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265)

공로 제대를 명함-2

소집해제!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군청에서도 인증을 해주었다.

“위에서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특별소집해제 맞습니다. 지난번에 여객선 참사 때 일곱 명의 목숨을 구한 것과 중요범인 검거 공로라고 합니다.”

“......”

“월요일자 해제니 오늘까지만 근무하시면 됩니다.”

그야 말로 전격 소집해제였다.

“......!”

지소 안에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보건소 이동으로 좋아하던 창승은 어이상실 표정이었다. 그 적막은 세희가 깨주었다.

“축하해요, 채 선생님!”

“저도 뭐가 뭔지...”

“뭐가요? 선생님 그럴 자격 있어요. 사람 일곱 명 구하고 중요 범인 잡는 게 아무나 하는 일인가요? 갑작스러운 일이라 좀 섭섭하기는 하지만...”

“......”

“우리 송별회 거하게 해야겠네요? 그렇죠? 지소장님?”

세희가 창승을 끌어들였다.

“그렇네. 축하해, 채 선생.”

마음을 다잡은 창승이 손을 내밀었다.

“지소장님...”

“지소장은 개뿔... 이제 채 선생이 제대자니 나보다 위야.”

“......”

“악수 안 해?”

“아, 예...”

그제야 창승의 손을 잡는 윤도.

“하긴 은 선생님 말이 맞아. 현역 사병들도 누구 목숨 일곱 명 쯤 살리면 고향 앞으로, 부모님 앞으로 해줄 거야. 공보의라고 그런 혜택 받지말라는 법 없잖아?”

“......”

“아, 이거 아쉽네. 나도 그때 여객선에 같이 타고 있었으면 증정품으로 엮여서 소집해제 되는 건데...”

“지소장님은...”

“그동안 나 때문에 서운했던 거 다 잊고.”

“그럼요.”

“채 선생 덕분에 한의사하고 침술 다시 봤어. 이거 진심으로 진심이야.”

“고맙습니다.”

“송별회 언제 할까? 내일 아침 배로 뜰 거야?”

“글쎄요, 느닷없는 일이라 정신이 없어서... 오늘 밤에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한 잔?”

“그러죠.”

꿈 속 일처럼 족쇄가 시원하게 풀린 날, 흥분된 분위기가 정리되어 갈 때였다. 지소 문이 열리며 이장이 들어섰다. 어촌계장도 함께 였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래? 채 선생이 제대를 한다고?”

소식 한 번 빨랐다. 군 행정전산망에 뜬 인사이동이 이 둘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채 선생, 그게 사실이야?”

어촌계장이 확인에 나섰다.

“그게... 그렇다네요.”

“아이고, 그럼 안 되는데. 우리 갈매도 주민들 건강은 누가 지키나?”

“못 가. 채 선생 여기다 한의원내라고. 땅은 우리가 공짜로 제공할 테니까.”

옆에 있던 이장은 손부터 내저었다.

“사람, 그걸 말이라고 하나? 우리 갈매도 주민이 얼마나 된다고?”

“아, 갈매도 주민만 있어? 공보의 해제되서 한의원 차리면 아무나 받을 수 있잖아? 그럼 우리 섬 관광객도 훌쩍 늘 테고...”

“그건 그렇지만...”

어촌계장은 울상을 한 채 윤도 눈치를 살폈다.

<갈매도 한의원.>

푸하하!

아쉬운 마음에 나온 말이지만 그들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너무 걱정마세요. 가는 날까지 제가 진료 봐드릴 거고요, 제대해도 종종 내려오겠습니다.”

“그거 정말이지?”

이장이 되물었다.

“각서라도 쓸까요?”

“아이고, 가는 채 선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가서 방송부터 해야겠네. 내일 어때? 토요일 일요일을 다 문 여는 건 말도 안 되고...”

이장이 윤도에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이틀 다 문 열 게요.”

윤도가 웃었다.

“그럼 그렇게 방송합니다.”

“네.”

“그럼 나 먼저 가네.”

이장은 바람처럼 내달렸다.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섬마을 방송이 나왔다.

“아아, 이장입니다. 중대사안 발표니까 일 손 잠시 멈추시고 잘들 들으시기 바랍니다. 큼큼.”

