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265)

그녀의 통 큰 배팅-1

“가능하죠.”

“오, 저런.”

“눈에 안검염도 있다고 들었는데 시간을 주시면 그것도 함께 치료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검염까지 말이오? 그게 사소하지만 난치병에 가깝던데...”

“장담은 못합니다만 잘 될 걸로 봅니다.”

“허어, 이거 로또 맞는 기분입니다. 그래, 언제 시간이 되시겠습니까?”

“아무 때든 좋습니다. 제가 아직은 백수거든요.”

“백수? 그 좋은 재주를 썩이고 있단 말이오? 보아하니 개업하면 대박이오 한방병원에서도 서로 데려가려고 할 거 같은데...”

“갑자기 공로제대를 하는 바람에 결정을 못했습니다. 좀 쉬면서 천천히 결정하려고요. 공부할 것도 있고...”

윤도가 말끝을 흐렸다.

공부는 약재 때문이었다. 산해경 때문이었다. 산해경의 영약들. 몇 번 경험이 쌓이다 보니 약 성분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영약의 성분구성을 알게 된다면, 즉 그 질병에 특효가 되는 성분을 알 수 있다면 현대의 약재로도 대체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사람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

예를 들어...

<발모제.>

<흰 머리를 검게 하는 약.>

그 두 가지만 개발해 특허를 등록한다면 당장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될 수도 있었다.

<암 치료 드링크>

<당뇨 방지 드링크>

이 또한 초대박 아이템이 분명했다.

“차관님이 어디 소개라도 하시겠습니까?”

윤도의 말끝에 장 박사가 끼어들었다.

“하하핫, 소개가 문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광희한방대학병원이든 진광대한방병원이든 다리를 놔드리죠. 그런데 채 선생이 장 박사님이랑 일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제가 채 선생 잡을 능력이 됩니까? 어쩌다 보니 인연이 닿아 만나고 있지만 의술로 쳐도 제 머리 위의 사람입니다.”

“박사님.”

과찬에 윤도가 놀랐다. 장 박사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제 생각이지만 채 선생은 하늘이 내린 우리 한의학에 내린 벼락 같은 선물입니다. 분명 갈 길이 따로 있을 것으로 압니다.”

“하핫,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래서 언제 침을 맞으시렵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맞고 싶지만 한 당분간은 의료보험법 개정으로 공청회다 전문가 미팅이다 해서 정신이 없을 겁니다. 몇 주 쯤 후라면 괜찮겠는데...”

노 차관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그렇게 하시죠. 혹 그 사이에 거취에 변화가 있더라도 침은 꼭 놔드리겠습니다.”

“어이쿠, 이거 아무래도 이행보증각서라도 받아놔야 마음이 편할 거 같은데...”

“하핫, 제가 증인이 되어드릴 테니 마음 놓으십시오.”

“그것도 고맙군요.”

세 사람의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오래 있지는 못했다. 노 차관에게 전화가 걸려온 까닭이었다. 장관의 호출이었다.

“다다음 주 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실은 장애인 등급만 없지 허리가 반 장애인이거든요.”

노 차관이 어정쩡하게 일어났다. 그는 장 박사의 한의원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진통제를 맞고 왔었다. 그 약 기운이 떨어지는 타임이었다.

“일이 잘 될 것 같지?”

노 차관이 떠나자 장 박사가 말했다.

“아예 병원 건에 대해 언질을 하시지 그랬습니까?”

“이런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면 속 보이지. 보아하니 노 차관이 침에 뻑 간 눈치 아닌가? 잘하면 차관 입에서 먼저 언질이 나올 것도 같네만.”

“그럴까요?”

“베테랑 관료인 저 양반이 모를 리 없고 측근인 지 과장 소식까지 들었으니 공적으로 연락이 오지 않을까 싶네.”

“박사님 계획대로 잘 풀리기 바랍니다.”

“그럼 이제 오붓하게 한 잔 하실까?”

“그러죠.”

“하핫, 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만 일어나야하네.”“괜찮습니다. 그럼 같이 가시죠.”“나만 간다는 걸세. 채 선생은 팬이 기다리고 계시거든.”

“팬이오?”

“곧 도착할 걸세.”

“누가 또 오시는지?”

“잠깐만 기다리시게. 내 입으로 말하면 극적인 느낌이 없지 않나.”

“박사님.”

윤도가 불렀지만 장 박사는 그대로 가버렸다. 잠시 후에 종업원이 다가와 테이블을 새로 세팅하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니 장 박사가 요청을 해둔 모양이었다.

