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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초음파 검사결과를 받아든 과장과 환자가 동시에 소스라쳤다. 윤도의 말이 맞았다. 큰 혹 하나였던 그림에 수수알을 뿌린 듯 작은 혹 알갱이들이 수십 개 엿보였다.
“이제 침술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윤도가 물었다.
“해주세요. 한 대가 아니라 열 대씩이라도 괜찮아요. 쥐어짜는 듯한 생리통의 고통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환자 목소리가 부드럽게 변했다. 이제야 마음을 여는 그녀였다.
“내일부터 가능해요?”
“네.”
“그럼 내일 뵈어요. 침은 약속대로 하루 한 대씩 4일간 놓을 게요.”
“더 놔도 되는데...”
환자가 배시시 웃었다. 고집을 부린 게 미안한 표정이었다.
“채 선생...”
그녀가 나가자 조 과장이 윤도를 불렀다.
“예.”
“정말 침 한 방으로 되겠어?”
“될 것 같습니다.”
“미안하지만 치료계획을 좀 들어도 되겠나? 이건 앞의 케이스처럼 의심이 아니라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보아하니 환자가 침에 많은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아서 비방을 쓸 생각입니다. 침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려고요.”
“비방?”
“제가 적취에 좋은 비방 약재들을 좀 가지고 있습니다. 장침으로 시도해 보고 효과가 미진하면 그 성분을 혈자리에 직접 투여해 병세를 잡겠습니다.”
“약침이군?”
“예, 과장님!”
“이야, 이거 오늘밤 잠은 다 잤군.”
“네?”
“채 선생 침술 때문에 말이야. 벌써부터 궁금해지잖아?”
“저도 잠은 많이 못 잘 것 같습니다.”
윤도가 웃었다. 산해경으로 영약채집을 나가야하기 때문이었다.
퇴근시간, 윤도가 병원을 나설 때였다. 레지던트 2년차 송재균이 그 앞을 막았다. 저만치에는 말년차 레지던트 마혁이 서 있었다.
“퇴근하시나?”
배배꼬인 말투가 나왔다. 윤도에게 가장 까칠한 송재균이었다.
“예...”
“좋네. 누군 24시간 뺑이치고 누군 임상연수랍시고 과장님하고 폼 잡고 돌아다니다 칼 퇴근...”
“......”
“아무리 부원장 빽으로 온 낙하산이라도 눈치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제가 실수를 했다면 이해하십시오. 병원 시스템을 잘 몰라서...”
“연수라는 게 그 시스템 배우러 온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럼 알아서 처신해야지, 아 막말로 우리가 그 쪽한테 길까?”
“그건 아닙니다만...”
“오늘은 나이트 한 번 뛰셔. 외국 한의사들도 우리 병원 연수 오면 다 하거든.”
“......”
나이트 근무.
한방 수련의들도 나이트를 뛴다. 인턴 때는 물론이지만 레지던트가 되면 조금 헐렁해진다. 레지던트 3년차가 되면 긴급 상황에만 나와도 된다. 광희한방대학병원의 경우는 그랬다.
나이트 근무에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산해경의 영약 때문이었다. 더러는 바로 채집되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밤을 새워도 허탕을 지는 게 영약채집이었다.
“죄송하지만 내일하면 안 될까요? 오늘은 내일 시침 준비를 해야 해서...”
“장난하셔? 그럼 우리는 오늘 놀고 내일 진료하나?”
“......”
“침구실 가보셔. 초짜 안 선생 좀 도와주라고.”
“......”
“왜? 안 돼?”
“그렇게 하죠.”
대답을 마치고 탈의실로 갔다. 다시 가운을 입었다. 윤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움이 필요한 밤이었다.
“괜찮을까?”
윤도가 멀어지자 마혁이 송재균을 바라보았다.
“명의라잖습니까? 게다가 연수 차 온 친구니 굴려먹는 게 예의 아닙니까?”
“뭐 그렇긴 하지만...”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마 선생님은 퇴근하세요.”
“아니, 나도 오늘은 야간에 시침해야 하는 환자가 있어서 늦게까지 있어야 돼. 논문 자료거든.”
