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위에 오른 의술-2
따르르르!
타이머가 울었다. 침끝을 잡고 혈자리의 반응을 읽었다. 아직은 모자랐다. 침을 지긋이 밀어놓았다. 인후에 작용하는 혈자리들이 좀 더 활성이 되기를 기도하면...
다시 30분이 흘렀다. 그때 복도 쪽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이러시면 안 돼요.”
간호조무사의 목소리였다.
“장 박사 여기 계신가?”
남자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원장님은 방송국에...”
“비켜!”
남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윤도가 복도로 나왔다.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은 노 차관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노 차관의 등장은 노정명 때문이었다. 한의원으로 오면서 아버지에게 문자를 보냈던 것이다.
“당신 뭐야? 누구 마음대로 내 아들에게 침을 놓고 있는 거야?”
침구실의 상황을 엿본 노 차관, 앞을 막아선 간호사 너머로 윤도를 도발했다.
“아드님에게 허락을 받았습니다만...”
윤도가 응수했다.
“허락?”
노 차관이 노정명을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만 곧 끝납니다.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닥쳐. 꼴랑 침 몇 방으로 뭘 어쩌겠다고? 우리 아이 병명이 뭔지나 알아?”
“연축성발성장애 아닙니까?”
“뭐야?”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끝납니다.”
“됐고, 당장 침 뽑아. 대학병원에서도 안 되는 일을 침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
“기왕 시작했으니 조금만...”
“게다가 장 박사도 아니고 어디서 실습생을... 우리 아이가 실습대상인 줄 알아?”
“실습생은 아닙니다만...”
“됐으니까 당장 침 뽑아.”
노 차관이 핏대를 올렸다. 난감했다. 하지만 노정명은 이미 한의학 치료로 재미를 못 본 상황. 권위자도 아닌 새파란 한의사의 침술이 불만스러울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윤도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미 시작된 치료였다.
“잠깐만요, 노 차관님.”
윤도가 차관 앞에 다가섰다.
“당신 나를 알아?”
“아드님 사랑하시는 거 맞습니까?”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아드님은 뮤지컬 가수가 꿈입니다. 하지만 현대의학으로도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지요.”
“아는군. 그래서 그깐 침과 뜸으로 뭘 어쩌겠다고?”
흥분한 노 차관이 눈을 부라렸다.
“첨단의학과 첨단수술로봇도 두 손 든 일을 어쩌겠냐고 묻고 있잖아?”
“때로는 작은 것이 위대할 수도 있는 겁니다.”
윤도의 응수는 냉철했다.
“뭐야?”
노 차관이 격노하는 순간 노정명이 잠에서 깨어났다.
“아버지”
열린 문으로 노정명 목소리가 나왔다. 그 소리에 노 차관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선생님 뭐라 하지마세요. 제가 원한 거라고요.”
“됐다. 다음 달에 독일의 권위자가 서울포럼에 온다기에 거기 부탁을 해두었다. 괜히 헛고생하지 말고 그만 가자.”
“하지만...”
“그만 가자니까.”
“저 분이 그 분이에요. 왜 그 남해 여객선 참사 때 심장마비 일곱 명을 살린 기적의 한의사 있잖아요? 아버지가 한의에도 인물 하나 나는 모양이네 하던 분요.”
“......?”
아들의 말에 차관이 반응했다.
윤도가 잠깐의 헐렁함을 파고 들었다.
“이제 30분 남았습니다. 100% 자신은 못하지만 치료 가능성이 있습니다.”
윤도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
“아시겠지만 침은 이따금 기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인체의 기와 가장 잘 맞을 때 말이죠. 한의사로써 할 말은 아니지만 아드님은 지금 사실 기적이라도 필요한 거 아닙니까?”
“기적?”
“저보고 기적의 한의사라고 했습니다. 환자가 의사를 믿을 때 침술은 뾰족한 쇠붙이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요.”
“......”
“단 30분입니다. 아니 이제 25분이군요. 독일 권위자를 위해 한 달을 기다리실 분이 25분 못 참습니까? 그렇다면 발침해 드리겠습니다.”
“......”
“아버지...”
“......”
차관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들어간 장침. 그러나 예전에 이미 효과 없음을 체험한 한의학...
“뽑아드리죠.”
윤도가 침을 향해 돌아섰다. 차관의 입은 그때 열렸다.
“그냥 두시오. 이미 들어간 침인데...”
