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265)

수련의들의 최고봉. 그러면서도 공사를 잘 구분하는 마혁. 윤도도 싫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송재균의 진정성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싫습니다.”

윤도의 대답은 옆으로 새었다.

“......!”

마혁의 얼굴이 살포시 구겨졌다. 그 표정 위로 윤도의 뒷말이 이어졌다.

“도가니 말고 그 옆의 불짬뽕이면 좋겠습니다. 지금 기분 상 칼칼한 게 땡기고... 대신 신고식 의미로 제가 쏘게 해주신다면...”

“채 선생이 쏜다고? 우리 숫자가 많아. 내가 채 선생 소개하려고 다른 과 수련의들도 죄다 불렀거든.”

“괜찮습니다. 저도 사실 선생님들에게 잘 보이라고 부모님이 찔러둔 카드가 있거든요. 그런데 잘 보일 기회가 없었어요.”

윤도가 카드를 뽑아들자 송재균이 웃었다. 윤도 손에 들린 건 신용카드가 아니라 교통카드였다. 웃음 속에서 둘의 사이가 한 뼘 더 가까워졌다.

“자자자, 침술의 천재 명의가 내는 불짬뽕입니다. 배에 불 붙도록 많이들 드세요.”

번개 점심모임에서 송재균이 바람을 잡았다. 이제는 소탈함까지도 엿보이는 그였다. 처음에 까칠한 사람이 나중에 정들고 처음부터 친절한 사람은 나중에 적이 된다더니 이 경우가 그랬다.

짝짝짝!

박수가 나왔다.

인턴, 레지던트들과 불짬뽕을 먹었다. 매웠다. 어마무시 매웠다. 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조금 남은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것 같았다.

“저기...”

국물을 들이키며 윤도가 송재균을 돌아보았다.

“혹시 저번에 제 책상에 커피, 송 선생님이 갖다놓으셨나요?”

“아, 그거...”

“역시 그렇군요?”

“뭐 그냥... 연수생이면 우리 병원 손님인데 그동안 너무 빡빡하게 군 거 같아서...”

“그럼 오늘 식사 후에 정식으로 한 잔 사세요.”

“좋지. 두 잔도 문제없어.”

송재균이 기꺼이 답했다.

식사비는 30만원도 넘게 나왔다. 아버지가 준 카드를 여기서 긁었다. 한국인은 역시 같이 먹어야 마음이 열린다. 그게 술이든 밥이든...

‘아버지 고맙습니다. 나중에 배로 갚을 게요.’

수고한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오후 시간은 한방약제실에서 살았다. 송재균이 바쁜 시간을 쪼개 안내를 자처했다. 약재를 보고 탕제 시스템도 보았다. 무엇보다 체계적인 약재관리가 눈길을 끌었다.

약재는 자연에서 왔지만 관리는 과학이 맡고 있었다. 매 약재의 인증검사로도 모자라 외부기관 검사의뢰도 시행하고 있다고 했다.

양약에 비하면 한편으로는 번거롭기 그지없는 한약재 관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장을 바라보면 괜히 뿌듯했다. 저 약재들이 환자의 병을 고치는 것이다. 고질병을 고칠병으로 바꾸는 것이다.

현장에서 약전을 보았다. 학교에서 이론으로 배우던 것과 분위기가 달랐다. 약전은 의약품의 성상, 확인시험, 순도시험, 정량법 등을 규정한 법전이다. ‘약전’이라는 용어의 기원은 신라시대로 올라간다. 의서로 치면 ‘본초서’가 꼽히고 우리나라에서는 ‘향약구급방’, ‘향약채집방’ 등을 꼽을 수 있다.

윤도가 말하는 약전의 의미는 법전이 아니었다. 생약 재료와 함께 붙은 성분분석표들이었다. 처음 본 약재는 백두구였다. 백두구의 주요 생산지는 태국이었다. 주요 성분표에는 Camphor, Borneol 등이 보였다. 숙지황도 보였다. 숙지황의 주요 성분은 5-Hydroxymethyl-2-furaldehyde로 나왔다. 윤도가 분석할 때 기준이 된 약성분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윤도가 생체 분석기를 가동 시켰다.

[원산] 국내산

[약재수령] 2년

[약성함유등급] 中中품

[중금속함유] 극미량

[곰팡이독소] 무

[약재사용유무] 가능

[용법용량] 기존 용법 참조.

