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265)

일침 명의, 죽은 자를 살리다-2

사택으로 돌아가는 길, 멀리 노란 별장이 보였다. 별장 너머에서 비치는 햇살이 묘한 느낌으로 아롱거렸다. 저 안에는 여러 공주가 살고 있다. 잠자는 공주, 미녀 공주, 추녀 공주, 식물인간 공주, 몽유병 공주...

젊은 여자에 대한 소문은 너무 많아 종잡기도 힘들었다.

문득 그녀가 궁금해졌다. 지금의 윤도, 공주의 어떤 병이라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식물인간 공주-치료가 될까?

몽유병 공주-침술이 통할까?

미치광이 공주-장침으로 뇌를?

질러가던 생각이 적유에서 멈췄다. 적유가 피부병 약이 아니고 정신병약이면 더 좋지 않을까? 그런데... 마침 그쪽에서 벤츠가 달려오고 있었다.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벤츠가 오갈 시간이라면 뱃시간 뿐이었다. 별장 사람들은 물건도 다 서울에서 공수해다 먹었다. 그렇기에 이 시간에 벤츠가 나올 리 없었다. 드라이브 같은 것도 즐기지 않는 별장이었다.

“워매, 쪼까 찬찬히 좀 다니쑈, 잉!”

앞마당에 나물 찐 걸 널던 할머니 하나가 질겁을 하며 소리쳤다. 벤츠는 아랑곳 없이 속도를 높였다.

끼익!

사택에 가까울 무렵, 폭주하던 벤츠가 급정거를 밟았다. 놀랍게도 지소 앞이었다. 별장에서 일하는 50대의 박 기사였다. 그가 미친 듯이 지소 문을 두드렸다.

“왜 그러시죠?”

윤도가 다가갔다.

“여기 의사 있죠?”

“그렇습니다만...”

“선생입니까?”

“저는 한의사고 의사는...”

“부탁합니다. 응급환자예요.”

기사가 조바심을 냈다. 윤도가 창승에게 전화를 걸었다. 창승과 세희는 5분여 만에 달려왔다.

“타시죠. 시간이 급합니다.”

기사가 벤츠를 가리키며 재촉을 했다.

“무슨 일이신지?”

창승이 물었다.

“사람이 갑자기 쓰러졌는데 숨을 쉬지 않습니다. 어서요.”

‘숨?’

창승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보였다.

“부탁합니다. 어서요!”

기사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그래도 창승의 발걸음은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S대 의대 나와 S대병원에서 인턴을 마친 재원이다.

하지만!

이 낙도의 섬에서 뭘 어쩐단 말인가? 의사는 의료장비와 의료기사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중대한 병일수록 그렇다. 수술 등에서는 로봇도 있어야한다. 그러나 현재 그가 지닌 건 청진기 하나 뿐이었다. 꼴랑!

“제세동기 가지고 가보죠.”

역시 세희였다. 짬밥으로 무장한 그녀는 제세동기를 챙기고 가운도 던져주었다.

“채 선생, 같이 가지.”

창승이 윤도를 엮고 들어갔다. 이럴 때는 혼자보다 둘이 든든하다. 윤도도 별 수 없이 동승을 했다.

“네, 네... 지금 가고 있습니다. 헬기는요?”

기사의 전화에 불이 났다. 아직 첫 배가 들어오려면 먼 상황. 사적으로 헬기를 요청한 모양이지만 섬까지 오려면 만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슬쩍 보니 창승이 굳어있었다. 원래는 별장 한 번 가기가 소원이었던 그였다. 술자리에서 몇 번이고 들었던 윤도였다.

“아, 저 별장 여자... 나한테 한 번 보여주기만 하면 바로 진단 나올 텐데... 시골에 묻혀 있으니 명의 못 알아보네.”

지금 표정은 그때와 달랐다. 환자가 숨을 쉬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절명했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S대 팔아봤자 인턴 출신 아닌가? 아니, 설령 그 병원의 진료과장인들 이 낙도에서 무엇을 어쩔 것인가?

“채 선생님.”

