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265)

그녀의 통 큰 배팅-2

한의사...

[개업]

[대형병원 수련의 마치고 대학한방병원 취업 후 교수 임용]

보통 두 길을 간다.

처음에는 그렇게 가고 싶었던 대형한방대학병원. 이제는 갈 기반이 생겼다. 국내 양대 한방병원 중의 하나에 가서 수련의 마치고 취직해 한 10년 정도 임상경험을 쌓는다. 침구과나 한방내과과장이 된 후에 독립한다. 단골이던 환자들이 따라오면서 쉽게 정착한다. 그런 다음 대학 강의를 뚫어 외교수가 된다.

공부 좀 하는 한의대생들이 꼽는 성공 코스의 하나였다. 윤도에게도 이제 그 길이 ‘거의’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윤도의 의술은 갈래가 달랐다. 임상경험으로 쌓인 의술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준 것. 이제는 수련의 과정을 간다고 해도 윤도를 이끌 침술전문가는 없었다. 그저 과정을 지나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굳이 수련의 코스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한방전문의 면허 없다고 개업을 못할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대형병원은 생각보다 복잡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시설만 좋았지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각 과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암투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건 외래교수들과의 뒤풀이 시간에 들었던 비화였다. 심지어는 수련의 동안에 교수의 폭력에 시달리는 노예 전공의도 있다고 했다. 한방이나 양방이나 도제식 수련이다 보니 자행되는 적폐의 하나였다.

[의술보다 처세술이 통하는 대형병원.]

[시스템을 따라야하는 침술.]

신침을 장착한 윤도에게는 바람직한 길이 아니었다.

‘기회...’

윤도는 생각했다. 중국 명의순례에서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았다. 그건 하늘에서 내려준 행운이었다. 몇 가지 착한 생각과 행동을 하기는 했지만 행운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땅에서 행운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일에 비하면 꽁으로 먹는 게 아니었다. 이부용의 현재를 구한 윤도가 아니었던가?

[더 포괄적이고 더 자유로운 진료.]

그걸 생각하면 개업이 답이었다. 이유는 역시 신침에 있었다. 윤도의 신침, 신맥, 그리고 산해경. 그 기원이 어디였던가?

‘중국의 명의순례 마지막 코스...’

윤도의 기억이 과거를 더듬었다. 추레한 할아버지와 그 등에 업힌 아이. 윤도는 둘을 돕고 싶었다. 그러다 생긴 엄청난 사고. 그 호수 속에서 본 아이의 시린 환영... 그 환영이 안겨준 시린 빛들...

어쩌면 그건 신들린 장침을 가지고 부귀영화 누리며 잘 먹고 잘 살라는 게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인술을 베풀라는 ‘계시’이자 ‘계약’일 수도 있었다.

“부용 씨.”

마음을 굳힌 윤도가 단정한 시선을 들었다.

“제 플랜 받아주시는 거죠?”

부용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제 한의원에 어떻게 투자하실 건지 물어도 될까요?”

기왕에 개업할 거라면 이제, 윤도는 자신의 의사를 반영하고 싶었다. 투자를 받더라도 끌려가는 게 아니라 윤도의 주관으로 주도하는 것이다.

“선생님이 원하는 모든 옵션을 수용할 게요.”

“제 옵션은 좀 많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말씀드렸지만 저희 아이돌들 눈이 굉장히 높습니다. 제 안목도 그렇고요. 만약 선생님이 강남의 몫 좋은 빌딩에 한의원 내달라고 하면 이 계획은 백지화 될 수도 있습니다.”

“......!”

부용의 말에 윤도의 피가 후끈 데워졌다. 역시 그녀는 싸구려 사업가 DNA는 아니었다.

“그런 쪽은 부용 씨가 더 전문가일 것 같네요. 저는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말씀하세요.”

“실은 제가 약재를 보는 능력도 좀 있습니다. 그래서 식약처에서 요구하는 품질관리 인증이 정착되지 않은 약재는 제가 직접 관리, 조제하고 싶습니다. 최고의 비방으로 말입니다.”

“탕약도 최고로 만들겠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GMP 시설을 갖춰달라는 거군요?”

“GMP도 알아요?”

윤도가 미간을 좁혔다.

“저 선생님이 제 생명의 은인이라 충동적으로 나서는 거 아니에요. 인생 접었다 부활한 사람으로서 가장 가치 있는 사업으로 판단하고 투자하는 거거든요. 따라서 관련 법규와 제반시설, 선생님의 능력까지 전부 검토 끝에 내린 결론이에요.”

“......!”

윤도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이 순간, 그녀는 빈 틈 없는 사업가였다.

