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통하는 신비경(神秘境)-1
“고맙습니다. 선생님!”
뱃시간이 다가오자 여섯 엄마부대는 합창을 하고 떠났다. 됐다고 하는데도 부득 음료수 박스까지 쌓아놓았다. 음료수는 할머니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었다. 기다려준데 대한 보답이었다.
“할머니, 한 잔 드시고 침대에 누우세요.”
첫 번째 할머니를 맞았다. 무릎이 좋지 않아 갈래나무 지팡이에 의지해 엉금엉금 걸어온 할머니였다.
“나는 됐고 이거 원장님 먹어.”
할머니가 오히려 인절미를 내밀었다.
“저는 괜찮아요. 오래 기다리셨잖아요?”
“웬 걸. 원장님 밥도 못 먹었잖아? 노인들은 많이 안 먹어도 돼.”
할머니는 기어이 인절미를 윤도 손에 쥐어주었다.
“아유, 무릎이 왜 이렇게 아픈지. 우리 영감 귀신이 이 거 좀 파가면 좋으려만. 침 좀 잘 놔줘요. 원장님!”
할머니는 피로감도 없이 벌렁 침대에 누웠다.
맥을 잡았다.
할머니는 왼 무릎이 나빴다. 양구혈과 음시혈, 복토혈이 문제였다. 이쪽 혈과 기가 동시에 나빴다. 수로로 치면 말라버리는 것이다. 보통은 양구혈을 다스리면 좋아질 수 있는 무릎 관절통...
“여기가 아프죠?”
윤도가 무릎 위 근육을 눌렀다.
“아야아!”
할머니가 쉰 비명을 냈다.
“여기도 조금 아프고요?”
“아유, 우리 원장님 인자 귀신이네. 예전에는 엉뚱한 소리나 픽픽 하시더니...”
“그랬어요?”
“응.”
“침 한 대 놔드릴 게요.”
윤도가 침을 당겼다. 맥을 짚은 왼손으로 톡톡 긴장을 풀며 장침을 넣었다.
“......!”
지켜보던 세희가 또 한 번 자지러졌다. 이번에는 무려 일침삼혈, 장침 하나로 양구혈과 음시혈, 북토혈까지 다 다스려버린 것이다. 하지만 세희가 보는 건 그저 껍데기뿐이었다.
혈자리 안에서 윤도의 침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혈자리의 상황에 따라 각도를 달리해 꽂은 시침. 그 안에서 최적의 효과를 위해 미세한 콘트롤을 수행 중이었다.
침을 멈추고 맥을 잡았다. 조금 나아졌다. 그제야 윤도는 침에서 손을 떼었다.
“왜요?”
넋나간 세희를 보고 윤도가 물었다.
“아, 아뇨.”
“아닌 게 아닌 거 같은 데요?”
“신기해서요.”
“뭐가요?”
“채 선생님 침술 말이에요. 무슨 드라마나 영화 속 한의사 주인공보는 거 같아요.”
“누가 저를 드라마에 써주겠어요?”
“못할 것도 없죠. 그거 아세요? 요즘 선생님, 매 환자들에게 다 주인공이라는 거.”
“왜 또 비행기 태우신담.”
윤도가 옆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이 할머니는 편두통이 있었다. 눈 옆의 태양혈에서 솔곡혈까지 일침이혈로 시침을 했다. 눈 감은 할머니의 얼굴이 편안해지는 게 보였다.
“자, 침 뺍니다.”
얼마 후에 첫 할머니의 무릎에서 장침을 빼주었다.
“움직여보세요.”
“......!”
“어때요?”
“시원하네?”
“내려와서 걸어보세요.”
“......”
“아까보다는 좋죠?”
“좋다마다. 지팡이 안 짚어도 되겠어.”
할머니가 반색을 했다.
“하지만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되니까 짚고 다니세요. 안 좋아지면 또 오시고요.”