확성기를 타고 이장의 목소리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우리 갈매도 보건지소 채윤도 선생이 지난번 여객선 인명구조와 수천억 해먹은 악질 범인 검거한 공로로다가 그 뭣이냐 소집해제... 그러니까 제대를 하게 되었다 이겁니다. 떠나기 전에 우리 주민을 위해 내일하고 모레, 연속으로다가 진료를 봐주신다니 몸이 불편하신 분은 채 선생의 진료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 기회지만 채 선생도 제대 준비를 해야 하니 조금 아픈 분은 참으시고 많이 아픈 사람만 지소로 가면 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이장이 말씀드립니다...”

확성기의 위력은 굉장했다. 그새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뭔 소리여? 채 선상이 제대를 하다니? 그럼 인자 섬을 뜨는 것이여?”

“화이고, 야단 낮네. 그럼 우리는 어쩌누?”

할머니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아무래도 선생님이 한 마디 해야겠는 데요? 자칫하면 폭동 일어나겠어요?”

세희가 윤도 등을 밀었다.

“어르신들, 너무 걱정마세요. 제가 내일하고 모레, 이틀 동안 어르신들 아픈 데 쫙 봐드릴 거고요 새로 오시는 한의사 선생님도 침 잘 놓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게 말이 되나? 내 팔십 평생에 채 선생 같은 침쟁이는 처음인데...”

“내 말이. 누가 우리 채 선생만큼 침을 놓겠어. 죽은 허준이 살아와도 안 돼.”

그래도 우려가 가시지 않자 윤도가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을 차례로 잡으며 안심 시켰다. 그제야 고조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송별식은 일요일로 미뤄야겠는 데요?”

노인들이 멀어지자 윤도가 말했다.

“그런 거 같네.”

창승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은 선생님, 지소 키 저 좀 주세요.”

윤도가 세희를 바라보았다.

“못 줘요.”

“네?”

“휴일 날 문 열면 의료봉사인데 그 좋은 거 혼자만 하시려고요? 나도 좋은 일 좀 해야겠으니 문은 내가 열어줄 게요.”

“은 선생님...”

“누가 알아요? 저도 그 공로로 다음번에 승진할지?”

“고맙습니다.”

“아아, 그렇다면 나도 동참이야.”

거기서 창승도 손을 들었다.

“지소장님도요?”

“지소장은 무슨. 그동안 채 선생에게 소원하게 했던 거 사죄하는 뜻으로 주말 동안 한의사 보조로 일할 테니 그런 줄 알라고.”

“지소장님...”

“왜? 나 자격 없어?”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유종의 미 한 번 거둬보자고. 내일하고 모레 이틀은 채 선생이 여기 지소장이야.”

창승이 쿨하게 쐐기를 박았다. 그 한 마디에 윤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미운 정 고운 정이 잔뜩 박힌 이창승. 그의 마음과 인술도 결코 야박하진 않았다.

제대에 더해 얻게 된 창승의 전폭적 지지. 값진 보석이었다.

“채 선생...”

사택 앞에도 할머니 행렬이 있었다. 지소에서 못 본 얼굴들이었다. 그녀들도 소문을 따라 윤도에게 달려왔다.

“제대한다고?”

할머니들은 눈물부터 글썽거렸다.

“예...”

“아이고, 인자 누구한테 침을 맞나.”

할머니들의 걱정은 한결 같았다.

“할망구가 노망이 났나? 그럼 채 선생은 여기 갈매도에서 평생 썩어? 지 손자 제대할 때는 어깨춤을 추더니...”

“누가 몰라? 그동안 채 선생 때문에 몸이 호강을 했으니까 그러지.”

“잔소리 말고 가져온 거나 줘. 인자 그거 줄 기회도 별로 없으니.”

안경 할머니가 윽박지르자 지팡이 할머니가 봉지를 내밀었다.

“먹어. 우리 아우가 아까 물질해서 딴 건데 아주 실해.”

할머니가 내민 건 자연산 전복이었다. 많기도 했다. 오늘 딴 걸 다 쓸어온 모양이었다. 그걸 받아드니 콧날이 시큰했다.

