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265)

도마 위에 오른 의술-1

노정명.

노 차관의 외아들이다. 나이는 22세로 대학 1학년. 대학 입학과 동시에 군대를 다녀온 까닭이었다. 일찌감치 병역의무를 마치고 뮤지컬 가수의 꿈을 키우려던 노정명.

군대에서 악몽을 만났다. 선임병들의 가혹행위였다. 처음에는 그저 목이 쉰 걸로만 알았다. 통증도 그리 크지는 않았다. 휴가를 나와 들린 이비인후과에서 치명적인 선고를 받았다.

[연축성발성장애.]

[치료 불가.]

두 줄의 진단은 노정명의 운명 뿐 아니라 가족의 운명까지 바꿔놓았다. 노 차관은 대노했지만 별 수가 없었다. 때늦게 고참들의 가혹행위를 문제 삼기도 어려웠다. 사회 분위기로 보아 자칫하면 권력을 이용한 갑질에 적폐로 몰릴 판이었다.

제대 후 노 차관과 줄이 닿는 대학병원과 이비인후과 권위자들을 찾아다녔지만 진단은 변하지 않았다. 목 안에 들어앉은 미세한 통증은 슬픈 동반자가 되어버렸다. 소리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 청년의 뮤지컬 가수의 꿈은 그렇게, 우연찮은 운명에 휘말려 뭉개져 버렸다.

하지만.

청년은 꿈을 버릴 수가 없었다. 무대를 기웃거리고 뮤지컬 공연을 보조하면서 못 이룰 꿈에 대한 짝사랑을 이어갔다. 물론 노 차관은 한의학에도 기댔었다. 한약과 함께 침을 맞았다. 효과는커녕 부작용이 생겼다. 당시 치료를 맡은 한의사가 욕심을 부린 탓이었다.

의사들을 통해 부작용을 확인한 노 차관은 한의학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지인들이 한의학의 거물 장백교를 추천했을 때도 일언지하에 선을 그었다.

“내 앞에서 한의사 얘기는 꺼내지도 마.”

그것은 노 차관의 신념(?)이 되어 버렸다.

“저기 나오는 애가 정명이에요.”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이 나올 때였다. 미리 나온 여학생이 노정명을 알려주었다.

“노정명 씨?”

윤도가 그 앞을 막았다.

둘은 캠퍼스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앉았다. 은행나무 아래의 벤치였다. 윤도는 미리 준비한 화면을 보여주었다. 윤도의 인명구조 기사가 실린 화면이었다.

“어, 선생님이 그 한의사세요?”

노정명이 호감을 보였다.

“기사 봤어요?”

“그럼요. 저도 그때 댓글 달았었는데...”

“뭐라고 달았어요?”

“그 신비의 장침으로 내 목병도 좀 고쳐주세요.”

“연축성발성장애요?”

“그건 진짜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 아빠가 보냈을 리도 없는데...”

“기사를 봤죠.”

이번에는 다른 화면을 보여주었다. 기사는 짧았다. 병영문제인 가혹행위 특집을 다루면서 두 줄로 끼어들어간 노정명의 사연이었다.

“아, 그거...”

“목 어때요?”

“그게...”

노정명이 얼굴을 붉혔다. 스물 세 살 풋풋한 대학생의 순수가 볼에서 엿보였다.

“실은 여객선 인명구조와 범인검거 공로로 공중보건의 제대를 했거든요. 서울로 오면서 뭐 뜻 깊은 일 하나 해볼까 싶다가 아까 그 기사를 본 거예요. 댓글 소원 내가 한 번 들어줘 봐요?”

“정말요?”

노정명의 시선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먼저 진맥부터... 가능성이 없으면 아예 시도하지 않는 게 좋으니까요.”

윤도가 손을 내밀었다. 노정명은 선뜻 손을 넘겨주었다. 윤도는 맥에 집중했다. 하지만 바로 떼었다.

“왜요?”

“아, 아직 맥이 안정이 안 되어서요. 이게 안정이 되어야 정확도가 높아지거든요.”

“네...”

십여 분이 지나자 다시 맥을 잡았다. 집중에 집중을 더 하며 혈자리 반응을 살폈다.

수삼양경-손에서 머리로 향한다.

족삼양경-머리에서 발로 향한다.

수삼음경-발에서 배로 향한다.

족삼음경-가슴에서 손으로 향한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사방에서 목과 다리 부위로 좁혀갔다. 인후를 관장하는 혈자리들은 발에도 많기 때문이었다. 목과 가슴의 혈자리들이 밤 하늘의 별자리처럼 번득거렸다.

천돌혈, 근축혈, 풍문혈, 내정혈, 곡지혈, 태충혈, 통리혈...

