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265)

갈매도의 권력자들-1

차분하게...

목욕재계까지는 아니어도 샤워는 했다.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차이라면 심신수양이 첫손에 꼽혔다. 서양의학과 달리 한의학을 다루는 한의사는 엄청난 수행과정을 거쳐야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먼 옛날의 명의들은 도가의 수련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의학의 4대 진단법만으로 난치병이나 불치병 정복은 엄두도 못낼 까닭이었다.

딸깍!

문을 안으로 잠궜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후우!’

숨을 고르고 산해경을 집었다. 안에 갈피로 끼워둔 거울을 꺼냈다. 거울은 여전히 맑았다. 그것만으로도 한없이 반가운 윤도였다. 판타지 영화나 소설을 보면 이런 경우 옵션이 따라온다.

뭘 해야 한다. 뭘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안 된다... 어쩌면 이 거울, 벼락이 떨어지는 날만 될 수도 있다. 보름달이 뜬 날만 될 수도 있었다.

‘음... 일단 그건 패스...’

어제 벼락이 치지 않았다. 어제가 보름달도 아니었다.

책의 한가운데를 넘겼다. ‘해외서경’이 나왔다. 해경편이다. 산해경은 산경과 해경으로 이루어져있다. 원래는 32권짜리였다. 현재 전하는 건 18권이다.

산경은 5편으로 이루어졌는데 산의 위치를 설명하고 산물(産物)을 설명하는 순서를 밟고 있다. 일종의 지리서적인 성격이다. 해경은 산경과 달리 신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산해경은 본래 산해도라는 그림이 함께 존재했었다. 하지만 그 그림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후대의 사람들이 산해도를 복원해 쓰기도 했지만 그것마져도 전하지 않는 게 많다.

현재 산해경에 쓰이는 그림은 청나라 학자의 것으로 원본과 달리 단편적 도움을 줄 뿐이다. 달리 말하면 책에 언급되지 않은 약재가 더 많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윤도의 선택은 적산이었다. 해외서경의 말미에 나오는 곳. 이 곳에는 동물이 많다고 나왔다. 호랑이는 물론이오, 이주, 구구, 시육, 호교 등 듣도 보도 못한 짐승 이름들이 즐비했다.

윤도가 여길 비춘 건 숲 때문이었다. 사방 300리로 내리뻗은 광대한 원시림. 그 안의 모습이 궁금했다. 윤도의 관심은 오직 약재이기 때문이었다.

“우허웅!”

거울이 비춘 건 호랑이 떼였다. 무려 네 마리나 되었다. 강철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니 등골이 시려왔다. 동물원이나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호랑이 따위는 댈 것도 아니었다.

다음으로 보인 건 몬스터풍 짐승이었다. 여러 동물의 특징을 따서 창조된 듯 했다. 거울을 조금씩 옮겼다. 그제야 깊고 깊은 산림이 거울 안에 보였다.

나무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거울의 조준을 땅에 겨누었다. 약초를 캐는 약초꾼의 시선이다. 숲은 지질리도록 깊고 무성해 약초가 쉽게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뒤졌을까?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산해경을 탐험한 것이다.

‘내일 계속할까?’

하지만 윤도는 거울을 놓지 못했다. 이 비경을 두고 잠을 잘 수는 없었다. 그러다 겨우 별 모양의 꽃을 발견했다. 도라지였다. 반가웠다. 보라색꽃이 소담하다. 본초학 실험 때 교수와 함께 누볐던 지리산에서의 보름. 그때 도라지와 더덕은 좀 캤던 윤도였다.

가장 실한 것으로 한 뿌리만 잡았다. 잡아당기니 현실까지 단숨에 뽑혀 나왔다. 진짜 도라지였다.

‘와우!’

까짓 도라지 한 뿌리가 뭐가 중요할까? 하지만 이건 그냥 도라지가 아니라 산해경 속의 도라지였다. 오염되지 않은 산세와 정기를 간직한... 도라지를 보며 분석표부터 뽑아보았다. 만약 현실의 것보다 약성이 약하거나 문제가 있다면 흥분할 이유도 없었다.

[원산] 산해경

[약재수령] 7년

[약성함유등급] 上上품

[중금속함유] 무

[곰팡이독소] 무

[약재사용유무] 가능

[용법용량] 기존용법 참조

[약효기대치] 上上

“......!”

