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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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째 되는 날.

윤도가 다시 신분증 달린 한의사 가운을 걸쳤다. 가운은 옷이 아니다. 신뢰다. 그 생각으로 복도에 나섰다. 빈 시간에 레지던트들의 침술을 참관했다.

“좀 나가계시지?”

레지던트 말년 차 왕고참 마혁이 침을 놓는 동안 차석 격인 송재균이 퉁명스레 반응했다. 대놓고 텃세였다. 윤도는 꾸벅 예를 갖추고 복도로 나왔다.

‘텃세...’

그 대처법을 아는 윤도였다. 더 강자가 되든지, 아니면 시간이 해결책이었다. 윤도의 경우에는 당연히 전자가 되어야했다. 아직은 윤도를 인정하지 않는 수련의들. 그 예봉을 꺾으려면 언어장해 소녀에게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게 급선무였다.

하지만 언어장해 소녀의 병실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보호자가 마혁에게 항의를 하고 나왔다. 환자의 열 때문이었다.

“치료가 잘못되는 거 아닌가요?”

보호자의 목소리가 높았다.

“설명드리셔.”

옆에 있던 송재균이 윤도를 내세웠다. 책임을 지라는 의미였다.

“뭉친 기가 열로 나오는 겁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윤도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어휴, 하여간 갖다 붙이면 말이라니까!”

보호자는 고개를 저으며 병실을 나갔다. 곧 침구과장이 들어섰다. 백전노장이기에 그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옆에 부원장이 동행한 까닭이었다.

“기분 어때?”

윤도가 침통을 꺼내며 소녀에게 물었다.

“오이아아오.”

소녀의 발성은 여전히 판독불가였다. 윤도가 진맥에 나섰다. 수련의들이 고개를 빼들었다. 윤도가 장담한 3일차였다. 그들은 윤도의 실패를 기대하는 지도 몰랐다.

그들도 사실 난다긴다하는 한의대의 수재들이었다. 개중에는 송재균처럼 일류대 의대에 붙고도 한의대로 온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 느닷없이 낙하산을 타고 온 지잡대 출신의 윤도에게 호의적일리 없었다.

윤도는 개의치 않았다. 눈을 감고 진맥에 집중했다. 치료는 수련의들과의 싸움이 아니었다. 오직 질병과 싸우는 것이다. 이틀 동안 투자한 혈자리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심장의 기운이 조금 나아졌다.

심장을 체크하는 건 심장이 혀와 통하기 때문이었다. 혀로 이어지는 생기가 좋아지면 도움이 된다. 하지만 윤도가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다.

다시 천정혈에 침을 넣었다. 이번에는 앞의 이틀보다 조금 더 깊었다. 팔의 극상혈도 그랬다. 두 개의 침을 꽂고서야 머리 쪽으로 다가섰다.

“하다하다 안 되니까 결국 아문혈을 껄떡거릴 모양이군.”

송재균이 중얼거렸다.

“혈자리나 제대로 잡을까요?”

“저러다 사고라도 치면...”

다른 수련의들도 동조를 했다. 그러는 사이에 윤도 손이 장침을 뽑아들었다. 하나가 아니라 세 개였다.

“......!”

침구과장의 시선이 매섭게 변했다. 부원장 역시 긴장 모드에 돌입했다. 두 개라면 하나는 아문혈 위의 풍부혈 몫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세 개는?

“......!”

지켜보던 침구과장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실망의 표시였다. 윤도의 침이 들어간 곳은 척추가 시작되는 지점의 대추혈에 가까웠다.

“진짜 아문혈이 뭔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한 인턴이 송재균에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쉬잇!”

마혁이 모두에게 주의를 주었다.

윤도는 개의치 않고 두 번째 침의 혈자리를 잡았다. 이번 침은 아문혈 아래 쪽이었다.

“모르네.”

중얼거리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마지막 침은 두 침과 삼각지점을 이루는 혈자리에 꽂혔다.

“허어!”

침구과장도 결국 탄식을 터트렸다. 그가 기대하던 침술이 ‘전혀’ 아니었다.

“아프니?”

무아지경에 빠졌던 윤도가 소녀를 올려보며 물었다.

“안 아아요.”

소녀가 대답했다. 그 대답이 침구과장의 뇌리를 벼락처럼 치고 지나갔다. ‘아아아아’가 아니라 ‘안 아아요’였다. 그건 명백한 차이였다.

“다시 대답해볼래?”

침구과장이 소녀에게 청했다.

“아나파요.”

발음이 조금 더 좋아졌다.

“......?”

거기서 침구과장의 뇌리에 또 한 번의 천둥이 울렸다.