딸깍!

사택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방 안에는 어둠이 소리 없이 들어와 있었다.

소집해제...

가만히 달력을 돌아보았다. 공보의도 제대날짜를 꼽는다. 사병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근무지가 결정되기 무섭게 기다리는 3년 후의 4월. 윤도 역시 그 날을 꼽고 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소집해제.

기다리던 제대다. 여객선 사고로 구한 일곱 명의 인명구조에 국기를 뒤흔든 범인 체포 공로.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의 지원이 있지 않고는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누굴까?

누가 도와준 걸까?

골똘한 결과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다.

첫째는 네티즌들이었다. 여객선 인명구조 보도 때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미성년 소녀들을 꼬드겨 소녀경 흉내를 내던 성동복 체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댓글들 중에는 공로제대를 추천한 사람들이 많았다. 다음은 부용이었다. 그녀도 그런 말을 했었다.

마지막은 장백교 박사에 닿았다.

“채 선생도 이동하게 될 걸세.”

분명 그 말을 했었다.

‘장 박사님...’

가능성이 높았다. 장박사를 생각하니 갈래가 태산전자 이 회장에게까지 넓어졌다. 이 회장이 뒤에서 도왔을까? 깊어가는 생각은 그쯤에서 거두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 일이었다.

‘이틀...’

윤도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항구 쪽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보였다. 처음에는 절망이었던 갈매도. 그러나 지금은 희망의 나날인 섬. 남은 이틀을 알뜰하게 마감하고 싶었다.

불을 켜고 산해경을 펼쳤다.

금요일 토요일.

그 두 밤 동안 섬 사람들에게 소용이 될 영약을 찾을 생각이었다. 신비경을 들이대는 그 눈빛은 산삼을 찾아 산으로 들어서는 약초꾼과 다르지 않았다.

뜻밖의 제대 통보를 받은 날, 윤도의 밤은 산해경 속에서 깊어갔다.

“......!”

산해경을 뒤지던 윤도가 잠시 신비경을 놓았다. 수많은 영약의 보고 산해경. 그러나 주어진 기회는 두 번 뿐. 그동안 조금씩 모은 약도 많지 않았다. 산해경이 영약의 보고지만 한 번에 대량을 허용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허탕을 칠 때도 있다.

섬 사람들을 생각했다. 대다수가 50대 이상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70이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은 생업에 종사한다. 움직일 수 있으면 일을 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진료 메모를 꺼내들었다. 세희가 적는 게 의료보험 청구와 업무보고를 위한 형식적인 거라면 윤도의 것은 진료경험을 위한 기록이었다. 그것들을 모아 나름의 통계를 냈다.

요통.

관절염.

두통.

손발저림.

숫자적으로 가장 많은 질환이었다. 그것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치매>

중국에 다녀온 후 세 명을 고쳤다. 치매는 이제 국가적인 과제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치매에 걸리는 건 아니지만 늙으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섬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과 달랐다. 누군가 치매에 걸려도 요양원에 보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치매환자와 함께 생활한다. 요양병원에 보낼 돈이 없는 경우도 있고, 자식이나 부부로써 보살피려는 경우도 있었다.

[거북의 일종인 선구-특이하게 머리에 털이 나있다. 그 털을 허리춤에 두르면 귀가 멀지 않는다.]

[탁이라는 풀은 눈이 어두워지는 걸 막는다.]

[여목-풀 종류로써 건망증이 사라진다.]

[식저-풀의 하나로써 근심을 치료한다.]

[네 발 달린 물고기-먹으면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

고민의 끝은 네 발 물고기에서 멈췄다. 노인들에게 다 필요한 약재지만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는 일. 치매방지 물고기를 잡아냈다. 오늘은 한 마리지만 내일 한 마리를 더해 달이면 여러 어르신들에게 도움이 될 일이었다.

물고기를 처방에 따라 손질해 냉장실에 넣고 침대에 들어갔다.

‘마무리를 잘 해야지.’

어쩌면 그게 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 윤도, 내일을 대비해 눈을 붙였다.

새출발을 향한 폭주!

“아아, 이장입니다.”