“GMP... 식약청의 한약재 품질관리기준이죠? 시설에 구비되는 공조기, 에어샤워, 클린룸 등을 갖추는데 최소 비용이 4억 소요되더군요. 어찌 보면 선생님 개인 연구실이기도 한 셈이니 선생님 능력이라면 마땅히 그런 시설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해요.”

“부용 씨.”

“MOU예요. 제가 대략 작성했는데 한 번 읽어보세요.”

‘MOU?’

투자에 대해 합의한 사항을 명시한 양해각서. 부용은 단 한 곳도 헐렁한 면이 없었다.

“굉장하군요.”

“시설에 대한 투자자본은 제가 제공하고요 20년 후에는 선생님 소유로 등기이전됩니다. 공식 수입에 대해서는 매월 기준으로 1%의 순이익금을 제게 제공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비보험, 비공식 진료에 대한 수입에도 일체 관여하지 않습니다.”

‘고작 1%? 게따가 비보험 진료비는 제외?’

이건 엄청난 특혜였다. 한의원의 많은 탕제들은 거의 의료보험적용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투자라는 형식으로 윤도 체면을 살리는 것이지 무한지원과 다를 바 없는 파격이었다.

“그럼 부용 씨 이익은?”

“첫째는 삶의 보람이고 둘째는... 저희 소속사 연예인에 대해 우선 진료혜택을 주시면 됩니다. 선생님의 신침이라면 모든 연기와 공연에 큰 차질이 없을 일이니 그것도 적지 않은 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

“아울러 TS전자 그룹 의무실 주치의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쪽 보수는 그룹 차원에서 따로 책정해드릴 거고 월 1회정도 왕진이면 된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 소원이니 제 체면 한 번 살려주셨으면 해요. 가능할까요?”

<아버지의 소원.>

말은 그렇지만 그 또한 윤도를 위한 배려가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혹시 방송출연 하시게 되면 그 일정과 계약 등의 매니지먼트는 제게 일임해 주시겠어요?”

“제가 방송을요?”

“아까 언급했지만 가끔은 출연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선생님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질 자격이 있으시거든요.”

“그건 생각해보지 않아서...”

“요즘 세상에 홍보도 실력이에요. 선생님 진료에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제가 조율할 게요.”

“저를 불러줄 방송이 있을까요?”

“있어요. 만약 없다면, 만들면 되고요.”

부용이 웃었다. 거침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미소였다.

“그렇다면야...”

“고마워요. 따로 더 추가할 게 있나요?”

“있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제게 유리한 조건들 고맙지만 병원 운영에 대한 관여는 일체 사양합니다. 부용 씨 소속 연예인들을 돕기는 하겠지만 저는 제 의술의 길을 갈 겁니다.”

<투자는 받되 자율경영 천명!>

돈으로 내 의술을 좌우할 꿈은 꾸지 마라.

윤도는 확실히 선을 그었다.

“콜이에요.”

부용은 쿨하게 윤도 뜻을 받았다.

“거기까지입니다.”

“좋아요. 선생님 의견은 다 반영하고요... 계약사항에 대한 이의가 있으면 언제든 제기하고 갱신요청하세요.”

“그러죠.”

“한의원 후보지 건물들은 미리 좀 알아보았어요. 입지가 괜찮은 것으로 골랐는데 셋 중에서 선택하시면 제가 내일이라도 매입할 게요.”

부용이 사진을 내놓았다. 둘은 강남의 빌딩이고 나머지 하나는 북악산과 청와대가 인접한 기와집이었다.

“누가 뭐래도 한국은 강남이 대세라 강남을 중심으로 체크했는데 한의원은 고풍스러운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의견들이 있어 한국풍도 하나 끼워보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정통 한정식집이었다가 출판사에서 인수해 쓰던 건물인데 조선시대는 때 꽤 유명한 한의원이었다고 해서요.”

기와집.

오래된 건물임에도 초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묵어 맛깔나는 발효음식 같기도 하고 기품도 좋아 보였다. 게다가 사랑채 입구에 장식용으로 걸린 현판... 놀랍게도 ‘一鍼貫病’이었다.

일침관병.

침 하나로 모든 질병을 꿰뚫는다는 뜻이 아닌가?

운명일까?

기와집이 윤도 마음을 끌었다.

“마음에는 이게 드네요.”

윤도가 기와집 사진을 집었다.

“혹시 현판 글자에 반한 거 아닌가요?”

“어, 그럼 부용 씨도?”

“맞아요. 괜히 그 현판이 시선을 끌더라고요. 어쩐지 선생님을 위해 준비된 집 같기도 하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감은 가네요. 좀 현대적으로 손을 본다면...”

