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침 3일 차.
내원하여 침대에 누운 환자가 경과보고를 해왔다.
“이틀 동안 피가 계속 나왔어요. 냄새도 좋지 않고요. 저 잘못되는 거 아니죠?”
“근종이 녹아나오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오늘도 윤도의 장침은 고집스레 관월혈이었다.
“오늘도 피가 나올 겁니다. 하루 남았으니 주의사항 잘 지키세요.”
“오늘도 피가 나온다고요?”
“예.”
“치료는 잘 되고 있는 거죠?”
“걱정 되요?”
“솔직히...”
“유 선생님.”
윤도가 환자를 바라보았다.
“네?”
“초밥요리사라고 하셨죠?”
“네...”
“제 생각인데 치료와 요리는 같은 맥락이 아닐까합니다. 좋은 요리사라면 재료만 봐도 좋은 초밥이 나올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마찬 가지로 저도 제 침이 환부를 제대로 다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신뢰감이죠.”
“......”
“편안하게 저를 한 번 믿어보세요. 손님들이 선생님 손맛을 믿고 초밥을 먹듯이...”
“알겠어요.”
그녀가 웃었다. 이제는 긴장이 제법 풀린 얼굴이었다.
병실을 바꿔 소아과 회진을 도왔다. 윤도가 도와준 영우는 퇴원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복으로 입으니 한결 씩씩해 보였다.
‘이제 오줌 콸콸 싸고 튼튼하게 자라렴.’
윤도가 혼자 속삭였다.
어린 환자들 중에서 겁이 많은 경우에는 장침대신 호침을 사용했다.
“어느 걸로 맞을까?”
선택권을 준 것이다. 아이들은 당연히 호침이었고, 자신들이 선택한 것에 책임을 졌다. 가슴 부위 위쪽으로는 신주혈, 허리 아래 쪽으로는 주로 명문혈을 다스렸다. 누가 뭐래도 아이들은 신장의 힘으로 몸을 지킨다. 특별하지 않은 질환은 신주혈로 해결이 되었다.
그렇게 또 하루의 임상연수가 끝나갈 때였다. 마혁 등의 수련의들과 함께 간식을 먹을 때 부용에게서 전화가 들어왔다.
“선생님.”
“어, 이 대표님.”
윤도가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저번에 저희 아버지께 인사 드리고 싶다고 하셨죠?”
“네...”
“혹시 오늘 시간 되세요? 저 지금 아버지 회사인데 오늘 시간이 되신다고 하네요.”
“잠깐만요.”
윤도가 송재균을 바라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가봐.”
통화를 눈치챈 송재균이 승낙을 해주었다.
“됩니다.”
윤도가 통화를 이었다.
“그럼 저녁에 뵈어요. 차를 보낼까요?”
“아뇨. 문자 넣어주시면 제가 가죠.”
“알겠습니다.”
부용의 전화가 끊겼다.
이태범 회장...
특별 제대에 대한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 군인 신분에는 세상을 안겨준 것과도 같은 전역. 이유여하를 떠나 인사를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던 윤도였다.
거기에 더불어 부용과의 개업합작... 그 또한 이 회장이 반대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윤도가 영약재료를 열었다. 잘 간직해둔 약재로 환을 만들었다. 잇몸 뼈가 좋지 않아 임플란트를 하는 데 애로가 있다던 이 회장이었다.
좋은 선물이 될 게 틀림없었다. 윤도는 적어도 경우를 아는 한의사였다.
“채 선생님!”
약속된 요리집에서 부용이 손을 들었다. 이 회장은 아직 도착 전이었다.
“바쁘신데 죄송해요.”
“별 말씀을... 대표님이야 말로 눈코 뜰 새 없을 텐데...”
“대표님이 뭐예요? 그냥 부용 씨라고 부르라니까요.”
“그래도...”
“아니면 저 일어나요. 선생님까지 대표님이라고 하면 저 먹다 체한다고요.”
“체하면 내관혈을...”
