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265)

눈 속에 든 조종사의 꿈-2

“제가...”

윤도의 위엄에 눌린 어머니, 그제야 심하게 오버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어깨를 떨며 뒷말을 이었다.

“나가있겠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탁!

발소리에 이어 문소리가 들렸다.

“죄송해요.”

세희도 사과를 전해왔다. 탓하지 않았다. 섬 보건지소라는 게 그랬다. 때로는 안에서 고구마 파티도 하고 때로는 옥수수 파티도 했다. 아무 때나 문을 열고 들어와 침 좀 놔줘 하는 게 여기 방식이었다. 그러니 혼자 뿐인 세희가 돌발까지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가볍게 마음을 전하고 환자에게 돌아섰다.

“많이 아프니?”

“이제 참을만 해요. 아까는 갑자기 눈알이 터질 것 같아서...”

“걱정 마. 좋은 징조니까.”

“네.”

“그럼 계속할까? 이제 거의 다 왔거든?”

“네.”

환자 손에 힘이 빽빽해 보였다.

“힘 빼. 편안하게...”

그 말과 함께 환자의 눈초리. 정명혈로 장침이 들어갔다. 마지막 정리에 들어간 것이다. 원래는 소동 후에 혈자리를 찾는 게 어려운 일. 하지만 윤도의 손가락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 손이 현종혈로 옮겨갔다.

장침은 부드럽게 혈을 뚫었다. 손끝에 감각을 실어 혈자리를 조절했다. 정리된 혈자리는 시신경에 작용해 활기를 주었다. 몇 혈자리가 조화를 이루자 뒷일은 쉬웠다. 간에서 올라온 힘과 영약 요초의 약성. 그것들이 엉기고 꼬인 시신경 다발에 준 탄성 때문이었다.

한 순간, 꼬인 시신경 다발이 고요히 숨을 죽였다. 그러다 동시에 빛을 번쩍이더니 꿀럭 요동을 쳤다.

“......!”

침 끝에 집중하던 윤도 감각에 불똥이 튀었다.

시신경의 혈자리...

그 혈자리...

눌어붙은 시신경 다발 몇 가닥이 자극을 받고 있었다. 미세하지만 분명 그랬다.

첫날 치료는 여기까지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진경태처럼 밤을 새우고 싶었지만 무리할 일이 아니었다.

“되는 거야?”

퇴근 시간에 창승이 물었다.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좋지 않겠습니까?”

가벼운 인사로 대답했다.

다음 날은 오전 오후로 나눠 침을 놓았다. 섬 마을 환자들 진료가 끝나는 짜투리를 투자한 것이다. 처음과는 시도를 달리했다. 영약을 쓰지 않고 시침을 한 것이다. 이건 침술에 대한 확인차였다. 어떤 상황에서는 영약이 없이 환자를 만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영약 없이 침으로만 승부하고 싶은 윤도였다. 하지만 구할 수 있다면, 영약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오전 침에는 큰 반응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후에는 침만으로 반응을 보았다. 딱 두 번이었지만 시신경의 신호가 있었다. 다만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장침만 쓰면 영약을 같이 쓰는 것보다는 효과가 약하다.’

장침만으로는 안 되네?

그보다는 백 배 나았다.

‘색맹, 역시 쉽지 않군.’

조바심 이는 마음을 달래며 침을 관리했다. 기와가루로 비비고 배추기름으로 닦았다. 마무리는 지소에 있는 멸균기 도움을 받았다. 15분 들어갔다 나오면 완전무균 상태가 되는 것이다.

3일차 침이 들어갔다. 남은 요초를 마져 눈에 떨구었다. 이제 간경은 공략하지 않았다. 전투로 치자면 군량미는 넉넉했다. 색맹이라는 견고한 성만 함락하면 되는 것이다.

난공불락.

