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265)

불짬뽕 땡기는 날-1

빠라빠라방!이른 아침, 윤도 핸드폰이 울렸다. 아직 6시를 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응?’

전화를 건 사람은 부용이었다.

‘부작용?’

덜컥 걱정이 앞섰다. 어제 전해준 영약 순초가 잘못된 걸까? 별 다른 일이 없고서야 새벽 시간에 전화를 걸 부용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기 무섭게 부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생님!”

“부용 씨...”

“어제 준 약 있잖아요? 피부에 좋다는...”

“네...”

“대박이에요. 영상통화하려다가 차마 못하고 사진 하나 보내요. 저 이 애기피부 계속 유지되는 거죠?”

“효과 좋아요?”

통화 중에 이미지를 열었다. 볼 피부가 뽀얗게 보이는 사진이었다. 역시 산해경...

“최고예요. 제가 솔직히 온갖 명품 화장품에 강남 피부과 특별 연고까지 바르고 있지만 깜도 안 돼요.”

“다행이네요.”

“고마워요. 피부병 때문에 남아있던 잡티와 흔적이 말끔하게 사라졌어요.”

“그럼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예요?”

“당연하죠. 여자에게 이보다 더 행복한 게 어디 있어요. 선생님, 혹시 이 약 더 구할 수 있나요?”

“아마...”

“분명 만들기 어려운 걸 테니 두세 사람 분만 부탁드려요. 이번 멤버 중에 피부가 거친 아이들이 두 명 있는데 그것 때문에 굉장히 의기소침하거든요. 이거면 해결이 될 것도 같아요.”

“약제비는 넉넉히 내실 거죠?”

긴장이 풀린 윤도가 조크를 건넸다.

“각 1천까지는 쏠 수 있어요. 그럼 저는 출근해야 해서 이만...”

각 1천만 원!

괜한 질문을 하고는 입이 벌어지는 윤도였다. 확실히 부용의 비즈니스는 사이즈가 달랐다. “어, 이렇게 일찍 나가요?”

“미안하지만 오늘은 얼굴 보며 놀라느라 늦은 거예요. 저 이 시간이면 사무실에 있을 시간이거든요.”

전화가 끊겼다.

“......!”

윤도는 말을 잊고 있었다. 순초의 효과 때문이 아니었다. 멤버의 치료비로 2천만 원을 쏠 수 있다는 말도 아니었다.

‘부용 씨...’

다시 보게 되었다. 먹고 놀아도 아무 지장이 없을 보장된 금수저 재벌의 딸. 그럼에도 저렇게 열심히 살다니...

‘젠장.’

윤도도 서둘렀다. 최소한 황금 다이아수저 부용보다 게으르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자궁근종 환자에게 마지막 침을 놓는 날. 일찌감치 끝내고 약재실과 탕제실 등도 둘러보고 싶었다.

빠라빠라방!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다시 전화가 울렸다.

‘또 누구?’

머리 물기를 대충 털고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는 광희대학병원의 조 과장이었다.

“채 선생, 일어났나?”

“과장님!”

“이거... 어쩐다?”

조 과장의 목소리가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 환자 말이야 유수미 씨...”

“예...”

“밤새 출혈이 심해서 반 기절 상태로 응급실에 들어왔다는 연락이 왔네.”

“......!”

“급히 좀 와봐야겠네.”

“......”

콰앙!

응급실.

그 단어가 윤도 뇌리 속에서 벼락을 쳤다. 오늘이면 오랜 생리통의 고통에서 벗어날 줄 알았던 유수미 환자였다. 그런데 응급실이라니? 응급실이라니?

**

“......!”

응급실에 들어선 윤도의 시선이 멈췄다. 침구과장과 부인과장, 내과과장 등이 나와 있었다. 부원장도 보였고 송재균과 마혁, 안미란도 보였다. 심호흡을 하고 인사부터 했다.

“왔군.”