아침 7시부터 스피커가 섬의 잠을 깨웠다. 섬 사람들에게는 더 없는 명의인 윤도. 오늘과 내일이면 진료가 끝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섬 사람과 선원들은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섬 끝자락에 사는 할머니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치매에서 벗어난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손에는 새벽 부지런으로 찐 반건조 민어와 찐 감자 찬합이 바리바리 들려있었다.

“......!”

보건지소에 도착한 할머니는 맥이 탁 풀렸다. 일찌감치 와서 따뜻한 민어찜을 건네주려던 생각이 하얀 포말에 밀려 사라지고 있었다. 시계는 고작 아침 7시 20분. 하지만 갈매도 보건지소 앞에는 파도의 포말만큼 머리 하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 역시 저마다 마음을 담은 반찬과 음식을 내놓았다. 방금 푼 쌀밥도 있고 회도 있고, 게장과 더불어 펄떡거리는 돌돔도 있었다.

“어르신들...”

1착으로 도착한 할머니의 다리에 침을 놔주고 나온 윤도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짓말 좀 보태 나가는 배편으로 한가득이 될 것 같았다.

“미안, 괜찮다고 해도 어르신들이...”

지원 나온 세희와 창승이 정성 담긴 선물 앞에서 난색을 표했다. 윤도가 웃었다. 할머니들의 생떼(?)는 신도 당하지 못한다. 마음을 나눠주는 것이니 사양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윤도의 손에 신바람이 붙었다. 진료 침대는 창승의 내과진료실까지 빌렸다. 약이 필요한 사람은 창승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하고도 침이 동나 버렸다. 침대마다 환자가 누우니 가지고 있던 장침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자자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고 합시다.”

땡땡땡!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밥그릇 종이 울렸다. 윤도와 창승의 사택 아줌마들 작당이었다. 비교적 젊은 아줌마들을 규합하고는 식사를 준비한 것이다. 그래봤자 평균나이 50대였다.

지소에 와글거리는 환자들이 무려 60여 명. 그럼에도 음식은 부족하지 않았다. 졸지에 지소가 섬마을 잔치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자, 방금 건져올린 도미와 방어입니다. 잡어와 참치 새끼들도 섞었으니 입맛에 따라 드세요.”

쟁반만한 회접시 세 개를 내려놓은 건 차명균이었다.

“선장님.”

“뭐 솔직히 말하면 선생님 납치해서 가둬놓고 이 섬사람들만 진료하게 하고 싶지만 우리 어머니 말씀이 그러면 천벌을 받는다니... 쩝.”

“이건 언제 또 마련하셨대요?”

윤도가 회를 가리켰다.

“그깐 회가 대수입니까? 생선은 바다에 지천으로 널렸지만 선생님은 가면 그만인데...”

“......”

“아무튼 배 터지게 먹고 가쇼. 우리 어머니 말씀이 채 선생 대충 먹여서 보내면 국물도 없을 줄 알랍니다.”

차명균의 시선이 테이블 끝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선장의 어머니가 손을 들어보였다.

“지소장님이 많이 드세요. 오늘 괜히 저 때문에 생고생하시니...”

윤도가 회접시 하나를 창승에게 밀었다.

“무슨 소리야? 오늘에야 공보의된 보람 제대로 느끼고 있는데...”

“정말입니까?”

“그럼. 채 선생 아니었으면 이런 일이 있겠어? 솔직히 선배 의사들은 공보의가 마지막 안식년이라고도 하거든. 그래서 푹 쉬다가 가려고 했는데 이제부터 생각 좀 바꾸려고. 히포크라테스 선서하던 마음가짐으로.”

“말만 들어도 좋네요.”

“그런 의미에서 아?”

창승이 회 한 점을 집어 윤도에게 내밀었다. 어색하지만 받아먹었다. 그러자 어르신들의 벌떼 협공이 들어왔다.

“여기도 있어. 아!”

“내 것도, 아!”

**

다음 날에 이르자 장침 신공이 수월해졌다. 침이 필요한 사람들이 웬만큼 거쳐간 것이다. 윤도는 산해경의 치매처방을 섬 끝 할머니에게 주었다. 동생이 치매에 걸렸으니 가족력이 우려되었다. 특히 알츠하이머 치매의 경우 가족력이 있으면 발병 위험이 2배나 높아지는 질환이었다.

