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싼 똥을 왜 내가 치워야하는데?>
<잘난 당신이 치워.>
윤도의 마음이었다. 환자를 두고 실랑이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예 하고 넙죽 받고 싶지도 않았다. 윤도의 장침은, 자존심까지 버리는 침이 아니었다. 응급환자라면 또 몰라도...
젠장!
한 번 더 뒤통수를 얻어맞는 송재균.
그 사이에 환자의 안색이 변하고 호흡이 낮아졌다. 뇌빈혈은 대개 어찔하다 마는 경우가 많다. 사람에 따라 잠시 의식을 잃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었다.
“선생님!”
안미란의 목소리가 조금 더 다급해졌다. 경련이었다. 환자의 발에 작은 경련이 보였다. 이렇게 되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채 선생.”
“......”
“위가 굳은 것처럼 단단하고 소화도 안 된다기에 중초혈에 시침하고 반응이 좋지 않아 응급으로 액문혈을 잡았어. 조 과장님 퇴근할 때 웬만한 응급은 채 선생과 상의하라는 말이 있었으니 확인 좀 부탁하자고.”
송재균의 목소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아까처럼 자존심 앞세우는 잘난 레지던트의 각이 아니었다.
“정말 그렇게 지시하셨습니까?”
일부러 확인하는 윤도.
“그래...”
“그럼 진작 말씀하시지 그랬습니까?”
“......”
멋대로 찌푸려진 송재균의 얼굴. 그 어깨가 절은 배추잎처럼 축 처지는 게 보였다. 완전히 꼬리를 내리는 것이다.
“그럼 맥부터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아무 거든 빨리 좀...”
송재균의 손이 환자를 가리켰다. 그제야 윤도가 팔을 걷고 나섰다.
“송 선생님 조치는 맞았습니다.”
맥을 짚은 윤도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중초혈과 액문혈.
응급조치 혈자리가 맞았다. 어쩌다 중초혈자리를 잘못 짚으면 기절을 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액문에 침을 놓으면 즉시 낫는다. 그러니까 이론상, 송재균의 조치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 채 선생도 모른다는 거야?”
“다만 액문혈이 움직였습니다.”
“......?”
“암 환자잖습니까? 원래는 송 선생님이 취혈한 곳이 액문혈 맞습니다. 약지와 새끼손가락 사이...”
“그래서요? 어떻다는 거야?”
“쉬잇!”
윤도가 손짓을 하고 침통을 열었다. 그 손에 잡혀 나온 건 장침이었다. 침은 중지와 약지 사이를 노리고 있었다.
“채 선생.”
“이 분의 액문혈은 일반적 기준과 달리 이 곳에 위치합니다. 그러니 어쩌면 중초혈도 조금 아래가 아닐지...”
의미심장한 비유와 함께 윤도의 침이 들어갔다. 그러자 환자가 서서히 의식을 찾았다. 창백하던 얼굴 빛과 함께 약한 경련도 사라진 후였다.
“다행이네요. 그럼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윤도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
송재균은 소리없이 경련하고 있었다. 환자의 경련이 옮겨온 듯 했다. 혈자리란 오묘하다. 사람에 따라 취하고 체형이나 나이까지도 고려해야했다. 어쩌면 안미란 때문이었다.
옆에 붙어서 채 선생님은, 채 선생님은 하며 광신도처럼 쫑알거렸다. 그녀 앞에서 위엄을 찾고 싶었다. 침술 하나는 자신도 채윤도에게 못지 않다는 레지던트의 위엄... 그게 화근이었을까?
‘아니...’
송재균이 고개를 저었다. 그 요인은 절반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환자의 특이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두 개의 혈자리가 다른 사람과 달리 치우쳐 있다던 과장의 코멘트가 떠올랐다.
‘젠장!’
한 번 더 그 말을 곱씹었다. 중초혈의 느낌이 최적이 아니었을 때 ‘예외’를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보면 액문혈도 같은 느낌이었다. 송재균은 그 같은 ‘느낌’의 덫에 걸린 것이다.
그럼에도 채윤도는 송재균을 짓밟지 않았다.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빈정을 날리고 목에 힘을 줄 수도 있었던 상황. 그런데 송재균의 자존심을 살리라고 힌트까지 주고 가버렸다. 침술 못지않은 칼날 감정 제어. 오싹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중초혈도 조금 아래가 아닐지.’
윤도의 조언이 메아리를 울렸다. 그 말은 곧 중초혈자리를 조금 아래로 잡으라는 뜻이었다. 환자가 우선임으로 침을 다시 넣었다.
“......!”
그 느낌에 놀라고 말았다. 침은 너무나 부드럽게 들어갔다. 틀림없는 혈자리라는 증명이었다.
“어이구, 속 시원하네.”
환자가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혈자리 부근을 눌러보니 굳은 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젠장!’
