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통하는 신비경(神秘境)-3
“또 비행기 태워요?”
“비행기 절대 아님. 환자 모실 게요.”
세희는 공직 짬밥 그릇 만큼이나 두툼해진 엉덩이를 끌고 가 다음 환자를 받았다.
끼이...
낡은 금속음과 함께 들어선 건 휠체어였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그림이었다.
“어머, 시어머니?”
세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대구에 사시다 며칠 전 배로 들어오셨어요. 혼자 사셨는데 요즘 힘이 없어 잘 걷지도 못해서...”
“네에...”
도시에 사는 시어머니와 합친 모양이다. 아들이 대구 사람인 까닭이었다. 윤도가 맥을 잡았다. 진맥이 죄다 약했다. 이 경우에도 진장맥을 염려하는 윤도. 다행히 진장맥은 잡히지 않았다.
한의사들은 왜 이렇게 진장맥을 우려하는 걸까?
그건 오장의 기가 자기 힘만으로는 진맥을 잡는 수태음촌구까지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장은 반드시 위맥의 힘을 받아야 거기까지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병이 심해지면 진장의 기운이 단독으로 수태음촌구에 등장한다. 병이 장기의 힘을 이겼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진장맥이 잡히면 큰 병이나 암 등을 유추할 수 있다. 다만 그때도 위 맥의 여부에 따라 치료를 기대할 수도 있었다.
할머니의 맥은 올 다운이었다. 이른 바 부맥이다. 피부 근처에서 맥이 허덕이는 것이다. 몸이 약해질 때 나타나는 맥이니 한 마디로 만성피로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무슨 일을 하시나요? 몸이 굉장히 쇠약해지셨네요,”
윤도가 며느리를 바라보았다.
“그게...”
며느리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박스 주워요.”
“......”
“맞아요. 이 몸에 밤낮으로 박스를...”
며느리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세희가 티슈를 뽑아 건넨다. 세희는 뭔가 사정을 아는 눈치였다.
“애기 아빠가 새 배 사면서 수협 빚을 졌는데 그걸 못 갚고 있어요. 자칫하면 배가 압류될 판이라 그거 갚아주신다고 이런 몸으로 박스를 주우러...”
“울기는... 내 몸이 어때서? 죽기 전에는 꿈적거려야지.”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어머니...”
“나 안 죽는다. 조금만 쉬고 가서 또 일할 거야. 어차피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
할머니는 굉장히 의연했다.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뼈와 주름만 남은 상태로도 변치 않는 모양이었다.
“침대로 올라가세요.”
윤도가 할머니를 부축했다. 혈자리는 복부 위의 중완혈부터 잡았다. 단전과 족삼리, 신수혈에 시침을 하고 신궐과 천추혈자리도 침을 넣었다. 간의 피로를 풀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시침이었다.
한의사들 중에는 신궐혈의 침을 꺼리는 사람도 있었다. 옛 문헌에 나오는 경고 때문이었다. 만약 침을 넣은 후에 배꼽이 헐어서 똥이 나오면 죽는다는 말이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윤도의 손가락은 신궐혈조차 거침이 없었다. 천추혈에서 침을 미세하게 돌려 조율을 했다. 빈 혈자리에 기가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문득 산해경 열매 생각이 났다. 늙은 아들을 위해 고장난 늙은 몸을 사리지 않는 할머니. 어쩌면 이 할머니를 위해 열매가 나왔을 지도 몰랐다.
“할머니, 아, 해보세요.”
윤도가 열매 반쪽 베어들고 말했다.
“뭐죠?”
“피로에 좋은 특효약이에요. 좀 써도 뱉지 말고 드세요.”
“먹고 벌떡 일어날 수만 있다면야...”
“잠이 올지도 몰라요. 졸리면 그냥 편하게 자세요.”
“고마워요.”
할머니가 입을 벌렸다. 윤도는 듬성듬성한 이빨 사이로 열매 과실을 넣어주었다. 몇 번 입맛을 다시던 할머니가 웁 하고 숨을 멈췄다.
“뱉지 마세요.”
윤도가 다짐을 놓았다. 할머니는 끄덕 고갯짓을 하더니 과실을 목으로 넘겼다. 그 이후의 상황은 안 봐도 되었다.
그 사이에 윤도는 두 명 환자의 무릎을 돌보고 기침하던 할아버지의 장침을 뽑았다.
“어때요?”
“응?”
할아버지가 숨을 몰아쉬었다.
“좀 개운하지 않으세요?”
“개운하다마다. 가슴에 새 경운기 모터를 단 것처럼 시원한데?”
“다행이네요. 이제 돌아가시고요 식사는 골고루 충실하게 하세요. 알았죠?”
“그러리다. 내 식사 때마다 가슴팍이 답답해서 잘 못 먹었는데 오늘은 좋아하는 된장 회 무침 좀 먹어야겠어요. 여보, 여보, 할멈!”
“워매, 인자 기침 안 한다요?”
소리를 들은 할머니가 냅다 뛰어들었다.
“젊은 의사 선생이 아주 용하네 그랴?”
“거봐요. 내가 끝내주는 선상님이라고 안 하요? 나 말만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어여, 가자고.”
할아버지는 밝은 인사를 남기고 진료실을 나갔다. 오늘 내방한 환자들도 만족도가 높았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열매를 먹은 대구 박스 할머니였다.
“어떻게 된 거죠?”
진료 마감시간, 섬이라 굳이 마감시간이랄 것도 없지만 내방한 환자들이 다 돌아갔으니 문 닫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잠을 깨지 않는 것이다.
“할머니, 할머니!”