모두 인후에 관여하는 혈자리들이다. 하나하나 체크를 했다. 윤도의 오감이 천돌에서 멈췄다. 그 다음이 통리였다. 천돌혈은 찝찝한 찌꺼기들이 들러붙은 느낌이었다. 청소 안 한 환풍기 느낌이랄까? 통리는 절반이 잘린 듯 했다. 그 중에서도 목 부위의 천돌이 단연 문제.

천돌혈이 주원인이라면 통리혈이 부원인으로 보였다. 천골혈의 불규칙한 조화로 목소리가 안정되지 못하고 통리의 위축으로 소리가 끊기는 기전이었다.

“어때요?”

윤도가 손을 놓자 노정명이 물었다.

“으음...”

윤도가 잠시 뜸을 들였다.

“역시 안 되죠?”

“장담은 못해요.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진짜요.”

“해볼래요?”

“네.”

“좋아요. 너무 큰 기대는 말고요, 하지만 잘 될 수도 있으니까 한 번 시도해 보자고요.”

“네, 저 해주세요. 그래서 만약 목소리가 전처럼 돌아온다면 생명의 은인으로 모실게요.”

“그보다는 뮤지컬 공연할 때 티켓 한 장 보내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문제없어요. 그런데 치료비는 얼마나 들죠?”

“그것도 역시 나중에 티켓으로... 나 여객선 심장마비 승객들도 돈 안 받았거든요.”

“우와!”

“안 바쁘면 지금 갈까요? 실은 내가 이제부터 좀 바빠질 거라서...”

“시간 오래 걸려요?”

“아뇨. 몇 시간이면 충분해요. 가요”

윤도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침대에는 노정명이 누웠다. 잔뜩 긴장한 얼굴이다. 장 박사는 자리를 비웠다. TV 촬영 차 방송국에 간 시간이었다.

“노래해요. 속으로.”

윤도가 부드럽게 말했다.

“네?”

“긴장 풀라고요.”

“아, 네...”

윤도가 침통을 열었다. 약통도 열었다. 산해경의 단장산에서 구한 영약이었다. 그러니까 갈매도의 마지막 밤이었다. 장 박사의 귀띔을 참고해 준비한 윤도였다.

천돌과 통리.

생각을 비우고 장침을 잡았다.

영약은 신비한 새였다. 그 새의 이름은 백야. 밤이 깊은 삼경, 즉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동량의 생강을 넣어 고아 환을 먹으면 되는 처방이었다. 다만 유효기간이 있었다. 환을 만든 지 한 순(旬) 이내에 먹어야하는 게 그것이었다. 순은 열흘의 옛말이니 문제는 없었다.

시작이 될 손목의 통리혈을 짚었다. 이 혈자리는 목이 잠겨 말이 잘 나오지 않을 때 특효다. 그런데 혈자리가 조금 컸다. 보통 혈자리는 좁쌀에서 쌀알 크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크게 잡히는 혈자리도 있다. 단추 크기도 있고 동전 크기도 있을 수 있었다. 노정명의 경우는 콩알 크기였다. 침 끝에 묻히려던 백야를 바라보았다. 묻히지 않고 그냥 침을 넣었다.

혈자리가 크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 기본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어떤 명의는 중병이든 가벼운 병이든 기본 탕약만 처방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말했다.

“기본을 잡으면 만병은 저절로 낫는다.”

기본에 대한 명언은 셀 수도 없다. 피아니스트의 거장 번스타인도 말한다.

“피아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약한 음을 잘 치는 것이다.”

명의든 거장이든 한 분야의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통하는 게 있다. 그게 바로 기본이었다.

장침을 넣고 전체 혈의 반응을 체크했다. 기세와 기혈의 문을 통해 달래고자 하는 질환의 반응을 보는 거것이다.

침을 뽑았다. 침을 바꿔 백야를 묻혔다. 그걸 넣고 반응을 비교했다. 윤도의 표정은 숭고했다. 영약은 윤도의 것이 아니었다. 산해경을 통해야만 한다. 영약의 비밀을 풀어 대량으로 만들면 좋다. 하지만 그게 안 된다면 영약을 통해 침술 효과를 끌어올리고 싶었다. 영약은 산해경의 것이지만 침술은, 윤도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시간과 장소의 제한이 없었다.

끄덕!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두 침의 차이를 알 것 같았다. 침을 어느 각도로, 어느 만큼, 기를 넣는 보법과 나쁜 기를 뽑는 사법일 때의 차이를 머리에 넣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왼손으로 차분하게 혈자리를 풀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아야했다. 장침이 제대로 먹히느냐 마느냐는 사실, 왼손의 보조가 중요했다. 혈자리의 구멍을 바로 세워 침이 저절로 들어가도록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기의 파문이 목에 닿을만하다 싶을 때 장침을 넣었다. 영약은 더 이상 묻히지 않았다. 침은 관을 따라 내려가듯 부드럽게 혈자리를 찾아들어갔다. 노정명은 느낌조차 없었다.

