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세요?”
윤도는 한의사로서 물었다.
“덕분에 또 한 번 살았습니다.”
진경태가 맥없이 웃었다.
“확인이 필요합니다.”
진경태를 마루에 누이고 맥을 잡았다. 꺾이고 부러진 어제보다 나았다. 척추는 정상 부근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장침의 위력이었다.
엎드린 자세에서 한 번 더 침을 놓았다. 무리가 될까봐 어제 찌른 혈자리는 피했다. 그 주변 혈자리에서 간접 자극으로 척추를 달래는 것이다. 꽂았던 침을 뽑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천천히라도 걸을 수 있는 상태에 이른 진경태였다.
“하아,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이제 움직일만 하네요.”
벽에 기대앉은 진경태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내려가서 119 구조대 불러 오겠습니다.”
“아이고, 구조대는 웬... 제가 천천히 내려가겠습니다.”
“무리하실 필요는 없는데...”
“무리할 일도 없습니다. 우리 순돌이 밥 말고는...”
“......”
“좀 시큰하지만 걸을만 하네요.”
진경태가 걸음을 떼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만 앞으로 나갔다. 윤도는 진경태 걸음에 맞춰 따라 걸었다.
“선생님 먼저 가세요.”
그가 말했다.
“먼저 갈 거라면 어제 벌써 갔죠.”
윤도의 답이었다. 그는 아직 환자였다. 산을 타는 사나이라 강단이 있다지만 깡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컹컹!
집이 가까워지자 개소리가 들렸다. 주인이 오는 걸 아는 눈치였다.
“어이쿠, 내 집이네.”
마당에 들어선 진경태가 늑골에 걸린 날숨을 밀어냈다. 숨을 따라 땀도 후두둑 떨어졌다.
“병원 안 가도 되겠어요?”
“대한민국 최고 명의의 침을 맞았고 제가 한약사인데 웬 병원요? 집에 있는 약재 몇 개 골라 다려 마시면 됩니다.”
“......”
“......”
“다른 도울 일은요?”
“보시다시피 움막에 비하면 천국입니다.”
“......”
“......”
“그럼 몸조리 잘 하세요. 저는 이만...”윤도가 인사를 했다. 원래는 이 생활 접고 개업하는 한의원을 도와달라고 찾아온 길. 말하자면 그러나 이런 상황이다 보니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
마루에 앉은 진경태가 윤도를 바라보았다.
“네?”
“나한테 볼 일 있어서 왔죠?”
“뭐 그렇다기 보다는...”
“숨길 생각마세요. 얼굴에 다 드러나거든요. 내가 한의사는 아니지만 풍지평파 겪다보니 사람 얼굴도 좀 볼 줄 압니다.”
“......”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약초가 필요하면 여기 있는 거 다 걷어가도 됩니다. 선생님이라면...”
“사실 한 가지가 필요하긴 합니다.”
“말씀하세요. 저 안에 진짜 산삼도 두 뿌리 있으니...”
진경태가 냉장고를 가리켰다.
“산삼은 아저씨가 드시고...”
윤도는 진경태에게 눈을 맞춘 채 뒷말을 이었다.
“제가 필요한 건 아저씨입니다.”
“나요?”
“재주 없는 제가 후원자를 잘 만나 개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번에 갈매도에서 쓴 각서 집행 부탁하려고요.”
윤도가 각서를 들어보였다.
“그거 집행하러 왔군요. 하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한의원 개업에 한약사 둬서 무엇하게요? 괜히 인건비만 들어갑니다. 녹내장 치료비 1억은 어떻게든 갚을 생각이니 염려치 마세요. 약재는 필요한 거 그때그때 말하면 내가 전국을 다 뒤져서라도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실은 한의원에 약재연구시설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소량 유통되는 약재검사도 하고 특별한 탕제개발과 비방 법제까지 하려다 보니 아저씨 같은 능력자가 꼭 필요합니다.”
“연구시설이라고 했습니까?”
“말이 너무 거창했나요? 옛날 한의사들은 모든 한약관리를 스스로 했지 않았습니까? 저는 일부라도 관리해서 저만의 탕약을 만들고 싶은데 공상일까요?”