부원장만이 알은 체를 해왔다.

“새벽 4시 넘어 구급차로 들어왔다네. 그때는 거의 기절상태였는데...”

조 과장 눈이 환자를 가리켰다. 지금은 대략 의식이 돌아와 있었다. 윤도가 진맥을 위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런데...

탁!

진맥을 보는 순간 윤도의 손을 쳐냈다.

“당신 뭐야? 오늘이면 끝날 거라더니?”

환자가 도끼눈을 부릅 떴다.

“오늘 끝날 수 있습니다.”

“됐어요. 나 어제 밤에 자다가 일어나서 죽을 뻔 했어요. 잠결에 하혈이 많아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하혈은 미리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자그마치 한 바가지나 쏟았다고요. 생리대로도 되지 않아 티슈 세 박스를 썼다고요!”

환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

“당신들, 다 각오해요. 나 정식으로 의료소송낼 거예요.”

“유수미 씨.”

부원장이 나섰다.

“됐다고요. 9시 넘으면 내가 아는 변호사 분이 오실 거예요. 그 분하고 말하세요.”

“변호사라고요?”

윤도가 시선을 세웠다.

“그래. 특히 채윤도 당신... 당신은 절대 용서 안 해. 나 어젯밤에 요단강을 두 번이나 들락거렸거든. 당신 나 가지고 장난친 거지?”

유수미 핏대 게이지가 올라갔다. 그런데 그 핏대에 응수한 윤도의 말이 상상초월이었다.

“요단강을 간 건 환자 분 책임입니다!”

“......!”

둘러서 있던 의료진들이 경악을 했다.

환자 책임!

무한도발에 가까웠다. 많은 하혈로 놀란 기절까지 간 환자. 119 구급대에 실려서 응급실에 들어왔다. 그런 환자를 잘 달래서 안정시키기는커녕 격한 자극을 하다니.

“채 선생.”

조 과장의 목소리가 준엄해졌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갑작스레 많아진 양의 하혈은 침과 무관한 것입니다.”

“어허...”“유수미 씨.”

윤도의 시선이 환자에게 돌아갔다.

“뭐죠?”

“새벽에 흘린 피는 앞 서 나온 피와 달랐죠?”

“뭐라고요?”

“잘 생각해 보세요. 분명 달랐을 겁니다. 더 검붉고 냄새도 더 안 좋았죠? 어쩌면 흰색 냉이 함께 나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봐요. 그럼 상처로 나오는 피가 향기가 나야하나요? 냉이 있는지 아닌지까지 체크하면서 출혈을 해야 하냐고요?”

“지금 확인하셔도 됩니다.”

“......!”

“채 선생.”

다시 조 과장의 견제가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책임회피나 환자 자극이 아니라 환자분의 확인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혈이 갑자기 많아진 건 침의 이상이 아니라 음식 때문입니다. 시간으로 보아 저녁 이후에 비위가 상하는 음식을 드신 거 같습니다. 그러니 붕루(崩漏)가 아니겠습니까?”

“붕루?”

내과 과장이 먼저 반응을 했다. 붕루는 자궁출혈 경우 중의 하나이다. 갑자기 많은 피가 나오게 된다. 이는 여러 경우가 있었다. 멀쩡한 사람도 포함된다. 그 외에도 거액을 잃거나 패가망신을 하는 경우, 뜻하지 않은 사별 등의 충격도 자궁출혈의 이유가 될 수 있었다.

“혹시 상한 음식이라도 드셨습니까??”

조 과장이 나서서 물었다. 환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뇌리 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가는 게 보였다.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는 건 틀림없어 보였다.

“잠깐 자리 좀 피해주세요.”

환자가 손을 내저었다. 안미란이 나서서 커튼 가림막을 쳐주었다. 안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그제야 과장들의 눈빛이 한 풀 꺾였다. 윤도의 침 부작용으로 몰아가는 듯 하던 아까와는 달랐다.