“한 가지 문제가 있기는 해요.”

“문제요?”

“가까운 곳에 유명한 한의원이 있어요. 탁상명 한의사라고 방송에도 고정출연하는 분의 화암 한의원...”

‘탁상명?’

윤도 머리에 천둥이 들어왔다.

탁상명.

살 빼는 약과 동안침, 부분 체형관리로 유명세를 타는 한의사다. 한의학계에서는 매선침의 최강자로도 불린다. 매선침은 일종의 성형침이었다.

그런 사람이 버티고 있는 곳. 자칫하면 유명세에 묻혀 윤도의 무덤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윤도는 두렵지 않았다. 유명한 한의사 옆이라고 꼬리를 말아서야 어떻게 높은 의술의 탑에 도전할 수 있을까.

부용은 윤도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 어떤 추임새나 의견도 내지 않았다.

“상관없습니다. 이걸로 하죠.”

윤도가 시원한 콜을 날렸다. 기와집이었다.

“괜찮겠어요?”

“네.”

윤도의 대답은 분명했다. 그제야 부용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쳐갔다. 도전하는 남자, 부용은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음을 알았다.

“한의원 이름은 어떻게 할까요? 생각해 두신 게 있나요?”

“이 현판대로 일침 한의원으로 가죠.”

“일침 한의원... 침 하나로 끝낸다 이거로군요. 멋지네요.”

<일침 한의원.>

일침즉쾌를 표방하는 윤도의 장침과 닮았다. 이렇게 한의원 작명까지 끝났다.

“그럼 사인하시죠.”

부용이 양해각서를 밀어주었다. 윤도가 사인을 했다. 기분이 아찔했다. 중국의 헤이싼시호에서 만난 시린 빛을 한 번 더 만나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운명이 확 다가오는 그런...

“매입하고 리모델링까지 끝내려면 두 달 가까이 들 것 같아요. 선생님은 그동안 함께 일할 스태프 뽑으시고 다른 준비들 하세요. 그리고 죄송하지만... 내일은 저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데...”

부용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주말에 공연할 댄스 아이돌 멤버 중에서 한 친구가 탈이 났어요. 탈장진단을 받아서 갔는데 장폐색도 있다네요.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수술을 권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 친구가 공연에 나설 수 없거든요. 무대 센터에서 팀 전체를 리드하는 친구라 뺄 수도 없고... 공연이 임박하니 취소할 수도 없고...”

‘탈장...’

탈장은 의외로 자주 접할 수 있는 질병이다. 대개 복강 내의 근육과 근막의 힘이 약해지거나 충격을 받다 장기가 밀려나온 상황. 탈장의 고통은 의외로 크다. 게다가 장폐색까지 있다면... 댄스 아이돌은 춤 중심이니 공연이 불가능한 게 맞았다.

“그럼 장 박사님께 양해 구하시고 그분 한의원으로 데려오세요.”

“와아, 시간 내주시는 거예요?”

“사인했으니 이미 동업자 된 거 아닌가요? 협력해야죠.”

“고마워요, 선생님.”

“인사는 치료가 된 다음에... 뭐든 미리 김칫국부터 마시면 좋지 않거든요.”

“와우, 이제 개운하게 달려요. 달리는 데는 아무래도 소주가 좋지 않을까요?”

부용은 이제 소탈 모드에 들어가 있었다.

“소주도 마실 줄 알아요?”

“어우, 대한민국 사람치고 소주 못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예 자리 옮겨서 철판 삼겹살에 김치랑 마늘 올려서 마실까요?”

“......”

“왜 그래요? 저도 그냥 여자 사람이에요. 일은 일, 술은 술.”

“좋아요. 한 번 달려보죠.”

“오케이. 가요.”

부용이 윤도의 팔짱을 끼고 나섰다. 윤도가 그 팔짱을 풀었다.

“선생님?”

뻘쭘해 하는 부용을 향해 윤도가 팔짱을 꼈다. 끌려가듯 가는 건 내키지 않는 윤도였다.

“가죠.”

윤도가 앞을 가리켰다.

아이돌과 장침파티.

아이돌과 장침파티.

드륵!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온 윤도가 서랍을 열었다. 몇 가지 약재가 보였다. 산해경에서 구한 걸 쓰고 남은 약재었다.

[빈초-피로를 풀어주는 영약.]

[여목-건망증을 없애주는 영약.]

[식저-가위눌림을 낮게 하는 영약.]

[문경-귀 먹은 병을 고쳐주는 영약.]

섬마을 환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낸 것들이다. 귀한 것이니 샘플 형식으로 시약병에 조금씩 간직한 윤도였다.