세희가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다.
“설마?”
며느리의 시선에 의심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뭐가요? 곤하게 주무셔서 그런 모양인데... 할머니...”
세희가 한 번 더 흔들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비켜 봐요. 이거 자는 거 아니잖아요?”
각을 세운 며느리가 세희를 밀었다.
“우리 어머니께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침 잘못 놓은 거 아니에요?”
며느리의 시선이 윤도를 겨누었다.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우리 어머니 살려내!”
며느리의 목소리가 훌쩍 높아졌다.
“그게...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면...”
“기다리다니? 그러다 돌아가시면 니가 책임질 거야? 불쌍한 우리 어머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흥분한 며느리가 윤도 멱살을 쥐었다.
“왜 이러세요? 말로 하세요.”
세희가 나서 며느리를 말렸다.
“시끄러워. 너도 한 편 아니야? 우리 어머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니까!”
며느리는 다른 손으로 세희까지 끌어당겼다. 바로 그때, 침대 쪽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휴우!”
할머니 목소리였다.
“어머니!”
“에미야, 너 뭐 하는 짓이냐?”
윤도와 세희를 닦아세우는 며느리를 바라보는 할머니.
“괜찮으세요?”
며느리 손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아휴, 저 양반이 명의시네. 침 맞고 무슨 약을 받아먹었는데 몸이 이렇게 가뜬할 수가 없어. 꿀잠 꿀잠하더니 이게 바로 꿀잠이네.”
“어머니...”
“의사 양반, 고마워요. 우리 동네 침쟁이 한의사들보다 백 배 낫네.”
침대에서 내려온 할머니가 윤도 손을 잡았다.
“어머니...”
그걸 본 며느리 눈이 휘둥그레졌다. 올 때만 해도 다리에 힘이 없어 휠체어 신세를 진 시어머니가 두 발로 섰지 않은가?“내가 걷는 거 처음 보냐? 뭘 그렇게 놀라?”
“정말 괜찮으세요?”
“보면 모르니? 내 너희들에게 짐이 될까봐 여기 안 오려고 했는데 정말 잘 왔구나. 여기서 침 몇 번 더 맞으면 다음 주에 대구로 돌아가도 되겠다.”
할머니가 윤도를 보고 웃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리고 은 소장님도...”
며느리는 고개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아줌마,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나야 괜찮지만 우리 원장님에게 함부로 하는 건 곤란해요.”
세희 목이 힘이 들어갔다.
“죄송하다고 하잖아요. 어머니가 안 움직이니까 겁이 나서...”
“오늘만 용서예요. 다음부터는 절대 안 되요.”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며느리는 연실 꾸벅거리며 진료실을 나갔다.
“나 잘 했죠?”
두 사람만 남자 세희가 윤도를 바라보았다.
“두 말 하면 잔소리죠.”
“그런데 뭘 먹였는데 저렇게 정신없이 잔대요? 보니까 과일 같던데 수면제라도 묻혔나요?”
“한 번 드셔보실래요?”
“저 할머니처럼 개운해질 수만 있다면야... 저도 피로가 무진장 쌓였거든요.”
“비타민제 매일 드시잖아요?”
“그거 광고만 요란하지 별 거 없어요. 안 먹는 거 보다 낫달까?”
“그럼 이거 드셔보세요. 먹으면 졸리니까 잠자기 직전에.”
윤도가 열매 반쪽을 건네주었다. 반쪽을 먹은 할머니가 개운해졌으니 세희에게도 효과가 있을 거 같았다.
“못 보던 열매네. 한방에 쓰는 산 열매인가요?”
“네.”
“좋아요. 이거 먹고 가뜬해지면 제가 한 턱 쏠 게요. 이 선생님도 내일 배편으로 오신다고 하니...”
“내일 온다고요?”
“지소장님이야 천년만년 병원에 누워있고 싶겠지만 그러면 채 선생님만 힘들게요? 어차피 일주일 꼴랑 두 번 보는 진료인데 아파도 여기 와서 아프라고 했어요.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알았다고 하던데요?”
“맹장도 쉬운 병 아닙니다. 너무 무리할 필요는...”
“지소장님은 다시 본소로 가려고 운동 중이잖아요? 그래서라도 올 거예요.”
“본소로 간다고요?”
윤도가 물었다. 창승은 보건소장과 삐걱거리다 섬으로 나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진해서 들어간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거긴 읍이잖아요. 여기에 비하면 대도시다 이거죠. 이번에 문병 온 소장님하고 중재가 이루어졌나봐요. 이번 인사 때 움직이게 될 거 같다고 하던데요?”
“예...”
“뭐 솔직히 채 선생님도 잘 된 거예요. 우리 군 공보의 중에서는 지소장님이 제일 까탈스러우니까.”
“......”
“대우는 S대 병원 전문의 수준을 원하지만 처방은 맨날 올 카피, 감기에 타이레놀, 엘도스, 페니라민. 아니면 Nasopharingitis, 코푸정, 타이레놀. 관절염에 울트라셋이알, 모빅 캅셀...
“......”
“내가 너무 심했나요? 얼른 퇴근하세요. 뒷정리는 내가 하고 갈게요.”
“예.”
“아, 이거 고마워요.”
세희가 열매 반 조각을 흔들어보였다.
지소를 나오자 바닷바람이 귀밑을 훑고 갔다. 시원했다. 그러고 보니 이 맘 때 느껴지던 피로감도 거의 없었다. 산해경의 열매. 진짜 묘약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윤도의 머리에 다시 거울이 들어왔다. 산해경이 들어왔다. 어제 되었다면 오늘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