사실 처음부터 그 단어 쪽이었다. 색맹에 도전한다는 자체가 무모했다. 하지만 이 환자의 경우는 유전적이 아니라 후천적인 색맹. 거기에 산해경의 영약. 두 가지에 기대 희망을 걸었지만 역부족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냥 비관적인 건 아니었다. 환자의 시야가 좋아졌다. 그건 준기의 말로 확인되었다. 시야가 시원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본전 이상이었다.

정명혈.

현종혈...

두 혈자리에 장침을 넣었다. 처음처럼 집중했다. 몇 번 입질만 하고 만 시신경. 그 기적의 요동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응?’

집중에 집중을 더 하던 순간이었다. 침을 돌리는 손가락 끝으로 여린 탄성 하나가 전해왔다. 착각일까? 같은 방향으로 침의 자극을 넣었다.

팅!

다시 울림이 왔다. 미세하지만 워낙 집중한 까닭에 대뇌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조금 더.

조금 더.

침을 돌리며 혈자리의 반응을 조절했다. 그러자 마침내 시신경과 시세포 다발이 꿀럭 명쾌한 탄성으로 답했다. 그러자 팅 하는 느낌과 함께 일체의 요동이 시작되었다.

‘맙소사!’

윤도는 숨을 쉬지 못했다. 침을 잡은 어깨가 부서질 듯 떨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기어이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꿀럭꿀럭!

망막 시세포인 원추세포 다발에 탄력이 들어갔다. 색을 인식하는 적추체 녹추체 청추체들이었다. 사람의 망막에는 대략 700만 개의 원추세포가 존재한다. 그 세 종류의 세포다발에 탄력이 도는 것이다. 특별히 적색계열의 적추체가 그랬다.

세포다발은 서로. 부드럽게 등을 다투더니 가닥 가닥 분리가 되었다. 녹추체와 섞여있던 적추체가 원상태가 되었다. 그러자 탄력도 멈췄다. 원추세포는 이제 정상이었다.

색상의 원상복귀였다. 사고 직전의 원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고유의 빛을 읽게 된 것이다.

'유전적' 색맹이 아닌 덕을 보았다. 후천적인 이유로 몇 가닥이 눌러붙은 시신경이었기에. 그 분리로 병인을 제거하는 기적을 끌어낸 것이다.

‘오...’

윤도의 의식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야말로 기절할 지경이었다.

“선생님.”

세희가 윤도를 불렀다. 윤도는 듣지 못했다.

“선생님!”

또 한 번 부르고서야 윤도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후우!’

숨을 고르고 환자를 바라보았다. 비처럼 쏟아지던 환자의 눈물이 멈췄다. 눈자위 주변도 한결 편안해 보였다.

“은 선생님!”

이번에는 윤도가 세희를 불렀다.

“네?”

“색맹 테스트 책 좀요.”

윤도가 COLOR VISION TEST 책자를 준기 앞에 펼쳤다.

“읽어볼래?”

“5.”

준기가 숫자를 읽어냈다. 틀리지 않았다.

“이건요?”

“8.”

또 맞췄다.

“이건 몇이죠?”

“9. 저 맞았어요?”

숫자를 읽던 준기가 고개를 들었다.

“맞았어. 다 맞았어.”

세희가 소리쳤다.

‘대박!’

윤도도 혼자 주먹을 그러쥐었다.

“선생님...”

준기가 윤도를 바라보았다.

“아아, 잠깐... 침을 뽑아야하거든.”

감격을 억누른 윤도가 침을 뽑았다. 마지막 침을 뽑아내기 무섭게 준기의 고함이 터져나갔다.

“엄마, 나 숫자 안 틀리고 읽었어. 나 이제 공사 갈 수 있어요.”

“준기야!”

소리를 들은 어머니가 빼꼼 문을 열었다. 윤도의 눈치를 보았다. 첫날 일을 기억하는 그녀였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윤도의 허락이 있자 어머니는 한달음에 아들 앞으로 뛰었다.

“이것 봐. 16, 74, 42, 12, 6... 맞지? 맞지 엄마?”

준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색맹검사책자를 읽어냈다.

“오, 하느님!”

