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265)

“기왕이면 두 발 다 넣어야지. 국민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야.”

“암 치료까지 괄목할 성과가 나오면 자궁근종과 더불어 침술 치료의 새 교본으로 삼을 생각입니다.”

“그래주시게. 이제 한방도 증명으로 국민 의료정서에 다가가야 할 시기라네.”

“그나저나 서울한방의료원 일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채 선생 덕분에 훈풍이 불 것 같네.”

“거기서도 신침을 선보였습니까?”

“맛만 보였지. 여기 연수 끝나면 내 한의원에서 마지막 화룡점정을 새길 걸세. 주부부처 차관의 고질병을 상대로 말일세.”

“박사님 노고가 크시군요.”

“내 노고랄 게 뭐 있나? 다 채 선생의 걸출한 침 솜씨 덕분이지.”

장 박사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은 웃지만 사실, 그의 속내는 골똘하고 있었다. 부용 때문이었다.

장 박사는 오는 길에 부용의 기획사에 들렀다. 거기서 윤도에 대한 말을 주고받았다. 그때 이 미션이 화두에 올랐다. 장 박사가 부원장의 계획을 알려준 것이다.

“채 선생님이 누굴 선택할 거 같아요?”

부용도 궁금해 했다.

“위암 환자가 적격이야. 치료 가능성이 높고 옛 의서(醫書)에도 언급이 여럿 나오거든. 가능성이 높은 질환을 선택해 집중하는 것도 의원의 자질이니까.”

“이거 누가 선정한 건가요?”

“주치의들의 추천이라고 하더군. 그건 왜?”

“신분 배열이 기 막혀서요. 재벌급 거부에 권력자 부인, 제약회사 대표, 그리고 가난한 공시생... 더구나 이 육각제약은 한약품 시장의 개척자 아닌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딱 한 사람이라면 말이에요...”

부용이 담담하게 말꼬리를 이었다.

“폐암 걸린 육각제약 사장을 살려야겠네요. 아무래도 채 선생님 일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생각의 각이 다르군. 역시 이 대표는 타고 난 비즈니스맨이야.”

“저랑 내기할까요?”

“내기?”

“채 선생님이 어떤 환자를 선택하는가 말이에요.”

“이 대표는 폐암환자에 걸려나?”

“각자 감이 오는 환자를 써서 밀봉해두는 게 어때요? 나중에 채 선생님 앞에서 까서 식사내기요.”

“재미난 이벤트가 되겠군. 이 대표는 뭐 하나를 해도 사람을 흥미 있게 만든다니까.”둘은 그렇게 내기를 걸었다.

밀봉한 봉투는 장 박사가 챙겼다. 그 봉투는 지금 장 박사 상의주머니에 있었다.

‘위암이냐 폐암이냐?’

장 박사의 고개가 진지하게 기울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장 박사는 긴장의 도가니였다.

치명적 선택-2

치명적 선택-2

윤도는 첫 병실에 도착했다. 인턴 안미란과 함께였다. 조 과장의 지시가 전격적으로 떨어졌다. 지시를 받은 마혁은 안미란을 투입했다.

애당초 송재균이 자청을 했지만 낙점은 안미란이었다. 송재균은 주치의로 배정된 환자가 있는까닭이었다.

1인용 특실이었다. 안에는 주치의가 있었다. 윤도를 보더니 반색을 하며 환자에게 소개를 했다.

“침술 천재로 불리는 채 선생님입니다. 그 왜 여객선 심장마비 승객들을 침 한 방으로 살린...”

“아이고, 선생님.”

재벌급 거부는 간절해 보였다. 눈밑은 검은 듯 붉었다. 암의 징후였다. 항암과 방사선치료를 견디지 못해 한방치료로 방향을 튼 환자. 나이에 비해 맥은 괜찮았다. 위장경으로 뻗치는 혈자리들의 문도 완전 엉망은 아니었다.

복용하는 탕제는 새명단.

새명단은 동의보감에도 나온다. 등창이나 어구창, 변독과 원인이 불분명한 종독을 치료하는 효능을 가졌다. 그렇기에 구성 약재를 가감해 암 치료에 쓰는 한의사가 많았다.

약성을 분석했다.

[약효기대치] 中中

현실 기준으로 치면 上中쯤 되었다. 좋은 약재가 총동원되었다는 뜻이었다. 환자의 기혈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의사가 환자의 맥을 제대로 짚고 치료 중이니 호전의 가능성이 높았다.

“저기 채 선생님.”

윤도가 나오자 주치의가 따라나왔다.

“네?”

“이런 말 할 자리는 아니지만 같은 값이면 이 분 치료 좀 부탁해요. 실은 제 고등학교 선배 할아버지인데 정말 좋은 분이거든요. 회복만 되면 사례도 충분히 하실 겁니다.”

“예...”