이번 젠장은 인정이었다.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침술이었다.
“와아!”
환자가 편안해하자 안미란이 박수를 쳤다. 송재균에게는 참 의미 없는 박수였다. 화장실로 나온 송재균은 흐르는 물에 머리를 적셨다.
‘대체 뭐야?’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 위로 윤도 얼굴이 비쳤다. 옛 의서의 전설에나 나옴직한 침술...
그러나 명백한 현실. 송재균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마혁의 말처럼 윤도는,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딸각!
회의실 책상으로 돌아온 윤도는 신비경을 꺼냈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분위기상 더는 윤도를 찾을 것 같지 않았다.
산해경을 펼쳤다. 북산경의 마성산이었다. 마성산에는 금이 많았다. 그 금바위 위에 윤도가 찾는 게 있었다.
하얀 머리에 푸른 몸, 노란 다리를 가진 새 ‘굴거’였다. 이 새를 달여서 먹으면 몸의 혹덩이를 없애준다. 이것으로 자궁근종의 비상용을 삼을 생각이었다. 일단은 침이었다. 그게 안 되면 최후의 보루가 되는 것이니 든든했다.
끼욱!
굴거가 울음을 남기고 거울 밖으로 나왔다. 윤도의 약재분석이 가동되었다.
[원산] 산해경
[약재수령] 6년
[약성함유등급] 上中품
[중금속함유] 무
[곰팡이독소] 무
[약재사용유무] 가능
[용법용량] 새의 배를 갈라 내장기관만을 사용한다. 수수가루 반죽을 입힌 후에 태워 재를 복용한다. 하루 2회로 나누어 아침과 잠들기 전에 마신다.
[약효기대치] 上中
수수가루가 나왔다. 수수는 한방에서 따뜻한 음식으로 분류한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의학의 기본은, 뜨거운 것으로 찬 병을 잡고 찬 것으로 뜨거운 병을 잡는 것이다. 음양이론이다. 황제내경에도 찬 것은 뜨겁게 하고 뜨거운 것은 차게 하라는 말이 나온다.
근종은 뜨겁다. 몸에 열을 내게 한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찬 기를 가진 기장 가루가 나오는 게 맞았다. 그런데 열성 곡류인 수수가 나왔다면...
‘이독제독(以毒制毒)...’
굴거의 약재성질이 나왔다. 열로써 열을 다스리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침통에 시선이 갔다. 장침 하나를 꺼내들었다. 약재가 열로써 환부를 노린다면 장침 또한 화침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럴까? 윤도 손가락에 뜨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알아서 반응하는 것이다. 어느새 아침이 코앞이었다.
유수미 환자의 첫 시침...
윤도는 충혈된 눈으로 침대에 걸린 환자의 네임카드를 보았다. 나이트 근무답게 밤을 꼴딱 세운 윤도였다. 굴거는 아침에 윤철을 불러 냉장포장으로 보내두었다.
일단은!
영약 없이 시작하기로 했다. 비상용이라고 생각하니 나쁠 것도 없었다.
<유수미 F/38>
그녀의 손목에 띠가 둘러져 있다. 혹시라도 동명이인, 혹은 다른 환자에게 진료가 행해질까 봐 정착된 시스템. 이제는 종합병원에서 당연한 풍경이 되었다.
침은 정말 원샷으로 갈 생각이었다. 낙점은 관원혈이었다. 환자의 요청이 없다면 중완, 관원, 중극, 귀래, 곡골에 시침할 생각이었다. 그 중 하나만 고르니 관원혈이 되었다. 진맥으로 보아 자궁근종의 시작이 되는 혈자리였다.
관원혈!
‘잘 해보자.’
윤도가 속삭였다.
진맥은 오래했다. 침을 네 번 찌른다 했으니 장침의 효과와 보·사법을 신중히 고려해야 했다. 결론에 도달한 장침이 들어갔다. 손가락은 저절로 뜨끈했다. 침 끝에 손가락의 기운이 전달되었다. 의심할 것 없이 화침(火鍼)이었다.
“끝났습니다.”
침을 넣은 윤도가 말했다.
“어머, 벌써요? 큼큼.”
긴장하고 있던 그녀가 눈빛을 세웠다. 환자는 목이 쉬어 있었다. 편도가 살짝 부어 입맛도 없다고 했다. 그래도 열은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장침은 배꼽에서 여자의 둔덕 뼈 사이를 다섯 등분한 지점에 버티고 있었다. 관원혈은 정기(精氣)의 물류창고 같은 곳이다. 시작부터 바로 잡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침의 말단까지 넣지는 않았다. 고작 1mm도 안 될 깊이를 아낀 것이다.
“저녁 때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할 겁니다.”
“어머!”
“하혈도 좀 나올 겁니다.”
“어머, 그날은 삼사일 남은 거 같은데?”
“근종을 이루는 상한 피가 나오는 것이니 걱정할 거 없습니다.”