“선생님!”
“알겠습니다. 대표...”
“또!”
“부용 씨.”
“그래요. 듣기 좋잖아요?”
부용이 만족스레 웃었다.
“......”
“한병병원 연수는 어때요?”
“재미납니다.”
“어머, 그 대답 대박이네요. 대개는 할만합니다라고 말하는데...”
“환자를 고치는 기쁨이란 의술을 가진 사람에게만 허락된 최고의 기쁨이니까요.”
“그 말도 완전 멋진데요? 설마 거기서 그냥 쭉 발 담그시는 건 아니죠?”
“물론이죠. 그런데 회장님은?”
“곧 오실 거예요. 치과에 가셨다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나 봐요.”
“임플란트는 해넣으셨나요?”
“그게 아직...”
“잘 됐군요.”
“네?”
부용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안 믿으실지 모르지만 제가 새 이가 나는 비방을 가지고 왔습니다.”
“새 이빨요?”
“네.”
“이빨은 영구치 빠지면 안 나오는 거 아닌가요?”
“보통은 그렇지만 예외도 있죠. 흰 머리가 되었다가 다시 검어지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정말, 정말이세요?”
“그렇다니까요. 여기 이 환인데 복용도 간단하게 맞추어놓았습니다.”
윤도가 약상자를 꺼내놓았다.
“알았어요. 잠깐만요.”
자리에서 일어난 부용이 핸드폰을 들고 나갔다. 그녀는 잠시 후에 돌아왔다.
“아버지와 통화해서 오시라고 했어요. 선생님이 이빨에 대한 비방을 가지고 왔다고 하니까 긴가민가하면서도 굉장히 기대하시는 데요?”
부용도 어느 새 들뜬 표정이 되었다.
“새 이가 난다고?”
잠시 후에 도착한 이 회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니까요. 채 선생님이 아버지께 드리는 비방이래요.”
부용은 윤도의 대변인을 자처했다.
“제 조기 전역을 위해 애써주신데 대한 작은 보답입니다.”
“그거야 채 선생이 우리 집안에 베풀어준 의술에 비하면 깜도 안 되는 일인 것을...”
“어렵게 찾은 비방인데 속는 셈 치고 시험해보십시오. 분명 이빨이 새로 날 겁니다.”
“허어, 채 선생 말이라면 무조건 믿겠지만 이 나이에 빠진 이가 난다는 건...”
“허황된 얘기 같지만 옛 의서에도 언급이 되는 일입니다. 일례로 경옥고가 있는데 과장이 심하긴 하지만 오장에 기운이 넘치고 백발이 검어지며 이빨이 새로 난다는 말이 나오지요. 양약(良藥) 24종과 독약(毒藥) 8종을 섞은 신침법(神枕法)이라는 신선의 베개 비방에도 검은 머리 희어지고 이빨이 새로 나며 180세까지 산다는 말이 보입니다.”
“신침법?”
“동의보감에 나오는 말인데 약재까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잣나무의 심본인 빨간 목재를 사용해 좁쌀 크기의 구멍을 무수히 뚫어 공기의 길을 내고 그 속에 양약과 독약을 각각 1냥씩 넣는다고 나오죠. 양약은 천궁, 당귀, 백지, 신이, 두란, 백출, 백봉령, 길경 등이고 독약은 오두, 부자, 여로, 반하, 세신 등입니다. 잠이 보약이다라는 뜻이겠지만 상세 기술한 것으로 보아 아주 황당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 비방의 맥을 찾았단 말인가?”
“그때와 지금의 약재가 모양은 같지만 지기가 약해, 약재성분을 맞추기 어렵기에 겨우겨우 맞췄습니다.”
“미안하지만 확실하신가?”
“예.”
“새 이빨이 난다... 허헛, 거 참...”
이 회장은 영약 상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식사가 나왔다. 윤도의 태산전자 의무실 근무 이야기도 자연스레 나왔다. 전용 진료실은 이미 마련이 되었다고 했다.