‘아문혈의 변형?’

천둥소리와 함께 몇 개의 기억들이 스쳐갔다. 혈자리라는 것. 무슨 공식처럼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에 따라 위치가 다르고 때로는 혈자리 옆을 찌르는 변용도 있었다. 그러니까 윤도는 지금 아문혈자리 주변을 삼각으로 포위하고 아문혈을 살려낸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침술의 극점에 서지 않고서는 선택할 수 없는 신침이라는 뜻이었다. 화타나 편작 쯤 되어야 나올 수 있는 그 신침...

“채 선생...”

사태를 파악한 침구과장. 그 목소리가 급성 경련 환자처럼 속절없이 떨었다. 다시 자신의 상상을 넘고 있는 채윤도였다.

“혜선아.”

윤도가 환자 손을 잡았다.

“네?”

“여기 선생님들이 네 목소리 듣고 싶어 하거든.”

“......”

“인사 한 번 해볼래? 안녕하세요, 하고.”

“안녕아-세요.”

환자가 윤도 지시를 따랐다. 긴가민가하던 수련의들도 강풍 앞의 갈대처럼 흔들렸다. 환자의 목소리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채 선생!”

부원장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과장님.”

윤도가 거기서 침구과장을 돌아보았다.

“왜, 왜 그러시나?”

“아문혈 말입니다.”

“......”

“다들 그걸 보시려고 오셨으니 약속대로 오늘 시침해 보이겠습니다.”

“......!”

윤도가 장침을 꺼내들자 병실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몰입!

집중!

압도!

세 단어가 참관자들의 눈과 입에 걸려있었다.

윤도는 장침 끝을 주시했다. 좁은 침 몸통을 따라 넋을 놓은 사람들의 긴장이 고스란히 전해왔다. 과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과시를 위한 침은 환자에 대한 모독이었다. 하지만, 아문혈은 이 환자에게 해롭지 않을 혈이었다. 이미 질환을 잡았지만 기혈 증강에 도움이 될 혈... 가만히 침구과장과 부원장, 수련의들을 돌아본 윤도, 자연스럽게 장침을 밀어넣었다.

스릉!

장침은 허공을 찌르는 듯 부드럽게 들어갔다. 제 칼집을 찾아가는 칼날처럼...

“......!”

마혁과 송재균 등의 수련의들이 경악하는 게 보였다. 가까이서 지켜본 과장은 그보다 더 소스라치고 있었다. 한 무리는 ‘경악’이었고 또 한 쪽은 ‘경탄’이었다. 윤도의 침술 하나에서 극과 극의 반응이 나온 것이다.

경악 VS 경탄.

아문혈.

이 혈자리의 침술에 위험부담이 있는 건 침의 각도와 방향 때문이었다. 자칫 침의 방향이 상향이 되면 위험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침술 솜씨가 설익은 경우에는 환자 머리를 앞으로 숙여놓고 침을 꽂는다. 하지만 그보다는 뒤로 약간 젖히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침구과장도 그걸 확인하려는 생각이었다. 자신이 없으면 결코 꽂을 수 없는 혈자리의 하나. 이것 하나만으로도 침술의 경지를 알 수 있는 까닭이었다.

그런데!

윤도의 장침은 아무 거리낌도 없이 불쑥 들어가 버렸다. 수련의들은 그래서 경악했다. 침의 각도를 고려하지 않은 취혈법. 초짜의 한계라고 본 것이다.

침구과장은 달랐다. 그는 보았다. 윤도의 침이 고개를 젖힌 각도처럼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걸. 자침 각은 당연히 상향이 아니라 안전한 ‘하향’이었다. 자세와 상관없이 손가락으로 모든 것을 조절하는 침술법. 고려의 침술명의 이상노, 조선의 침술 명의 허임. 그들의 합이 거기 있었다.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절정의 기량이었다.

“다들 가까이 와서 확인하도록.”

침구과장이 수련의들에게 말했다. 웅성거리던 수련의들이 다가와 아문혈의 침을 확인했다.

“......!”

말년 차 레지던트 마혁은 말을 잊었다.

“......?”

까칠하던 송재균의 미간도 사납게 구겨졌다.

침의 각도는 교과서처럼 들어가 있었다. 완벽했다. 각도와 위치, 깊이까지도 흠 잡을 데가 없었다.

‘말 도 안 돼.’

침 좀 놓는다는 송재균, 고개를 저었다. 그 이마에서 식은땀이 툭 떨어졌다. 분명 바른 자침 자세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펙트한 침술이었다.

“우와...”