“선생님은 침술만 해도 환자몰이가 가능할 텐데요?”
“그건 인정하나요?”
“물론이죠.”
“그럼 인건비 걱정은 안 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인기 있는 한의사가 인건비 걱정하면 안 되잖아요?”
“......”
찌익!
진경태 앞에서 각서를 찢었다. 종이는 허공에 놓았다. 바람에 날려 진경태 발 밑에 떨어졌다.
“이런 걸로 아저씨 협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윤도가 정중히 말했다. 유비가 공명에게 이랬을까? 마침 나무의 붉은 꽃잎이 후두둑 쏟아졌다. 유비가 공명을 청하는 그 마음을 꽃잎이 알아준 모양이었다.
“선생님...”
“부탁합니다.”
한 번 요청을 했다.
“허어, 이거 참. 두 번이나 큰 도움을 받았으니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도와주시는 거죠?”
“그럽시다. 다시는 한의사 밑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신들린 침술에 생각까지 반듯하니 같이 망해도 어쩔 수가 없군요. 여기 정리하고 연락 기다리지요.”
“망하지 않습니다. 같이 흥해야죠.”
“그럼 더 좋고요.”
진경태가 웃었다. 윤도도 함께 웃었다. 또 한 번의 꽃잎 물결이 두 사람의 미소를 스쳐갔다. 도원결의는 아니지만 한의(韓醫) 결의 쯤 되는 장면에 대한 축하였다.
원하던 사람은 얻었다. 남은 건 의술공부와 경험 쌓기였다.
고속버스에 오른 윤도의 눈은 광희한방대학병원 임상연수를 겨누었다. 장 박사의 연락을 받았다. 이틀 후부터 시작이었다. 병원이 허락한 건 3주. 넉넉한 시간은 아니지만 3년처럼 활용할 생각이었다.
진격.
윤도의 마음은 벌써 광희한방대학병원에 가 있었다.
신침神鍼의 위엄-1
신침神鍼의 위엄-1
이틀 뒤, 윤도가 도착한 곳은 광희한방대학병원이었다.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한의학의 산실이다. 당연히 인턴, 레지던트의 수련의 과정도 있다. 1+3년 과정이다. 이 4년 과정을 마치면 전문의 시험을 볼 수 있다. 합격하면 한방전문의가 된다.
한의사 전문의?
아직도 일각에서는 한의사 전문의 제도에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한의사도 현대의학 의사와 마찬가지로 전문의 제도를 두고 있다. 한방에는 8개의 전문과목이 있어 그 분야의 전문의를 배출한다. 침구과, 한방부인과, 한방내과, 한방안이비인후피부과, 한방재활의학과, 사상체질과, 한방소아과, 한방신경정신과 등이 그것이다. 이 제도는 2000년부터 본격 시행이 되었다.
광희한방대학병원은 동서의학 협업을 표방한다. 따라서 MRI와 CT 등의 첨단진단기도 사용하고 이화학적 검사도 실시한다. 그것을 담당하는 영상의학전문의나 병리전문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병원의 중심 가치는 당연히 ‘한의학’이었다.
지방 한의대에 다닐 때, 윤도 꿈의 하나가 이 병원에 수련의로 오는 거였다. 하긴 누군들 그렇지 않았을까? 이 병원에 간다는 건 의사들이 S대 병원이나 SS병원 코스로 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인턴 지원과정부터 분루를 삼킨 윤도였었다.
로비에 들어서자 한약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마음이 편해졌다. 늦은 밤까지 의서(醫書)를 뒤적거린 피로가 풀리는 거 같았다.
새로운 도전.
그 계기가 윤도의 열정을 데워주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의서를, 의술을, 처방을, 차곡차곡 머리에 새기고 왔다. 최고의 대학병원이니 무엇이든 지잡대 어리바리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다.
똑똑!
윤도가 노크한 곳은 진료부원장실이었다.
“혹시 채윤도 선생님?”
부원장 여비서가 먼저 물었다. 귀띔을 받는 눈치였다.
“예...”
“들어가세요. 장 박사님도 도착해 계십니다.”
여비서가 부원장 방으로 통하는 문을 가리켰다.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을 열었다.
