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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영우야. 밥 먹었어?”
소아병실로 들어선 안미란이 한 꼬마에게 친한 척을 했다.
“네.”
꼬마가 대답을 했다. 아이는 제법 씩씩한 편이었다.
“오줌은?”
“싸러 갔는데 몇 방울 밖에 못 쌌어요. 하느님이 오줌 꼭지를 잘 안 풀어줘요.”
“이 선생님이 하느님 대신 시원하게 풀어줄 거야.”
안미란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간호사 선생님이 오늘은 침 끝이라고 했는데?”
“밤에 자다가 쉬 마려울까봐. 그럼 나쁘잖아?”
“네.”
“이 선생님이 우리 병원 침 대장이거든. 한 번 믿어봐.”
“그럼 약속.”
아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하세요.”
안미란이 윤도 등을 밀었다. 손가락을 걸고 진맥을 잡았다. 맥은 진단과 같았다. 아랫배가 부어오르고 소변줄이 막힌 경우였다. 소화불량으로 인한 소변의 애로였다. 기록을 보니 신주혈에 뜸을 뜨고 침을 넣었다. 신주혈은 어린이에게 좋다. 처방 자체는 정확했다. 하지만 이 꼬마의 경우에는 다른 혈자리가 포인트를 쥐고 있었다. 명혈이라고 해서 100%는 것은 아니라는 반증을 보여주는 경우였다.
“또 엎드려요?”
진맥이 끝나자 꼬마가 물었다.
“많이 해봤잖아?”
안미란이 꼬마의 상의를 걷을 때 윤도가 그 손을 잡았다.
“엎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앉은 자세로 할까요?”
“그것도 필요 없습니다.”
“네?”
“발로 갑니다.”
“신주혈이 아니고요?”
“신주혈보다 더 좋은 혈을 찾았습니다.”
“......?”
“발가락의 은백혈입니다. 거기다 뜸을 뜨세요. 뜸 뜨기도 아주 쉬운 곳이죠.”
“제가요?.”
“아이가 안 선생님 좋아하잖아요? 그렇지? 이 선생님이 하면 더 좋지?”
윤도가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팔랑팔랑 흔들며 윤도를 지지해 주었다.
“......”
“시작하세요.”
윤도가 아이 발을 가리켰다. 안미란은 떠밀리듯 은백혈을 잡았다. 엄지발톱에 닿은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뜸 뜨기는 정말 쉬웠다.
“앗!”
뜸을 뜨는 동안 꼬마가 펄쩍 움직였다.
“왜? 뜨겁니?”
안미란이 물었다.
“아뇨. 오줌 마려워요.”
“조금만 참아.”
“안 돼요. 오줌 꼭지가 다 열린 거 같아요.”
“끝내주세요.”
윤도가 안미란에게 말했다. 환자가 반응하는 이상 굳이 시간을 채울 필요는 없었다. 꼬마는 로켓처럼 화장실로 달렸다. 잠시 후에 나온 꼬마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또 꼭지가 안 열렸어?”
“아뇨.”
꼬마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너무 빨리 열려서 바지에다 좀 쌌어요.”
꼬마가 바지섶을 잡아보였다. 거기 오줌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영우야, 세상에 우리 애 배도 들어갔어요?”
지켜보던 보호자가 아이 배를 까며 소리쳤다. 윤도는 슬쩍 복도로 자리를 비켰다. 혼자 남은 안미란은 공치사를 받느라 바빴다. 공치사는 많이 받아야한다. 치료 성공에 대한 환자나 보호자의 인사는 중독성이 강하다. 의술을 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흠뻑 중독되는 게 맞았다.
“선생님!”
잠시 후에 안미란이 복도로 나왔다. 그녀는 더 할 수 없이 상기되어 있었다.
“다음 환자 봐야죠.”
“잠깐만요. 설명 안 해주세요?”
“설명이 뭐가 있어요? 그 정도는 다 알잖아요?”
“머리에야 들었죠. 그게 환자나 질병하고 매칭이 안 돼서 그렇지...”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이런 게 있어요. 병명에 너무 얽매이지 말자.”
“병명?”
“마찬가지로 어린이라고 신주혈에만 목 맬 필요 없어요. 가끔은 상품보다 사은품이 더 좋은 경우도 있잖아요.”
“우와... 비유가 딱이네요.”
“다음 환자 없어요?”
“있기는 한데...”