어머니는 준기 무릎에 얼굴을 대고 무너졌다. 엊그제는 아들 눈에서 나던 눈물홍수가 어머니 얼굴로 옮겨갔다. 그녀는 엄청난 눈물을 쏟고서야 겨우 눈물을 그쳤다. 그녀가 돌아보자 윤도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고맙습니다.”

인사는 어머니와 윤도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나왔다. 준기 어머니야 당연한 인사지만 윤도는 달랐다. 산해경의 요초 약효를 확인하게 해준데 대한 인사였다. 경우야 어쨌든 색맹을 넘으며 안구의 혈자리 공부를 깊어지게 해준데 대한 인사였다.

도를 넘은 진료라서 내심 황당하기도 했던 윤도. 그러나 그 또한 윤도의 청낭서에 보물로 자리매김할 경험이었다.

이렇게 한 사례를 더 경험했다. 이렇게 한 뼘 더 자랐다. 아직 임상사례에 대해 배가 고프지만, 이 순간만은 마음 껏 뿌듯해질 수 있는 윤도였다.

“대박!”

창승도 인증의 엄지를 꼽아주었다. 믿기지 않지만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선생님...”

나가는 배편이 들어오자 준기가 윤도 앞에 단정히 섰다.

“이건 보너스.”

윤도가 내관혈자리에 쌀알을 대고 밴드를 붙여주었다. 간편 멀미약이었다.

“이러면 멀미 안 해요?”

“공부하다 틈나면 꼭꼭 눌러줘. 그럼 멀미 안녕, 하게 될 거야. 멀미하면 비행기 못 탈 걸?”

“와아. 그것도 제 고민 중 하나였는데...”

“공사 꼭 가고.”

“그럼요. 조종사 되어서 나중에 선생님께 비행기 태워드릴 게요.”

“음, 기왕이면 큰 비행기면 더 좋겠는데? 2층짜리...”

“문제없어요.”

“잘 할 거야. 나중에 합격하면 연락하렴.”

“네, 선생님.”

준기가 웃었다. 색맹기가 사라진 눈은 더 없이 청량해 보였다.

“선생님, 이거 저희 성의예요.”

엄마가 봉투를 쥐어주었다. 안에 든 돈은 천만 원이었다. 정기적금을 탄 돈이라고 했다.

“준기 학자금으로 쓰세요. 그리고 꼭 공사 보내세요.”

윤도가 봉투를 돌려주었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준기 집안 형편을 아는 까닭이었다. 엄마는 300만원을 기어이 윤도 가운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눈물까지 터트리며 받아달라고 애원하는 바람에 내치지 못했다.

뿌우웅!

배가 바다로 나갔다.

“선생님, 죄송했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복 받으실 거예요!”

뱃전에서 어머니가 손나팔로 소리쳤다. 콧등이 시큰했다.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무대뽀 돌격... 어머니도 윤도도 함께 무모했지만 최고의 결과를 낳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두 모자의 얼굴은 오래오래 윤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

저녁 무렵 노을이 진했다. 창승은 몸살을 호소하며 일찍 드러누웠다. 장침으로 도와줄까 했지만 그 역시 의사. 자신이 직접 약을 지어먹었으니 참견하지 않았다.

윤도는 숙소에서 산해경을 뒤지고 있었다. 요초 때문이었다. 색맹을 잡는 영약이니 더 확보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회가 오면 유전적으로 인한 색맹에도 통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요초를 찾은 자리를 중심으로 사방을 뒤졌다. 보이지 않았다.

‘옛날 진짜 산삼처럼 요초도 필요한 사람에게만 책이 허락하는 것일까?’

가만히 책을 덮었다.

색맹 혈자리를 정리하다 경맥 공부를 더했다. 경맥 그림은 인체에서 세로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거기서 나온 난맥은 그물처럼 퍼졌다. 12경맥과 12경별, 기경8맥 등도 도로를 이루며 펼쳐졌다. 침술과 경락은 불가분의 관계다. 하나하나 질병 혈자리들을 집어갈 때 세희가 문을 두드렸다.

