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265)

“죄송합니다. 환자 치료라는 게 늘 조심스러운 부분이라 솔직히 마음을 놓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채 선생 나이가 고작 약관이라...”

“이해하네. 조바심 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무튼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 침술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제가 기른 휘하가 아니라서 부끄럽기는합니다만.”

“그럼 채 선생 좀 꼬셔보게나. 내 스카우트 제의에는 꿈쩍도 않는군.”

“다른 병원에서 일하기로 된 건가?”

조 과장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주제 넘지만 개업을 준비 중입니다.”

“허어, 개업이라...”

“......”

“지금 한의원 자리를 리모델링하고 있다고 하더군. 어차피 잡을 수 없는 사람이니 굴려먹기나 하시게. 그게 채 선생과 장 박사님 요청이기도 하고.”

“그럼 부인과에 내원하는 유수미 환자를 맡겨볼까요?”

“그 생리통이 엄청난 분?”

극한의 생리통 환자.

스태프 회의 때 나온 환자 보고 케이스였다. 아주 드문 격통을 호소하는 환자라 부원장도 진료한 적이 있었다.

“예.”

“그 분이 침술치료를 받으시겠다던가?”

“일단 시도해보시겠다고 해서 통증클리닉에 특진일정을 잡아두었습니다.”

“어떠신가? 채 선생.”

부원장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부인과 환자라면?”

“조 과장이 설명하시게.”

부원장이 공을 과장에게 넘겼다.

“자궁근종 환자시네.”

과장이 병명을 말했다.

‘자궁근종...’

윤도가 신중해졌다. 아직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환자였다. 자궁근종 역시 골칫덩이다. 한 번 생기면 스스로 사라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크기와 위치에 따라서 엄청난 생리통을 유발하기도 하고 빈혈과 난임 등의 문제를 동반한다. 게다가 자궁은 여자의 상징. 그렇기에 자궁근종은 심적으로도 큰 부담을 주는 질환이었다.

“한 번 보시겠나?”

조 과장이 물었다. 언어장해 환자의 경우와는 달리 신뢰가 실린 말투였다.

“맡겨주시면 성심껏 보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히 상황을 전달하자면 이 분이 유명한 초밥집을 운영하는 요리사인데 생리 때마다 격통이 심해져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니 자궁근종 판정이 나왔네. 해서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초음파를 이용한 하이프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는데 근종 크기가 오히려 조금씩 커지는 바람에 적출을 권유받은 모양일세. 그런데 이 분이 나이도 젊고 종교적인 이유도 있어 적출을 거절하고 한방치료를 생각하시게 된 거라네.”

“예...”

하이프 시술...

초음파 치료법이다. 체외에서 방출된 초음파를 돋보기처럼 한 점에 집중하여 목표하는 지점의 온도를 상승시켜 근종세포를 파괴한다. 장점은 전신마취나 복부 절개없이 치료하며 2~3일 후에 일상생활로 복귀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우리도 검사를 해봤더니 근종 크기가 6cm를 넘었네. 일이 그렇다보니 하루 이틀에 될 게 아니고 거기다 환자의 생리통이 거의 까무러칠 정도라 긴장하고 있던 터라... 일단 침뜸과 더불어 보강된 귀출파징탕으로 다스릴 계획이네만...”

“병원에 계시면 제가 볼 수 있을까요?”

“입원 환자는 아니고 오후에 검사결과를 보기 위해 내원예정이니 그때 같이 보시게.”

“알겠습니다.”

윤도가 답했다.

자궁근종...

새로운 질환을 만날 생각을 하니 밥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손도 윤도 마음을 아는지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그럼 저는 신경정신과에 미팅이 있어서...”

조 과장이 먼저 자리를 떴다.

“그런데 채 선생...”

둘이 남자 부원장이 고개를 들었다.

“말씀하십시오.”

“혹시 말일세...”

부원장은 신중한 말투로 뒷말을 이었다.

“숨기고 있는 거 없나?”

“네? 숨기다뇨?”

“언어장해 환자 침술 말일세.”

“......”

“왜 3일을 끈 건가?”

“......!”

차분하던 윤도 눈빛이 출렁 흔들렸다. 부원장은 윤도의 마음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제 조 과장도 없지 않나?”

“부원장님...”

“나까지 속이려는 건 아니겠지?”

부원장의 눈빛이 묵직하게 윤도를 겨누었다. 한참 동안 그 눈빛을 바라보던 윤도. 긴 날숨과 함께 미소를 머금었다.

“왜 3일을 끌었나?”

“그건...”

“조 과장 체면을 고려해서?”

“......”

“채 선생.”

“그건 아닙니다.”

망설이던 윤도의 입이 열렸다.

“그럼?”

“부원장님 말씀대로 3일을 끈 건 틀림없습니다. 장담할 일은 아니지만 첫날이나 다음 날 끝낼 수도 있었습니다.”

“맙소사, 내 예상이 적중했군?”

부원장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하지만 조 과장님 체면을 생각한 건 아닙니다. 저도 한방대학병원은 처음이고 병세가 가볍지 않다보니 신중을 기했을 뿐입니다.”