윤도가 돌아보자 차관이 고개를 외면했다. 그도 인간이다. 나아가 부모였다. 그렇기에 기적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쏠렸다. 아들은 오죽했겠는가? 오죽 했으면 혼자 여기까지 왔을까? 그 마음이 차관의 흥분을 넘었다. 차관 앞에서 침구실 문을 닫았다. 슬프지 않았다. 보호자와의 실랑이도 사실, 한의사와 의사의 몫이었다. 그렇기에 ‘각서’나 ‘동의서’가 나온 것이다.
게다가 이 정도는 양호한 편에 속했다. 멱살을 잡히고 폭행을 당하는 의사도 많았다. 드라마라면 시청자들은 이런 장면에서 흥분한다. 주인공이 저런 대우를 받으면서 꼭 치료를 해야 하느냐?
그럼 어쩔까?
마음에 안 드는 환자는 다 내치고 딸랑딸랑 아부 떨고 고분고분한 환자만 치료해줄까?
아니다.
치료해야 한다.
그게 의술이다. 과거의 한의사들은 부당 대우의 극한에서 참형을 당한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죽어가는 사람 한 사람,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 한 사람을 위해 손을 내미는 게 의술의 본분이었다.
도마 위에 오른 의술.
좋은 의술을 펼치려면 그게 칼날 위의 도마라 해도 마다하지 말아야했다.
“......”
“......”
침구실에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한참 후에 노정명이 말했다. 그 순간 윤도가 파뜩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 때문이었다. 처음과는 분명 달랐다.
“다시 한 번 말해봐요.”
“네?”
“방금 그 말... 아니, 아무 거라도...”
“죄송하다는 말요? 어”
그제야 노정명도 뭔가의 이상을 느꼈다.
“천천히... 자연스럽게...”
“목소리 나오는 게 편해요. 침 삼킬 때마다 느껴지던 칼칼한 통증이 없어요.”
“좋아요. 이제 노래 한 번 해봐요. 딱 한 소절만.”
“노래?”
“잠깐만요. 기왕이면 아버지도...”
윤도가 문을 열었다. 복도를 서성이던 노 차관이 안을 바라보았다.
“노래...”
노정명의 어깨가 파르르 떨었다. 그의 꿈이었던 뮤지컬 가수. 그러나 떨림과 끊김의 목소리로 변하면서 노래 자체가 공포가 되어버린 지금이었다. 노정명의 시선이 노 차관에게 향했다. 노 차관 역시 고개를 끄덕하며 기대감의 사인을 주었다.
노정명의 입에서 첫 가사가 나왔다. 오페라의 유령이었다.
첫 소절은 살짝 떨렸다.
두 번째 소절부터는 떨림이 가셨다.
“And do...”
노정명의 목청이 트이기 시작했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묘하게 그 가사부터였다. 이어지는 가사부터는 자신의 목소리가 나왔다. 꿈에도 그리던 가수지망생의 목소리였다.
“선생님.”
윤도를 돌아보는 노정명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짧은 발성.”
윤도가 목트임을 도왔다.
“아아아!”
“긴 발성!”
“아아 아아아!”
“오케이.”
“선생님.”
“예?”
“또 노래 해봐도 되요?”
노정명이 물었다.
“그럼요.”
“잠이 들면~...”
노정명의 노래가 병실을 울렸다. 오랜 시간 아팠던 성대라 약간 불안정한 느낌이 있지만 듣기 편하고 맑은 음색이었다.
“그 목소리...”
한 소절을 반복하던 노정명 눈에 눈물이 맺혔다. 노 차관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데려가셔도 됩니다.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경찰에 고발하셔도 되고요.”
노래의 끝에 윤도가 노 차관에게 말했다. 애당초 만들었던 영약은 노정명에게 먹였다. 유효기간이 있으니 다른 곳에 쓸 수도 없었고, 영약이라는 건 주인이 정해져 있었다.
“......”
“하지만 한의학과 침술을 무시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서양의학의 장점이 있으면 한의학도 장점이 있는 법입니다.”
“......”
“이의 없으시면 제가 나가도 될까요?”
“선생...”
파르르 경련하던 노 차관의 입이 열렸다.
“미안하오. 그리고 고맙소.”
“......”
“그 나이에 이런 침술이라니... 당신은 한의사가 아니군. 하늘에서 내려온 명의요. 명의...”
“아뇨. 저는 한의사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한의사 중의 한 사람.”
“......”
“아무튼 아드님의 일은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아드님의 선택이자 용기였지만요.”
“용기...?”
“만약 아드님도 차관님처럼 저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오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서 병은 자랑하라는 말이 있나봅니다.”
“이 일... 장 박사의 부탁이었소?”
“......”
“그렇소?”