“이어, 채 선생.”
소파의 장 박사가 반색을 했다. 옆에는 부원장 길상구가 보였다.
“인사 드리시게. 여긴 진료부원장님 길상구 박사.”
장 박사가 부원장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앉으시게. 그렇잖아도 장 박사님 입에 침이 마를 지경이라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부원장이 자리를 권했다.
“정말 약관이군. 이번에 공보의 특별 제대를 하셨다고?”
“예...”
“장침 하나로 일곱을 살린 신의가 이런 사람이었군.”
“과찬이십니다.”
“나도 사실은 그 뉴스 듣고 과장이 심하다 싶었는데 장 박사님이 증인을 서시니 안 믿을 수도 없고... 게다가 TS 이 회장님 남매까지 회생 시켰다고?”
“예...”
“대단하군. 그 따님은 나도 장 박사님 따라가서 상태를 본 적이 있는데... 장침 하나로 양·한방 의료계가 두 손 든 질환을 고치다니...”
“그저 성심 껏 하다 보니...”
“아닐세. 나도 이 회장님과도 아는 사이고 그 따님이 사업감각에다 지혜가 출중해 어떻게든 일조를 하고 싶어 우리 의료진들과 머리를 맞댔는데 방법을 찾지 못했거든. 이건 엄청난 사건이야. 그 사례 정리해서 논문으로 발표할 생각 없으신가?”
‘논문?’
“한의학 발전에 도움이 될 걸세. 좋은 비방은 서로 나눠야 한의학이 발전할 거 아닌가?”
“그렇게까지 생각지는 못했는데 천천히 고려해 보겠습니다.”
“이야, 이거 고만고만한 재원들만 바글거려서 어쩔까 싶었는데 이제야 하늘이 내린 의원이 난 모양이군. 내 장 박사님 말 듣고 기분이 좋아서 새벽처럼 출근을 했어요. 보아하니 아직 거취를 정하지 않았으면 아예 우리 병원으로 오시면 어떻겠나?”
즉석에서 컨택 제의가 들어왔다.
“말씀은 고맙지만 곧 개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업?”
“예. 아무래도 제 취향이...”
“허어, 내가 진작 이런 인재를 알았어야했는데 병원에 매어 살다보니 근시안이 되어서...”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닐세. 자리가 어디든 무슨 상관인가? 의원이란 인술을 떨치면 그만인 것을.”
“이해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자, 사설은 그만 하고 본론으로 가시지. 길 박사가 지금 채 선생 침술이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거든.”
관망하던 장 박사가 상황을 정리했다.
“어이쿠, 역시 장 박사님은 탕약도 9단이고 심리도 9단이십니다. 말은 이래도 눈에는 장침이 어른거리고 있거든요.”
부원장이 웃었다. 부원장은 장 박사의 후배였다. 그 역시 대한민국 한의계에서 10걸에 꼽히지만 장 박사에게는 깍듯했다. 그렇기에 3주 정도 임상연수를 받고 싶다는 드믄 요청을 수락한 것이다.
잠시 후에 한 사람의 한의사가 묵직하게 들어섰다.
‘조수황 교수?’
윤도의 긴장이 한 레벨 올라갔다.
[조수황 침구과장.]
그 또한 한의계의 거두에 꼽혔다.
양주동 박사 이후로 한국 침술 명맥을 이어가는 사람 중의 하나로 명의만 출연하는 명의열전 프로그램에도 소개된 침구의 권위자였다.
“이 쪽이 그 사람일세. 여객선에서 침 하나로 우리 한의학을 띄워놓은 채윤도 선생.”
부원장이 윤도를 소개했다. 윤도가 꾸벅 인사를 했다.
“어리네?”
조 과장 표정은 무심했다. 새로 온 인턴을 대하는 딱 그 눈빛이었다.
“내가 채 선생 재주 좀 보고 싶은데 좋은 케이스가 있을까?”
부원장이 조 과장을 바라보았다.
“차근차근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조 과장은 헐렁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고 한방병원의 실무 침구과장. 아직 윤도의 실력을 모르니 경계하는 것이다. 다만 부원장의 청이다 보니 순화된 단어로 검증을 제시하고 있었다.