뒷 좌석에 함께 탄 세희가 침통을 넘겨주었다.

“......?”

“아무 장비도 없잖아요? 어쩌면 선생님이 더 필요할 지도 몰라요. 그 신기의 침술 말이에요.”

세희가 침착하게 속삭였다. 그 또한 짬밥의 힘이었다.

“......!”

별장에 들어서기 무섭게 창승이 얼어붙었다. 침대의 환자는 젊었다. 그러나 여자는 아니었다.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창승이 물었다.

“30분 쯤 되었어요.”대답은 사모님이 했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기품이 가득한 장년의 여자였다. 창승이 청진기를 댔다. 여러 번 확인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고개를 떨구었다.

“선생님.”

사모님이 고개를 들었다.

“숨이... 끊긴 거 같습니다.”

창승이 말했다. 세희 쪽에도 고개를 저었다. 제세동기 같은 건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아!”

사모님이 그 자리에서 넘어갔다.

“사모님.”

한 덩치하는 가정부가 부축을 했다. 세희도 도왔다.

“다시 좀 봐주세요. 우리 도련님이 얼마나 건강체질이신데...”

기사의 다그침에 창승이 한 번 더 수고를 했다. 그래도 호흡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창승의 고개가 한 번 더 떨어졌다.

“세상에나!”

사모님은 또 다시 넋을 놓았다.

“말도 안 돼. 선생님이... 선생님이 다시 확인해 주세요. 이렇게 가면 안 되는 분입니다.”

이번에는 기사가 윤도 등을 밀었다. 지소의 일 따위는 전혀 모르는 별장. 가운을 입고 있으니 닥치는 대로 밀어대는 기사였다. 창승은 밖으로 나갔다. 더는 무의미하다는 뜻이었다. 반 강압에 밀린 윤도가 맥을 잡았다. 잡히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고 한 번 더 잡았다.

“......!”

순간, 윤도 손 끝에 가느란 신호가 왔다. 마치 바다 깊은 심연의 그곳에서 낚시줄을 건드리는 듯 아련한 생명의 신호...

‘응?’

윤도가 다시 집중했다. 새털이 내려앉는 느낌이지만 맥은 분명 남아있었다. 윤도의 손이 허벅지로 옮겨갔다. 그곳에 손을 대고 한참을 머물렀다. 느껴졌다. 다른 곳에 비해 온기가 높았다.

‘살아있다.’

윤도의 오감이 말했다. 그 말은 바로 입을 타고 나왔다.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

그 한 마디에 모든 사람들이 소스라쳤다. 세희와 사모님, 가정부와 기사... 그리고 다시 들어온 창승까지도 예외는 없었다.

“채 선생.”

창승의 태클이 선착으로 들어왔다.

“살아 있습니다.”

“이봐. 지금...”

“은 선생님, 침 준비 좀 해주시겠습니까?”

윤도가 세희를 재촉했다. 동시에 그 자신은 가운을 벗고 남자와 나란히 누웠다.

“이봐요.”

사모님이 뭐라 할 기세였지만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윤도가 남자와 나란히 누운 건 혈자리 확인 때문이었다. 몇몇 경혈에는 보다 바람직한 취혈 자세가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견우혈-팔을 위로 들고 혈자리를 잡는 게 좋다.

액문혈-주먹을 쥐고 혈자리를 잡는 게 좋다.

청회열-입을 벌리고...

신도혈-몸을 굽혀서...

거궐혈·전중혈-위를 보고 누워서 혈자리를...

윤도 손이 거궐혈을 먼저 짚었다. 심장의 상태를 드러내는 주요 혈자리의 하나 거궐혈. 그건 명치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손을 전중혈로 옮겼다. 이는 양 유두의 사이에 존재하는 혈이었다.

“......!”

윤도의 신경이 극한으로 곤두섰다. 미세한 감이 온 것이다. 벌떡 일어난 윤도가 그 자리에 장침을 밀어넣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밀어넣은 채, 윤도는 혈자리의 반응을 살폈다. 그 감이 올 때까지 숨도 쉬지 않았다.

