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265)

난치병에 도전하다-3

비몽사몽 사택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여니 익숙한 풍경들이 윤도를 반겼다. 초라하지만 눈에 익은 것들. 별장의 럭셔리함이 주는 위압감보다 나았다.

일단 씻었다. 전염성이 있다는 피부병. 두려운 건 아니지만 관리는 철저히 하는 게 좋았다.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신비경을 들고 산해경을 펼쳤다. 열매가 필요했다. 반 쪽만 먹으면 골수의 피로까지 몰아내는 그 열매. 몇 번의 조준 끝에 나무를 발견하고 두 개를 쥐었다. 그 이상은 잡히지 않았다. 과육 반쪽을 먹었다. 윤도는 침대에서 뻗었다.

꿈에 새들이 날아올랐다. 비익조가 날고 봉황이 날았다. 당호도 날고 우도 날았다. 기묘한 새들이 나니 무지개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나래를 따라 고대의 명의들이 걸었다.

편작도 있고 화타도 있었다. 윤도는 자신이 좋아하는 장상군의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다. 명의들 중에서 화타가 뭔가를 건네주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손을 펴니 청낭서가 있었다. 청낭서는 화타의 비방이 적힌 비기다. 그러나 조조에 의해 투옥되어 죽음을 맞은 화타의 청낭서는 행방이 묘연한 한의학의 보물이었다. 그 청낭서가 윤도 손에 들어온 것이다.

가만히 청낭서를 열었다. 진주알처럼 영롱한 비방들이 펼쳐졌다.

“......!”

하나하나 읽던 윤도가 소스라쳤다. 그 비방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침 하나로 목숨을 구하는 비방... 듣도 보도 못한 불치병, 희귀난치병에 대한 비방...

그 비방을 윤도의 손가락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윤도의 손가락이 행하던 침술은 화타의 청낭서에 적힌 비기의 일부였다.

一鍼卽效 仙針求世.

청낭서의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침즉효 선침구세>

침 한 방이면 즉방 효과니 신선의 침으로 세상을 구하라. 신성한 글자가 윤도 마음에 녹았다. 그 시린 느낌은 중국의 검은 호수 속에서 만난 아이의 숭고한 빛과 닮았다.

<마음을 다해 망진(望診)하라.>

<정성으로 문진(問診)하라.>

<성심 껏 문진(聞診)하라.>

<최선으로 절진(切診)하라.>

한의학의 4대 진단법이 청낭서의 기운과 함께 아른거렸다.

망진은 사람의 아픈 몸과 부위를 살펴 병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첫 번째 문진은 환자에게 들어서 찾고 두 번째 문진은 목소리나 냄새 등으로 아는 것이며 절진은 환자의 몸을 만져서 질병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진맥은 여기에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청낭서는 고황으로 변했다.

고황(膏肓)!

심장 아래이자 흉격의 위. 심장과 횡경막 사이. 한의학에서는 이 곳에 병이 생기면 불치로 보았다. 하지만 화타의 청낭서는 그 또한 불가능은 아니라는 듯 고황에 밝은 빛을 비추며 사라져버렸다.

“......!”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그것도 너무 깊은 아침이었다. 그건 시계와 노크소리가 증명해주고 있었다. 산해경 열매는 반알즉효였다. 마치 천국에서 일어난 듯 개운했다.

9시17분.

윤도가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었다.

“......!”

하마터면 문을 닫아버릴 뻔 했다. 거기 서있는 건... 놀랍게도 부용이었다. 놀랍게도 사모님과 박 기사였다. 그리고... 그들 뒤로 창승과 세희가 있었다.

“선생님!”

얼떨떨한 가운데 부용이 다가왔다. 얼굴을 보았다. 처음 보았던 괴물이 아니었다. 흉측한 피부딱지와 흉터들이 떨어져나가고 새살이 돋고 있는 부용의 얼굴. 그건 사진 속에 보이던 그녀의 아름다운 선과 닮고 있었다.

“어머니께 말씀 들었습니다. 제 병을 고쳐주셨다고요?”

부용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 또한 찢어지는 괴성이 아니었다. 상대를 편하게 하는 맑은 목소리였다.

“......”

자신이 치료한 환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환자. 그 바람대로 정신질환이 달아나고 얼굴의 피부병도 굉장히 호전된 부용. 그럼에도 윤도는 아직, 잘 믿기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예...”

“게다가 저희 오빠까지도 살려주셨다고요?”

“......”

“오빠도 내일 쯤 내려온다고 합니다. 아빠하고 함께요.”

“......”

