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265)

동영상을 찍는 안미란의 손이 파르르 떨었다. 그녀 자신은 감도 느끼지 못한 혈자리. 더구나 목 밑의 쇄골 부근 등은 원래도 자침이 어려운 곳이다. 자칫 침을 잘못 넣으면 폐를 찌를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윤도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다...

“......!”

폐수혈에 넣을 때는 침 끝이 살짝 튕겼다.

‘헛방인가?’

등골이 섬뜩해지는 윤도였다. 혈자리를 다시 확인했다. 헛발질이 아니라 혈자리의 반발이었다. 폐암이 성깔을 부리는 것이다.

잠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마음을 추스른 윤도, 오감을 총 동원해 포인트를 맞췄다. 왼손가락으로 주변 긴장을 달래며 침 끝을 밀었다. 비로소 혈자리의 반발이 죽었다.

‘오케이.’

오늘의 백미는 고황수혈자리였다. 환자의 고황수혈자리는 최악이었다. 그 또한 티끝 크기인 데다 같은 체형의 사람들보다 폐 쪽에 가까웠던 것. 장침이 빗나가면 폐를 상할 수 있었다.

“좀 뻐근할 겁니다.”

그 말과 함께 장침을 넣었다. 모든 신경을 침 끝에 실었다. 100분 1mm를 더해도 안 되고 덜 해도 안 되는 혈자리였다. 미세하게, 미세하게...

철컥!

마침내 침끝이 혈자리에 물렸다.

‘후아!’

안도의 숨이 나왔지만 쉬지 못했다. 호흡을 하면 손가락이 움직여 침끝이 흔들릴 수 있었다. 그 상태로 침끝을 돌려 전체 혈자리와의 기혈 조화를 맞췄다. 고황수혈은 결국 닫힌 문을 열어주었다.

‘휴우!’

첫 시침이 끝났다.

오늘 윤도는 너무 많은 침을 찔렀다. 너무 많은 심혈을 기우렸다. 혈자리의 계산으로는 다섯 방 정도면 가능했다. 하지만 의도적인 융단폭격이었다. 폐암 걸린 환자였다. 현대의학의 항암치료가 맞지 않으면서 몸까지 상했다. 아무리 한약에 조예가 있다 해도 침 몇 방으로 성이 차지 않을 일이었다.

환자가 침을 의심하면 좋을 리 없다. 그렇기에 시위하듯 빼곡하게 장침을 넣었다. 환자의 신뢰를 사는 것, 그 또한 치료법의 하나라고 믿었다.

침은 보(補)법으로 뽑았다. 폐암은 나쁜 것이니 원래는 사(瀉)법을 쓰는 게 좋은 상황. 하지만 이 또한 생각이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환자가 위로를 주었다.

“아닙니다. 잘 참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침을 이렇게 무아지경으로 놓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과장님 말씀에 침술 천재라더니 다르시군요.”

“예...”

“장침도 역시 맞기 시작하면 침대에서 안정하는 게 좋겠죠?”

마지막 침을 뽑을 때 류수완이 물었다.

“산책은 좀 하세요.”

“산책을요? 선생님들이 절대 안정하라고 했는데...”

환자가 안미란을 바라보았다. 안미란도 그중 한 명이었던 모양이었다.

“제 장침 치료는 산책이 필요합니다. 다만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네...”

“처음 이틀은 더 힘들 수 있습니다. 치료과정이니 이틀만 참아주세요. 너무 힘들면 언제든 얘기 하세요.”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복도로 나왔다.

“선생님.”

안미란이 앞을 막았다.

“왜요?”

“환자 말이에요. 말기암인데 절대안정은 꼭 필요한 거 아닌가요? 양방이든 한방이든...”

“필요하죠.”

“그런데 왜 산책을?”

“마음은 절대안정, 하지만 폐는 안정만 하면 안 돼요. 적당히 움직여야 활성이 생기거든요.”

“선생님.”

“제 장침은 그렇습니다.”

“왜 그런지...”

“세상의 동물 중에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건 없잖습니까? 특히 폐는 오래 움직이지 않으면 상하기 마련입니다. 옛날 명의들도 폐병이라고 누워만 있으면 폐를 더 해친다고 했잖습니까? 가만히 누워있으면 기가 죽고 식욕까지 망쳐버리니까요. 오로소상(五勞所傷), 아시죠?”

“아, 오로소상!”

오로소상은 기(氣), 혈(血), 근(筋), 골(骨), 육(肉)이 손상된 5가지 증세를 말한다.

안미란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윤도는 저만치 멀어졌다. 인턴 때는 이런 경우가 많았다. 머리에는 있지만 꼭 필요할 때 생각나지 않는...

“선생님, 같이 가요.”

안미란은 허겁지겁 윤도 뒤를 따랐다.

융단폭격-2

융단폭격-2

‘골암이라...’

윤도가 두 번째 환자를 맞았다.

환자 구대홍이 숨을 죽였다.

보조하는 안미란도 숨을 죽였다.

시침하는 윤도 역시 숨을 죽였다.