“어쨌든 하루만에 끝낼 수도 있었다?”

“아마...”

“허어, 명의로군. 상상 너머의 명의야!”

부원장이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저 맥이 선명하게 짚이는 통에 혈자리의 문제를 알았기에...”

“그 맥을 조 과장은 안 짚었겠나? 신경정신과장도 짚고 내과 과장도 짚었네.”

“......”

“조 과장... 그런 줄도 모르고 조바심을 내다니...”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아문혈 말일세, 거긴 왜 시침한 건가? 보아하니 응용 혈자리로 환자의 병세는 잡은 것 같던데...”

부원장의 눈도 정확했다. 과연 대한민국 최고 한방병원의 진료 사령탑다웠다.

“외람되지만 사람이라는 게 원하는 걸 봐야 직성이 풀리지 않겠습니까? 부원장님 말씀대로 아문혈을 찌르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었지만 참석한 분들이 다들 원하는 눈치라서... 그래서 그 혈자리를 취하지 않으면 우연히 질환을 고쳤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아...”

“수련의들까지 배려해서?”

“환자에게 깔끔한 마무리이기도 했습니다.”

“허어, 허어!”

부원장은 탄식을 멈추지 못했다. 환자에 이어 참관자들까지 배려한 윤도의 침술. 그 마음 씀씀이에 매료되는 부원장이었다.

“침술보다 사람이 먼저 되었군. 장 박사님이 왜 채 선생에게 목을 매는지 알 것 같네. 그것도 모르고 궁시렁거리던 우리 수련의들이라니... 허어, 이 사람 낯이 뜨거워 못 앉아있겠군.”

“아닙니다. 그 분들의 염원과 건강한 기가 뒤에 있었기에 제 침술에 도움이 된 거 아니겠습니까? 거기 계신 모든 분들이 협진을 한 거나 같습니다. 심지어는 부원장님도...”

“......!”

머쓱해진 부원장 앞에서 윤도가 얼굴을 붉혔다.

‘이 친구... 상상 너머의 대물일지도...’

부원장은 윤도의 겸허한 대처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의학에 내린 벼락 같은 축복...

벼락 같은 축복...

부원장은 단어의 결계에 갇힌 듯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

“저희가 유수미 씨 케이스로 특별히 초빙한 명침 한의사십니다.”

진료실에서 조 과장이 유수미 환자에게 윤도를 소개했다. 처음과 비교하면 과분한 소개였다.

“이 분이 제게 침을 놓으려고요?”

환자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굉장한 실력파입니다. 제가 주로 치료를 하겠지만 한 번 진료를 받아보시면 치료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과장님!”

환자의 눈빛에 매운 날이 섰다.

“예?”

“저는 과장님 침술을 받으려고 특진신청을 했습니다. 안되면 다른 한방병원으로 가겠습니다.”

단칼에 거절하는 환자. 계속된 격통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닌 환자였다. 이렇듯 명의를 따라 의료쇼핑을 하는 환자들은 눈치가 빨랐다. 여러 경우, 서양의학과 한의학이 서로 각을 세우고 책임을 떠넘기는 경우도 있었다.

-서양의학은 전체를 보지 않아요. 근본적인 치료가 안 됩니다.

-한방의 진단은 과학적이지 않아요. 자칫 병을 키울 뿐입니다.

물론 일부 의료인들의 경우다.

누가 뭐래도 두 의학의 본질은 같았다.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치고, 양심과 위엄으로 의술을 베풀고,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고, 환자의 사회적 지위를 초월하여 의술을 펼치는 것.

서양의학은 그 나름대로 질병퇴치를 위해 최선을 경주해 왔고 한의학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윤도는 환자의 입장에서 의견을 존중했다. 어느 쪽이건 그녀의 질병을 잡아주었더라면 그녀가 의료쇼핑을 다닐 이유도 없었다.

“......!”

단호한 거부에 조 과장의 입이 닫히고 말았다.

“그러시면 죄송하지만 진맥만 한 번 해볼 수 있을까요?”

윤도가 나섰다. 입장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가능성까지 포기하는 것도 한의사의 자세는 아니었다.

“그것도 싫은 데요?”

환자는 윤도를 쏘아보며 대답했다. 이제 더는 물어보기 곤란하게 되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윤도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목숨을 다투는 일이 아니니 강제로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다 막 진료실 문 손잡이를 잡을 때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환자가 윤도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예?”

윤도가 돌아보았다.

“혹시... 연예인 이가인 씨라고 아세요?”

이가인?

부용의 별장에 왔던 그 스타였다. 윤도의 변비 처방으로 응가를 한 바가지나 밀어내고 배에서 멀미 처방을 받았던...

“만난 적은 있는 데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이가인 씨 변비 고쳐준 그? 이가인 씨가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거든요.”

“예. 한 번...”

“잠깐만요. 제가 이가인 씨 전화번호를 아는데 전화 좀 해볼게요.”

환자가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저쪽에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유, 스타라서 그런가 전화가 안 되네?”