솔직한 감탄은 안미란의 입에서 나왔다. 윤도는 개의치 않았다. 그 신경의 방향은 오직 환자와 침이었다.

환자의 맥을 확인한 윤도가 침을 뽑았다. 예정보다 5분을 더한 시간이었다.

“혜선아.”

다시 환자를 호명하는 윤도.

“네?”

“한 번 더 인사해볼까? 다들 혜선이 축하하러 온 선생님들이야.”

윤도가 환자에게 재차 요청했다.

“흠흠!”

환자가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또렷한 발음을 밀어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들!”

“그리고 여기 송 선생님께도... 네 주치의시지?”

윤도가 송재균을 가리켰다.

“안녕하세요?”

“......!”

환자의 목소리에 송재균이 휘청거렸다. 약간 떨리기는 하지만 흠잡을 데 없는 목소리였다. 송재균은 자신도 몰래 윤도를 돌아보았다. 지잡대 한의대를 나왔다고 무시 때리던 초짜 한의사. 인턴모집에서 서류전형조차 넘지 못한 허접. 그러나 지금 눈앞의 윤도는 전설속 명의의 그 포스였다.

‘젠장.’

송재균의 고개가 저절로 떨어졌다. 우월감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좋아.”

부원장이 다가와 윤도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 사이에 과장 지시를 받은 안미란이 보호자를 데려왔다.

“엄마에게도 인사해야지.”

“엄마!”

윤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자가 입을 열었다.

“혜선아!”

“엄마!”

환자가 보호자 품에 안겼다.

“혜선아, 너 말 할 수 있는 거야? 그런 거야?”

보호자는 딸의 두 볼을 잡고 오열했다.

“응, 나 말 할 수 있어. 잘 들려? 아, 아, 아, 엄마, 엄마!”

“다시 말해봐.”

“안 들려? 아, 아, 아. 엄마 사랑해.”

“들려. 들리고 말고. 아이고, 우리 딸. 이제 살았네, 살았어!”

“이 선생님이 고쳐주셨어. 이따시만 한 침으로.”

환자가 두 팔을 벌렸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보호자가 허리를 숙였다. 윤도의 피로는 단숨에 씻겨나갔다.

그래.

이 맛이지.

윤도는 정중한 맞인사로 보호자에게 예를 갖췄다.

신침神鍼의 위엄-4

신침神鍼의 위엄-4

“채 선생.”

병원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 침구과장이 입을 열었다. 소담한 더덕구이에 조기구이가 딸려나온 백반 정식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침술은 누구에게 배웠나?”

곤란한 질문이 나왔다.

“나이로 보아 양주동 선생님도 아닐 테고...”

“공보의 때 환자 중의 한 분이 민간에서 침술에 정통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 선친께서 한의사였다는데 나름 비기 몇 가지를 배웠다고 하더군요. 몇 가지 팁을 주셨는데 그걸 연습해 제 것으로 만들었더니...”

“환자? 그 분 선친 성함이?”

“기도환이라고...”

윤도가 둘러댔다. 기도환은 일제시대에 떠돌이 한의사로 명성을 날렸던 사람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팔도의 거부들 치고 그의 침을 맞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한 때는 서울의 한의원에 머물며 서울 갑부들의 고질병을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 방랑벽이 강해 서울을 떠났고 그 후로 전하는 건 별로 없었다.

미안하지만 그 이름을 팔았다.

“기도환이라면 광복을 전후해서 재야 침술의 최고봉으로 꼽히던 분인데...”

“......”

“아들이 있었군?”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 분도 돌아가셔서...”

조금 더 둘러댔다. 딱히 설명하기 편한 일이 아니니 이쯤에서 선을 긋고 싶었다.

“채 선생 자질이 좋았겠지만 그 아들도 신의였군. 그렇지 않고서야...”

“예, 아마...”

“경이로운 침술이 아닌가? 보아하니 뜸 자리에도 침이 거침없이 들어가던데 그 또한 이치를 깨우치고 하는 게 맞겠지?”

조 과장이 물었다. 역시 침구과 최고봉답게 모든 것을 꿰뚫은 눈이었다.

“예... 뜸 자리에는 화침처럼 뜨거운 기를 보태고 있습니다.”

“뜨거운 기로 화침처럼?”

“혈자리와 뜻이 통하면 뜸 없이도 화침이 된다 배웠기에...”

“허어, 채 선생 말이 사실이라면 침선(鍼仙)을 만났군. 침선을 만났어.”

“조 과장이 이제야 마음이 열린 모양이시군.”

조 과장의 질문이 폭주하자 된장찌개를 뜨던 부원장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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