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기로 온 두 거물-2
“아빠, 채 선생님, 계속 이렇게 세워두실 거에요?”
옆에 선 부용의 말이 있고서야 이 회장은 윤도 팔뚝을 놓아주었다. 그때 거실 끝에 대기 중이던 박 기사가 이마를 짚으며 벽에 기댔다.
“어디 아프십니까?”
윤도가 물었다.
“아닙니다. 가끔 격한 두통이...”
“진단은 받아보셨습니까?”
“섬에서 주로 지내다보니 차일피일...”
“제가 진맥을 좀 봐도 될까요?”
“저까지 민폐를 끼쳐서야...”
“잠깐이면 됩니다.”
윤도가 박 기사 맥을 잡았다.
두통...
누구나 한 번쯤 아파본다. 진통제 한두 알 먹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속적인 두통은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니었다.
“......!”
진맥을 하던 윤도의 신경이 짜릿하게 곤두섰다. 머리 쪽 맥이 고르지 못했다. 하지만 위급한 상황은 아니다. 아니... 이제 보니 과거의 신호였다.
“혹시 일이 년 전 쯤에 뇌질환을 앓지 않았습니까?”
“......!”
그 말에 몇 사람의 호흡이 멈췄다. 당사자인 박 기사와 장 박사, 그리고 이 회장이었다.
“두통에 뇌질환이라니? 너무 질러가는 거 아니신가?”
장 박사가 슬쩍 물타기에 나섰다.
“머리 혈 중에서 몇 가지를 체크해 보았는데 뇌동맥류 혈자리가 고르지 못합니다. 본래 두통이라는 게 녹내장이나 기타 뇌질환의 신호탄이기도 한데 뇌지주막하 쪽에 가까운 혈자리가 다소 불안한 것으로 보아 그 쪽 질환이 의심되기에...”
“뇌지주막하 출혈이 있었다는 건가?”
“진맥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윤도가 박 기사를 보았다. 기사는 뭐라 답하지 못하고 장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웃음소리는 이 회장에게서 터져나왔다.
“와하하핫!”
윤도가 이 회장을 돌아보았다.
“장 박사님이 채 선생 실력이 궁금했었나 봅니다. 박 기사는 뇌동맥류 맞습니다. 2년 전에 서울에 있는 장 박사님 한의원에서 진단을 받아 수술을 했었지요.”
“......”
어리둥절해 하는 윤도를 향해 장 박사가 다가왔다.
“굉장하군. 진맥으로 뇌질환을 발견하다니. 맥으로 그것까지 가능하단 말인가?”
“뇌동맥류 외에 시신경 부근의 혈자리도 다소 원활하지 않습니다. 안구가 뻑뻑한 쪽의 머리가 아프시죠?”
윤도가 기사에게 확인했다.
“맞습니다. 그래서 편두통인 줄 알고 편두통 약을 먹고 있습니다.”
“나중에 지소에 한 번 들르세요. 침을 놔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박 기사가 반색을 했다.
자리를 잡자 차가 홍삼 절편이 나왔다. 좋은 일에 쓰려고 아끼고 아꼈던 차라고 했다. 향이 정말 좋았다. 그런데 홍삼을 우물거리던 이 회장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치아가 좋지 않으시군.’
한의사 아니랄까봐 그런 것만 눈에 보였다.
“이가 안 좋으십니까?”윤도가 슬쩍 물었다.
“아, 예... 발치하고 의치를 넣었는데 잇몸 뼈가 약해서 아직 임플란트를 못 하고 뼈 이식 중이라...”
이 회장이 입맛을 다셨다. 재벌도 병은 있다. 나이 듦에 따라 약해지는 이빨 역시 피할 수 없는 일의 하나였다.
“채 선생 이거 말이야...”
몇 모금 차를 넘기던 장 박사가 약재를 풀어놓았다. 약재는 정신질환에 쓰는 탕약의 재료들이었다.
“평심방 아시지?”
“마음을 안정시키는 탕약 아닙니까?”
“그걸 기본으로 대조탕과 주사안신환의 약재를 적량 배합한 것이네. 부용의 빠른 회복을 위해 일일이 따로 법제해서 준비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 박사가 재료 한 줌을 쥐어보였다.
“......”
윤도의 시선이 약재에 꽂혔다. 자동분석기가 가동되었다. 윤도는 약재 중에서 숙지황을 한 줌 들어냈다.
“뭐가 잘못 되었나?”
장 박사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건 아니지만 숙지황의 약성이 다소 변질된 듯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법제 때 부주의해서 구리에 닿은 게 아닌가합니다만.”
