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265)

난치병에 도전하다-4

“지소장님!”

놀란 윤도가 소리쳤다.

“응?”

돌아보던 창승이 신비경을 떨어뜨렸다.

“......!”

더 놀란 윤도가 몸을 날렸다.

때앵.

신비경이 떨어지며 기묘한 울림소리를 냈다. 다행히 일그러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미안.”

창승이 손을 들며 뒷말을 이었다.

“못 보던 물건 같은데 신기해보여서...”

후우!

“그래서요? 뭘 한 거죠?”

한 번 심호흡을 한 윤도가 담담하게 물었다. 특별하게 보이면 이상하게 여길 지도 몰랐다.

“거울인가 싶어서 얼굴 한 번 비쳐봤어. 그런데 물체가 밍숭맹숭하길래 그 책을...”

창승의 손이 산해경을 가리켰다.

“이 책 비췄어요?”

“응.”

“뭐가 보이던 가요?”

“아무 것도... 그런데 그거 거울 아니야?”

“아, 아닙니다. 이건 옛날 약재저울 받침이에요.”

“쳇, 그래서 잘 안 비쳤구나?”

창승이 방을 나갔다. 문이 닫기기 무섭게 방문을 걸어 잠궜다. 그런 다음 신비경을 살폈다.

‘웃!’

표면을 보던 윤도 인상이 일그러졌다. 샘물처럼 찰랑거리던 기운이 사라진 것이다. 놀란 마음에 신비경을 뒤집었다. 뒤도 그랬다. 다행히 다시 앞면을 보자 원래대로 돌아왔다. 후아아, 윤도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신비경은 다른 사람에게 통하지 않는다. 오직 윤도만이 산해경을 볼 수 있다. 그 사실이 뿌듯한 윤도였다.

신비경을 산해경에 겨누었다. 적유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적유가 잡혔다. 그걸 손질해 약탕기에 넣었다. 33시간을 다리려면 서두르는 게 좋았다.

‘부탁해.’

약탕기를 톡톡 쓰다듬고는 불을 올렸다. 후르르 끓으면 줄이면 된다. 약탕 또한 전처럼 돌로 된. 약탕기에 숯불을 쓰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신비경은 잘 숨겨두었다. 놀라는 건 한 번으로 족할 일이었다.

“채 선상님 오시네.”

“아이고, 우리 선생님.”

“선생이라니? 원장님!”

윤도가 출근하자 할머니들이 반색을 했다. 몇 명은 일어나 손까지 잡아주었다. 노인은 서럽다. 늙으면 눈이 침침해지고 이빨이 빠진다. 가장 큰 애로는 허리와 무릎이었다. 한 평생 기둥이 되어준 허리와 무릎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얼음이 든 것처럼 시리고 또 때로는 불덩이가 든 것처럼 뜨겁다.

할머니들은 기대감에 젖어 지소 안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한 할머니만은 나무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몇 번이고 일어나려고 해도 기력이 딸렸다.

“할머니.”

윤도가 다가섰다.

“이 놈의 다리가 말을 안 들어. 오늘은 바다 나가서 홍합을 걷어야하는데...”

할머니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진맥을 했다. 먼 곳의 혈자리에 문제가 있었다. 다리 바깥쪽의 양능천이었다. 윤도가 그 자리에서 침을 꽂았다.

“이제 일어나 보세요.”

“어응?”

힘을 주던 할머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선 것이다.

“일어났어. 다리가 안 아파.”

“천천히 걸어보세요.”

“이렇게?”

“이제 됐습니다. 앉으세요.”

할머니가 앉자 윤도가 침을 뽑아주었다.

“이제 가시면 됩니다.”

“어응?”

“다리 아파서 오셨잖아요? 이제 안 아프니 가셔야죠.”

“벌써 다 고친 거야?”

“일단은요. 그 자리가 또 아프면 다시 오세요.”

“아이고, 고마워요. 선상님.”

할머니는 앞니 없는 잇몸으로 몇 번이고 같은 말을 하고 멀어졌다.

안으로 들어온 윤도는 쉴 새 없이 침을 꽂았다. 그때마다 할머니들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할머니들 사이에 할아버지 환자가 끼어있었다.

“귀에서 자꾸 소리가 나. 이것도 침으로 되려나?”

“한 번 해보죠.”

윤도의 선택은 백회혈이었다. 머리꼭대기 중앙의 혈자리. 그 자리에 장침을 꽂고 혈자리를 어루만졌다. 빈 곳이 차고, 넘치는 곳이 조절되었다.

“어때요?”

혈자리 조절을 마친 윤도가 물었다.

“어라? 소리가 안 나네?”

“잘 들어보세요.”

“안 나. 아까는 무슨 물 흐르는 소리 같은 게 나더니...”

“그럼 이제 가보셔야죠.”

“허어, 신통방통하네. 나 옛날 어릴 때 육지에서 이런 한의사 본 후는 처음이야. 그때 그 한의사가 우리 아버지 허리 나가 똥오줌 받아내는 걸 이틀 만에 걷게 해줬거든.”

“아직도 좋은 의사는 많답니다.”

“아이고, 개운하다. 개운해.”

할아버지는 어깨춤을 들썩이며 진료실을 나갔다.

저녁 무렵, 윤도는 서둘렀다. 부용 때문이었다. 급한 김에 라면 물을 올렸다. 냉장고에 해물은 많았다. 오늘 할머니들이 가져온 조개만 해도 한가득. 그것 몇 개 넣고 끓이면 한 끼로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이 끓기도 전에 차 소리가 들렸다. 별장의 벤츠였다.

“선생님.”