“확인하시려고요?”

윤도가 정곡을 찔렀다.

“뭐 확인이라기 보다...”

“그럼 이거 보시겠어요?”

윤도가 화면을 열어보였다. 갈매도 보건 지소 앞에서 찍은 그 사진이었다.

“어머, 맞네.”

환자는 반색을 하며 질문을 이었다.

“선생님이 진짜 이가인 변비를 원샷에 고쳤어요?”

“예...”

“이가인 씨가 저희 초밥집 단골이에요. 변비 때문에 굉장히 고민해서 변비특식 다시마 초밥을 만들어주기도 했는데 섬에서 명의를 만나 원샷에 해결했다며 참치초밥, 도미초밥을 4인분이나 먹고 갔거든요.”

“네...”

“실은 저도 변비도 있는데...”

환자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경계심이 풀렸다는 뜻이었다. 그건 곧 윤도의 기회였다.

“진맥... 좀 봐도 될까요?”

“......”

환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자기 손을 보더니 그대로 수락해주었다.

윤도가 그 손목을 잡았다. 변비는 둘째 치고 자궁근종이 궁금했다. 맥은 어떨까? 혈자리는 어떨까?

일침즉쾌의 장침이 자궁근종에도 통할까?

“......”

윤도 표정이 진지해졌다. 자궁에 적취가 있었다. 자궁의 적취, 이런 덩어리는 대개 양성 종양에 속했다. 불편하기는 하되 암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하나가 아니었다. 큰 덩어리 외에도 작은 것들이 많았다.

숫자로는... 셀 수도 없었다.

명침은 도전을 즐긴다-1

명침은 도전을 즐긴다-1

“어때요?”

손을 놓자 환자가 먼저 물었다.

“자궁근종이 있네요. 큰 볼륨 하나와 자잘한 수수쌀 크기가 꽤 많이 있습니다.”

“저번 초음파 때는 하나 뿐이라고 했는데요?”

환자가 이의를 제기했다.

“만약 있으면 제게 침술을 맡겨주시겠습니까?”

“없으면 어쩌시게요?”

“손가락에 관절염이 고질이죠? 변비까지 해서 침 두 방으로 고쳐드리겠습니다.”

“어머, 손가락 아픈 건 아직 말 안 했는데...”

“어떠세요?”

“그럼 저도 이가인 씨처럼 약으로는 안 되나요? 침은 사실 겁도 나고...”

“......!”

환자의 말에 윤도가 고민에 잠겼다.

몸 안의 혹.

거기에 듣는 산해경의 영약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대학병원이었다. 처방 없이는 약을 쓸 수 없다. 그런데 산해경의 영약이 포함되는 탕약 처방에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족보에 없는 약재를 탕약에 끼워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딱 침 한 대로 고치면 어떨까요?”

윤도가 재미난 제의를 던졌다.

“딱 한 대요?”

“네.”

“지금 농담하세요? 양방에서는 적출하자는데 침 한 방이라뇨?”

“하루 한 대씩 4일이면 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

환자의 반응은 황당이었다. 당연했다. 오랫동안 고질병이었던 걸 고칠병이라고 선언하는 사람. 게다가 그 분야의 권위자로 소문난 것도 아니었다. 환자 입장에서는 ‘허세’로 볼 소지가 다분했다. 하지만 윤도는 따로 방책이 있었다.

산해경 속에는 혹이나 종기에 잘 듣는 영약이 있었다. 장침의 효과에 따라 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든든한 자산이 있는 건 틀림이 없었다.

환자는 망설였다.

“잠깐만요.”

윤도가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 이 환자에게 필요한 건 윤도가 아니라 이가인이었다. 거기까지는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그 후에도 거부한다면 그건 이 환자의 팔자였다. 정신병이 아닌 다음에야 싫다는 환자를 강제로 묶어놓고 시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보세요.”

윤도가 누른 건 부용의 번호였다. 그녀라면 이가인과 연락이 닿을 지도 몰랐다. 다행히 OK가 떨어졌다.

“곧 이가인 씨에게서 전화가 올 겁니다. 제 증인이 되어줄 지도 모르니 의견 들어보고 결정하세요.”

윤도는 환자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이가인요? 이가인 씨는 제 번호를 몰라요. 저만 그 쪽 번호를... 응?”

순간 환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환자의 번호는 윤도가 전송했다. 환자기록부의 연락처를 참조한 윤도였다.

“이가인 씨?”

환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윤도는 창가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저 도톤보리 초밥집 유 실장인데요... 네... 그러니까 한의사 채윤도라는 분이 지금... 네?”

질문을 이어가던 환자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선생님...”

통화를 끝낸 환자의 눈빛에서 날선 각이 사라졌다.

“뭐라던가요?”

“선생님이라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이가인 씨가 보증까지 선다는 데요?”

스타는 스타였다. 그 이름은 병원의 환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럼 일단 초음파부터 해볼까요? 제 말이 맞는지 틀리는 지... 과장님.”

윤도가 요청했다. 과장의 응급검사 사인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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