“아이고, 인자 용해졌다더니 진짜네. 야이, 순덕아, 막내야. 나 무릎 나았다. 인자 안 아프다고.”
할머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진료실을 나갔다.
그날 저녁 윤도는 선물더미에 묻혔다. 할머니들이 바리바리 싸온 선물이었다. 고구마와 감자는 물론이오, 조개와 생선도 푸짐했다. 특히 반건조 민어가 압권이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윤도가 사양했지만,
“아이고, 왜 이런대요. 노인네들 정성인데 이런 거 안 받으면 섭하지.”
할머니들은 반강제로 선물을 놓고 가버렸다.
반건조 민어.
윤도의 저녁반찬에 당첨되셨다. 민어는 학교 강의에서도 자주 들었던 생선이었다. 과거에는 임금님 진상품으로도 쓸만큼 고급 생선이었다. 지금도 물론 그렇다. 민어의 명성에 금이 간 건 점성어 때문이었다. 모양이 비슷한 점성어를 민어로 속여팔면서 민어 이미지를 구긴 것이다.
점성어와 민어의 맛은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이었다.
3등분 해서 프라이팬에 구웠다. 소금만 찍어도 맛이 기가 막혔다. 생선이라고 다 같은 생선이 아니었다. 식사 중에 잠깐 전기가 나갔다. 섬의 전기 사정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초를 찾던 윤도의 시선이 책상에 멈췄다. 시선을 당긴 건 산해경이었다.
“......!”
중국에서 함께 생환한 산해경. 그 산해경이 반딧불이처럼 저 홀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호수에 풍덩 빠졌다가 나왔음에도 새책 같은 산해경.
신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마음으로 책을 잡았다. 순간 윤도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마치 우주의 삼라만상 같은 광경이 찰라의 순간에 지나가버린 것이다. 그 안에는 산해경 속의 기이한 생명체들이 가득했다.
의자에 앉아 책을 넘겼다. 청동거울이 나왔다.
빛은 거기서도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때, 아이의 눈에서 보이던 그 시린 달빛이었다. 빛은 샘물처럼 투명하고 맑았다.
‘이거 대체...?’
가만히 들여다보던 윤도가 움찔 흔들렸다. 그 통에 거울을 떨구고 말았다.
‘뭐야?’
윤도는 숨도 제대로 넘기지 못한 채 거울을 집어들었다.
‘응?’
산해경 위에 있을 때와 달랐다.
‘조금 전에는 분명...?’
다시 산해경의 한 쪽으로 거울을 비치던 윤도, 이번에는 의자와 함께 나뒹굴고 말았다.
와당탕.
“......!”
쓰러진 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 자세로 손목을 비틀어보았다. 뒤지도록 아팠다. 이 또한 꿈이 아니었다. 엉거주춤 일어섰다. 다시 책의 한 면에 거울을 올렸다.
‘오 마이 갓!’
윤도는 부들거리는 손을 간신히 주체했다. 그리고 부릅 뜬 눈으로 거울을 주시했다.
거울 속...
그 속에 산해경의 한 지점이 비쳐지고 있었다. 책의 지명으로 나온 산이었다. 조금 움직이자 산의 지점도 따라서 변했다. 마치 포탈 사이트의 지도보기 같았다. 다른 거라면 거울이 비추는 게 ‘실물’이라는 거였다. 산해경 속의 실물...
책은 서산경 파트였다. 거울에 들어온 건 ‘내산’이라는 산. 거울 안을 가득 채운 건 박달나무와 닥나무였다. 나무들은 진정한 원시림이었다. 신기하게도 목향까지 밀려나왔다.
‘이게 말이 돼?’
향기에 놀라 정신줄을 놓았다. 순간, 괴상한 새가 버럭거리며 괴성을 질렀다.
“빼애에!”
“으헉!”