“나 이제 치매 걱정 안 해도 되는 겨?”

할머니가 덩실 어깨춤을 추었다. 소박하고 순박한 섬 사람들. 그들의 몸짓들이 소중한 갈피로 마음에 새겨졌다.

일요일 진료는 일찍 마감이 되었다.

뒷풀이는 어촌계장의 집에서 하게 되었다. 이장이 주민들과 합심해 지소 직원들을 납치(?)한 것이다. 납치에 쓰인 장비는 경운기였다. 들꽃을 꺾어 장식한 경운기는 그럴싸한 꽃마차가 되었다.

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어촌계장의 집에는 섬 유지(?)들이 죄다 모여들었다. 차명균 선장도 오고 섬에 근무하는 경찰관도 합류했다.

“채 선생님, 축하합니다.”

뜻밖의 손님들도 있었다. 군 공보의들이었다. 공보의 모임에서 얼굴을 익히고 있던 그들까지 축하차 파도를 넘어왔다.

온갖 명주가 나왔다. 저마다 집에 가보처럼 감춰둔 약술을 들고 온 것이다.

“이거이 우리 텃밭에서 30년 동안 피고 진 머위꽃과 대궁으로 만든 술이여. 한 잡솨봐.”

이장 사모님이 약술 항아리를 맥주잔에 들이부었다. 술맛이 담담하니 좋았다. 여러 술을 맛보았지만 과음은 하지 않았다. 아직도 윤도에게는 남은 과제가 있었다.

‘장백교 박사님...’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그걸 잊을리 없는 윤도였다.

또 하나는 300만원이었다. 색맹의 준기 엄마가 주고 간 돈이었다. 그 돈을 가지고 나갈 생각은 없었다. 슬그머니 따라나온 이장이 여섯 명의 명단과 통장계좌번호를 내주었다. 섬마을에서도 특히 살림이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그것까지 알 리 없는 윤도가 계좌번호를 부탁을 한 것이다. 이 섬에서 딴 과실은 이 섬에 다 베풀고 가려는 윤도였다.

“그런데 통장번호는 뭐에 쓰시려고...”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겠다는 분들이 있어서요. 섬에 정이 들었으니 작은 도움이나마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꼭 비밀로 해주세요.”

“화이고, 우리 채 선생이 생불이네 생불이야. 이런 줄도 모르고 처음에는 구린 대학 나온 한의사가 온다고... 웁!”

감정에 충실하던 이장, 헛말이 나오자 얼른 자기 입을 막았다.

“하핫!”

윤도가 웃었다. 이장도 따라 웃었다. 그거면 되었다. 윤도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뿌우웅!

월요일 아침, 첫 배의 뱃고동이 울렸다.

“잘 가시소.”

“꼭 댕겨가시소.”

어르신들은 부두를 메운 채 손을 흔들었다. 치맛자락을 잡고 눈물을 훔치는 할머니는 부지기수. 올 때는 삭막했지만 갈 때는 가슴이 벅차기만 했다.

“갈 게요.”

윤도가 세희에게 안녕을 고했다. 세희는 짬밥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그렁거렸다.

“아, 진짜... 내가 공보의 열 댓명을 보내도 안 울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엄마 같고, 어쩌면 누나 같았던 고참 간호사 세희. 그녀와 가벼운 포옹을 나누고 배에 올랐다. 그동안 초짜 한의사를 돌봐주고 치다꺼리해준 데 대한 인사였다.

“여름 휴가 되면 놀러 와요.”

이장과 어촌계장이 외쳤다.

“알겠습니다. 꼭 올 게요.”

뱃머리의 윤도도 두 손을 흔들었다. 그새 정이 든 갈매도. 하지만 외국도 아니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다시 올 수 있는 곳이었다.

배가 바다로 나오자 별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윤도에게는 그 역시 잊을 수 없는 하나의 기억. 부용의 얼굴이 떠오를 때 뱃소리가 가까워졌다.

“채 선생님.”

