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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말도 안 돼.”
사진을 본 윤철이 부들부들 떨었다. 윤도와 어우러진 해피 프레지던트였다. 윤철의 눈에는 미녀와 야수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미녀가 하나도 아니고 무려 일곱인 것이다.
“형, 나도 좀 부르지.”
윤철은 거의 울부짖었다.
“부르면? 와서 침이나 흘리려고?”
“침은 무슨... 얘들 우리 사단에도 위문공연 왔었다고.”
“그럼 이미 봤네?”
“보긴 뭘? 하필이면 그날 경계근무 걸려서 확성기로 나오는 노래만 들었다고. 내 사수는 악수에 포옹까지 했다던데.”
“안 됐다.”
윤도가 윤철 손에서 핸드폰을 수거했다.
“그럼 사진이라도 쏴줘.”
“가지고 다니면서 여친이라고 사기치려고.”
“누가 그렇대? 내 여친도 해피 프레지던트 좋아한단 말이야.”
“여친 누구 미연이?”
“걘 벌써 쫑 냈지.”
“그럼 희애?”
“걔는 그 전에 끝났고.”
“잘 한다. 니가 카사노바냐? 하나를 사귀어도 좀 진득하게 만나라.”윤철 머리에 알밤을 날리고 가족들에게 상황을 전했다.
“개업?”
어머니와 아버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TS전자 따님이 밀어주는 거라고?”
어머니가 대표로 물었다.
“네. 저한테 나쁜 조건이 아니라서 수락했어요. 오픈하게 되면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형, 그 여자 형한테 꽂힌 거 아니야?”
윤철이 광속으로 앞서 나갔다.
“비즈니스라고.”
윤도가 그 입을 막았다.
“미안하구나. 우리 아들 유명해 진 걸 모르고... 개업은 내가 먼저 생각했어야했는데...”
아버지가 조용히 웃었다.
“아니에요. 저도 갑자기 받은 제의라서... 그래도 좋은 기회니까 열심히 해볼 게요.”
“네가 섬에서 질병 치료를 도왔다고?”
“네.”
“하긴 네 침이 굉장해지긴 했더라. 네 엄마도 그렇고 나도 오늘 펄펄 날았다. 내 친구 놈들은 하나도 안 믿더라만.”
“맞아. 내 허리는 20대 허리가 되었다니까.”
어머니도 장단을 맞추었다.
“다 두 분 덕분이에요.”
“아무튼 단단히 준비해서 하거라. 의사들 개업이야 일반 자영업하고는 다르지만 병의원도 폐업하는데 많으니까 준비를 제대로 해야 할 거야.”
“알았어요.”
“허어, 이거 또 파티 각인데 내가 신새벽에 재료상에 가야해서 말이지.”
“그럼 간단하게 맥주 1캔 씩?”
윤철이 바람을 잡았다.
짱!
즉석 건배가 이루어졌다.
“개업 축하한다.”
아버지가 대표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윤도가 화답했다. 간이 파티는 간단하게 끝을 맺었다.
‘진경태 아저씨...’
방으로 돌아와 스케줄 메모를 짚었다. 수순 상 그를 확보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각서를 받았다지만 그에게도 정리할 시간은 필요할 일. 내일 고속버스 티켓을 예약했다. 폼 나게 스포츠카 타고 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진경태에게 위화감을 줄 지 몰라 그만두었다.
남는 시간에 또 영약 채집을 나섰다. 이 것 저 것 진귀한 동물을 구경하다가 운우산으로 옮겨갔다. 신선들의 나무 때문이었다. 노란 줄기에 붉은 가지, 푸른 잎을 가진 나무였다. 오늘도 두 신선이 나와 나무의 약재를 채집하고 있었다.
신선들은 세월아 네월아 여유로웠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다는 말이 있더니 과장은 아닌 것 같았다. 지켜보는 사이에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신선들이 도착했다.