“허어!”
윤도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장백교가 무릎을 쳤다. 법제란 약의 효과를 질병에 맞춰 변화, 가공하는 것을 말한다. 지황은 법제할 때 구리를 피해야할 약초의 하나였다.
“법제도 잘 아는가?”
“다른 건 몰라도 구리를 피해야 하는 지황과 하수오, 철을 피해야 하는 인삼, 맥문동, 납을 피해야 하는 모과, 뽕나무 겨우살이 등은 알고 있습니다.”
“더 해보시게.”
“이 약재의 일부는 술에 넣었다가 볶았습니다. 이는 부용 씨의 질병이 머리와 가슴에 있으니 약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죠. 먼 과거에는 어린 아이의 소변에 담갔다가 쓰기도 했던 것으로 압니다.”
“회장님!”
장 박사의 시선이 이 회장에게 건너갔다.
“기가 막히군요.”
이 회장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은 두 사람이 합작한 음모였다. 박 기사를 내세워 뇌질환을 확인한 것도, 일부러 나쁜 약재를 섞어놓고 윤도의 약재 보는 기량을 확인한 것도...
“자수하네. 채 선생 같은 기재(奇才)를 보니 늙은이의 의심병이 도졌다네. 듣도 보도 못한 섬에서 하늘이 내린 명의라니? 해서 채 선생 실력을 확인한 거라네. 한의로서의 기본은 제대로 갖춘 것인지. 갖췄다면 그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
“괜찮습니다. 저는 아직 초짜인 걸요.”
윤도가 웃었다.
“환자에 맞춤한 탕제와 침술... 거기에 더해 박 기사의 병력을 꿰고 약재 보는 눈까지 정확하니 할 말이 없군. 침술의 마지막 대가로 불리던 양주동 선생까지 울고 갈 실력이 아닌가?”
“감히 그 분과 비교가 되니 낯이 뜨겁습니다.”
“회장님, 장담하건대 이 젊은 한의사는 명의의 재림이 분명합니다. 이 정도라면 능히 편작이나 화타에도 견주어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장 박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장 박사님이 아니라고 해도 저는 채 선생을 믿을 생각입니다. 죽은 아들을 살렸고 딸의 불치병까지 고쳐주었는데 어떻게 믿지 않는단 말입니까?”
“제 말은 이 실력이 우연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럼 속내나 밝히시죠. 보아하니 하실 말씀이 있는 거 같은데?”
“아이고, 역시 회장님 눈은 피할 수가 없군요. 회장님이 후원하시는 서울한방의료원 건립 말입니다. 채 선생 도움 한 번 받으면 어떨까요?”
‘서울한방의료원?’
그 단어에 윤도가 반응했다. 졸업반 무렵에 들었던 말이었다. 대한민국 굴지의 재벌회사가 한방의 재도약을 위해 설립을 추진 중이라고 들었다. 그 진원이 태산전자인 모양이었다.
“어쩌시려고?”
“해당부처 차관과 국장이 공연히 인가에 제동을 걸고 있지 않습니까?”
“그 쪽이 요구하는 부분을 보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 단순히 사업목적이나 입지, 환경평가에 관한 딴죽이 아닙니다.”
“그럼?”
“제가 판단하기로는... 해외환자 유치 등의 슬로건에 대한 태클 같습니다. 한방병원이 그렇게까지 나갈 필요가 있냐는 거죠. 아무래도 당해부처에 약사와 의사들이 주로 포진하다 보니 한의학 정책에 대해 다소 소극적인 면이...”
“어쩌시게요?”
“그런 판단에는 아마도 한방의 국제화가 시기상조거나 역량부족이라는 생각이 깔려있을 터이니 한방에도 이런 인재가 있다, 한방병원이 건립되고 활성화되면 이런 인재들이 더 많이 배출되어 국민보건과 건강제고에 도움이 된다는 걸 보여주자는 거죠. 일종의 무력시위랄까요?”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이 회장의 시선이 윤도에게 향했다. 장 박사의 눈빛도 함께 따라왔다.
“채 선생.”
장 박사가 숙연하게 본론을 펼쳤다.
“예.”
“서울한방의료원이라고 들어본 적 있나?”
“주워듣기는 했습니다.”
“여기 이 회장께서 이 늙은이를 내세워 건립을 추진 중이시라네. 원래는 양주동 박사가 할 일을 그 양반이 일찍 죽는 바람에 내가 떠안았지.”
“예...”