“네에...”
“피가 나오기 시작하면 생리대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치료기간 동안 음식을 조심하시고 무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음식은 걱정마세요. 저 나름 유명한 요리사예요.”
환자 말소리에 자부심이 실렸다.
설명을 끝내고 장침을 뽑았다. 침 끝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어머!”
시침이 끝났을 안미란이 들어섰다. 환자를 돌보고 오는 눈치였다. 침술을 보지 못해 발을 구르는 안미란. 침술 욕심이 많은 모습이 괜히 귀여워보였다.
그런 그녀를 위한 타임도 주었다. 드물게 큰 혈자리를 가진 환자가 있었다. 요즘은 거의 사라진 1원짜리 동전만 했다. 취업을 위해 다이어트 침을 맞으러 온 졸업반 여대생이었다. 윤도에게 맡겨진 시침을 안미란에게 떠넘겼다.
퐁당퐁당!
거의 그 수준이었다. 침에 익숙하지 않은 안미란조차 눈감고 침을 놓아도 되었다.
“와아!”
그녀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저녁 시간, 돌아오는 길에 한의원 공사현장에 들렀다. 수수를 사려면 어느 역에서 내릴까 생각하다 경복궁 역 이름을 보게 된 것이다.
“......!”
현장에 도착한 윤도가 얼른 몸을 숨겼다. 부용이 있었다. 공사감독과 함께였다. 그녀는 공정을 꼼꼼히 체크하고야 현장을 떠났다. 그제야 윤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원장님.”
감독이 반색을 했다.
“퇴근 안 하세요?”
윤도가 물었다.
“아, 예... 인부들 보내고 뒷정리 좀 하느라고요. 오늘 공정에 하자가 있는 지도 체크해야 하고...”
“방금 이부용 씨가 있는 거 같던데...”
“보셨어요?”
“맞나요?”
“네,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오셔서 체크하세요.”
“......!”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 그 바쁜 사람이?
“원장님이 굉장히 소중한 분이라고 절대 하자가 나면 안 된다면서...”
“......”
한 번 더 놀랐다.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돈 많고 능력 있는 여자. 돈질로 밀어붙여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하나 몸소 챙기고 있다니...
“하핫, 이거 원장님께는 말씀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
“안 쪽 진행상황 보실래요?”
“예? 예...”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는 소리없이 변신해 있었다. 접수실과 대기실, 진료실에 새 옷이 입혀지고 있었다. 현대와 한의사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장식이었다.
“좋죠? 제가 보기에도 공간 구성이 탁월합니다. 실내디자인 팀 말을 들으니 이부용 대표님이 네 번이나 캔슬 놓고 다섯 번째 만에야 오케이 사인했다고 하더라고요.”
“예...”
이번에는 약제분석실, 즉 연구방의 문을 열었다. 그 공간도 놀라웠다. 기계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지만 공간분할부터 마음을 사로잡았다.
‘와아.’
감독에게 방해가 될까봐 그쯤하고 집으로 향했다.
대충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영약재료를 꺼냈다. 가장 관심이 가는 건 치아재생 약재였다. 양이 적어 딱 한 명의 이빨을 나게 하고 미량 남을 정도였다.
다른 하나는 산해경의 청요산에서 구해온 순초였다. 얼굴빛이 고와진다는 영약이었다.
‘부용 씨...’
순초의 주인은 부용으로 정했다. 개업이라는 빛나는 선물을 안겨준 그녀. 피부병이 나았지만 아직은 살결에 거친 맛이 남았다. 그녀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간밤에 확보한 굴거의 법제(?)를 시작했다. 하품이 나오는 걸 꾹 눌러참았다. 법제는 경건하게 해야 한다. 피로 따위가 핑계가 될 수는 없었다.
법제에 들이는 정성 하나하나가 질병을 퇴치하는 전사로 승화되는 거니까.
경옥고와 신침법神枕法 비방에 기대어.
경옥고와 신침법神枕法 비방에 기대어.
다음 날 아침, 윤도 책상에 테이크 아웃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안 선생님이 주는 거예요?”
윤도가 안미란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 역시 윤도에게 주기 위해 한 잔을 사들고 오던 참이었다. 윤도는 쌍코피가 아니라 쌍커피를 들고 마셨다.
자궁근종 시침 2일 차.
이번에는 마혁과 송재균, 안미란 등의 수련의들이 참관을 했다. 특별한 태클없이 무난하게 넘어갔다. 그 하루 동안 송재균은 윤도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짜투리 시간의 지시사항을 내려달라고 할 때도 그랬다.
“지금 치료나 전념해.”
말소리는 여전히 퉁명했지만 까칠함은 많이 무뎌져 있었다.
“저기...”
“왜?”
“혹시 아침에 커피...”
“커피가 왜?”
“아닙니다.”
윤도는 더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