‘누가 오는 걸까?’

머리가 복잡해질 때 어깨 뒤에 기척이 느껴졌다. 그 기척이 손가락으로 윤도 어깨에 노크를 했다. 윤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기척의 주인공과 마주친 윤도의 오감이 거기서 멈춰버렸다.

All Stop!

**

“안녕하세요? 선생님!”

상큼한 보이스를 쏟아내는 주인공은 이부용이었다. 갈매도 별장의 몬스터 아가씨...

“부용 씨?”

“앉아도 될까요?”

“그럼 장 박사님이 말한 사람이?”

“네, 제가 데이트 신청한다고 박사님께 부탁했어요.”

“......”

뻘쭘한 사이에 부용이 앞 자리에 앉았다. 윤도는 무슨 여신이 앉는 줄 알았다. 옷차림부터 코디, 헤어까지 완벽한 변신이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별장의 이미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피부도 꽤 좋아졌고 눈빛에도 생기가 넘쳐흘렀다. 배터리로 치면, 갈매도가 3-5%였다면 이제 100% 만땅을 찍은 위엄이었다.

“받으세요. 제대 선물이에요.”

부용이 꽃다발을 내밀었다.

“후리지아예요. 당신의 시작을 응원한다는 꽃말이 있더라고요. 선생님께 딱인 거 같아서 바로 질렀어요.”

“고맙습니다.”

후리지아는 부용처럼 단아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제가 와인 한 잔 쏴도 될까요?”

“술 마셔도 되나요?”

“저 다 나았어요. 팔씨름을 해도 제가 이길 걸요.”

부용이 웃었다. 건강미가 드러나는 미소. 회복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으음... 저도 갈매도에서 할머니들 장침 놓느라 팔뚝 힘 좀 기르긴 했는데... 아무튼 마시죠.”

윤도가 수락하자 부용이 주문을 넣었다.

꼴꼴꼴!

와인이 잔을 채웠다.

“일단 건배부터 해요. 제대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부용이 와인잔을 들었다.

“고맙습니다.”

챙!

두 잔이 허공에서 맑은 음을 튕겨냈다.

“그런데...”

한 모금을 넘긴 윤도가 입 안에 맴돌던 말을 꺼내놓았다.

“제 특별 제대 말입니다. 부용 씨가 주도한 것 같던데...”

“어머, 그거 자수해야 해요?”

“궁금하잖아요?”

“그냥 넘어가면 좋은데...”

“부용 씨.”

“좋아요. 고백하죠 뭐. 범인은 저희 아빠고요 저는 공범자예요. 하지만 아이디어는 제가 제공했어요. 달리 말하면 애교 섞인 협박이라고 해야 하나?”

“아이디어라고요?”

“솔직히 선생님이 공로 제대할 만 하잖아요? 남들은 뭐 축구, 야구만 잘 해도 군대 안 가던데 선생님은 사람 목숨 일곱에 굉장한 범인검거까지 일조했어요. 범인 검거 때는 위험도 무릅쓰고 말이죠. 그게 공로가 안 되면 뭐가 공로가 되겠어요?”

“부용 씨.”

“그래서 제가 아빠 등을 팍팍 밀었죠. 관련 부처 사람들 만나면 건의 좀 하시라고. 이럴 때 힘 안 쓰면 뭐할 거냐고.”

“역시 부용 씨가...”

“기분 나쁘신 건 아니죠?”

“아, 그게...”

“그럼 됐어요.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사전에 허락 받을 일이 아니었으니 이해해 주세요. 그러실 거죠?”

부용의 상체가 훌쩍 가까워졌다. 와인이 확 올라왔다. 그래서 그럴까? 조명을 받은 부용의 얼굴 라인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알겠습니다. 회장님께도 인사 전해주세요.”

“그럼 이제 제대인사는 끝난 거예요.”

“예...”

“그럼 이제부터 비즈니스 해요.”

“비즈니스요?”

“선생님, 갈 곳 정해놓으셨어요?”

“갑자기 제대하는 바람에 아직...”

“그렇죠?”

“......”

“선생님!”

부용의 상체가 다시 윤도 쪽으로 다가왔다.

“예?”

“저랑 합작 한 번 안 하실래요?”

“부용 씨와 합작을요?”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요... 제 비즈니스 플랜 한 번 들어보세요.”

“예...”

“제가 연예기획사 다시 시작했잖아요? 그래서 정신이 없어요.”

