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통하는 신비경(神秘境)-2
“......!”
열매...
열매가 윤도 손에 쥐어졌다. 거울 속에 손을 넣어 잡았더니 딸려나왔다. 신기해서 한 번 더 넣었지만 이번에는 잡히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이라는 뜻일까?
열매... 바라보는 순간, 저절로 분석이 되어버렸다.
[원산] 산해경
[약재수령] 1년
[약성함유등급] 上上품
[중금속함유] 무
[곰팡이독소] 무
[약재사용유무] 가능
[용법 용량] 피로회복과 자양강장에 탁월함. 깨끗이 씻어 과육을 먹음. 성인 기준으로 절반이면 충분함.
[약효기대치] 上上품
上上품.
거기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수 자연 야생에서 자란 물건도 上上을 주지않던 분석표. 이 열매에 최상의 등급을 매긴 것이다. 이해가 되기는 했다. 원시에 가까운 산해경 속의 신산(神山). 기묘한 생명체들이 판타지를 이루며 살아가는 초자연이니 그 약성이 오죽할까? 지구의 지기와 정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순수 자연 약재인 것이다.
‘피로를 푸는 열매...’
겉으로 보아서는 작은 복숭아처럼 보였다. 향기는 좀 더 강했다. 하지만 약간의 걱정도 앞섰다. 난생 처음 보는 열매. 그것도 환상처럼 손에 들어온 열매. 용법에는 아무 말이 없지만 혹시... 잘못 먹어서 죽는 건 아닐까? 한 번 더 분석표를 읽었다. 부작용 등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와삭.
떨리는 마음으로 한 입 깨물어버렸다.
“......!”
열매를 문 채 윤도 입의 저작이 정지되었다.
“우웹!”
강력한 쓴 맛에 인상이 찡그려졌지만 뱉지는 않았다. 약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 게다가 역겨운 쓴맛도 아니었다. 입 안에 문 열매의 과육을 그냥 삼켜버렸다. 입 안에 고인 침을 넘기며 반응을 기다렸다. 괜찮을까?
5분...
10분...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윤도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건 참을 수 없는 졸림이었다.
꾸벅!
고개를 흐느적거리던 윤도는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그를 지키는 건 먹다 남은 반쪽의 열매, 아울러 아직 손도 대지 않은 또 하나의 열매였다.
***
똑똑!
문소리가 났다.
쾅쾅!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제야 윤도가 눈을 떴다. 그냥 뜬 게 아니라 번쩍이었다. 본능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아침 9시 20분이었다.
‘지각?’
화들짝 일어서는데 열매가 보였다.
“......!”
그제야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다. 거울을 들어 산해경을 비추었다. 산해경의 풍경들이 실물처럼 보였다. 다른 고서들은? 예를 들어 향약집성방이나 본초강목 등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직 산해경에만 반응하는 신비경이었다.
바닥에 남은 열매를 집어들었다. 간 밤에 먹었던 열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가뜬할 수가 없었다. 중학교 이후로 언제 꿀잠을 잤는지 기억도 아련한 윤도였다. 늘 몸에 달고 살았던 찌푸둥한 만성피로...
그런데...
머리는 맑고 눈도 상큼했다. 팔 다리에 매달려있던 피로감도 남의 일이 되었다.
‘맙소사!’
윤도는 열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산해경에서 꺼낸 것만 해도 기적. 그런데 그 열매의 효능이 책과 똑 같이 나타난 것이다.
맥과 혈자리로 인체의 이상 여부를 알아내며 신침(神鍼)을 놓는 손가락 신수(神手). 즉석 약재분석이 가능한 기이한 신안(神眼). 거기에 더해 산해경의 진귀한 약재를 현실로 가져올 수 있는 신비동경(神秘銅鏡)까지...
신수.
신안.
신비경.
무려 3종 세트가 몸에 내린 것이다.
‘오 마이 갓.’