분석표를 본 윤도 입이 쫙 찢어졌다. 또 다시 최상의 약재였다. 이제야 알았다. 그동안 윤도가 분석한 자연산들이 좋은 등급을 받지 못했던 이유. 그건 그것들이 자연산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현대로 오면서 약해진 산의 지기 탓에 약성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반대로 산해경 속의 약재들은 하나 같이 최상품의 약성을 지녔다. 그건 그 산과 땅이 신비감에 더불어 원시의 지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거울을 책의 다른 장소로 옮겼다. 이번에는 대황동경편의 해내였다. 굉장히 큰 게를 만났다. 거의 세숫대야만한 크기였다. 노량진수산시장에서 먹어본 털게 맛에 반한 윤도, 호기심이 발동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새벽 3시에 가까운 시간.

내일은 원래 창승이 진료하는 날이지만 병가 중이니 윤도가 대타로 들어가야 했다. 열매 덕분인지 몸은 피곤하지 않았다. 하지만 핏줄 선 눈으로 진료를 보는 것도 의사의 도리가 아니니 과욕을 접어야했다.

‘꿩대신 닭이라고...’

윤도는 게를 잡았다.

하지만!

게는 거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응?’

손에는 분명 잡혔다. 그러나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일일일약(一日一藥)?’

문득 스쳐가는 전설이 있었다. 태백산의 영약 샘물이었다. 명의를 꿈꾸던 백정촌의 마의(馬醫)가 만난 산신. 그의 정성에 반해 탕재를 만드는 신비수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 신비수는 하루에 단 한 번, 한 바가지만 풀 수 있었다.

한 번 더 시도했던 윤도. 손에 닿는 게가 밖으로 나오지 않자 미련을 끊었다. 오늘만 날이 아닌 것이다.

***

다음 날, 일과 마치기 무섭게 거울을 집었다. 다시 해경편의 게를 찾았다. 게는 그 자리에 없었다. 바다의 해변을 뒤지자 게가 나왔다. 다시 게를 찾는 이유는 확인 때문이었다.

책 속 비방은 하루에 한 번 뿐일까?

게를 잡았다. 이번에는 힘 들이지 않고도 거울 밖으로 딸려나왔다. 방 안을 기는 게를 보았다. 일일일약이 맞는 모양이었다.

게!

산삼이라도 캐지 그랬냐고? 물론 산삼이 보인다면 당연히 그럴 윤도였다. 하지만 게도 명약이다. 본초강목에 보면 게의 효능이 나온다. 맺히고 응어리진 피를 풀어 순환이 잘 되게 한다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맛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노인들과 나눠먹으면 명약이 될 수 있었다. 피가 맑아지는 것이다.

“요 놈이 추운 바다에 살아서 그런가? 게 맛이 쌉쌀하네?”

지소가 문을 열기 전, 게 요리를 시식한 노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산해경에서 나온 게는 담백한 털게 맛이 아니었다. 그 감칠맛 뒤에 쌉싸름한 맛이 있었던 것. 그래도 노인들은 살을 뱉지 못했다.

“특별한 약을 넣은 게탕입니다.”

윤도의 말 때문이었다. 슬슬 윤도의 신도가 되어가는 노인들. 죽은 피를 풀어주는 약재를 넣었다니 기를 쓰고 먹었다. 큰 냄비 가득하던 게는 국물도 남지 않았다.

“몸이 가뜬하네?”

“눈도 잘 보이는 것 같아.”

고혈압에 고지혈증이 있던 할머니들이 입을 모았다. 탁한 피가 맑아지니 시력이 좋아진 듯한 느낌도 틀린 건 아니었다.

“채 선생님.”

그제야 출근한 세희가 울상을 지었다. 창승의 빈 자리를 메우는 와중에 음식봉사까지 하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 과일 어땠어요?”

냄비를 치우며 윤도가 물었다.

“엊그제 그 거요?”

“네.”

“지인짜, 진짜 직빵이에요. 어제 먹어봤는데 비타민보다 훨 나아요.”

“그렇죠?”

“몇 십년 만에 개운하게 일어났다니까요. 그런 꿀잠은 처음이었어요. 스무 살, 푹 자고 난 그 기분이라니까요.”

“그럼 진료 시작할까요?”

윤도가 찡긋 윙크를 했다.

“진짜 진료 볼 거예요?”

“아니면요? 지소장님 없다고 다 돌려보내요? 저도 명색이 한의사인데?”