“두 분 역시 선생님께 감사를 전하기 위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단지 의사로써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대한민국 유일한 의사입니다. 아니 어쩌면 세계적으로...”

“......?”

“제 질병... 한국 뿐 아니라 미국과 독일, 일본의 병원도 거쳤거든요. 하지만 그 누구도 제 병을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여러 약의 부작용으로 얼굴과 몸에 흉측한 피부병까지...”

“......”

“그러니 여기서 큰 절을 드려도 모자랄 판입니다.”

“절은...”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부용이 말하는 사이, 사모님이 느닷없이 큰 절 기습을 감행했다.

“사모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놀란 윤도가 사모님을 부축했다.

“아닙니다. 이까짓 절 따위, 백 번을 한들 어떨까요? 내 바람이 우리 부용이가 다시 건강하게 세상을 향해 꿈을 실현하는 거였어요. 그 소원이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날마다 백팔 배를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알았으니 따님을 모시고 돌아가세요. 많이 좋아졌지만 한 번 더 침을 맞는 게 좋겠습니다. 얼굴 피부병도...”

“선생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요. 무조건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선생님.”

모녀는 더없이 애틋한 얼굴로 윤도를 바라보았다.

“부용 씨 돌보다 감염되었다는 분도 연락 되면 제게 오도록 하시고요 오전 진료 보고 점심 때 잠깐 들릴 테니 먼저 가계세요. 부용 씨는 절대 무리하지 마시고요.”

“네, 기꺼이.”

부용이 대답했다. 광기 때문에 공포스럽게 보이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부릉!

벤츠가 멀어졌다. 대신 세희가 가까워졌다.

“우와, 우리 채 선생님 대박.”

그녀가 엄지를 세웠다.

“지각인 데도요?”

“까짓 지각이 대수예요? 사람을 살렸는데...”

“하지만 할머니들은 아닌 거 같은데요?”

윤도의 시선이 지소 쪽을 향했다. 지소 앞의 의자에 하얗게 핀 할머니 꽃이 보였다. 머리도 백발이지만 할머니들은 대개 흰색계열의 옷을 좋아했다.

“채 선생.”

창승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또 뭐 빈정이나 울리려나했는데 엄지를 세워보였다.

“인정!”

창승이 웃었다. 처음에는 한의사를 개무시하던 창승이었다. 기껏해야 요통이나 골관절염 정도에나 쓸모 있는 거 아니냐던 창승. 한의사를 대표하는 침술이라야 기껏 플라시보 효과라고 평가절하하던 그가 변한 것이다.

“진짜요?”

윤도가 확인에 들어갔다.

“그래. 솔직히 배알 꼴리지만 이 정도라면 인정해야지. 죽은 사람 살린 것도 그렇지만 내놓으라하는 서울 병원 의사들이 손을 든 환자를 고치다니.”

“지소장님.”

“내가 서울에 선을 좀 대봤거든? 우리 병원 신경정신과 권위자이신 이철상 박사님 환자였더라고. 그 분도 두 손을 든 환자였다나?”

“......”

“게다가 나도 목숨 빚져, 우리 엄마 후두암도 조기발견해 줘... 이건 뭐 팩트가 이 정도니 무시하거나 모함을 하려고 해도 틈이 없네.”

“지소장님...”

“나야 뭐 곧 보건본소로 갈 거니까 그동안 서운한 거 이해해. 대신 육종서 선생이 올 거 같은데 그 친구는 한의학에도 굉장히 우호적이니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채 선생."

"네?"

"그럼 채 선생도 이제 침으로 마취도 가능하고. 그런 거야?"

"......"

"거기까지는 아닌가?"

"가능합니다만."

"헐, 대박. 완전 무협지에 나오는 신침이네?"

윤도 말에 창승의 시선이 출렁거렸다.

“아이고, 일단 가서 진료 시작하자고. 할머니들이 애를 태우고 계신데... 내가 대신 봐준대도 침술 명의만 찾으시네.”

창승이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윤도는 일단 화장실로 달렸다. 밤새 탱탱하게 부푼 방광을 비우기 위해서였다. 오줌발도 기가 막히게 시원했다. 방광은 그 안에 들어온 강물을 깔끔하게 비워냈다.

“유후!”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별장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창승의 인정. 그건 윤도의 바람이었다. 한의사로 실력을 발휘해서 콧대를 누르고 싶었던 마음. 그게 실현된 것이다.

“......!”

세수를 하고 방으로 돌아오던 윤도가 걸음을 멈췄다. 그 안에 창승이 있었다. 그 손에 신비경이 들려 있었다.

이창승.

그걸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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