“이제 채 실장 방이니 언제든 와서 구경해도 좋네.”
이 회장이 웃었다.
채 실장.
이 회장이 정한 직함이었다.
일침 한의원 이야기도 나왔다. 이 회장은 그 한의원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잘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윤도의 처방 중에서 대중화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특허등록해 세계시장을 노려보라는 말도 나왔다. 모녀는 죽이 척척 맞았다. 윤도와는 달리 뼈속까지 사업가들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차가 나왔을 때, 부용이 화장실로 향했다. 그때 이 회장이 진지하게 운을 떼었다.
“채 선생.”
“예, 회장님.”
“그러고 보니 우리 인연은 굉장히 극적이군. 그렇지?”
“......”
“중국에 있을 때 진웅이의 위급 소식을 들었지.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네.”
“......”
“그러다 용한 한의사를 만나 목숨을 구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세상에서 가장 큰 사업 프로젝트를 따낸 기분이었네. 일에만 미쳐있던 내게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해준 날이었어.”
“......”
“거기에 더해 부용이의 병까지 고쳤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네.”
“......”
“이 약 말일세... 경옥고와 신침법의 비방으로 새 이빨이 나게 한다는...”
이 회장이 약 상자를 들어보였다.
“날 겁니다. 저를 한 번 믿어보시기 바랍니다.”
“믿어야지. 채 선생을 안 믿으면 누굴 믿을까? 게다가 나한테 장난을 칠 리도 없고...”
“......”
“혹시 이 약... 누구에게나 통하는 건가?”
“물론입니다만 어린 아이라면 용법이나 용량을 줄여야합니다.”
“성인이면 상관없다는 거군?”
“예...”
“제한 조건 같은 건 없나? 임플란트처럼 잇몸 뼈가 좋아야한다든지...”
“큰 건 없습니다만 왜 그러시는지...”
“미안하지만 이 약... 혹시 한 사람 분 더 만들 수 있을까?”
“그건 곤란합니다. 약재 수급에 문제가 있어 쉽게 만들 수 있는 약이 아니거든요.”
“그렇겠지? 새 이빨이 나는 비방니...”
“이유를 말씀해주시면 해보기는 하겠습니다만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아닐세. 그냥 물어본 거네.”
이 회장이 손을 저었다.
부용이 돌아온 후에 이 회장은 먼저 자리를 떴다. 또 다른 비즈니스가 줄을 선 모양이었다.
“선생님.”
“예, 부용 씨.”
“아버지 약 정말 고마워요. 잇몸이 부실해서 임플란트 하려면 1년 이상 치료하셔야 할 판이었는데... 먹는 거 제대로 못 먹으면서 만찬회나 연찬회 참석하는 것도 정말 고역이거든요.”
“그런데... 회장님께서 약이 더 없냐고 하시던데 아는 거 없어요?”
“아버지가요?”
“네.”
“어머, 그럼 중국 상무위원 주시려고 그러나?”
“상무위원이라고요?”
“아니에요. 그건 됐고요... 그보다 선생님, TV출연 한 번 해요.”
“TV 출연요?”
“왜 영화도 개봉 직전에 배우들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영화홍보하잖아요? 선생님도 그거 한 번 하시라고요.”
“그게 마음대로 되겠어요? 제가 유명한 한의사도 아닌데...”
“왜 이러세요? 선생님은 이슈가 확실한 분이에요. 게다가 실력도 출중하시고...”
“부용 씨.”
“우리 아버지, 아무나 좋아하는 사람 아니거든요. 아버지가 인정하시면 그건 끝난 거예요.”
“......”
“방송에 한의사들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 분들이 다 실력 있어서 나오는 줄 아세요?”
“아닌가요?”
“몇 분은 실력파지만 일부는 정치를 잘 하는 덕분이죠. 일부는 의술보다 화술이 더 뛰어날 걸요? 하지만 선생님은 실력으로도 꿀릴 게 없잖아요. 더구나 선전포고도 해야 하고...”