신선들은 서로 다른 부분을 취했다. 흰 머리가 땅에 닿을 듯한 신선은 흰 열매를 잡았다. 여섯 개를 따고는 대지에 드러난 뿌리를 여섯 가닥 잘랐다.
머리가 검은 머리 신선은 매끈한 푸른 열매와 잎사귀를 한 바구니 땄다. 또 다른 신선은 뿌리만 몇 줄기 끊어갔다. 신기한 건 따낸 자리에 바로 열매와 잎이 돋는다는 사실이었다.
‘줄기와 잎사귀, 열매와 뿌리가 각각 쓰임이 다르다.’
윤도는 감을 잡았다. 특히 잎사귀와 열매가 그랬다. 척 보기에는 청색이지만 그 채도가 달랐다. 열매도 다양하게 열렸다. 색깔도 그렇지만 모양도 여러 가지였다.
윤도는 긴 머리 신선이 딴 열매를 두 개 얻었다. 열매는 아이보리 색이 감돌았지만 대략 무색무취였다. 윤도 눈빛이 싸아해지나 싶더니 자동분석이 나왔다.
[원산] 산해경
[약재수령] 84년
[약성함유등급] 上上품
[중금속함유] 무
[곰팡이독소] 무
[약재사용유무] 가능
[용법용량] 치아손실에 쓴다. 열매 여섯 알에 동 가닥의 뿌리를 환으로 빚어 사용한다. 열매는 그믐부터 보름까지 14일간 그늘에서 말리고 뿌리는 같은 기간 동안 양지에서 말려 반 냥짜리 환으로 만들어 밤에 물고 잔다. 3일을 반복하면 새 이빨이 돋는다.
[약효기대치] 上上
“......!”
효능을 본 윤도, 졸음이 싹 달아나버렸다. 대머리 발모제나 흰머리를 검게 하는 약을 상상하던 차에 그 못지않은 약재를 찾은 것이다. 한 냥은 37.5g이니 18.7g 정도가 되었다.
새 이빨...
이 또한 굉장한 약재였다. 임플란트가 있다지만 차선책에 지나지 않는다. 썩어도 준치라고 이빨은 내 것이 최고였다. 그런데 새 이빨이 나게 하는 영약이라면...
‘후아!’
상상만으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아쉬운 건 양이었다. 약재의 양을 계산해 보니 재료 확보에만 적어도 6일이 걸렸다. 그걸 거의 보름이나 말려야 하니 20여일 이상을 투자해야 한 사람의 이빨을 구제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분석해서 성분 재조합만 할 수 있다면...’
피가 후끈 끓었다. 영구치는 한 번 손실되면 영원히 빠이빠이다. 권력이나 금력으로도 살 수 없다. 날짜나 수고로 따질 가치가 아니었다.
‘산해경...’
늘 그랬지만 오늘 밤에도 윤도 심장을 심쿵하게 만들었다.
‘한의원을 개업하면...’
연구방을 머리에 그렸다. 직접 대한약전 기준으로 분석도 하고 새 탕제도 만들 생각이었다. 가능하면 화타의 청낭서나 옛 명의들의 처방도 되살린다. 뭐 하나 걸리기만 하면 특허 직행이다. 대박을 치면 돈 없어 치료 못 받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영약의 형태도 영구치를 닮았다. 이리 보고 저기 보아도 므흣하다. 그러는 사이에 훌쩍 밤이 깊어갔다.
아침, 겨우 눈을 붙인 윤도가 깨었다. 책상을 보니 봉투가 보였다. 카드와 함께 아버지의 메모였다.
<미리 못 챙겨서 미안하다. 개업에 이래저래 돈이 들 테니 이걸로 보태쓰거라.>
“......!”
아침부터 가슴이 먹먹했다. 거실로 나오니 아버지는 벌써 출근하고 없었다.
“왜?”
엄마가 물었다. 엄마는 모르는 눈치였다. 아버지 스타일이다. 기와집 기와에 내려앉은 푸른 이끼처럼 그저 묵묵할 뿐 무엇도 내세우지 않는다.