심연...

갈매도의 앞 바다는 깊다.

그러나 인간의 심장만큼 깊은 심연이 있을까? 그 바다에 침을 담그고 물살의 흐름을 살피는 격이었다. 거대한 기둥도 아니고 꼴랑 침 하나다. 그래도 윤도는 그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젊은 생명이 걸린 일. 도시에 망망대해에 남아있는 생명의 신호. 몰랐으면 모를까 감을 잡은 다음에야 포기할 수 없었다. 온몸으로 생명의 존귀함을 보살펴야 하는 한의인 까닭이었다.

신호...

오거라.

제발 내 손 끝에...

윤도의 비원을 알았는지 혈자리가 응답을 했다. 그 미세한 울림이 침으로 전해온 것이다. 침 끝을 그 쪽으로 옮겼다. 좁쌀보다 조금 큰 혈자리 안에서의 시도였다. 그런 다음 침을 돌리고 움직이며 잠든 혈을 깨웠다. 오 분, 십 분이 지나자 혈자리의 울림이 조금 커졌다.

‘후우!’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고 거궐혈로 옮겨갔다. 거기도 장침을 시침했다. 사모님의 황당한 시선이 연실 세희에게 건너왔다. 세희가 잘라말했다.

“젊지만 침 하나는 대한민국 최고세요. 믿어보세요.”

사모님은 시계를 보았다. 그들은 헬기를 요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프로펠러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황. 이미 숨소리가 꺼진 상태니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윤도의 손은 신기에 가깝게 움직였다.

완벽하게 침묵하는 심장. 한의에서 심장은 군주지관으로 불린다. 한 나라의 왕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또는 심주신(心主神)으로도 불린다. 정신을 주관하는 장기로 본다. 한의학에서는 심장의 영역에 뇌의 기능을 포함하고 있었다. 울화통이 치밀 때면 머리를 치지 않고 가슴을 치며 한탄하는 걸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심장 주변의 혈자리에 들어간 장침은 모두 7개였다. 그 수는 오행에서 심장을 상징하는 숫자 중의 하나였다.

“양말을 벗겨주세요. 팔도 펼쳐주시고요.”

또 다른 장침통을 열며 윤도가 소리쳤다. 이제 모두는 숨을 죽였다. 창승도 그랬다. 눈앞에서 움직이는 윤도는 한의대 갓 졸업한 초땡이가 아니었다. 맹세컨대 창승을 가르치던 S대의 내과 과장들도 이 정도의 진료 카리스마는 없었다.

윤도의 장침은 쉬지 않았다. 두 장침이 겨드랑이의 극천혈에 들어갔다. 이 혈은 정신을 맑게 하고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혈자리. 장침의 마지막은 발바닥의 용천혈이었다. 그 또한 울화를 내리는 혈자리였다. 그곳까지 시침을 마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남자의 가슴팍이 들썩 하더니 꾸르륵 숨소리가 넘어온 것이다.

“사모님!”

기사와 가정부가 소리쳤다.

“세상에!”

사모님은 또 한 번 자지러지고 말았다. 환자의 기사회생이었다. 어깨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 사이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해가 완연한 바다 위였다. 헬기는 별장의 넓은 정원 끝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응급구조용 닥터 헬기나 119 구급대 헬기는 아니었다.

눈에 익은 로고는 태산전자였다. 국내 굴지 기업 중의 하나인 태산전자. 베일에 싸였던 별장은 태산전자와 관련이 있는 모양이었다. 구급 의료진들은 한달음에 별장에 뛰어들었지만 바로 남자를 싣지는 못했다. 윤도 때문이었다. 윤도가 침을 뽑고 있었던 것이다.

“아후!”

남자 입에서 긴 숨이 밀려나왔다. 이제는 완전하게 정신이 든 남자였다.

“진웅아!”

사모님이 남자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았다. 윤도는 그제야 자리를 비켜주었다. 헬기의 의료진들이 남자를 수습해갔다.

투타타타!

헬기는 왔던 항로를 향해 씩씩하게 이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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