[약효기대치] 中中

[주의사항] 입맛이 없는 환자, 설사하는 환자에게 신중하게 사용해야 함.

생체분석기 리딩을 끝낸 후에 성분표와 비교에 들어갔다. 5-Hydroxymethyl-2-furaldehyde, 즉 숙지황의 주요성분 함량은 0.3%로 나왔다. 건조 정량품이 주로 0.1% 이상 함유하는 것에 비하면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中中이 나온 모양이었다. 산해경 기준이 아니라면 上中품 쯤 되는 것이니 우수한 쪽이었다.

다음은 우황이었다. 우황은 사실 소의 담낭중에 생긴 결석의 일종이다. 우황의 약성을 알아낸 건 편작이었다. 우황은 결합형빌리루빈을 20.0% 이상 함유한다. 주의사항으로는 앞서 살핀 숙지황이다. 같이 쓰면 효과가 없다. 아울러 임신부가 복용하면 유산의 위험도 따른다.

‘흐음...’

기분이 좋았다. 약재분석 능력이 디테일해지는 느낌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겉이 멋진 사람의 속내까지 본 느낌이갈까?.

치명적 선택-1

치명적 선택-1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

그 말은 진리였다. 응급실 대소동은 병원 전체에 번졌다. 그로 인해 윤도의 침술실력이 병원직원들과 환자들에게까지 퍼졌다. 전화위복이 되었다. 윤도를 힐금힐금 보러오는 환자들도 생겼고, 일부는 윤도에게 다가와 읍소를 하기도 했다. 윤도 위상이 확 높아졌다. 간단한 환자는 과장이나 마혁의 수락을 받고 시침을 했다. 그렇게 고쳐준 환자만 다섯에 달했다.

“아이고, 진짜 명의네, 명의야.”

오랜 류머티즘으로 잘 서지 못하던 할머니, 두 발로 서게 되자 갈매도의 할머니들처럼 윤도를 얼싸 안고 덩실거렸다. 좋았다. 한의사의 보람. 병의 경중을 따질 일이 아니었다.

이틀 후, 윤도는 부원장의 호출을 받았다.

“부르셨습니까?”

부원장실에 들어선 윤도가 인사를 했다. 안에는 장 박사가 도착해 있었다. 윤도의 허리가 한 번 더 숙여졌다.

“엊그제 수련의들에게 불짬뽕을 쐈다고?”

부원장이 웃었다.

“예... 연수랍시고 이런 저런 신세를 지고 있어서...”

“그런 자리라면 나도 좀 끼워주지 그랬나?”

부원장은 노트북을 들고 와 윤도 앞에 앉았다.

“그렇잖아도 유수미 환자께서 부원장님이랑 조 과장님 모시고 꼭 오라고 하더군요.”

“소동을 부린 게 미안했던 모양이군?”

“예. 안 오면 안 된다고...”

“그 일은 유감이네.”

“생리 때면 민감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수미 환자도 그랬던 거 같습니다.”

“하긴 유난한 환자들이 있기는 하네. 나도 젊을 때 주먹질까지 당한 적도 있어.”

“......”

주먹질...

아쉽지만 의료현장의 현주소였다. 환자들이 각종 의료정보에 쉽게 노출되면서 의술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진 까닭에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으면 폭력이나 폭언을 불사하는 경우는 한둘이 아니었다.

“이제 병원 시스템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지?”

“아닙니다. 아직 병실도 제대로 못 찾는 주제입니다.”

“병실 찾는 거야 좀 헤매면 어떤가? 환자 척척 고치면 그게 최고지.”

“......”

“장 박사님.”

부원장이 장 박사를 바라보았다. 장 박사는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한 번 보시게.”

장 박사가 화면을 윤도 쪽으로 돌려놓았다. 차트를 복사한 A4 용지와 함께...

“뭐죠?”

“내가 부원장께 채 선생 좀 팍팍 굴려먹으라고 하지 않았겠나? 그랬더니 자궁근종을 기막히게 치료했다고 진짜 적취 환자들을 뽑아오셨더군.”

‘적취?’

윤도가 미간을 좁혔다. 진짜 적취라면 암을 지칭하는 게 분명했다. 물론 한방에서는 옹저(癰疽)로 말하는 경우가 흔하다.