“그럼 가요. 제 동생이 좀 있다가 오기로 해서...”
“......”
안미란은 양심에 찔렸다. 송재균의 의도를 알기 때문이었다. 이건 연수가 아니라 시기이자 갑질이었다. 안미란의 머리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온 금발의 미녀가 들어있었다.
‘도브레브...’
그녀는 3개월 전에 침술연수를 마치고 갔다. 그때 송재균은 굉장히 친절했었다. 직접 데리고 다니며 침과 뜸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어려운 일은 시키지도 않았다.
하지만!
안미란은 어쩔 수 없었다. 송재균은 침구과 레지던트 차석. 매사 그와 함께 한다. 그러니 자칫 눈 밖에 나면 앞으로의 레지던트 과정까지 내내 고달플 수 있었다.
더불어 윤도에 대한 호기심도 한몫을 했다. 맥만 짚어도 진단이 나오는 사람. 혈자리를 귀신처럼 읽어내는 사람. 나아가 장침을 신들린 듯 펑펑 꽂아대는 이 사람...
‘어쩌면 이 또한 고쳐낼 지도...’
긍정과 호기심이 세트가 되어 안미란의 등을 밀었다.
“따라오세요.”
결국 안미란이 앞장을 섰다. 송재균이 의도하던 508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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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혜.
50초의 그녀는 유명한 의류 디자이너였다. 재봉질도 직접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일이 밀릴 때는 6일 밤낮으로 재봉틀을 밟았다고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다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게 되었다. 병원에 갔지만 정확한 진단이 나오지 않았다. 물리치료와 신경치료를 받아도 큰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지인의 소개로 한방병원을 찾았다. 입원한지 나흘.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자유롭지는 못했다.
침구기록을 보니 양릉천, 중완, 양지에 뜸 치료가 진행 중이었다. 침은 기문, 거료, 위중과 위양을 중심으로 시침이 되었다.
진맥을 했다. 누워있던 환자라 맥은 대략 낮았다. 진단과 침구는 일치했다. 덕분에 다리의 통증도 꽤 가셨다는 환자의 말이 그것을 입증해 주었다.
“이 분이 우리 과장님이 모셔온 분이세요. 특별히 몇 분씩 골라서 시침을 하고 있는데 한 번 맞아보실래요?”
안미란은 환자와 윤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말은 곧 윤도에게 시침을 해달라는 뜻이기도 했다. 윤도가 끄덕 고갯짓으로 답했다. 안미란의 얼굴이 확 펴졌다.
“굉장히 젊으시네?”
“그거 아세요? 남해 여객선 사고 때 침 하나로 일곱 사람을 살린...”
“어머, 이 분이 그 분이세요?”
환자도 반색을 했다. 다행히 뉴스를 들은 모양이었다.
“명침 같아서 나도 한 번 찾아갈까 생각했는데...”
환자가 윤도 손을 잡았다.
“그럼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윤도가 침통을 꺼내놓았다. 장침 두 개였다.
‘두 개...’
안미란은 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조 과장의 시침을 떠올렸다. 그 부위는 기문, 거료, 위중, 위양, 경문, 지실, 신수, 천종 등의 혈자리였다. 그런데 윤도의 침은 꼴랑 두 개...
“옆으로 누워주시겠습니까?”
윤도가 환자를 도와 자세를 잡았다. 거기서 안미란의 눈에 빡센 경련이 일었다. 윤도의 침은 경문과 고황혈 두 곳이었다.
경문은 보통 팔을 위로 올리고 혈자리를 잡는 곳이었다. 하지만 윤도는 엎드린 채 주저없이 침을 넣었다. 안미란이 보기에는 신기에 다름 아니었다. 왼손이 혈자리 주변 긴장을 푸나싶더니 어느새 혈자리를 차지해버린 것이다.
“아픈 다리 뻗어보세요.”
윤도가 고황에서 침 끝을 조절하며 말했다. 환자는 조심스레 다리를 뻗었다.
“좀 더요. 힘주지 마시고 자연스럽게...”
“응... 어머!”
다리를 뻗던 환자가 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일자로 뻗쳐져 있었다.
“잠깐만요. 조금 더 뻗어보세요.”
침끝을 돌려 경문혈을 조절한 윤도가 다시 말했다.
“......!”
발을 다 뻗은 환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큰 통증도 없이 다리가 쭉 펴진 까닭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윤도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치료는 한의사의 본분이니 따로 생색낼 이유도 없었다.