부용이 명함을 내놓았다.

SN엔터테인먼트. SN은 슈난의 약자였다.

“엔터네인먼트 회사라는 게 사실 연예인이 재산이에요. 다행히 제가 능력이 좀 있어서 전에 계약했던 애들하고 유망 신인들 호응이 좋아요.”

“......”

“하지만 요즘 공연과 예능이 다이나믹하고 액티브한 추세다 보니 사고가 굉장히 많아요. 크고 작은 골절부터 삐고 부러지고 몸도 아프고 목도 뻑 나고...”

“......”

“전에도 침을 대놓고 맞는 한의원이 있었는데 선생님 정도는 아니었어요.”

“......”

“그래서 드리는 제의인데 선생님이 독립하셔서 저희 회사랑 전속병원 계약하시면 어떨까요? 저희 애들이 다 유명세 좀 떨치다 보니 아무 병원이나 가기에는 애로가 있거든요.”

“부용 씨.”

“그러다 보니 병원시설이나 닥터 수준 문제도 있고...”

“......”

“해서 제가 한의원 제대로 지어드릴 테니 선생님이 책임운영 해주시는 형식으로 시작하면 안 될까요? 말하자면 제가 선생님 신침에 투자하는 거예요.”

“부용 씨.”

"저 허공 긁는거 아니예요. 선생님과 제가 합작하면 해외 의료관광 유치도 어렵지않아요. 한국의 유명 연예인들이 전속으로 다니는 한의원. 거기에 한국 최고 침술의 한의사. 이 매칭이면 중국이건 일본이건 상류층환자들만 가려서 받을 수도 있을 걸요. 미용침이나 비만관리침 같은 거...선생님이면 가능하지않나요?"

"......"

“별장에서 썩는 동안 제 몫의 주식이 꽤 올랐더라고요. 돈 걱정은 안 하셔도 되요.”

부용은 윤도에게 꽂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오만하거나 일방통행의 시선은 아니었다. 마음을 다해 요청하는 간절함. 그녀의 외모에서 풍기는 당당함과는 또 다른 진솔함이었다.

-투자 제의.

-유명 연예인들이 전속으로 올 한의원.

-거기에 플러스 되는 윤도의 신침.

어쩌면 단 순간에 대한민국 개업 한의계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는 제의였다.

윤도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부용의 제의. 그녀의 아버지가 TS전자의 수장이니 그녀의 주식이 올랐다는 말도 과장은 아닐 것 같았다. 즉, 그녀는 아버지가 아니어도 그만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 제안은 부용이 이 회장의 전폭 지지를 얻은 일이었다. 갈매도의 별장에서 숙제로 받아 안았던 윤도에 대한 보답을 궁리하던 부용. 윤도의 능력을 살리면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했다. 그 결론이 이것이었다.

“묘안이다.”

그렇기에 이 회장도 후한 점수를 주었다.

“제 생각에는 서로 윈-윈하는 사업이 될 것 같아요. 저희에게는 선생님의 침술과 진맥이 큰 도움이 될 테고 선생님도 유명 연예인들이 단골로 이용한다고 알려지면...”

“......”

“뭐 선생님 정도라면 예능에 출연 시켜서 몸값을 올릴 수도 있고요. 그 왜 한국의 명의 30선 같은 거 있잖아요. 아까 제 의견이 마음에 안들면 어려운 사람들 대상으로 난치나 고질병 전문 한의사로 의술을 펼치셔도 되고요. 저는 선생님이 어떤 결정을 하셔도 다 환영이에요."

“......”

“저 믿고 예스라고 말해주세요. 저 이래 뵈도 사업감각 있어요. 지금까지 제가 투자해서 폭망한 적 한 번도 없어요.”

“하지만...”

윤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침으로 하고싶은 치료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그러자면 역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둥지, 즉 한의원이 필요했다.

돈이든.

명예든.

인술이든.

생각하는 사이에 부용이 승부수를 던져놓았다.

“안 되면 저 다시 아프던 때로 돌려놓아주세요.”

“예?”

폭탄 발언에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건강 회복해서 제대로 일 좀 해보려고 해요. 그런데 이렇게 뜻 있는 사업조차 못 할 거라면 건강을 되찾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차라리 아프던 때로 돌아갈래요.”

“......”

“결정하세요. 선생님 침이라면 그것도 가능할 거 아니에요?”

부용의 말은 반어법이었다.

제안을 꼭 받아달라는 반어법...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