윤도는 무릎을 꿇은 채 거울을 안았다. 연인을 품듯 마음을 다했다. 순간,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채 선생님!”
세희였다.
“은 선생님...”
“일어나신 거예요?”
멀쩡한 윤도를 본 세희가 울상을 지었다.
“예...”
거울을 감추며 대답하는 윤도.
“어휴, 전 또 안 나오시길래 어디가 아픈가 했잖아요? 지금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와있는지 아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 늦잠을...”
“아니에요. 안 아프면 됐어요. 제가 잠깐 시간 끌 테니 빨리 오세요.”
“예.”
대답과 함께 방문이 닫혔다.
“휘유!”
윤도 입에서 휘파람이 나왔다. 표정도 확 펴졌다. 남은 열매 하나 반을 허공에 던졌다. 그걸 받아낸 윤도가 미칠 듯한 환호를 울렸다.
“아싸!”
“원장님!”
지소 앞에서 환자들이 반색을 했다. 환자는 어제보다 더 많았다. 대략 봐도 10명은 넘어보였다. 원래는 새파란 한의사가 뭘 아냐고 경계하던 사람들. 슬슬 입소문이 나면서 확인 차 모여든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가운을 입었다. 의사의 가운은 옷이 아니다. 명예다. 윤도는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변질되면 돈이 된다고 했다.
가운의 공신력으로 돈이나 챙기려는 의사들. 윤도가 일하던 한의원 원장도 그런 부류였다. 의료보험 부정청구. 변호사 사서 대략 때웠지만 참 치사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탓할 수 없었다. 원장은 정직한 다른 원장들 보다 잘 먹고 잘 살았다.
“시작할까요?”
윤도가 세희를 보았다.
“그래야 할 거 같아요.”
“그럼 환자 받으세요.”
“네!”
세희가 한방진료실 문을 열어주었다. 첫 환자는 노인부부였다. 쿨럭쿨럭, 할아버지가 날선 기침을 토해냈다.
“이 양반이 이렇게 기침을 하면서도 병원을 안 가요. 우리 젊은 한의사 양반이 침을 잘 놓는다니 좀 봐주쇼, 잉?”
할머니가 보호자로 나섰다.
“어디가 안 좋으신데요?”
“노박 가심이 아프다고 안 하요? 기침도 달고 살고...”
“다른 병은 없나요?”
“혈압이 낮다고 들었는데 병원 간 지가 오래 되야서... 당뇨는 저번에 의료봉사 온 데서 검사했는데 없다했어라.”
할머니의 사투리가 정답게 들렸다. 외지에서 시집온 사람인 모양이었다.
“할아버지, 병원은 왜 그렇게 안 가세요?”
윤도가 환자를 바라보았다.
“병원은 무슨... 늙으면 사람 몸이 조금 아프다 말다 하는 거지. 자동차도 연식이 오래 되면 골골거리잖나? 쿨럭.”
대답하는 할아버지 입에서 가래가 골골 끓었다.
“이 양반 말하는 본새 좀 보소. 집에서는 나를 달달 볶아대면서 혼자만 선비 났네.”
“알았으니까 할머니는 잠깐 나가 계세요.”
“이 양반 대침 좀 잔뜩 찔러주소. 저 놈의 기침이 썰물 나가듯 시원하게 가버리게.”
할머니는 다짐을 놓고 복도로 나갔다.
“맥 좀 볼까요?”
윤도가 손을 내밀어 할아버지의 맥을 짚었다. 첫 번째 맥이 손을 타고 건너오는 순간 윤도 심장이 심쿵해졌다. 인체의 맥을 고스란히 느끼는 손가락. 첫사랑의 미녀 연인을 만나는 것도 이보다 설레진 못할 거 같았다.
진맥...
여유가 생긴 까닭인지 깊이도 더해졌다. 진맥은 원래 해 뜰 무렵이 좋다. 몸의 상태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자신감이 붙으면서 진맥 위치를 바꾸었다. 진맥은 보통 세 군데에서 할 수 있다. 손목과 목, 나아가 각각의 12경맥에서 뛰는 동맥이 그곳이다. 좌우 손목을 체크하고 목으로 나갔다.