“선전포고라면?”
“이웃한 화암 한의원 말이에요.”
“그 쪽이랑 경쟁자로 싸울 생각은 없는 데요?”
“전쟁이 아니라 시너지예요. 모르는 사람은 선생님이 탁상명 씨 후광을 입으려고 그 근처에 개업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이삭줍기 말이에요. 그 반대라는 걸 보여주고 가자는 거죠.”
“제가 그 분 유명세하고 상대가 될까요?”
“죄송하지만 제가 광희대학병원 일도 다 모니터 하고 있거든요? 거기서도 신침을 떨치고 계시던데 뭐가 걱정인가요.”
“모니터라고요?”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선생님이랑 저랑 동업인데다 저한테 방송 매니지먼트 맡기셨으니까 고객관리 차원이에요.”
‘푸헐!’
“선생님은 상품가치 있어요. 미개봉 신상이잖아요. 제가 아는 피디 몇 명에게 섭외 타진해 봤는데 거품을 물고 덤비더라고요.”
“부용 씨...”
“맹세하건대 선생님 의술을 오락용으로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서 대한민국 의사와 한의사들에게 선전포고를 하세요.”
“선전포고요?”
“나 채윤도야. 대한민국 명품 명의의 콘셉트는 내가 바꾼다. 이제부터 대한민국 명의는 내가 기준이야.”
“어디서 많이 보던 카피 같은 데요?”
“어머, 그래요?”
부용이 수수하게 웃었다.
“그런데 제가 방송 제대로 할 수 있겠어요? 방송출연도 예능 DNA가 필요한 거 같던데...”
“제가 개인지도 해드려요?”
“네?”
“놀라시긴... 너무 걱정마세요. 제 일이 그거잖아요. 전문가들도 많이 알고 있고 피디들에게도 선생님 콘셉트에 맞추라고 대못을 콱 박아놓을 테니까요. 저 그 정도 능력 있어요.”
“......”
“허락하신 거예요? 개업식 하기 전에요.”
“......”
“뭐하시면 현서하고 가인이, 해피 프레지던트까지 프로그램에 지원해 줄 게요. 걔들은 선생님 진료 증인도 될 테니 든든하실 거예요.”
“부용 씨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어쩔 수 없군요. 한 번 도전해 보죠.”
“잘 생각하셨어요. 시청률 대박칠 거예요.”
“설령 대박을 쳐도 본업우선입니다. 그건 고려하세요.”
“역시 선생님은 마인드가 우월하다니까요.”
부용은 엄지를 세운 후에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약제분석장비 말이에요.”
“네.”
“그쪽 회사에서 장비사용법 연수를 해주겠다고 하시던데 선생님이 직접 하실 건가요? 아니면 사람을 따로 둘 건가요?”
“얼마나 한다던가요?”
“이틀이면 된다고 해요. 자기들이 세팅할 때 알려줄 수도 있지만 제대로 하려면 그 회사 연구실에서 받는 게 좋을 거라고.”
“그럼 두 사람으로 신청해주세요. 저하고 한약사가 갈 겁니다.”
“준비 되셨군요?”
“당연하죠. 제 일인 걸요.”
“알겠습니다. 조치해 두죠.”
“이건 선물이에요. 피부병 때문에 남은 잡티 없애는데 좋을 겁니다.”
윤도가 순초를 내밀었다.
“피부에 좋은 거라고요?”
“네. 아마 만족하실 겁니다.”
“와아! 고마워요.”
그녀는 자연산삼이라도 받은 듯 좋아했다. 하긴 그녀에게는 자연산삼보다도 더 좋은 효과를 줄 영약이었다.
‘역시 갈매도는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그녀와 헤어지고 혼자 생각했다. 부용 또한 갈매도에서 만났다. 재벌의 딸을 떠나 능력이 출중한 여걸. 정신병 치료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싸가지 없는 인간들이라면 봉투 하나 내놓고 말아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라니...
윤도는 피로가 쫙 풀려나가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