[암, 영어명으로 캔서(Cancer)]

하도 흔해 이제는 새롭지도 않은 질병이었다. 이제는 누가 암에 걸려도 그저 ‘안 됐네’ 하는 정도에 그치는 질병. 하지만 과거에는 누가 암에 걸렸다고 하면 초상집에 쑥대밭이 되는 게 수순이었다. 그러나 암은 여전히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최악의 질병...

“채 선생이 이비인후피부과, 탕제연수도 해야 하니 시간이 창창한 건 아닐 테고... 스태프들 의견은 그중 한 환자 정도 골라 채 선생 침술을 써줬으면 하는 눈치인데...”

부원장이 설명을 끼워 넣었다.

“암 환자들이군요?”

“그렇네. 다들 방사선이나 항암치료 거부하고 찾아온 분들이야. 부작용을 경험했거나 개인적인 신념 등으로 말이야.”

“......”

윤도의 입이 닫혔다. 신침을 가진 윤도지만 병명 앞에서는 매번 경건해졌다. 암의 무쌍한 변신과 변이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직 임상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 갈매도에서 암 진단에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치료를 한 건 아니었다.

암하면 떠오르는 단어...

‘시한부 인생...’

“지구여행 시간이 몇 달 안 남았습니다. 이제 여행을 정리하시는 게...”

한의대생 때 본 영화 대사가 스쳐갔다. 의학이 발달해 치료되는 암이 늘었고 평균 생존율도 훌쩍 늘었다지만 영화 속의 통보를 받는 환자는 여전히 많았다.

-세 달 정도 남았습니다.

-다섯 달 밖에 못 삽니다.

그걸 통보하는 의사의 마음은 어떨까? 다시 한 번 겸허해지는 윤도였다.

“해서... 장 박사님과 미리 숙의를 한 결과 채 선생 판단에 맡기기로 했네. 다시 말하지만 강요는 아닐세.”

부원장의 말이 윤도 머리의 상상을 밀어냈다. 장 박사는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윤도 시선이 A4 용지에 꽂혔다.

[70대 후반 남자-위암 중기-재벌급 거부.]

[50대 여자-유방암 중기-청와대 비서관 부인.]

[40대 남자-폐암 중기-육각제약 대표.]

[20대 남자-골암 중기-공무원 수험생.]

네 명 환자의 병력이 나왔다. 그 옆에 달린 메모들은 환자의 신분으로 보였다. 환자의 직업은 치료에 참고 사항이다. 하지만 신분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모나 표시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진상이든지, 혹은 고관대작의 가족이라 부득 예우를 해야 하는 경우 등이 그랬다. 병원은 질병을 치료하는 곳이지만 더러는 환자들의 수준을 고려하는 서비스도 필요했다.

“환자들 돌아본 다음에 결정해도 되네. 그 중 누구 한 사람만 고쳐줘도, 아니 현저한 호전만 시켜줘도 고무적인 일이 될 걸세.”

“......”

“버거우면 거절해도 되고. 채 선생 침술에 반한 스태프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니까.”

“......”

“우리 침의 가능성을 알고 싶은 거라네. 침술은 과연 어디까지 통하는 건지... 과거의 명의들은 침 하나로 고질병과 난치병을 고쳐댔지 않은가?. 적취며 옹저,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살리기까지...”

“......”

“양주동 박사님 이후로 침술이 점점 퇴락하는 마당에 채 선생 같은 신침을 보았으니 호기심도 당연한 일이라 힘든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네.”

부원장이 부연 설명을 마쳤다.

“부원장님!”

그쯤에서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말씀하시게.”

“방금 부탁이라고 하셨습니까?”

“물론이네만.”

“제 침을 평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렇다면 한의사의 본분으로 환자들을 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약속 하나를 부탁드립니다.”

“뭔가?”

“그게...”

운을 뗀 윤도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자궁근종이 전환점이 되었다. 병원 내에 분위기도 형성되었고 침술 역시 증명할 만큼 보여줬다고 생각한 윤도.

이제는 소신을 펼치기로 했다. 겸손이 지나치면 비굴이 되는 것이다.

“엊그제 같은 진료방해 행위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보장해주십시오. 저는 연수생이라 지정의도 주치의도 아닌 까닭에 적극 대처하기 난감했지만 진료 중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원장님께서 제 침술에 대한 지지로 보증을 서주셨지만 그보다는 한 마디가 아쉬웠습니다.”

“어떤 한 마디 말인가?”