검증!
검증이었다.
앞선 과정이 있었다. 조 과장의 특진예약 환자들이었다. 그의 침술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첫 환자는 통증클리닉 침대였다. 늑간신경통이었다. 장년의 남녀에게 흔히 생기는 질환이다. 윤도도 섬에서 여러 사례를 접했던 그 늑간신경통...
‘양능천, 대포, 족임읍, 외관혈...’
병명을 들은 윤도가 혈자리를 상기했다. 조 과장의 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윤도와 다른 것은 통증 부위에 부항을 떠서 피를 낸 것 뿐이었다. 침은 주로 호침이었다. 능숙하고 노련하게 혈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마지막 침 하나가 윤도 시선을 끌었다. 색깔이 달랐다.
‘동침?’
그건 동으로 만든 침이었다. 특별한 경우에 사용하니 강한 자극이 필요할 때 쓰였다. 동침은 혈자리에 들어가기 무섭게 나왔다. 전광석화의 침이다. 환자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가 닫혔다. 효과를 본 것이다.
‘역시...’
윤도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두 번째는 미용 클리닉 특진인데 조금 색달랐다. 요즘 돈이 된다는 미용침이었다. 50대 초반의 여성환자였다. 원래는 이비인후피부과 환자. 까다로운 환자였는지 조 과장에게 맡겨진 시침이었다. 거기서 조 과장이 꺼내든 게 매선침이었다.
[매선침.]
전통적인 침과는 쓰임이 조금 달랐다. 쉽게 말하자면 미용침으로 봐도 무방했다. 이 침의 원리는 피부 진피층에 실을 주입하여 당겨주는 시술이며 이로 하여 소위 브이라인 리프팅 효과까지 얻을 수 있었다.
매선침은 녹는 실이라는 ‘매선’을 피부 속에 넣어 팔자주름을 당겨주거나 코를 높이는 위력까지 발휘한다. 나아가 피부에 자극을 줌으로써 콜라겐과 에라스틴 조직 생성을 촉진하여 처진 피부를 개선하고 피부재생효과를 높인다. 성형외과 시술에도 뒤지지 않는 침이었다.
윤도가 부원장으로 있던 강남의 한의원 원장도 매선침을 선호했다. 돈이 되었다. 미용이나 비만은 한의원의 새로운 돌파구이기도 했다.
특히 비만은 단순한 살의 문제가 아니라 만성병이었다. 성인 비만 인구는 1976년 1억 명에서 출발해 2016년에는 6억을 찍으며 6배나 폭주했다. 여기에 어린이 비만도 가세했다. 그렇기에 비만 시장은 한의학에 있어서 더욱 매력적인 분야였다.
갈매도로 간 후로 만져보지 못한 매선침. 조 과장은 담당과 레지던트와 함께 시침을 했다. 대학병원의 매선침은 윤도에게 새로운 침의 보여주었다.
마지막은 봉독약침 클리닉의 봉독약침이었다.
봉독약침은 말 그대로 벌의 독성분을 침으로 놓는 치료였다. 벌독의 성분 중에서 인체에 좋은 멜리틴, 아파민, 아돌라핀 등의 성분을 추출해서 경혈에 주입하는 침술이다. 악성 만성 신경통과 요통, 관절염 등에 애용한다. 침이 들어가자 환자의 긴장이 노곤하게 풀리는 게 보였다. 침빨이 끝내준다는 증거였다.
다음 방에서는 동안침 시침을 참관하게 되었다. 뷰티 클리닉 쪽이었는데 그 쪽 과장의 시침이었다. 30대 중반의 여성 얼굴에 침 꽃이 피었다. 얼굴에 침이 차곡차곡 쌓였다.
침은 귀 뿌리가 시작되는 이문혈, 청궁혈, 청회혈부터 눈가 주름 예방에 좋다는 승읍혈과 사백혈, 광대뼈 바로 아래의 관료혈, 마금수, 마쾌수혈까지 빼곡하게 자리를 잡았다.
동침.
봉독약침.
그리고 매선침.
오랜만에 윤도 눈이 호강을 했다. 중국 명의 순례 이후 처음이었으니 역시 대한민국 최고 한방병원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