고개를 숙여주고 다음 병실을 찾았다. 병원에는 이런 환자들이 많았다.

어느 과 누구 닥터의 처가(妻家),

간호사의 언니,

스태프의 작은 아버지...

환자가 되면 아는 지인이 있는 병원이 위안을 준다. 반면 슬픈 생각도 들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환자는 불이익이라도 받는 건가?

그런가?

두 번째 환자를 만났다. 유방암 환자는 다소 히스테릭했다. 개인비서 역시 까탈스럽기로 치면 만만치 않았다. 권력에 기대 대접 받는 게 몸에 배어 그런지 의사 위에 군림하려는 눈치였다.

태의승 곽옥의 명언을 생각했다.

-권세 있는 자가 의원을 믿지 않으면 치료하기 어렵다.

열외!

이 환자는 즉석에서 결정을 내렸다.

세 번째는 폐암 환자 차례였다. 2세 경영인이다. 그러나 무늬만 경영인은 아니었다. 그는 병상에서도 신약개발과정을 챙기고 검토하고 있었다. 미국 아이비리그를 마쳐 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매출순위를 끌어올린 저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진취적이다. 웬만한 메이저 제약회사도 꺼리는 한약 신약개발에 열중이다. 한 마디로 도전적인 경영정신의 소유자였다.

진맥을 받는 손에서 한약냄새가 났다. CEO가 직접 약재를 만진다는 반증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회사를 이끄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

진맥하던 윤도의 머리카락이 삐죽 솟구쳤다. 문제가 있었다.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혈자리...’

다시 한 번 체크했다. 불안한 정보는 거듭 확인이 되었다. 혈자리였다. 특이하게도 혈이 작았다. 티끝이라고나 할까? 거의 흔적 뿐인 사람이었다.

물론, 모든 혈자리는 크지 않다. 대개는 좁쌀에서 쌀알 크기다. 드물게 작은 동전만한 혈자리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환자는...

‘후우!’

한숨을 감추고 진맥을 끝냈다. 좋지 않은 정보는 내색하지 않는 게 환자에게 좋았다.

“어때요?”

폐암 환자 류수완이 물었다.

“맥은 괜찮네요.”

별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선생님이 신침을 놓는다고 들었습니다.”

“신침은 아니고 열심히는 놓습니다.”

“혹시 기회가 되면 나도 그 침 좀 부탁해요. 꿈꾸던 신약개발이 코앞인데 이 놈의 암이 딴죽을 걸고 있어서...”

꿈!

그 단어가 귀를 타고 들어왔다. 진솔함에 홀려 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그의 손에, 나아가 그가 보고 있는 책에 열린 꿈이 보였다.

‘병원에서도 꿈을 꾸는구나...’

한의사로서 한 번 더 겸허해지는 순간이었다.

안미란이 진료차트를 찾는 동안 혼자 골종양 환자의 병실로 걸었다. 휠체어의 청년이 윤도 곁을 스쳐갔다. 통화하는 목소리가 너무 밝아 무심결에 돌아보았다.

“......!”

환자는 침대에 없었다.

“여기 환자는 방금 휠체어로 나간 남자분이세요.”

뒤따라 들어선 안미란이 말했다. 환자의 침대에는 옷가방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부원장의 말처럼 퇴원 절차 중인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네.’

탁!

병실 문소리와 함께 환자 방문이 끝났다.

상담실에 혼자 자리를 잡았다. 세 명의 암 환자 진맥을 머리에 띄워놓았다. 맥으로 본 치료 가능성의 순서는 재벌급 거부>청와대 권력자 부인>제약회사 대표의 차례였다.

윤도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딱 한 사람만 고칠 수 있다면...’

누굴 고쳐야 큰 가치를 이룰까?

가능성만 본다면 위암 환자인 재벌급 부자가 첫 손에 꼽혔다. 하지만 윤도 머리에는 제약회사 대표의 혈자리가 와글거렸다.

그의 자세와 최악의 혈자리... 두 가지가 중력처럼 마음을 끌어당겼다. CEO가 되어서도 꿈을 가진 사람. 더불어 희귀한 혈자리 때문에라도 경험하고 싶었다.

<당첨.>

<폐암 환자.>

결정과 함께 화장실에 들렀다. 시원하게 소변을 보고 나올 때였다. 비상구 계단참에서 맑은 통화음이 새어나왔다.

“아빠...”

소리의 주인공은 골종양 청년이었다.

“걱정하지 마. 나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목소리가 너무 맑아 윤도가 걸음을 멈췄다. 골암에 걸린 청년. 병소 부위가 좋지 않아 다리를 절단해야 할 처지다. 그런데 저렇게 낭랑한 목소리라니?

‘혹시 자기 상황을 모르는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경우는 많았다. 의사를 만난 보호자들이 환자에게 통보하지 않는 경우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가지게 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청년은 그렇지 않았다.

