 듯이 표면이 맑은 게 아닌가? 신기한 마음에 손가락을 대보자...
“......!”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을 뺐다. 마치 빨아들이는 듯 한 느낌이 왔다. 이건 또 웬일일까? 놀란 마음에 거울을 내려놓았다. 사상의학을 주창한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위였다. 거울은 다시 정상이 되었다.
‘헤이싼시호가 상지수라도 되었던 걸까?’
궁금한 마음에 독일의 율리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중국어로 했다. 율리안이 영어보다 중국어에 강하기 때문이었다. 목소리는 밝지 않았다. 대참사의 충격 때문에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몸에 윤도 같은 변화는 없었다. 일본과 미국에서 참여했던 한의들도 그랬다. 내친 김에 중국의 한의 둘까지 체크했다. 상태가 나빠진 사람은 있어도 좋은 징조를 만난 사람은 윤도가 유일했다.
전화를 놓고 허공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참사가 난지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
날짜를 짚다가 벌떡 일어섰다. 30이라는 숫자 때문이었다. 상지수를 마시고 30일 차에 오장육부와 기혈을 모두 꿰뚫어보게 된 편작.
30이다.
기묘하게 윤도가 침으로 인체의 혈자리 반응을 감지하게 된 날도 헤이싼시호에 빠졌다가 나온지 30일이 되는 날이었다.
역시 30이다.
‘이거...’
윤도가 손가락 마디를 바라보았다.
30일.
30일...
그때부터 신묘한 능력이 생겼다. 그 능력은 31일이 되는 오늘까지 이어졌다.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더구나 덧붙여진 약재를 보는 능력... 방금 전에는 거울까지 이상한 반응을 보였으니...
‘어쩌면...’
윤도는 손가락을 쓰다듬으며 계속 중얼거렸다.
‘헤이싼시호에 빠졌을 때 만난 아이가 환상이 아닐 수도...’
윤도 눈에 흰빛의 아이가 아른거렸다.
‘그 아이가 장상군이나 편작, 아니면 순우의의 혼일 수도...’
상지수의 전설처럼 30일이 지난 후에 일어나고 있는 기적...
중국 한의들이 말하던 30년 주기 명의선택설은 정말 존재하는 걸까? 그걸 암시하기 위해 천하제일문에서 햇살을 받고 혈자리 짚기에서 쟁쟁한 중국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가련한 아이의 민머리가 맑은 빛으로 계시를 비춘 걸까?
그렇다면!
그 옛날 신의 손으로 불리던 명의들처럼 묘방(妙方)과 기방(奇方), 신방(神方)이 이 시대의 한의학에서도 실현가능하다는 걸까?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제 오늘 연속으로 체험한 진맥과 혈자리의 완벽한 반응. 더하고 빼고 어르고 달래 혈자리의 수위 조절까지 가능하던 손가락의 능력...
그러고 보니...
또 이상한 점 한 가지...
한 달이 되는 날부터 기묘한 꿈도 꾸지 않는 윤도였다.
‘하아!’
30일.
그 기적이 윤도에게 내린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