“예.”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연락해.”
“알겠습니다.”
송재균이 답하자 마혁은 복도를 따라 멀어졌다.
‘짜식!’
마혁이 멀어지자 송재균의 시선이 윤도가 사라진 복도 쪽으로 향했다.
‘니가 그렇게 침을 잘 놔?’
송재균의 입가에 흐르는 미소는 저렴한 쪽이었다.
“......!”
침구실에 들어선 윤도가 미간을 찡그렸다. 안에는 환자와 인턴 뿐이었다. 인턴 안미란은 안전부절하는 중에 윤도를 맞았다.
“선생님!”
그녀가 윤도를 바라보았다.
“여기 가보라고 해서요. 오늘 나이트 근무 명 받았습니다.”
“나이트요?”
“그나저나 무슨 일이죠?”
“이쪽으로...”
안미란이 윤도를 구석으로 끌었다.
“격한 두통으로 온 환자예요. 견정혈에 호침을 찔렀는데...”
안미란이 울상을 지었다. 윤도가 돌아보니 환자는 맥이 풀려 있었다.
“제가 봐드려도 될까요?”
“송 선생님이 오시기로 했는데...”
“저를 보냈습니다.”
“그럼 봐주세요.”
안미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윤도가 맥을 잡았다.
‘뇌빈혈...’
윤도는 이내 문제를 알았다. 두통으로 온 환자였기에 정석대로 어깨 견정혈에 침을 놓았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침이 잘 안 들어갔지요?”
“예...”
“뺏다가 찔렀나요?”
“아뇨. 그냥...”
“진단은 뭐라고 나왔나요?”
“근막통증증후군에 의한 두통이라고...”
“침 준비하세요.”
“예?”
윤도 말에 놀란 안미란이 고개를 들었다. 인턴으로 일하는 안미란. 견정혈 정도는 침을 놓을 수 있기에 송재균에게서 시침 지시를 받았었다. 그러나 사고를 쳤다. 그래서 애가 바짝바짝 타던 차인데 다시 침을 놓으라니?
“족삼리에 침을 넣으면 해결될 겁니다.”
“선생님!”
“시간이 없습니다.”
윤도가 침통을 밀었다. 안미란은 꿀꺽 긴장을 삼키고 호침을 잡았다.
“편안하게 찌르세요.”
윤도의 격려를 받은 안미란이 혈자리를 잡았다.
“조금 위가 좋겠어요.”
윤도가 자리를 수정해 주었다. 그녀의 침이 족삼리로 들어갔다. 경직된 손가락이지만 혈자리는 놓치지 않았다.
“으음...”
오래지 않아 환자가 정신을 차렸다. 그 사이에 견정혈의 침은 다시 꽂혀 있었다. 그 또한 윤도의 지시에 따른 안미란의 시침이었다.
“어, 머리 개운하네?”
환자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 그래요?”
안미란은 버벅거리는 목소리로 응대했다.
“어이구, 역시 나는 병원보다 한방이 잘 맞는다니까.”
환자는 가뜬하게 일어나 병실로 돌아갔다.
“선생님.”
안미란의 눈동자가 별처럼 찰랑거렸다. 그녀는 궁금한 게 많았다. 고마운 건 물론이었다.
“견정혈이 어깨의 우물이라는 건 알고 있죠?”
“네?”
“근막통증증후군은 어깨 근육이 마른 거잖아요. 그래서 물을 끌어들여 부드럽게 하려고 침이나 뜸을 뜨는 것이고.”
“네...”
“그로 인해 두통이 올 수 있으니 견정혈이 특효기는 한데 자칫 위경(胃經)과 문제가 되면 뇌빈혈을 일으킬 수 있어요. 방금처럼요.”
“아...”
“그럴 때는 족삼리에 침을 놓으면 좋죠. 뜸을 떠도 되고요.”
“아...”
“또 다른 일은 없나요? 어차피 나이트 뛸 건데 기왕이면 여러 케이스를 만나고 싶네요.”
“잠깐만요, 송 선생님께 보고하고 올 게요.”
안미란은 가뜬하게 복도로 나갔다.
“......!”