커튼은 금새 열리지 않았다. 10분 쯤 지난 후에 윤도가 커튼 안에다 말을 전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

“틀리지 않았다면 빨리 하혈을 막고 자궁근종 치료를 마저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3일 간의 공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

“유수미 씨. 일단 침을 맞고, 마음에 안 들면 그때 알아서 하십시요.”

“......”

“유수미 씨.”

윤도 목소리가 이어질 때 커튼 자락이 열렸다.

“좋아요. 일단 하혈만이라도 멈추게 해보세요.”

환자의 수락이 떨어졌다.

“한 번은 더 많이 나오게 될 겁니다.”

“뭐라고요?”

“마지막 치료입니다. 근종의 뿌리를 뽑는 날이거든요. 3일 간 병을 내보낼 길을 만든 겁니다. 거기로 뿌리를 내쫓자면...”

“아니, 이제 보니 무슨 수작이 있는 거 아니예요?”

“수작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출혈을 멎게 하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이 나온다고?”

“근종도 그 정체는 혈괴입니다. 마지막 덩어리가 터져 나오려니 출혈이 많을 수 밖에요. 잠깐이면 됩니다. 30분 정도...”

“됐어요. 다 필요 없으니까 앰뷸런스 불러줘요. 당신들로는 안 되겠고 다니던 대학병원으로 가야겠어요. 진료기록 건드리지 마세요. 조작할 생각 같은 거 말라고요.”

“유수미 씨.”

부원장이 나선 건 그때였다.

“3일 간 잘 치료를 받으셨다고요? 그렇다면 마무리를 맡겨보시는 게...”

“이제 부원장님까지요?”

“제가 추천한 사람입니다. 잘못되면 저도 책임을 지겠습니다. 설령 소송을 하시더라도 저를 상대로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 녹음해도 되겠어요?”

유수미가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상관없습니다.”

“과장님은 왜 안 끼세요? 특진 신청한 환자에게 이 한의사 소개한 사람이 과장님이잖아요?”

유수미가 침구과장을 향해 빈정을 울렸다.

“끼도록 하죠. 마무리 시침을 받으신다면...”

조 과장도 윤도 옆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환자의 각이 살짝 무뎌지는 게 보였다.

윤도가 침통을 꺼냈다. 이번에도 장침 하나였다.

“채 선생.”

조 과장이 신호를 줬다. 환자의 위장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윤도가 말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병소부터 잡는 게 옳았다. 하지만 윤도는 들은 척도 않고 혈자리를 풀기 시작했다.

“......!”

그 과정에서 윤도는 아찔함을 느꼈다.

‘굴거...’

그걸 가져오지 않았다. 비상용으로 준비해주었던 영약. 조 과장의 전화를 받고 챙겨두기까지는 했는데 급한 마음에 그대로 나와 버린 것이다.

‘젠장.’

가슴 속에 휑한 바람이 지나갔다. 딱 지금이 영약의 필요처였다. 그게 있다면 아주 깔끔하게 마무리를 할 수도 있었다. 윤철을 생각했다. 심부름을 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장침을 뽑아든 상황. 이제 와서 다른 이유를 댄다면 이 기회는 사라질 일이었다.

‘그대로 간다.’

꿀꺽!

마른 침이 넘어갔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그동안의 시침을 믿고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윤도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았다. 후웅후웅, 손가락 안에 열풍이 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영약의 도움을 받지 않은 시도. 어쩌다 보니 위기에 몰리긴 했지만 과정은 나쁘지 않았다.

눈앞에는 독기 오른 환자.

뒤에는 병원의 모든 스태프들.

쿵쿵거리는 심장과 달리 윤도의 손가락은 초연했다. 그 손을 닮기로 했다.

될까?

안 될까?

한의사는 자기 마음을 의심하면 안 된다. 의심하는 순간, 치료는 실패 쪽으로 기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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