‘고맙습니다.’
아버지가 걸어나갔을 도로를 보며 중얼거렸다. 괜히 콧등이 시큰해졌다.
각서를 집행하다.
각서를 집행하다.
“자자, 오갈피 사세요. 인삼은 저리가라 오갈피입니다.”
5일장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까닭에 참숯 한의원에 들러 인사를 했다.
“채 선생.”
원장은 반색을 하며 반겼다. 서울에 개업을 하기로 했다고 하니 진심 어린 축하를 해주었다. 보험가입부터 진상환자 대처까지 자잘한 조언이 폭풍으로 날아왔다.
저녁 식사를 하자는 걸 일단 미루어두었다. 밥보다 일이 우선이었다.
장터로 나가 약초구경을 했다. 몇 개 약성 좋은 약재가 보였다. 그런 약초의 값은 굉장히 높았다.
“진짜 심신산골 대물 약초입니다. 안 살 거면 만지지도 마쇼.”
노점 약초상이 거품을 물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대략 구경을 마치고 진경태를 찾았다. 구석진 좌판 자리에 그가 없었다.
‘산에 가셨나?’
주변을 다 확인한 후에 약초상에게 물었다.
“저 쪽 끝의 약작두 아저씨 안 나왔나요?”
“오늘 온다더니 안 보이던데? 약초 사시게?”
“아닙니다.”
윤도는 약초상을 지나쳤다. 어차피 내친 걸음, 택시를 잡아타고 진경태의 집으로 향했다. 서울 갈 때 인사하러 가본 적이 있어 낯설지 않았다.
끼익!
택시는 여울 앞에서 멈췄다. 산이 시작되는 길, 찻길이 끊겨 걷는 수 밖에 없었다.
“아저씨.”
산자락에 물린 진경태의 대문은 여전히 흉내 뿐이었다. 몇 번을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보지만 소용없다. 오는 길에도 그랬지만 멘트는 똑 같았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컹컹!
사람 대신 개소리가 들렸다. 허름한 대문을 밀고 들어섰다. 알큰한 약초향이 코를 찔렀다. 담장 아래에도, 처마 밑에도, 아담한 마루 위에도 온통 약초였다.
그런데...
담장 아래의 약초를 응시하던 윤도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다 마르지도 않았는데 습기가 서렸다. 아침 이슬을 맞았다는 얘기였다. 약초를 이렇게 방치해?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약초에 대해서는 심지가 굳은 줄 알았던 진경태. 겉 다르고 속 다르다고 약초를 이렇게 다룬다면 대실망이었다.
“......?”
개 밥그릇에 시선이 닿은 윤도가 걷던 걸음을 멈췄다. 밥그릇이 심하게 말라 있었다. 적어도 이틀은 밥을 주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제야 불길한 생각이 스쳐갔다.
집에서 나와 가까운 주변을 돌았다.
“아저씨!”
아-저-씨.
메아리가 돌아온다. 어디에도 진경태의 흔적은 없었다. 고개가 산으로 향했다. 산중턱에 있다는 약초건조장이 떠올랐다.
어쩌면 산으로 갔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방치한 약초와 개가 매치되지는 않았다. 며칠 여정으로 산에 갔다면 개를 데려갔을 일이고 약초를 널어두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휴우!’
땀을 닦으며 산길을 올랐다. 유비의 삼고초려를 떠올렸다. 유비는 공명을 얻기 위해 그의 초려를 세 번이나 찾아갔다. 토트넘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도 삼고초려 끝에 손흥민을 얻었다. 윤도는 유비나 포체티노가 아니지만 전설적인 일화들을 생각하니 힘들지 않았다. 한참을 오르니 야트막한 평지에 움막지붕이 보였다. 그 또한 초려였다.
“아저씨!”
그 앞에서 진경태를 불렀다.
“저 갈매도 공보의였던 채윤도입니다.”
몇 번 소리치지만 기척은 나오지 않았다.
‘여기도 아닌가?’