차명균과 그의 배였다. 그는 여객선과 나란히 달리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바다 잘 지켜주세요.”

윤도가 소리쳤다.

“이 바다는 내가 지킬 테니 선생님은 병자를 지켜주세요.”

“네.”

“대한민국 최고 명의가 되세요!”

채명균이 두 손을 흔들었다. 서서히 멀어지는 그가 한없이 듬직했다.

‘병자를 지키고 명의가 되라고?’

채명균의 외침이 갈매기 노래에 묻어왔다.

‘그러죠.’

윤도가 다짐했다. 이제 육지가 지척이었다.

빵빠앙!

항구에서 내리자 차량 경적이 울렸다. 기분 때문인지 살짝 멀미가 났다. 작은 군이지만 섬에 비하면 대도시였다. 차도 많고 사람도 많았다. 짐이 꽤 되었다. 한의학 서적 때문이었다.

빠아앙!

경적이 자꾸 울렸다. 그렇다고 서울처럼 차량이 엉기지는 않는 동네. 무슨 일일까 싶어 돌아보았다.

“......!”

돌아본 상태로 굳어버렸다. 별장의 박 기사였다. 그가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다.

“선생님!”

삐까번쩍한 차량 앞에서 손을 들어보이는 박 기사. 그의 뒤로 빛나는 배경이 되고 있는 건 시린 흰 빛의 스포츠카였다.

“기사님.”

“타세요.”

기사가 하얀 스포츠카를 가리켰다.

“예?”

“선생님 찹니다. 전에 선물한 건데 기억하십니까?”

“예?”

“피곤하실 테니까 태워서 서울까지 모셔다 드리라는 사모님 지시를 받았습니다. 차도 선생님도...”

서울로 돌아갔다는 별장 사모님. 그 분도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박 기사가 윤도 짐의 박스끈을 잡았다.

“기사님.”

윤도가 기사를 막았다.

“지난번에 선물 거절하신 거 압니다. 그때는 선생님 신분이 공보의라서 넘어가셨지만 이제 제대를 하셨으니 차를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

“부탁합니다. 거절하시면 저 이겁니다.”

기사가 한 손으로 목을 그어 보였다. 난감했다. 부용과 진웅을 구하고 받았던 선물. 그러나 너무 큰 부담이기에 별장에 두고 왔던 스포츠카 키...

“부탁합니다.”

박 기사가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제가 오늘 공보의 제대하는 거 아시고 온 거죠?”

“예...”

“그것 말고 다른 것도 알죠?”

“예?”

“제가 오늘 제대하게 되는 이유 말입니다.”

“그야 여객선 인명구조와 국기를 흔든 범인 검거 공로로...”

“제 생각에는 부용씨 남매 구조 공로인 것 같은 데요?”

“......!”

날카로운 질문에 박 기사가 움찔거렸다. 윤도는 날선 공세를 조금 더 깊이 밀어넣었다.

“회장님이 막후에서 힘을 쓴 건가요?”

“......”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그 차 타지 않을 겁니다.”

“어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박 기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뭐 정 그렇다면...”

윤도가 단호히 돌아섰다. 그 팔을 박 기사가 잡았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제야 고개를 돌리는 윤도.

“실은... 어휴...”

한 번 더 난감해하던 박 기사. 결국 뒷말을 이어놓고 말았다.

“부용 아가씨입니다.”

“예?”

“부용 아가씨가 적극 나서서 회장을 설득하고 회장님이 정부 요로에 건의를 하셔서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아니고 부용 씨라고요?”

“예.”“......!”

“어쨌든 알려드렸으니 타시죠. 서울 댁까지 모시겠습니다.”

“정말 부용 씨가...”

“생명의 은인 아닙니까?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오늘도 별장의 괴물로 괴성을 지르며 살고 있을 테니...”

“......”

“타세요.”

황당한 윤도의 등을 박 기사가 밀었다. 윤도는 얼떨결에 조수석에 앉고 말았다. 짐은 박기사가 실었다.

“그럼 출발합니다.”

부릉!

시동은 푸딩처럼 부드럽게 걸렸다.

“아직 안 됩니다.”

윤도가 핸들에 손을 올렸다.