박 기사가 차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일찍 오셨네요. 식사 좀 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실은 그 때문에 일찍 왔습니다.”

“네?”

“사모님이 저녁 한 끼 대접하고 싶다고...”

“아닙니다. 번거롭게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준비를 끝내셨습니다.”

“......”

“대단한 건 아니니 꼭 식사하시기 전에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분부대로 안 하면 저 짤릴 지도 모르니...”

“......!”

박 기사의 표정은 진중했다. 별 수 없이 침통을 챙겨 벤츠에 올랐다.

“선생님.”

항구를 지날 때 기사가 입을 열었다.

“네.”

“정말 대단하세요.”

“별 말씀을...”

“아까 사모님이 식사준비를 할 때 아가씨도 함께 나와 거들었습니다. 그걸 보는데 괜히 눈물이 나더군요.”

“......”

“우리 아가씨, 정말 좋은 분이시고 정말 아까운 분이셨거든요. 그런데 몹쓸 병에 걸리는 바람에...”

“......”

“회장님과 사모님이 온 세계의 병원을 다 알아보고 노력하셨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저도 안쓰러울 정도로...”

“......”

“우리 회장님, 중국 출장 중이신데 그 소식 듣고 대륙이 떠나가라 환호하셨다더군요.”

“......”

“그런데도 믿기지 않네요. 솔직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와 병원도 하지 못한 일을... 이런 섬마을의 젊은 한의사가...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사모님 말씀이... 갈매도에 별장을 지은 게 신의 한 수였다고... 그래서 운명적으로 선생님을 만났다고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다 왔네요.”

낯 뜨거워진 윤도가 기사 말을 막았다. 그동안 애가 탔을 부모 마음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시큰해졌기 때문이었다.

실은 윤도 부모도 그랬다. 윤도 역시 어린 시절 괴질을 앓았다. 그때 한의원에서 한약을 먹고 위기를 벗어났다. 자라는 동안 부모님은 종종 그때 이야기를 했었다. 어머니가 강물만큼 눈물을 흘렸다는 말, 아버지가 어디든 달려갔다는 말. 윤도를 살릴 수만 있다면 부모 목숨도 내줄 생각이었다는 말...

모든 부모 마음은 똑 같다. 그래서 의술이 중요하다. 아픈 사람을 고쳐 가정에 평화를 안겨주는 일. 그거야 말로 의사의 숭고한 사명이었다.

“선생님!”

사모님이 정원까지 나와 윤도를 반겼다. 부용은 잔디 위에서 단아하게 인사를 했다. 그녀의 자태는 아까와도 달랐다. 이제는 전에 지녔던 품격과 기상이 솔솔 배어나는 그녀였다.

식사는 소박했다. 테이블에는 최소한, 재벌의 모습이 없었다. 맑게 끓여낸 복지리와 맛깔스럽게 무친 게장, 몇 가지 해산물과 장아찌, 김치 두 가지가 전부였다.

“선생님 식성을 몰라서 그냥 담백한 것 쪽으로 준비했어요. 너무 요란을 떨어도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아서...”

사모님이 설명을 했다.

“이 정도면 용궁의 산해진미지요. 따지고 보면 제가 군인이거든요.”

“어머, 그렇게 되는 거예요?”

부용이 재치 있게 맞장구를 쳤다.

“아유, 겸손하시긴... 제가 볼 때 선생님은 공보의만 마치면 구름 환자 몰고 다니실 거예요.”

“고맙습니다.”

“많이 드세요. 음식은 얼마든지 있어요.”

“예...”

“우리 아이는 당분간 죽 중심으로 먹기로 했어요. 괜찮겠죠?”

“좋죠. 하지만 소화가 어려운 육식위주만 아니면 입맛대로 드셔도 괜찮습니다.”

윤도가 부용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가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식사를 마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치료는 저번과 같았다. 머리에 여섯 장침을 시침하고 마지막 코스를 남겼다.

“......!”

윤도는 차마 다음 말을 하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 코스가 그 부분인 까닭이었다. 그러자 가정부가 나서 해결을 해주었다. 그녀가 부용에게 속삭였다. 부용은 스스로 하의를 벗고 그 부분을 내주었다.

‘꿀꺽!’

어제와 같은 치료였다. 그런데 어제와 달랐다. 침부터 그랬다. 어제보다 날이 좋았다. 부용의 기도 어제보다 나았다. 그래서 조금 얕게 침을 꽂았다. 이럴 때는 사람의 양기(陽氣)가 겉으로 나온다. 좋은 한의사라면 그것까지 고려해야 했다.

황제내경에도 전한다.

<날씨가 차면 침을 가리고 따뜻하면 부담 없이 침을 놓으라. 나아가 달이 완전하게 기울면 침을 놓지 않는 것이 좋다.>

윤도도 그 쯤은 알고 있는 한의사. 배움와 손의 뜻이 합치니 당연히 그렇게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윤도의 마음이었다. 왠지 모르게 삐질삐질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떨리는 것이다. 부용 때문이었다. 어제는 완벽한 환자였지만 오늘은 여자처럼 보였다. 미모는 아이돌에 비견되고 자태는 단아하게 세련된 여자. 그게 윤도 마음을 흔든 것이다.

“큼큼!”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침이란...’

침을 놓는 자세를 생각했다. 검은 호수의 시린 빛을 생각했다.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윤도의 손이 부용의 항문 쪽으로 향했다. 무아지경으로 장침을 넣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시침을 마치고 혼자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부용 앞에서 허튼 모습을 보였다는 것. 그 또한 부용이 회복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받으며 정원으로 나왔다.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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