12경맥도 다 짚었다. 중지 다음에 검지와 약지가 움직였다.
모든 부위에서 맥이 감지 되었다.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윤도였다. 할아버지의 맥을 따라 차근 생각을 짚어갔다. 맥은 생기가 있어야한다. 나아가 맥은 위장의 기운을 근본으로 삼는다. 좋은 맥은 위의 기운이 조화롭다. 할아버지의 위 맥은 약한 편이었다. 잘 먹지 않는다는 신호였다.
‘흉통에 기관지천식...’
맥으로 환부를 잡은 윤도가 진폐맥에 집중했다. 진폐맥은 원재 그 기세가 크지만 마치 살갗에 닿는 새의 가슴털이나 물에 내려앉는 함박눈처럼 허전하다. 할아버지의 느낌은 그보다 더 가물거렸다. 다행히 맥은 어느 정도 고르게 나타났다. 나름 강골인 할아버지였다.
맥에서 가장 위험한 건 진장맥의 등장이다. 위의 기세가 없으면 진장맥이 나타난다. 건강에 치명적인 적신호라고 보면 틀림없다.
진맥을 끝낸 윤도가 장침을 펼쳤다. 지켜보던 세희가 숨을 죽였다. 혈자리를 잡은 윤도의 손이 악기를 켜듯 부드럽게 장침을 꽂아넣기 시작했다. 흉부의 한가운데를 따라 장침이 거목처럼 우뚝우뚝 자리를 잡았다.
구미혈을 시작으로 선기혈까지 시침한 장침은 무려 일곱 개였다. 그렇다고 무작정 시침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여 혈자리의 기세를 양측 흉부로 펼쳤다. 각각의 침마다 들어간 정밀함은 오늘도 무아지경의 궁극이었다.
“쿨럭쿨럭!”
장침 다섯 개가 들어갔을 때까지만 해도 할아버지는 가슴을 들썩거렸다. 그 기침이 여섯 번째 장침에 제압되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장침을 끝냈을 때 할아버지의 기침은 기가 죽었다.
“후우!”
시침을 끝낸 윤도가 어깨를 들썩이며 물러났다. 지켜보던 세희가 엄지를 세워보였다. 이제는 옆에서 보는 것조차 즐거운 세희였다.
“채 선생님.”
그녀가 접수대로 나오며 말했다.
“지소장님은 자기 자랑할 때 SSS급 닥터라고 하잖아요?”
“그러죠.”
윤도가 답했다. SSS급 닥터. 그건 창승이 술을 마시면 공공연히 하는 말이었다.
S대 출신에 S대병원 인턴출신이라 Special. 그래서 SSS급 닥터였다.
반면 윤도는 LLL급 닥터다.
Lag Local Looser, 즉 인생에 락 걸려 지방대로 간 실패자라는 뜻이다. 이 신조어는 창승이 어느 날 술자리에서 진담을 농담처럼 뱉은 말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보기에 HHHH급 닥터예요.”
“HHHH급요?”
세희가 지어낸 또 하나의 신조어. 이건 또 무슨 뜻일까?
“지소장님이야 골려먹느라 LLL급이라 했지만 그건 말도 안 되고요, High Healthy Heal, 거기에 더해 Heart.”
“무슨 말씀이신지...”
“내 마음대로 만든 건데요 지소장님이 스페셜한 닥터라면 선생님은 초월적 치료사라고요. 환자를 생각하는, Heart, 마음까지 지극한...”
HHHH.
장침을 견고하게 맞물린 모양이다. SSS라는 말에 비하면 뭔가 색다르게도 들렸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윤도였다.
왜냐고?
‘나는 스페셜한 한의사니까.’
윤도 마음에 자부심이 쌓이기 시작했다.
차곡차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