“선생님, 방금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알았어요. 몇 군데 들렀다가 가야 합니다. 보건소장님께도 인사 드려야하고...”

“그런 거라면 문제 없습니다.”

“도움말을 주시던 한의원에도 가야 하고 지인도 만나야합니다.”

“그것도 문제 없습니다. 얼마든지.”

굳었던 박 기사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스포츠카는 잔잔한 파도처럼 편안하게 출발했다.

‘부용 씨...’

항구를 뒤로 하며 부용을 생각했다. 돌직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가능성은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중이 낮았던 이부용. 그녀가 공로 제대를 추진했다니...

“축하해요.”

보건소장은 사무적인 멘트로 윤도를 맞았다. 윤도네 공보의를 관리하는 행정과장과 팀장도 그랬다. 진료실의 의사 둘도 올라와 축하해 주었다.

공보의.

그들 입장에서는 어차피 오고 가는 사람들. 게다가 섬에서 근무하는 통에 겨우 얼굴이나 익힌 처지니 작별인사도 짧았다.

“제대요?”

약초를 말리던 진경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날이 아니라 산 밑의 집까지 찾아간 윤도였다. 다행히 산에 올라가 지 않은 덕에 만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제나 그제 나와서 약주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었지만 섬 어르신들 진료를 마무리하느라... 게다가 내일은 서울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아이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무슨 대수라고.”

“서울 일이 마무리 되면 다시 내려오겠습니다.”

“말은 반갑지만 너무 무리는 마세요.”

“눈은 어떠세요?”

“1.0랍니다.”

“예?”

“눈이 보이는 게 너무 신기해서 안과에 갔었거든요. 녹내장으로 거의 제로이던 시력이 1.0가 나왔어요. 거기 의사하고 간호사가 기절했다 깨어났다니까요. 나보고 500년 묶은 산삼이라도 캐먹었냐며...”

“다행이군요.”

“아무튼 축하드리고요 언제든 시간나면 내려오세요. 만사제치고 기다릴 테니까요.”

“그럼...”

진경태와의 작별은 그렇게 마감했다.

“이제 가시면 됩니다.”

섬 주민에 대한 계좌송금에 이어 용천규 검사와 참숯 한의원 인사까지 마친 윤도가 차로 돌아왔다. 황 원장은 아쉬움과 함께 축하를 해주었다. 언제건 놀러와라, 혹시 한방병원 취업이나 개인 한의원 부원장으로 갈 거면 좋은데 소개해주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용 부장 검사 역시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더불어 그의 희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채 선생님 덕분에 나도 이번 공로에 서울 쪽으로 영전 될 것 같습니다.”

아는 사람에게 생기는 좋은 일, 나쁘지 않았다.

부릉!

시동과 함께 차가 출발했다. 보건소가 멀어지고 군청이 멀어졌다. 고속도로에 올라서자 군청의 기억들은 더 빠르게 멀어졌다.

공보의.

윤도를 새로이 태어나게 한 시간이었다. 요원하던 한의사의 길을 쭉 당겨준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이 쭉쭉 밀려났다.

시야는 시원하게 뚫려있고 길은 멀었다. 어쩌면 윤도가 걸어갈 의술의 길처럼도 보였다. 멀고 먼 의술의 길.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다는 한의학. 하지만 이제는 올 때처럼 막막하지는 않았다.

“조금 더 밟아보실래요?”

윤도가 요청했다. 이제부터 열릴 새로운 의술 세상으로 기꺼이 진격하고 싶은 윤도였다.

“그러죠.”

박 기사 발에 힘이 들어갔다.

콰아아!

스포츠카가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새출발을 향한 폭주였다.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침 열 손가락. 약재를 꿰뚫는 안목에 산해경의 영약을 꺼낼 수 있는 신비경. 그와 함께 차곡차곡 쌓여가는 윤도의 침술경험과 치료경험...

정신병을 잡고 치매를 잡았다. 녹내장도 치료했고 색맹도 경험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질병이 더 많지만 두렵지 않았다.

채윤도.

이 광속질주처럼 두려움 없이.

질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

‘서울로 직진!’

정면을 응시한 윤도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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