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침 명의, 죽은 자를 살리다-1
“장난 아닙니다. 잘난 척 하려는 것도 아니고요.”
“......”
“지소장님.”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하지.”
“꼭 가셔야합니다. 늦으면...”
“그만 해. 나도 의사야. 우리 어머니 건강 하나 못 챙길까?”
창승이 슬쩍 각을 세웠다. 윤도는 거기서 말문을 닫았다. 그의 말대로 그의 어머니였다. 직접 찾아온 환자도 말을 안 들을 수 있는 판에 서울로 간 어머니를 윤도가 어쩌랴?
창승이 사라진 회식판에 둘만 남았다.
“진짜 지소장님 어머니가 안 좋은 거예요?”
궁금한 건 세희 뿐이었다.
“아무래도...”
“어머, 우리 채 선생님 진짜 허준 넋이라도 쓰였나봐. 아니면 화타나 편작이라도...”
화타나 편작.
그런 거 다 소용없다. 현대는 서양의학의 시대였다. 그 둘이 현생한다고 해도 그들의 의학을 신뢰할 시대가 아니었다. 어쩌면 의사들은 그들의 껍데기까지 벗겨 허구를 증명하려고 할 지도 모른다.
‘당신 무면허야.’
무서운 말이다. 한의학이 무너진 것도 종이 한 장 때문이었다. 일제시대, 서양의학을 받아들인 일본을 민족의학 말살정책을 펼쳤다. 한의사를 양성하던 학교를 강제로 폐쇄시켰고 한의사 면허도 박탈되었다. 그들이 대신 던져준 건 의사 면허보다 한 단계 낮은 ‘의생’ 면허였다. 민족의학이던 한의학의 맥이 잘려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형성된 높고 높은 불신의 벽.
그 씁쓸함을 안주 삼아 남은 양주를 들이켰다. 그 잔으로 상념을 잘랐다. 양주 따위보다는 산해경에 빠지고 싶은 윤도였다. 그 맛을 어찌 술 따위에 비할까?
“아, 술 마시고 나면 얼굴 또 푸석해질 텐데... 선생님 혈색 좋아보이는 비법 같은 건 없어요?”
잔을 비워낸 세희가 물었다.
“전에 알려드렸었는데...”
“죄송요. 그때는 솔직히 선생님 말이 별로 신뢰가 안 가서...”
“......”
“없어요? 좀 알려주세요.”
“양손을 아랫배에 올리고 배꼽 주위를 시계방향으로 문지르세요. 몇 차례면 됩니다.”
“그게 다예요?”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비빈 후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주세요.”
“또요?”
“이건 조금 난이도가 높은데...”
“괜찮아요. 동안이 될 수만 있다면...”
“우리가 보통 혈색이 좋은 사람을 보면 신수가 좋다, 신수가 훤하다라고 하잖아요?”
“네.”
“거기서 말하는 신수가 바로 신장이에요. 즉 신장이 좋으면 혈색이 좋아지는데 신수혈을 자극하면 좋아요.”
“그게 어딘데요?”
“여기요.”
윤도가 혈자리를 짚어주었다. 요추 2-3번 사이에서 양쪽 허리 쪽으로 4-5cm 방향이었다.
“자기 전에 항문을 최대한 오므리고 신수혈을 100여 차례 문지르세요. 그 후에 윗니와 아랫니를 지긋이 몇 번 깨물고 자면 되요.”
“으음, 뭐 해볼만 하네요.”
세희는 신수혈을 문지르며 숙소로 돌아갔다.
사택으로 가는 밤길, 쏴아아쏴아아 파도소리가 윤도의 길동무를 해주었다.
빠라빠라랑!
파도를 따라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전화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젊은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큼큼, 양주 세 잔 마셨지만 혹시라도 취한 목소리가 나갈까봐 목청부터 가다듬었다.
“어디시죠?”
“서울이에요.”
‘서울?’
“저번에 아기 경기 때문에 찾아갔던 엄마예요. 부정맥 기억하세요?”
“아, 네...”
“그 날 올라와서 다음 날 병원에 갔어요. 선생님 말처럼 부정맥이었어요.”
“네...”
“의사 선생님이 빨리 와서 수술도 수월하게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선생님께 감사드리려고요.”
“아닙니다. 아기가 건강하면 그만이지요.”
“우리 아기, 이제 울지도 않고 숨소리도 좋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기 잘 기르세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창승으로 하여 다소 찜찜하던 기분이 확 풀렸다. 서양의학이면 어떻고 한의학이면 어떠랴? 의학의 존재 이유는 단 하나다. 닥치고 병자를 고치는 것.
과거의 명의 중에는 침을 놓을 때 얇은 옷차림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환자의 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한의들은, 환자를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허준 같은 명의도 직접 약을 찾아 산을 뒤지곤 했다. 그 수고로운 과정 속에 환자를 사랑하고 목숨을 중시하는 의술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윤도의 마음은 산해경 앞에서 멈췄다. 미소가 절로 나왔다. 오늘은 무슨 약재를 찾아볼까? 화목이라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무기력한 환자들에게 기력을 찾아줄까? 아니면 식저를 찾아 근심병을 낫게 할까? 아기 엄마들을 위한 거라면 용골을 닮은 천영을 찾는 것도 좋았다. 땀띠를 없애준다니 사소하지만, 엄마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었다.
차분하게 책의 처음으로 갔다. 대충 여기저기 맛을 보았으니 차근차근 훑어갈 생각이었다. 남산경이 시작이었다. 작산이 출발이며 그 첫머리에 소요산이 나왔다. 서해의 가장자리에 닿은 지역이었다. 여기서도 굉장한 약재를 만났다.