“하지만 이러다 섬사람들이 채 선생님만 찾으면...”

“그럼 하루 비워둔 날도 진료 보면 되죠. 어차피 이 섬에서 나가려면 국방부 시계가 돌고 돌아야 하거든요.”

“역시 선생님은 HHHH급!”

세희가 힘차게 지소 문을 열었다.

딸깍!

침통을 펼쳤다. 아홉 가지 침이 우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전에는 보기만 해도 부담스럽던 침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너무나 반갑다. 오늘은, 이번 환자는, 어떤 침을 넣어 망가진 혈자리를 고쳐줄까? 생각만 해도 신이 나는 것이다.

침은 술술 들어갔다. 그때마다 노인들의 주름살이 하나씩 펴졌다. 휘파람이 절도 나왔다.

“......!”

그러다 들어온 환자에게서 윤도의 동공이 정지되었다. 갈매도 바다를 좌지우지하는 차명균 선장이었다. 외관상으로는 삐쩍 골은 얼굴이지만 깡다구 왕으로 불리는 강골이었다.

태풍 속에서도 바다를 뚫는 사람, 잘못 걸린 고래 때문에 배가 뒤집어지고도 살아나는가 하면 시시때때 출몰하는 중국선단에도 절대 꿀리지 않는 갈매도 전사가 등장한 것이다. 갈매도 육지가 어촌계장이나 이장의 홈그라운드라면 바다에서는 차명균이 절대적이었다.

‘방어...’

윤도 머리 속에서 방어 떼가 팔딱거렸다.

차명균.

이름 대신 방어가 떠오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윤도가 섬에 배속된 지 2주 뒤의 일이었다. 고질적 오십견 위에 어깨 부상을 입은 그가 침을 맞으러 왔다. 그물을 몰래 걷어가는 중국 어선과 일대 격전을 벌이다 어깨를 상한 날이었다. 새 한의사가 왔다니 호기심 반으로 왔던 차명균. 윤도의 환자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침을 맞는 내내 인상을 찡그렸다. 여간해서는 꿈쩍도 않는 사람이다. 오죽하면 화타가 살을 째는 동안 내색도 않았던 관우를 연상했을까? 네 번째 침이 들어갈 때 그가 윤도 팔을 밀어냈다.

“어이, 한의 선생. 침은 놔봤어?”

카랑한 목소리가 터졌다.

“......!”

윤도는 숨도 쉬지 못했다.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 밖으로 걸어나간 그는 잠시 후에 돌아와 팔뚝만한 방어 몇 마리를 던져놓았다.

“사람 잡지 말고 연습하고 해.”

윤도 발밑에 던져진 방어들이 미친 듯이 펄떡거렸다. 윤도는 그 힘에 밀려 두 번이나 쓰러졌다. 사실 명백한 실수였다. 핑계를 대자면 차명균의 흉터 때문이었다. 옷을 벗은 상체는 멀쩡한 데가 없었다. 어떤 곳은 칼자국이었고 또 어떤 곳은 상처들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는 젊은 시절 육지 항구의 폭력배였다. 당시 상대 조직이 일본 야쿠자와 손을 잡았고 그걸 깨기 위해 사시미칼 두 개를 들고 혈혈단신 야쿠자의 요트에 올라갔다고 한다. 거기서 그는 야쿠자 일곱을 회 뜨고 자신도 칼빵을 몇 번 맞았다.

그 기세에 질린 야쿠자들이 한국 진출을 포기했다. 2년 가까운 치료 끝에 회생한 그는 고향인 갈매도로 돌아왔다. 칼빵을 맞고 보니 폭력 세계에 정이 떨어진 것이었다.

거기에 더한 중국 어부들의 폭행 흔적. 자상과 창상이 말라붙은 등짝은 그야말로 상흔의 바다였다.

“으으으!”

윤도 손에 강진이 일었다. 쌩초짜 쪽에 가깝던 윤도는 혈자리조차 제대로 찾지 못했고, 어쩌다 찾으면 흉터 때문에 빗나갈 수 밖에 없었다.

방어와 흉터. 그리고 차명균의 카리스마. 그로 인해 일주일 동안 잠도 제대로 못잔 윤도였다.

그 후로 그는 윤도를 찾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오면 창승에게 진통제를 받았다. 그런 그가 오늘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걷지 못하는 늙은 어머니를 등에 업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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