개업!

그 단어가 시약병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심장이 조심스럽게 뛰었다. 개업의가 되는 것이다. 부용이 약속한 일이니 틀릴 게 없었다. 더구나 그녀의 준비는 완벽했다.

개업까지 길어야 두 달이었다. 그 동안에 준비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적어보았다.

두 달!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대한 몸으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침을 놓을 수도 없었다.

‘임상경험...’

우선순위가 떠올랐다. 갈매도의 만성환자 경험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게다가 보건 지소처럼 협조적인 환자들만 있을 건 아니었다. 의사보다 병을 잘 아는 환자가 즐비한 대한민국 서울이었다.

1) 임상경험.

그러자면 한의원이나 한방대학병원 같은 곳에서 다양한 환자를 만나는 진료경험이 필요했다. 아니면 최소한 참관이나 연수...

2) 진경태.

두 번째는 약초 달인 진경태였다. 그가 있어야 비방처방이 용이할 수 있었다. 환자들 치료하면서 약재의 구입이나 관리, 탕약까지 아우르기는 무리였다.

3) 산해경 약재 확보.

세 번째는 영약 확보였다. 매사에 영약에 기댈 필요는 없지만 영약은 윤도 날개 중의 하나였다. 가능하면 미리 확보해 난치병이나 불치병 치료에 ‘레어 아이템’으로 대비하는 게 좋았다.

4) 직원채용.

마지막은 간호사 등의 직원 문제가 꼽혔다. 기타 기와집의 규모로 보아 한의사가 한두 명 더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5) 마함철 장침의 안정적 공급.

개업을 하면 침 소모가 많아질 수 있었다. 모두 일회용으로 써야하니 미리 주문처를 확보하는 게 좋았다.

메모를 치우고 산해경을 펼쳤다. 다섯 가지 우선 순위 중에서 ‘지금’ 할 수 있는 건 산해경 영약채집이었다.

‘탈장에 장폐색이라...’

그 정도는 장침으로도 잡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산해경을 뒤지는 건 산해경 안에 든 영약의 종류와 분포를 알기 위해서였다.

연구방이 차려지면 영약 분석도 겸할 계획이었다. 산해경 속에 나오는 풀이나 나무들 중에는 현재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비슷한 약성의 약재를 찾아낸다면 난치병 정복에 기여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성분 분석을 통해 화학적 약성을 조합해 한방 치료제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다.

부용 때문인지 새로운 약재도 시선을 끌었다.

<순초.>

먹으면 얼굴빛이 고와지는 영약이다.

연예인!

그 단어와 강력하게 매칭이 되었다.

연예인들은 얼굴이 재산이다. 우윳빛 애기 피부도 재산이다. 톱스타들은 그 관리에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한다. 약도 먹고 마사지도 받고 성형도 불사한다. 마사지와 성형 등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그러니 음료수처럼 마시거나 발라서 원샷 관리가 가능하다면? 그 또한 센세이션을 불러올 비방이 분명했다.

일단 해경부터 비췄다. 산경에 영약이 많지만 해경에는 영약창고로 불리는 영산이 있었다. 온갖 약이 다 있다고 하는 영산. 윤도는 그곳을 낱낱이 해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산에는 천제를 지내는 신인(神人)들이 많아 접근이 쉽지가 않았다.

다음은 운우산의 란(欒)이었다. 줄기는 노랗고 가지는 붉은 색이며 잎은 푸른 나무다. 운우산의 산신들에게 약을 제공하는 나무였다.

두 영약은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좋았다. 흡사 저개발국 촌놈을 영국 최고 백화점 헤롯의 럭셔리 매장에 떨구어놓은 듯 윤도를 들뜨게 만드는 산해경의 세계...

오늘 밤 윤도의 선택은 파사였다. 파사는 네 가지 색을 가진 뱀이다.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기에 찾기가 쉬웠다. 뱀의 실체가 신비경에 들어왔을 때는 정신줄이 반 쯤 풀리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공포감이란 이루 말하기 어려웠다.

파사의 배설물인 응가를 뒤졌다. 이 배설물에서 나온 뼈가 복부 질병에 특효였다. 당장 공연에 나서야 하는 댄스 아이돌. 만에 하나 장침의 효과가 늦을 경우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대비라는 아이템은 늘 사람 마음을 든든하게 하니까.

신새벽이 다 되어서야 뼈 하나를 얻었다. 약절구에 넣고 갈았다. 그 또한 노가다였지만 표시내지 않았다.

‘정성을 다해...’

스릉스릉...

뼈 갈리는 소리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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