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하게요?”
“네...”
“혹시 주치의께서 장침 맞을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얘기 안 했어요?”
“음... 지나가는 말로 하기는 했어요.”
구대홍이 대답했다. 폭풍 서러움의 그늘은 그의 얼굴에 없었다.
“뭐라고 농담해요?”
“제 뼈를 갉아먹는 암 세포를 쫙 밀어낼지도 모를 장침 선생님? 하지만 조금 늦은 거 같다고 했어요.”
“본인 생각은 어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진 봤는데... 아주 나쁘게 자리를 잡았더라고요. 병원에 조금만 일찍 왔으면 좋았을 걸...”
“내가 진맥 한 번 해봐도 될까요?”
“그건 어렵지 않아요.”
구대홍이 팔을 내주었다. 윤도가 천천히 맥을 잡았다. 맥은 부조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나이로 치면 혈기 왕성한 청년. 그러나 무릎뼈의 골종양이 깊다 보니 끊기고 무너지는 맥이 많았다.
윤도는 한참을 집중했다. 위태롭지만 희망의 씨줄 하나를 잡아냈다. 무릎을 관장하는 혈자리 한둘에 흔적이 남았다. 완전히 끝장이 난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좋지는 않네요.”
윤도가 손목을 놓았다.
“거봐요.”
“하지만 100%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에요.”
“......?”
구대홍의 표정이 뜨악하게 변했다.
“소방 공무원 시험 봤죠?”
“어? 어떻게 알았어요?”
“경쟁률이 얼마였어요?”
“120대 1이오.”
“공부할 때, 합격 보장 되었나요?”
“세상에 보장된 일이 어디 있어요? 그냥 최선을 다했을 뿐이에요.”
“떨어질 각오했었죠?”
“그럼요.”“그 마음으로 우리가 같이 한 번 도전해볼까요?”
“네?”
“솔직히 말해서 구대홍 님의 골종양... 무릎뼈로 너무 나쁘게 들어갔어요. 그래서 전이 가능성도 높고 누구도 치료를 보장할 수 없게 되었네요.”
“......”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에요.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시도해볼만 하지 않을까요?”
“선생님...”
“이거 한 번 볼래요?”
윤도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윤도 기사가 난 화면이었다. 여객선 심장마비자 일곱 명을 구한 장침의 명의...
“와아, 선생님이 그 선생님이세요?”
구대홍이 소박하게 웃었다.
“잘 난 척 하려는 게 아닙니다. 나도 다른 한의사와 다를 거 없지만 어떤 날 필이 제대로 꽂히면 큰 병을 잡기도 하거든요. 그게 우리 침술의 매력이죠. 여객선의 심장마비 경우처럼 말이에요.”
“......”
“해볼래요? 120대 1 경쟁률도 겁 안 내고 도전한 용기면 안 될 것도 없잖아요.”
윤도가 웃었다.
“선생님...”
“오케이?”
“돈 많이 들어요?”
“치료비는 큰 문제 없어요. 내가 약속해요.”
“......”
“오케이?”
“그럼 한 번 해볼게요.”
구대홍의 대답이 나왔다.
“잘 생각했어요.”
“저는 뭘 준비하면 되요?”
“한 가지 있기는 하죠.”
“뭔데요? 열심히 하고 있을 게요.”
“신념!”
“신념?”
“나를 믿고 자신을 믿으세요. 암은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 그럼 좋은 결과가 나올 지도 몰라요.”
윤도는 구대홍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복도로 나왔다.
걸음 속도가 빨라졌다.
이제는 거침이 없는 윤도였다.
명의장침 하사불성何事不成-1
명의장침 하사불성何事不成-1
“......!”
부원장실에서 두 사람의 눈이 뒤집혔다. 장 박사와 부원장이었다. 윤도의 선언 때문이었다.
“폐암과 골종양 환자를 동시에 맡아보겠다고?”
부원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예.”
“채 선생.”
“쉽지않다는 거 압니다. 만용도 아니고 허세도 아닙니다. 다만 제 침을 필요로 하는 병자가 있다면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암 환자네. 한 명만 정해서 집중하는 게...”
“한 명만 정하라시면 골종양 환자를 선택하겠습니다.”
“채 선생, 그 환자는...”
“전권을 주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
윤도의 신념 앞에 부원장은 말문이 막혔다. 침을 놓는 건 윤도였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신 건가?”
이번에는 장 박사의 질문이 이어졌다.
“자세한 건 내일 이른 아침에 상세 진맥을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럼 나머지 두 사람은 왜 제외한 건지도 알 수 있을까?”
“위암 환자는 현재의 치료과정으로 가도 호전될 가능성이 있고 유방암 환자는 창공의 삼불치(三不治)와 편작의 육불치(六不治)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분에게는 직위가 높은 한의사가 필요합니다. 제가 극복할 수는 있지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시간이 많다면 다 다룰 수 있다는 거로군?”
“병세의 경우를 말로 장담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채 선생 뜻은 알겠네만 골종양 환자는...”
부원장의 우려가 나왔다.
“퇴원은 일단 제가 막았고... 치료비댈 여유가 없다고 하셨던가요?”
“비단 그 이유만이 아니지 않나? 공연히 시간을 지체하면 무릎 아래를 자를 걸 그 이상으로...”
“반대로 무릎 아래도 자르지 않을 수 있지요.”
“채 선생.”
“그저 가능성만을 얘기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부원장님.”
“......”
“혹시라도 제 장침이 성공하면 그 청년의 병원비는 면제해주셨으면 합니다.”
“면제?”