<축여.>
부추처럼 생긴 풀이다. 먹으면 허기가 지지 않는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을 구하는 데는 이보다 좋은 약재가 있을 수 없었다. 이 산에 사는 성성이라는 짐승고기를 먹으면 달리기를 잘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육상이나 마라톤 선수에게 처방하면 총알 탄 사나이 우사인 볼트를 넘을 지도 모른다. 조개의 하나인 육패도 욕심이 났다. 그 껍데기를 몸에 차면 복부 질병을 예방하니 복부예방주사로 안성맞춤이었다.
동쪽 당정산으로 옮겨가자 나무가 많았다. 그만큼 많은 게 또 있었다. 바로 수정과 황금이었다.
‘황금...’
금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지금이었다. 덩어리 몇 개만 집어내도 병원을 차릴 수 있다. 호기심에 누런 금덩이를 잡았다. 딸려나오지 않았다. 얌전히 제 자리에 내려놓았다. 윤도가 취할 수 있는 건 오직 약재였다. 그것도 하루 한 번이었다.
뒤에 이어진 건 청구산이다. 거기 원시의 늪지대가 보였다. 늪에서 기이한 물고기를 만났다. 이름은 적유. 머리가 마치 사람 얼굴을 닮았다. 하지만 소리는 원앙새처럼 맑았다. 신기함에 못 이겨 윤도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한 번 만져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푸득!
물고기가 그만 거울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
실수였다. 두 손으로 물고기를 받쳐든 윤도, 넋이 반쯤은 나갔다. 펄떡거리지 않는가? 소리를 내지 않는가? 찬찬히 형태를 살핀 후에 거울 안으로 밀었다. 들어가지 않았다.
‘응?’
다시 해도 다르지 않았다. 나올 때는 자연스러웠지만 들어갈 때는 벽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물고기, 즉 적유가 숨을 멈췄다.
‘뭐야?’
당황하는 순간, 윤도의 약재 분석기가 돌아갔다.
[원산] 산해경
[약재수령] 17년
[약성함유등급] 上上품
[중금속함유] 무
[곰팡이독소] 무
[약재사용유무] 가능
[용법용량] 피부병에 특효. 한 마리를 통 째로 보름은 낮에, 보름은 밤에 그늘에서 말려 잡질을 제거하고 연말하여 극세말로 만들어 사용. 총량을 3회에 나누어 복용함. 혹은 33 시간을 고아 총량이 10분의 1로 줄어들면 방울로 복용.
[약효기대치] 上上
적유.
피부병 대박 특효약이었다.
‘맙소사.’
탄식의 이유는 용법과 용량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기존용법대로 하라더니 조제법이 따로 나왔다. 잡질을 제거하라는 건 허튼 것이 들어가지 않게 하라는 것이고 연말이니 극세말이니 하는 건 가루로 쓰라는 말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처방이었다.
엉뚱하게 얻게 된 적유. 이건 또 무슨 운명일까 싶은 생각에 냉장고에 담았다. 말린다고 해도 아침이나 되어야 시작할 일이었다.
한잠을 붙였지만 일찍 눈을 떴다. 산해경 때문이었다. 손가락 때문이었다. 아니, 그 모든 능력들 때문이었다. 설명할 수 없지만 하늘이 내린 이 능력. 그걸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항구가 환했다. 이른 새벽, 어선들이 출항하는 것이다. 차명균 생각이 났다. 깡으로 뭉친 그가 침을 맞으러 올 리 없었다. 하지만 한 대 더 맞으면 오래 가뜬할 일. 잠도 깬 마당에 침통을 챙겨들고 나섰다. 옛날 한의들은 심신산골 왕진도 갔었다. 코앞 항구까지 못 갈 것도 없었다.
“선장님!”
항구에 이르러 대양호를 보며 외쳤다. 그 배가 차명균의 배였다.
“어, 원장님.”
어구를 확인하던 차명균이 반색을 하며 돌아보았다. 윤도가 침통을 들어보였다.
“아,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차명균은 결국 웃통을 벗을 수 밖에 없었다. 윤도는 선장실에서 자침을 했다. 그 사이에 선원 둘이 삘쭘삘쭘 서성거렸다.
“어깨 아프세요?”
눈치를 깐 윤도가 물었다.
“예... 그 놈의 오십견이 왔는지...”
선원 하나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선원들은 크고 작은 근육통과 관절염을 달고 산다.
“그럼 돌아와서 지소에 가. 나도 신세지고 있는데 최 씨까지?”
“괜찮습니다. 이리 와서 옷 벗고 앉으세요.”
윤도가 차명균을 막았다.
“아이고, 이거 죄송해서... 이게 견딜만 했는데 엊그제 중국 놈들 하고 어구 싸움하면서...”
선원 둘이 사이좋게 옷을 벗었다. 진맥을 하니 오십견과 어깨통증이 맞았다. 세 사람을 놓고 사이좋게 장침을 넣어주었다.
“이야, 진짜 가뜬하네?”
“그러게. 젊은 분이 대단하구만.”
발침을 하자 어깨가 풀린 두 선원이 입을 모았다.
“고맙습니다. 새벽부터 일부러 오셔서...”
“웬걸요. 잠이 안 와서 나왔습니다. 만선이나 채워서 오세요.”
“당연히 만선이죠. 게다가 이제 어깨도 시원하게 나았으니 중국 새끼들 어망 도둑질하다 걸리기만 하면 다 죽음입니다.”
차명균은 사자후를 남기고 출항을 했다.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위로 아침이 밝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