“채 선생님.”

“왜요?”

윤도가 문을 열어주었다.

“응급환자가 있대요.”

“응급환자요?”

“저쪽 무인도 바다에서 낚시하던 배라는데 낚시 중에 한 사람이 쓰러졌다고...”

“지소장님은요?”

“보니까 약 먹고 잠이 들었어요. 그리고... 지소장님 있어도 채 선생님이 가야할 거 같아요.”

“예?”

“선생님 소문을 들었나 봐요. 선생님을 콕 집어서 찾더라고요.”

“알았어요. 일단 제가 가볼 테니까 여차하면 헬기에 연락해주세요.”

윤도가 침통을 들고 뛰었다.

“이쪽입니다.”

지소 앞에 있던 40대 남자가 소리쳤다. 척 봐도 탄탄한 체격이었다. 그의 손은 여객선이 들어오는 부두가 아니라 작은 어선들이 정박한 뒤쪽 부두를 가리켰다.

“여기요.”

남자가 먼저 배에 올랐다. 배는 작은 낚시배였다.

“빨리 좀 부탁합니다.”

남자가 선원실을 가리켰다. 거기 노년의 남자가 보였다. 어디를 다쳤는지 얼굴 쪽이 피투성이였다.

“어떻게 된 거죠?”

윤도가 남자에게 물었다.

“저쪽 섬 근처에서 낚시하다가 배가 뭐에 걸렸는데 그때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처음에는 일어서시더니 얼마 후에 이렇게...”

설명을 들으며 맥을 짚었다. 진맥으로 보아 뇌진탕에 의한 의식상실이었다.

“심각한가요?”

“다행히 심하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응급으로 발바닥의 용천혈부터 장침을 넣었다. 코피를 지혈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용천혈은 생명과 기운이 샘처럼 솟는다는 뜻이니 거길 막자 코피도 기세가 죽었다.

“모자하고 선글라스 벗겨주세요. 머리에 침을 놔야겠습니다.”

“안 벗으면 안 되나요?”

남자가 주저했다.

“왜요? 문제가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이 분이 눈병이 있어서...”

“눈병이라고요?”

“예...”

남자가 얼버무렸다. 거짓말이라는 건 윤도가 먼저 알았다. 진맥에는 안구질환이 없었다. 다시 한 번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뭔가를 감추려는 듯 행동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럼 일단 모자만이라도 벗기세요.”

“예.”

구급혈인 백회혈에 침을 놓을 생각이었다. 백회혈은 원래 백 가지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만능경혈로도 불린다. 이 환자의 경우에는 머리의 백회혈에 더불어 그 주변을 네 겹으로 포위(?)하고 있는 사신총혈을 잡으면 의식이 돌아올 것 같았다.

그런데 이 환자, 특이하게도 신장의 기운이 바닥이었다. 막간의 시간 동안 한 번 더 확인을 했다. 지나친 정기 발산이 원인이다.

‘정기 남용이면 섹스인데...’

그때 모자가 벗겨지며 환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선글라스 때문에 확실하지 않았다.

장침을 첫 사신총혈에 넣는 것을 시작으로 응급처치를 취했다. 그 순간, 배가 출렁 흔들렸다.

“잠깐만요.”

남자가 밖을 살피러 나갔다. 배는 몇 번 더 요동을 쳤다. 환자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환자 밑에 담요 한 장만 달랑 깔린 까닭이었다. 그 바람에 선글라스가 밀렸다. 본능적으로 환자 옷깃을 잡은 윤도, 주춤 손길이 멈췄다.

“......!”

이 환자... 확실히 본 적이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궁금증에 검색을 했다. 화면을 확인한 윤도의 솜털이 삐쭉 각을 이루며 솟구쳤다.

<성동복>

그 수배범이었다. 천문학적인 비리와 소녀성애로 지탄을 받던 인간. 외국 도피를 했다더니 갈매도에 가까운 무인도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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