“그렇습니다. 장 박사님께서 부탁을 하셨습니다. 차관님이 한의학 정책에 대해 소극적인 거 같으니 도와달라고요. 하지만 제 침술은 부탁과 상관이 없습니다. 아드님은 환자였고,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침술에는, 특히나 이렇게 불치나 난치성의 질환은 만용이나 사심 같은 게 끼어들면 성공하기 어려우니까요.”
윤도는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노 차관이 도중에 쳐들어와 버린 일. 이렇게 된 바에야 굳이 에둘러 가고 싶지 않았다.
“......”
“그럼...”
윤도가 걸음을 떼었다. 기백과 카리스마에 압도 당한 노 차관은 비켜서는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
병원 밖으로 나오자 노정명 목소리가 들렸다. 창문이었다.
“고맙습니다. 저 꼭 뮤지컬가수가 되어서 티켓 보내드릴 게요. 꼭 오셔야 해요.”
“오케이.”
두 손을 흔드는 노정명에게 손을 들어 화답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노정명의 목소리. 그 소리만큼이나 기분이 가뜬해지는 윤도였다.
잘 했어.
윤도는 스스로에게 별 다섯 개를 매겼다. 그럴만 한 일이었다.
**
늦은 밤, 윤도는 노 차관을 두 번째 만났다. 이번에는 장 박사도 함께였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전화를 받았다. 장 박사였다. 두어 시간 방송출연을 마치고 온 그는 소란이 있었던 걸 알게 되었다. 노 차관 때문이었다. 원장실에서, 원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채윤도 선생이라고? 들어요.”
노 차관이 요리를 가리켰다.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아드님은 어떻습니까?”
윤도가 물었다. 인체란 오묘하기 때문이었다. 급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질환도 얼마든지 양상이 변할 수 있었다.
“집에 가기 무섭게 제 엄마에게 노래를 불러줬다는군요. 하지만 지금은 입 다물고 있을 겁니다.”
“문제가 생겼습니까?”
“아니죠. 소중하게 되찾은 목소리니까 아끼려고요. 한 며칠은 좀 참으라고 했습니다. 너무 무리하면 안 좋을 거 같아서요.”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무튼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같이 와서 인사를 드린다는 걸 나 혼자 나왔어요.”
“차관님의 인사만 해도 충분합니다.”
“아니에요. 오면서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정말 좁았습니다. 왜 현대의학이고 첨단이고 좋은 것만 고집했는지...”
“침 때문이군요.”
“맞습니다. 아까 보니 우리 아이에게 정통 장침을 찌르더군요. 그게 돈으로 치면 얼마나 됩니까? 하잘 것 없는 의료장비 하나로 불치병을 고쳐내다니...”
“침은 의료장비가 아닙니다. 한의사 몸의 일부이지요.”
“표현이 잘못됐다면 이해하세요. 내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이거...”
차관이 봉투를 꺼내놓았다. 돈봉투였다.
“이런 거 받으면 침술 기가 흐트러집니다.”
당연히 거절했다.
“내 성의입니다.”
“그럼 뜻 깊은 곳에 쓰시지요. 저는 치료에 성공한 보람만 해도 충분한 보상이니까요.”
윤도는 부드럽지만 완곡했다. 차관은 결국 봉투를 거두었다. 아들 학교에 장학금으로 기탁하겠다고 했다.
“그나저나 장 박사님, 어디서 이런 재원을 만났습니까? 내가 부처에 들어가 부하직원에게 한 번 알아보라고 했더니 더 놀라운 말을 해요. 우리 지 과장 허리도 채 선생이 고쳤다면서요?”
노 차관이 장 박사를 바라보았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어이쿠, 내 솔직히 화타니 편작이니 다 지어낸 말 같아서 믿지 않았는데 채 선생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우리 정명이 치료하던 SS의료원 의사들도 한결 같이 놀라더군요. 이런 말까지 해요. 그게 침 때문이 아니라 나을 때가 되어서 그런 걸 거라고.”
“그건 너무 무례한 말이군요. 채 선생이 혼신을 기우려 시침을 한 일을 두고...”
장 박사가 슬쩍 불편함을 토로했다.
“동의합니다. 우리 아들이 그러더군요. 채 선생의 침이 들어올 때의 기분 말입니다. 마치 부드러운 무엇이 아픈 곳을 녹여내는 기분이었다고 했어요.”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고질병이라 해도 궁합이 맞는 의사가 있는 법이니 아드님 앞날이 쭉쭉 뚫릴 겁니다.”
“그런데 언감생심이라고... 혹시 내 허리도 좀 봐줄 수 있겠어요?”
노 차관의 마음이 열렸다.
아픈 사람의 마음은 다 똑 같다. 어디 쓸만 한 의사 없나 하는 것. 못 고쳐도 좋으니 속 시원하게 알고나 싶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