“저 변호사 끌어내!”

“......!”

우릉!

부원장의 눈에 지진이 일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병원에 와서 목소리를 높이던 변호사. 그러나 윤도는 병원소속이 아닌 연수생 신분. 그렇기에 윤도가 변호사나 환자를 상대로 언쟁을 하기는 어려웠다. 명백히 병원 측의 배려 부족이었다.

“제 침술을 믿는다면 쾌적한 진료환경을 만들어 주시는 게 우선 아니었을까요? 여긴 제가 있던 갈매도의 주민친화형 보건지소가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의 한방병원이 아닙니까?”

윤도의 주장은 명쾌했다. 실제로 의료사고가 났다면 모르지만 진료과정에서 일어나는 의료 침해는 없어야했다.

“내 불찰이었네. 채 선생 침술의 결과만 생각하느라 대처에 소홀했어.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사과하겠네.”

“......”

“그리고 약속하겠네. 채 선생이 그 환자들을 진료하게 된다면 진료 및 처방 결정권은 물론이고 진료에 어떤 곤란도 없도록 전권을 주도록 말일세.”

“암 시침 시에는 수련의도 한 분 동행하게 주십시오. 제가 여기 정식 한의사가 아니다보니 혼자 진료에 나서면 여러 애로가 많습니다.”

“문제 없네. 그 또한 조 과장에게 지시하겠네.”

부원장의 허락이 떨어졌다. 암 환자를 치료하려면 이 정도 포지션은 필요했다. 들러리가 아니라 최고의 침술로써 환자를 선택하는 거라는 것. 그런 분위기부터 조성해야 했다. 이 또한 과시와는 달랐다.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윤도가 A4 용지를 들고 일어섰다. 침으로 암에 도전. 한의대를 다닐 때의 윤도도 궁금한 일이었다. 동기들과 밤샘 토론도 했었다. ‘갑을경’을 남긴 황보밀이라면, ‘침구경험방’을 남긴 허임이라면 암을 잡을 수 있을까? 에이즈를 잡을 수 있을까? 사스나 메르스를 잡을 수 있을까?

“아, 그런데 말이야...”

부원장의 말이 윤도를 세웠다.

“......?”

“마지막에 있는 환자는 고려하지 않아도 되네. 무심하게 방치하다 최근에야 암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오른쪽 무릎 부위 골종양이네. 전이 가능성이 높고 병소 부위가 깊어 현대의학에서 절단을 권유한지라 한방으로 안 될까 싶어 왔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의견이 나오고 침술 차도가 없자 퇴원신청 중이라네. 아마 형편이 넉넉지 않다는 말에 주치의가 끼워 넣은 모양인데 제외하시게나.”

‘절단?’

“우리 비서 아가씨도 빼는 걸 깜빡한 모양이야.”

“알겠습니다.”

윤도가 복도로 나갔다. 우묵한 두 시선이 윤도 그림자를 따라왔다.

“나 모르는 일이 있었군?”

장 박사가 부원장을 바라보았다.

“예, 자궁 과다출혈에 놀란 환자가 소송을 내겠다고 변호사를 부르는 통에... 박사님께 면목 없게 되었습니다. 명의를 보내셨는데 침술 평가에 넋이 빠져 진료권을 보장하지 못했으니...”

“아쉽지만 의사의 운명 아닌가? 평생 몇 번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 우리 채 선생, 덕분에 한 뼘 더 자랐을 거야.”

“대처도 놀랍더군요. 치료가 성공되었다는 걸 확인 시킨 후에 환자와 소동 변호사를 불러다 정식 사과를 받아냈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되는 친구지. 암.”

“그나저나 누굴 선택할까요?”

“글쎄... 암의 상황으로 보아 위암이 좋지 않을까? 초기인데다 한의학에도 여러 비방이 전하고... 하지만 우리 채 선생 침은 워낙 예측 불허라서 말이야.”

“위암 쪽이 적합할 거 같습니다. 폐암 환자 같은 경우에는 특수한 상황도 있고... 위암이라면 채 선생의 장침을 기대할 만 하지요.”

“하긴 부원장 스태프들 앞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면 암 침술의 새 지평은 물론이고 모두에게 힘이 될 걸세.”

“채 선생은 이미 그 지평에 한 발을 넣었습니다. 우리 의료진들, 지금까지 채 선생이 보여준 침술만으로도 바짝 고무되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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