확인이라도 할 생각으로 움막 문을 밀었다. 문은 힘없이 안으로 밀렸다. 이제 막 노을이 내리는 저녁 무렵, 숲의 그림자에 가린 움막 안은 쉽게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저씨...”
무심코 기척을 내던 윤도 눈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서 물체가 보인 것이다. 사람이었다.
“아저씨!”
윤도가 소리쳤다. 어스름 속에 누운 사람은 진경태가 맞았다.
“채... 선...생?”
마르고 칼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다치셨어요?”
“여길 어떻게?”
“그게 중요해요? 어디 아파요?”“산에서 약초 캐고 내려오다가 산돼지를 만났어요. 그걸 피하다 발을 잘못 디뎌서...”
“허리군요?”
윤도가 침통을 꺼냈다. 허리가 아니라면 이런 상태로 누워 있을 리가 없었다.
“이게 척추가 댕강 끊어진 것처럼... 억!”
꿈질거리던 진경태가 비명을 토했다.
“그냥 계세요.”
“마침 핸드폰도 배터리가 떨어져서 119에 전화도 못하고...”
“괜찮습니다. 그냥... 그냥 계세요. 혹시 초 없나요?”
“없...습니다.”
“......”
낭패였다. 초 하나 구하자고 산을 다시 내려갈 수도 없었다. 방문을 활짝 열었다. 빛이 조금 더 들어왔다. 그럭저럭 방 안이 가늠되었다.
진맥부터 잡았다. 혈자리가 망가진 곳은 척추가 맞았다. 충격으로 척추뼈가 어긋나고 추간판이 밀렸다. 사고 장소가 멀다면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일단 마취혈부터 잡을 게요. 혈자리를 잡으려니 통증이 장난 아닐 거 같아서요.”
윤도의 침이 마취혈자리를 확보했다. 그런 다음 옆으로 비스듬히 세웠다. 태아의 포즈였다. 아예 눕히면 침 놓기는 편하겠지만 척추가 상할 수 있었다.
시작은 목을 주관하는 경추였다. 목을 앞으로 주체하지 못하니 턱의 승장혈을 잡았다. 목에 팽팽하던 긴장이 조금 누그러졌다. 윤도의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천주혈을 시작으로 척추혈자리를 타고 내려가 종아리의 은문혈과 손등의 합곡혈에 침을 꽂고서야 손을 멈췄다.
손등에는 땀이 송송 맺혔다. 등도 흠뻑 젖은 후였다.
“어떠세요?”
윤도가 물었다.
“좀 편합니다.”
진경태의 대답이 윤도에게 위로가 되었다.
대략 운신이 가능해지자 진경태가 돌아누웠다. 혈자리 잡기는 쉬워졌지만 어둠이 문제였다. 핸드폰의 손전등 기능에 의지해 침을 꽂았다. 겨우 말라가던 등짝이 또 한 번 젖어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배터리가 바닥을 보이면서 핸드폰이 깜박거렸다. 침을 뽑고 진경태를 바로 누였다. 다행히 헌 옷가지 등이 있어 그걸 덮어주었다.
밖으로 나오니 별빛이 무심했다. 그들은 움막의 숨가쁨을 모르는 듯 했다. 몇 시나 되었을까 궁금했지만 시간도 알 수 없었다.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꾸벅거리다 잠이 들었다.
바스락!
아자작!
잎사귀 밟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이었다. 마루 앞에 다람쥐가 내려와 있었다. 녀석은 약초 위에서 종종거리다 달아났다. 윤도가 일어나 약초들을 수습했다. 괭이와 망태도 한 쪽으로 치웠다. 그때 끼이 소리를 내며 허술한 움막문이 열렸다.
“......”
“......”
윤도와 진경태의 눈이 마주쳤다. 기는 자세로 문을 연 진경태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 꿈뻑거리는 눈에 뜨거운 무엇이 비쳐보였다.
“여기서 밤을 샌 겁니까?”
목매인 소리로 진경태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