이번에는 송재균이 놀랐다. 들어가려던 마혁과 음료수 한 잔 하던 참이었다.
“한 방에 뇌빈혈 해결책을 내놓았다고?”
“네...”
“어디다 침을 놨어?”
“족삼리혈...”
“......!”
송재균이 경기를 했다. 근막통증증후군의 특효혈로 꼽히는 견정혈. 그걸 잘못 찌르면 뇌빈혈이 온다. 그건 송재균이 인턴 때 겪은 값 비싼 경험이었다. 그래서 생생하게 기억하는 비방(?)이었다. 그런 비방을 윤도는 대수롭지도 않게 잡아낸 것이다.
그것도 그 자신이 아니라 안미란에게 시침을 맡겼다. 혈자리의 위치까지 정해주면서...
“그렇게 빠르게 대처했단 말이지?”
“네...”
“환자는?”
“곧 괜찮아져서 병실로 올라갔어요.”
“......”
“오늘 나이트 근무하기로 했다고 환자를 많이 보게 해달라고 하던데...”
“마 선생님?”
안미란의 말을 들은 송재균이 마혁을 돌아보았다. 뭐 좋은 케이스 없습니까? 그런 눈빛이었다.
명침은 도전을 즐긴다-2
명침은 도전을 즐긴다-2
“장난이라면 그만 하는 게 좋아. 그 친구, 과장님 레벨 이상 같아.”
마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어쩌다 몇 건 올린 거지 진짜 편작이나 화타일리는 없잖습니까?”
“과장님 아시면 좋아하지 않을 걸.”
“손해볼 거 없잖습니까? 침술이 끝내준다면 환자들 다 고쳐놓을 테니까 일 줄어들어 좋고 아니라면 그 친구가 원하는 공부가 되는 것이니...”
“......”
“마 선생님.”
“그럼 301호 데려가 봐. 내가 시침을 맡았는데 오늘 저녁 침은 건너뛰어도 될 것 같아서 그냥 두었거든.”
“소아과요?”
“조영우 알지?”
“아랫배에 붓기가 있고 소변 잘 못 보는 아이 말이죠?”
“그래.”
“소아과라... 딱이네요. 중환자도 아니면서 어린이... 애들 침은 쉽지 않으니...”
송재균은 안미란을 향해 바로 지시를 내렸다.
“그 친구 301호로 데려가. 그리고 그 친구가 뭘 시키면 하지 말고 안 선생이 시켜. 지금 누가 연수를 받는 거야?”
송재균이 소리를 높였다.
“죄송합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마. 내가 신주혈 몇 번 잡았는데도 큰 차도가 없으니 쉽지 않을 거야.”
마혁이 웃었다. “알겠습니다.”
“아, 만약, 만약에 말이야 그것도 해결하면 박윤혜 여사 있지? 508호?”
송재균은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오더를 보태놓았다.
“다리 못 펴는 환자요?”
안미란이 물었다. “그 케이스도 맡겨봐.”
“선생님, 그 분은 과장님이...”
“내 말 안 들려?”
“알겠습니다.”
안미란이 나갔다.
“뭐 이 정도면 깝치다 두 손 들겠죠?”
송재균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스쳐갔다.
“508호까지는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심하긴요? 연수 시키는 거라니까요.”
“난 그만 들어갈게. 아무튼 사고 안 나게 잘 해.”
마혁은 손을 들어 보이고 멀어졌다.
송재균은 다리를 꼬고 황제내경을 펼쳤다. 그도 실은 침이라면 소질이 있는 편에 속했다. 그래서 조 과장의 인정도 받고 있었다. 그런 차에 등장한 윤도가 분위기를 흐려놓았다.
뇌빈혈만 해도 그렇다. 그 주변의 수련의들 중에서 그걸 아는 사람은 마혁 뿐이었다. 덕분에 송재균이 설명을 하면 인턴들은 감탄사 토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윤도는 단 한 방에 해결이었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윤도가 신침이 아니라 신삥이라는 걸 입증하고 싶은 것이다.
‘이쯤 되면 손을 들겠지. 매번 행운이 따라줄 리 없잖아?’
송재균은 기대감어린 눈빛을 번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