딸깍!
윤도가 복도로 나왔다. 안미란도 따라 나왔다.
“선생님!”
“저 좀 쉬어도 될까요? 동생이 왔다는 문자가 왔어요.”
“그건 문제 없어요. 그런데...”
“고황혈이 궁금해서요?”
“네... 우리 시침 기록에는 없었는데...”
“다른 분은 아마 고황혈 대신에 천종혈을 택한 것 같습니다.”
“......”
“경문혈을 보니 굉장히 단단하게 뭉쳐 있어요. 그러니 다리를 펴기 어렵지요. 고황혈을 다스리면 경문혈이 느슨해지는 건 알죠? 두 혈은 서로 잡아당기는 관계거든요. 그 원리에 따라 한 번 놔본 겁니다. 예상대로 경문혈이 잘 풀려서 결과가 좋았네요.”
“......!”
“그럼 잠깐 다녀올게요.”
윤도가 돌아섰다. 그 길로 나가 윤철에게 산해경과 신비경을 받았다.
“형!”
윤철이 몸을 꼬며 운을 뗐다. 뭔가 아쉬운 게 있을 때면 나오는 동작이었다. 그게 뭔지는 감을 잡고 있었다. 산해경 심부름을 시켰더니 스포츠카 타고 가도 되냐고부터 묻던 윤철이었다.
“하루만?”
“응!”
윤철은 숨이 넘어갈 듯 대답했다. 스포츠카를 하루만 타게 해달라는 아부였다.
“이번 학기 과 톱 먹으면 생각해본다.”
“형!”
“고생했다. 그만 가봐!”
3만원을 찔러주고 등을 밀었다. 수고한 동생과 커피 한 잔 마셔줄 시간도 없는 윤도였다.
회의실 구석을 차지했다. 잘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한방병원이다 보니 나이트라 해도 일반 대학병원보다는 나았다. 대학병원이라면 응급실만 해도 미어터진다. 운이 좋아 환자가 적은 날도 있기는 하다. 윤도의 친구 중에 H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의사가 있었다. 전문의 따고 가려고 아직 병역 의무를 남겼다. 응급실에 근무하게 되면 전쟁터를 방불케한다고 했다.
이리 저리 뛰다보면 아침이 어떻게 오는 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무 데나 주저앉으면 잠이 온다고 했다. 운이 좋은 건지 윤도의 첫 나이트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건 아니었다.
비밀스레 산해경을 뒤질 때 안미란에게서 응급 콜이 들어왔다.
응급 콜!
명침은 도전을 즐긴다-3
명침은 도전을 즐긴다-3
“......!”
한달음에 입원실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좋지 않아보였다. 침을 놓은 사람은 송재균이었다. 안미란이 옆에서 수행하다 일이 꼬이자 윤도를 부른 것이다.
“......!”
윤도를 본 송재균도 인상을 구겼다. 그로서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다.
“선생님.”
안미란이 송재균을 바라보았다. 환자는 50대의 남자. 침대에 기절해 있었다. 침은 명치와 배꼽 사이에 꽂혀있다. 즉 중초혈이었다. 병실은 암 환자들이 입원한 곳. 중초를 찔렀다면 소화 문제로 시침한 듯 보였다.
“누가 채 선생 부르랬어?”
송재균의 목소리에 각이 섰다.
“하지만...”
젠장!
송재균의 얼굴에 비친 단어였다. 밤 11시가 넘어 다른 환자들은 대개 잠이 든 상황. 송재균의 얼굴에는 어둠처럼 깊은 낭패감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윤도가 함부로 나설 수는 없었다. 윤도는 연수생 신분이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럼 마 선생님이나 과장님께...”
안미란이 전화를 꺼내들자 송재균의 손이 그걸 막았다.
젠장!
그 단어가 송재균 얼굴에 한 번 더 새겨졌다.
“선생님...”
“채 선생.”
송재균이 윤도를 불렀다.
“암으로 침구시술 받는 분이셔. 신경이 예민해서 뇌빈혈이 온 거 같은데 한 번 보라고.”
송재균의 어투는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잘난 레지던트의 자존심과 돌연한 사고 앞에서의 낭패감 사이에서 자존심을 강조한 포지션이었다.
“제가 감히 낄 자리가 되겠습니까?”
환자를 돌아본 윤도가 담담하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