“부원장님 말씀이 넷 중 한 명만 치료해도, 아니 현저한 호전만 보여주어도 고무적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성과로 만족하시고...”
“옵션까지 거는 걸 보니 대충 물러설 각오는 아니시군?”
“일단 맡으면 끝까지 가야 하는 게 의술이라고 생각합니다.”
“......”
“......”
“좋아. 채 선생이 괄목할만한 성과를 낸다면 그 청년의 병원비를 면제해주겠네.”
부원장의 허락이 떨어졌다.
“고맙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씀하시게. 그 분들이 현재 복용하는 새명단의 구성도 채 선생이 원하다면 성분교체도 무방하네.”
“상세 진맥 후에 종합의견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시게. 전 진료부서에 총력 지원을 지시해두겠네. 인력이든 약재든 장비든, 뭐든 말이야.”
부원장의 다짐은 전폭적이었다.
**
혼자 주차장으로 나온 장 박사는 상의에서 봉투를 꺼내들었다. 부용과 내기를 건 그 밀봉 봉투였다.
‘허어.’
장 박사의 고개가 기울었다. 그가 적은 답은 오답이었다. 위암 환자라고 썼던 것이다. 장 박사는 그저 의학적인 소신에 따랐다. 분위기로 보면 폐암 쪽이었지만 한의사로서 본분 쪽에 배팅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윤도가 선택한 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게다가 난이도가 높은 암 환자들만 골랐다. 아니 윤도는, 시간만 넉넉하면 넷을 다 선택할 기세였다.
“폐암 환자의 혈자리가 최악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전하는 마음으로...”
복도에서 물었을 때 나온 윤도의 대답이었다.
어렵기 때문에 도전한다.
그거야 말로 한의사의 최고 덕목에 속했다. 과거의 명의들이 그랬다. 황제나 왕, 혹은 갑부들 옆에서 호의호식할 수 있음에도 세상의 온갖 질병을 찾아 유람한 명의들이 많았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어 21세기. 어려운 일 싫어하는 젊은이들이건만 윤도의 생각은 의원의 정도를 걷고 있었다. 저 실력이면 거만도 부릴만 하건만 여전히 배우는 자세의 윤도...
‘허어.’
무슨무슨 전문가랍시고 타이틀에 기대 사는 기성세대로서 부끄러움까지 들었다.
부릉.
장 박사가 시동을 걸었다. 그길로 부용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박사님.”
부용은 활기차 보였다. 소속 아이돌의 신곡과 공연준비를 점검하던 그녀였다.
“바쁜데 미안.”
“이번만 봐드릴 게요. 제 방으로 가세요.”
부용이 장 박사를 끌었다.
“급한 일이세요?”
대표실에 들어선 부용이 물었다.
“채 선생 말이야, 저번에 말한 암 환자들 중에 치료할 사람을 선택했거든.”
“그랬어요?”
“미리 말하지만 나는 틀렸어. 채 선생이 재미난 선택을 했지 뭔가?”
“제 답이 궁금해서 오신 건가요?”
“솔직히 말하면 자수하러 왔지. 나는 명명백백한 오답이라는...”
“박사님은 누굴 적으셨는데요?”
“이거 열어도 될까? 어차피 채 선생이 옆길로 새서 말이야.”
“편하신 대로 하세요.”
찌익!
부용이 답하자 봉투 끝이 잘려나갔다.
“......!”
부용의 답지를 펼친 장 박사의 시선이 얼어붙었다. 부용의 답지에 적힌 건 골종양 환자였다.
“허어, 기가 막히군.”
“왜요?”
“결과적으로는 우리 둘 다 틀렸지만, 나는 완전하게 틀렸고 부용은 맞은 거나 진배없어.”
장 박사가 두 종이를 펼쳐놓았다. 위암과 골종양이었다.
“채 선생님이 옆으로 샜다면... 한 명이 아니라 두세 명을 선택했어요? 아니면 전부 다?”
“둘이라네. 폐암환자와 골종양 환자...”
“최고의 선택을 했군요.”
부용이 시원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능성만 본다면 최악이지. 힘든 경우만 골랐거든.”
“가능성 같은 확률을 무색하게 만드는 게 채 선생님 의술이잖아요?”
“이 대표는 짐작하고 있었나? 지난번에는 폐암 쪽이더니?”
“채 선생님이 폐암 환자를 선택하길 바라기는 했어요. 누군가 한 명을 살려야한다면 제약회사 사장이 채 선생님에게 긴요한 인연이 될 테니까요.”
“비즈니스 측면으로?”
“그렇네요.”
“그런데 왜 골종양을 적었나?”
“그건...”
부용이 일어나 창을 향해 걸었다. 시선이 단아해졌다. 부용은 창 밖을 바라보며 잔잔하게 말을 이어놓았다.
“희망사항이었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내가 아는 사람이 냉철한 이성으로 현실을 헤쳐 나가길 바라지만 마음 한 편으로는 돈이나 득이 되지 않더라도 인간미를 보여줬으면 하는 마음...”
“......”
“그거였어요.”
부용이 몸을 돌려 장 박사를 바라보았다.
“허어...”
장 박사는 뒤통수가 뜨끈해지는 걸 느꼈다. 부용의 설명 또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제 마음을 해킹이라도 한 듯이 현실과 이상을 다 골랐네요. 그러니 최고의 선택이 아니고 뭐겠어요?”
“듣고 보니 그렇군.”
“박사님 소감은 어떠세요?”
“채 선생... 이제 보니 그 친구, 한 사람만 고르라는 옵션을 주지 않았더라면 네 명을 다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하네만.”
“제 생각에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어째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