“하지만 건립과정이 다소 난항일세. 좀 도와주시겠나?”
“저 같은 게 힘이 되겠습니까? 겨우 공보의 신분인데...”
“능력은 공보의 수준이 아니라네. 아니, 어쩌면 약관의 공보의이기에 더 극적일 수도 있지.”
“예?”
“수십 년 경륜도 아닌 낙도의 20대 공보의... 그런데도 기막힌 의술을 가지고 있다면 더 큰 어필이 되지 않겠나?”
“......”
“번거롭게 생각할 필요 없네. 한방을 잘 모르는 실무 고관들에게 한의학의 진가를 한 번 보여주면 되는 거야. 우리 한의학 수준이 이 정도라오. 아까 말한 대로 일종의 무력시위지.”
“......”
“설령 뜻대로 안 된다고 해도 한의학의 심오함을 보여줄 수 있고.”
“......”
“한 번 해보시겠나?”
“......”
“채 선생.”
“복잡한 건 모르겠고 그저 진료를 보는 일이라면 해보겠습니다.”
윤도가 답했다. 서울한방의료원을 떠나 의료정책에는 다소 불만이 있었다. 한국의 보건의료정책에 있어 한의사가 찬밥 대우를 받는 기분 때문이었다.
“어이쿠, 고맙네.”
장 박사가 좋아했다.
“허어, 우리 박사님이 단단히 반하신 모양이군요. 웬만한 젊은 한의사는 쳐다도 안 보는 분이 초면에 들이대시는 건 처음입니다.”
“모처럼 큰 재목을 봤더니 마음이 급해서 그러지 않습니까? 내가 헛살았습니다. 대한민국 한의계를 대표한다는 주제에 이런 재목을 몰랐다니.”
장 박사가 또 웃었다.
좋은 자리의 좋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윤도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채 선생.”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 이 회장 시선이 건너왔다.
“네, 회장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하겠소?”
“의사로써의 사명을 다한 것 뿐입니다.”
“그렇지 않소. 게다가 서울한방의료원 일까지 신세를 지게 생겼으니 어떻게든 마음의 표시를 해야겠어요.”
“저는...”
“원하는 근무지역이 있으면 옮겨줄 수도 있어요. 그 정도 파워는 있습니다.”
“그건 괜찮습니다.”
“차가 없다고 들었는데?”
“없는 건 아니고 서울에 두고 왔습니다.”
“마음 같아서야 아담한 요트라도 한 대 선물하고 싶습니다만...”
“정말 괜찮습니다. 다만, 정히 마음이 쓰이신다면 보건 지소의 냉난방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충분치 않아 환자들이 불편해 해서요.”
“고작 그 것 뿐이란 말입니까?”
“예...”
“끄응... 이것 참...”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윤도가 일어섰다. 박 기사가 벤츠 문을 열어주었지만 이번에는 사양했다. 이제는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선생님, 이거 들고 가세요.”
부용이 따라 나와 랜턴을 쥐어주었다.
“고마워요.”
“제가 드릴 말씀이에요. 조심해 가세요.”
부용은 윤도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딱 필요한 만큼의 배려만 하는 여자. 과연 어린 나이에 세계무대를 활보하던 그릇다웠다.
밤길을 걸었다. 멀리 등대 불이 보였다. 시원하게 바다를 비추고 있다. 윤도는 랜턴으로 길을 비췄다. 바다의 등대처럼 랜턴은, 윤도의 가이드가 되고 있었다.
“진웅아, 부용아.”
윤도가 멀어지자 이 회장이 진웅과 부용을 불렀다.
“채 선생 말이야.”
“예.”
“보답할 방법을 생각해 봤느냐?”
“의술이 출중하니 공보의 마치는대로 본사 의무실에 스카우트 하면 어떨까요? 최고 대우로 말입니다.”
이진웅이 의견을 냈다.
“최고 대우?”
“의사 친구들에게 물어봤는데 연봉 5억에 종신계약이면...”
“장 박사도 인정하는 대붕을 네 평 의무실에 가둘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
“아버지 말씀이 옳아요. 채 선생님은 대붕이에요. 날개를 다 펴면 어디까지 날지 알 수 없지요.”
부용이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 있느냐?”
“채 선생님이 아직 공보의예요. 그러니 서두를 건 없다고 생각해요. 저 곧 복귀할 거니까 머리가 제대로 돌기 시작하면 대붕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방향으로 강구해볼 게요.”
“알았다. 그럼 큰 그림은 네가 그리도록 하고 당장은 성의표시라도 하거라.”
이 회장이 마무리를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