놀란 윤도가 거울을 치웠다. 그러자 또 다른 해괴한 짐승이 홰를 치며 각을 세웠다. 사람 얼굴이 달린 수탉이었다. 윤도는 얼른 책을 덮어버렸다.
화악!
전기가 들어왔다. 냉장고로 달려가 생수를 들이켰다. 입을 댄 채 반 병을 내리 마셨다. 그래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눈...
호수에서 이상이 생겼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책 속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들이 보일 리 없었다.
착각이야.
착각이겠지.
‘하지만...’
윤도의 시선이 열 손가락으로 향했다. 손가락에서 한기와 온기가 교대로 느껴졌다. 착각인 줄 알았던 진맥과 혈자리도 틀림이 없었다. 이제는 차곡차곡 윤도의 실력으로 쌓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저 거울과 산해경도?
꿀꺽!
이제는 모진 결심을 하고 의자에 앉았다. 다시 서산경 편을 펼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녹대산에 거울을 비췄다. 백옥과 은이 많은 산.
거울 지점을 조절하자 산 정상 부분에 우뚝 흰 눈 닮은 백옥 바위들이 보였다. 백옥은 손에 닿았다.
미치겠다.
책과 딱 맞아떨어지는 풍경.
그런데 이게 손에 만져지다니...
목적지를 찾듯 조심스레 거울을 옮겼다. 거울을 따라 산의 풍경이 변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까 그 동물이 꼬까악, 홰를 쳤다.
“......!”
놀랐지만 거울을 움직이지 않았다. 제대로 보려는 것이다.
꼬까악!
사람 얼굴을 한 동물. 책을 보니 부혜라고 나왔다. 부혜는 동영상을 보는 듯 선명하지만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처음 비췄던 내산을 겨누었다. 우거진 박달나무 숲이 나왔다.
그리고 포악한 얼굴을 한 새도 거울 안으로 들어왔다. 그 새의 이름은 라라. 정이 뚝 떨어지는 포스다. 식인새라는 설명을 보니 이해가 되었다.
‘잡힐 듯 생생하게 보이지만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두려움이 가시자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판타지 영화처럼, 혹은 장르소설처럼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떨까? 산해경에는 수 많은 금덩어리들이 나오지만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저 원시의 순수를 고스란히 간직한 산에서 자생하는 약초나 약재들이 탐날 뿐이었다.
내친 김에 다른 곳을 비췄다. 이번에는 부주산이었다. 해설을 보니 이 산에는 물이 콸콸 솟아나는 유택이 있었다. 그 주위에는 복숭아를 닮은 과일나무가 있다. 그걸 먹으면 피로가 가신다.
거울을 조절해 유택을 찾았다. 자연상태의 산에서 원하는 목표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일단 물줄기부터 찾았다. 그 주변을 비추다 결국은 목적한 나무를 찾아낸 윤도였다.
‘으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단순히 문장으로 이루어진 책. 이따금 삽화가 있지만 꼭 같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마치 보물찾기에 성공하는 기분이었다.
나무에 꽃이 피었다. 노란 꽃이었다. 잎사귀는 대추 잎을 닮았다. 거울로 열매를 비추었다. 복숭아와 비슷하지만 조금 작았다.
‘저걸 먹으면 피로가 사라진단 말이지?’
정말일까?
궁금해졌다.
윤도도 사실 피로감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현대인은 모두 피로하다. 책의 말이 진짜라면, 만성피로에 지친 사람에게 하나 건네 피로를 풀어줄 수 있다면...
윤도는 한의사의 바람으로 거울 속 열매를 잡았다.
그런데...
“......!”
거울에 닿은 윤도의 손이 얼어붙은 듯 멈춰버렸다.
‘이거...’
열매가... 복숭아보다 조금 작은 열매가 손에 닿았다. 착각이 아니라 진짜 촉감이 왔다.
현실의 손과 거울 안의 세계...
그게 진짜로 만나고 있었다.
R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