“아빠, 다리 좀 자르면 어때? 나 두 팔은 힘 무지하게 세거든. 아빠하고 팔씨름해도 이기잖아?”

“......”

윤도의 상상은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았다.

“소방관 공무원 시험? 괜찮아. 나 필기합격이잖아? 거의 다 맞았어. 그러니까 반은 된 거잖아? 그 실력으로 장애인 공무원 시험 보면 돼. 불 못 끄고 사람들 못 구해서 좀 그렇지만 소방 공무원만 공무원인 건 아니니까.”

“......”

“응, 그러니까 아빠는 여기 오지 말고 그냥 장사해. 나 장애인 택시 부르면 돼. 그거 타고 아빠 트럭 앞에 내릴게. 오늘은 통닭 좀 팔았어?”

‘통닭...’

청년의 아빠는 길가에 세워진 장작구이 트럭행상인 모양이었다.

“병원비는 알바비 모은 걸로 내면 된다니까. 아, 씨... 최종 시험 합격하면 그 돈으로 아빠 제주도 구경 시켜주려고 그랬는데 기회를 안 주네.”

“......”

“아빠, 그러니까 통닭이나 잘 구워. 저번처럼 너무 구워서 안 팔린 걸로 3일이나 연짱 먹게 하면 안 돼.”

“......”

“응, 나 금방 갈게. 파이팅.”

청년의 말소리가 끊겼다. 바로 계단참에서 나올 거 같아 윤도가 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계단참에서 나온 건 휠체어가 아니라 흐느낌이었다.

“엄마...”

쉰 목소리였다. 조금 전까지 씩씩하던 목소리와 달랐다.

“미안해. 나 소방공무원 포기야. 다리를 잘라야한대...”

“......”

“엄마가 화재 때문에 죽어갈 때 약속했는데... 꼭 소방관 되겠다고. 그래서 정말 잠도 잘 안 자고 열심히 공부해서 한 방에 합격했는데...”

“......”

“대신 다른 공무원 시험 봐서 합격증 가져다줄게. 그걸로 용서해줘.”

“......”

“미안해. 절대 울지 않는다고 엄마랑 약속했는데... 나 한 번만 울게. 한 번만... 어엉...”

그런데...

청년의 목소리 사이로 익숙한 멘트가 불협화음으로 반복되는 게 들렸다.

<이 번호는 없는 번호이니 다시 확인...>

그제야 윤도는 알았다. 청년이 건 건 그의 어머니 번호였다. 이미 하늘로 간 어머니. 받는 사람도 없는 번호에 전화를 걸고 고백하는 청년이었다.

우릉!

윤도 머리에 천둥이 울었다.

눈물을 추스른 청년이 휠체어를 밀고 나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병실로 향한다. 문 뒤의 윤도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겨우 정신줄을 가다듬고 나온 윤도가 계단참을 바라보았다. 쓰레기통이 보였다. 그 옆에 떨어진 종이조각이 시선을 차고 들어왔다.

“......!”

공무원 수험표였다. 두 번 찢어 네 겹으로 만든 후에 구겨서 버렸다. 미련을 버린 것이다.

[공무원 수험응시표.]

[응시자 성명 구대홍.]

[응시직렬 소방직.]

‘소방직...’

엿들은 것만으로도 청년의 사연을 알 것 같았다. 엄마는 화재로 죽었다. 그 엄마 앞에서 소방관이 되겠다고 약속을 했다. 엄마처럼 불에 희생되는 사람을 막으려는 착한 맹세였다.

아버지는 장작구이 통닭 트럭행상을 한다. 청년은 알바를 하면서 공부를 했다. 필기시험에 합격해 엄마와의 약속을 ‘절반’ 지켰다.

골종양은 그 후에 발견되었다. 수험표의 시험 일자를 보니 지난달이다. 시험을 본 후에야 병원을 찾았다. 청년의 골종양은 이미 중기. 무릎 관절 쪽이 주요 병소였으니 통증이 없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걸 참고 공부를 했다니. 한 마디로 초인이었다.

절반의 꿈을 이룬 초인.

그 초인이 암세포 따위의 습격에 휘말려 날개를 접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누구보다 숭고한 꿈의 날개를...

꿈...

다시 그 단어를 곰곰 생각했다.

윤도에게도 꿈이 있었다. 한의사로서 전설적인 명의들처럼 의술을 펼치는 것. 그 꿈을 헤이싼시호에서 이루었다. 보이지 않은 기운이 윤도에게 축복을 내렸다.

그 꿈을...

저 친구에게도 나눠줄 수 있을까?

그 생각이 윤도 등을 밀었다.

“구대홍 님.”

가방을 챙기는 청년을 윤도가 불렀다.

“어?”

구대홍이 고개를 들었다. 그로서는 처음 보는 윤도. 그러나 병원 가운을 입었으니 의료진인 걸 알기에 눈만 끔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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