손끝으로 침의 울림을 들었다. 침의 몸통을 타고 신호가 왔다. 먼 물결 아래서 피라미가 낚시를 문 듯 미미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신들린 윤도의 손가락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침을 서서히 돌리며 경락의 물결과 조화를 맞췄다. 맥의 문을 열고 혈자리의 문을 여는 것이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침...

그건 단순한 판타지의 상상이 아니었다. 편작은 태자의 유회혈에 침을 놓아 죽은 목숨을 살렸고, 화타는 현종과 환도혈에 침을 놓아 절름발이를 걷게 하였다.

이 순간 윤도는 그 신의들을 꿈꾸지 않았다. 장백교를 의식하지도 않았고 서울한방의료원이라는 거창한 목적도 마음에 없었다.

이 순간에는!

오직 단 하나만이 머리에 있었다.

환자 노정명.

뮤지컬 가수가 되고 싶은 대학생. 그에게는 목숨을 위협하는 중병만큼이나 치명적인 질환. 그걸 고쳐 한 대학생의 꿈을 이루어주고 싶을 뿐이었다.

손이 목으로 옮겨갔다. 이제 병의 주력부대를 상대할 차례였다. 지원군은 이미 심어두었다. 적의 빈 틈을 잘 노리면 지원군과의 합세로 일거에 상황을 종료할 수도 있는 게 전장. 연축성발성장애라는 막강 질병을 향해 장침을 밀어넣었다. 장침은 정확히 천돌혈을 찔렀다. 하지만 기대하던 감은 쉽게 오지 않았다. 울림이 없는 것이다.

“......”

등골이 오싹해졌다. 적진에 대한 탐색은 마친 후였다. 경락의 흐름도 체크했고 기혈의 상태도 파악했다. 그런데 마치 허공을 찌른 듯 허무한 천돌혈자리였다. 적막하다. 너무 적막해 어지러울 정도였다.

기가 반응하지 않으면, 이렇듯 늦게 도달하면 치료가 어렵다. 그저 혈자리에 침을 꽂았다고 해서 낫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백야!

영약이 유혹을 했다.

나를 묻혀.

그럼 바로 반응이 올 걸?

아니.

고개를 저었다. 한의사는 서두르면 안 된다. 침술은 더욱 그렇다. 일침즉쾌의 효과를 보려면 그만큼의 인내와 노력이 필요했다.

‘호침을 넣을 걸 그랬나?’

생각을 가다듬었다. 자침 중에는 호침이 가장 섬세한 까닭이었다. 그래도 포기는 하지 않았다. 침을 돌리고 자극하며 기(氣)를 기다렸다. 망망대해에서 낚시를 무는 물고기를 기다리듯.

이마를 타고 진땀이 흘러내렸다. 등은 이미 흠뻑 젖은 후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오른쪽으로 침을 감던 손가락에 저절로 열이 맺히기 시작했다. 손가락의 열은 침끝을 타고 혈자리를 데웠다. 그게 신호였다. 혈자리가 데워지자 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처음은 새털 같은 느낌이었지만 마침내 명백해졌다.

‘오케이!’

천돌과 통리혈.

부드럽게 퍼지는 느낌이 왔다. 봄 아지랑이 같았다. 두 혈자리는 병소의 원인을 둘러싸고 아른거렸다. 노래할 때 가벼운 통증이 온다는 그 부위였다.

‘될 것 같다.’

숨을 돌리고 다른 장침을 집어들었다. 치료 효과의 배가를 위해 태충혈에 자침할 생각이었다. 엄지발가락 쪽의 그 혈자리 또한 인후의 질병에 애용하는 곳이었다. 노정명은 잠이 들었다. 그만큼 윤도의 침은 부드러웠다.

침이 들어갔다.

태충혈의 기는 연관된 혈자리의 문을 열어제치며 상부로 올라갔다. 기세로 보아 30분 정도면 인후에 닿을 듯 싶었다. 침끝을 잡고 전체 조화를 감지했다.

‘90분.’

기혈의 기세를 읽었다. 한 바퀴로는 약했다. 두 바퀴나, 세 바퀴를 돌면 병소가 잡힐 것도 같았다.

타이머를 세팅하는 손이 떨렸다. 어쩌면 영약 없이 성공할 것도 같았다. 시간이 대답할 일이었다. 잔뜩 상기된 채 노정명을 바라보았다.

이 친구...

다시 노래할 수 있을까? 어쩌면 환자보다, 윤도가 더 떨리는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