일단 무릎 바깥쪽에 자리한 독비(犢鼻)혈 내외측에서 죽은 피를 빼냈다. 무릎 양쪽으로 움푹 들어간 부분인데 마치 송아지(犢) 코(鼻)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피는 좌우 대칭으로 뽑았다. 한방의 원리가 균형을 고려하는 까닭이었다. 음곡, 곡천혈 등에서도 그랬다. 이는 무릎 관절이나 통증치료의 기본이었다.

‘복토혈...’

윤도의 뇌리는 복토혈에 꽂혔다. 연관 혈자리를 차례로 짚은 후에 나온 결론이었다. 복토혈은 무릎 치료의 주요혈이다. 거기서 각 경혈 문의 반응을 보며 가닥을 잡을 계획이었다.

윤도가 쑥과 웅황 용액을 함께 꺼내놓았다. 그런 다음 세 개의 장침을 뽑아들었다. 세 장침에는 각기 다른 생각이 숨어 있었다.

첫 침은 그저 장침이었다. 슬개골 외상연에서 위로 6치, 양구혈에서 4치 위. 보통 복토혈을 찾는 방법이다. 윤도의 침은 아래로 1치 가까이 내려왔다. 1치는 엄지손가락 굵기 정도. 동영상을 촬영하는 안미란은 그 혈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윤도는 침을 돌리고 멈춤을 반복하며 신중하게 혈자리의 반응을 읽었다. 어떤 문이 열리는지, 어떤 문이 닫히는지...

그런 다음에 두 번째 장침을 넣었다. 쑥 용액을 묻힌 침이었다. 그 또한 체크법은 같았다. 마지막으로 웅황을 묻힌 침이 들어갔다.

‘흐음.’

문들의 반응은 확실히 빨랐다. 가속기를 붙인 것 같았다. 웅황의 침을 빼고 미리 꽂아둔 장침을 잡았다. 아무 것도 묻히지 않은 침이었다. 돌리고 누르며 문들의 반응을 주목했다. 웅황의 그것과 맞추려는 것이다. 몇 개는 되고 몇 개는 되지 않았다. 조금 더 시도하자 웅황의 침과 비슷한 반응점을 찾았다.

‘빙고.’

윤도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조금 느리지만 영약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접점을 알아낸 것이다. 그래서 한 혈자리에 세 개의 침을 꽂은 윤도였다. 그럼에도 침 끝은 서로 닿지 않았다. 윤도의 손가락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웅황의 기세와 쑥의 기세는 폐암에서와는 다르게 나타났다. 같은 약이라도 질환이나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혈자리였다. 티끌만한 혈자리를 찌르다 구대홍을 만나니 야구 타자가 수박을 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절대, 소홀하지는 않았다.

환자에게 알맞은 감을 찾은 윤도의 손이 본격 공세에 돌입했다. 골종양의 기본혈인 천추, 경문, 관언수혈 등에 장침을 넣었다. 무릎에 신통방통 먹힌다는 내슬안, 외슬안, 양구, 독비, 위중, 위양, 족삼리에도 침이 들어갔다. ㄱ 자로 굽은 환자의 무릎에도 침 꽃이 피었다.

보기가 좋았다. 마치 적군의 성을 포위한 신(神)의 군단처럼 보였다. 포위하고 서서히 목을 조여가는 것이다. 마지막은 손목의 태연혈이었다. 폐에다 기습 멀티를 시도하는 암에 대한 조치였다.

“기분 어때요?”

시침을 마친 윤도가 구대홍에게 물었다. 구대홍의 몸에도 장침의 융단폭격이 빼곡 위용을 뿜었다.

“시원한 데요?”

“그렇죠?”

“네.”

“오케이, 잘 될 겁니다.”

윤도가 웃었다.

타이머는 30분에 맞춰놓았다.

막간에 잠시 상담실 의자에 앉았던 윤도. 긴장이 풀리며 까무룩 늘어졌다. 잠시 후에 그 문이 열렸다. 들어선 사람은 조 과장과 안미란이었다.

“깨울까요?”

안미란이 물었다.

“아니, 그냥 둬.”

“네...”

“어땠나?”

“침 놓는 모습이 너무 편해보였어요. 다만 폐암 환자에게 시침할 때는 땀을 굉장히...”

“편안하다... 과연 인물이군.”

“네?”

“원래 실력 없는 친구들이 표시를 내기 마련이지. 깊은 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고 명의는 누굴 시침하든 티나지 않는 거야.”

“네...”

“안 선생, 폐암 환자 혈자리 짚어봤나?”

“네. 채 선생님이 짚어보라고 하셔서...”

“어떻던가?”

“죄송하지만 저는 거의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겠지. 그 환자는 혈자리가 굉장히 작거든. 나도 애를 먹었지.”

“채 선생님도 그 말을 했어요.”

“그래서 이 친구가 더 대단하다는 거야. 여기서 일할 것도 아니고 쉬운 길을 가도 되는데 굳이 폐암 환자까지 택했어. 혈자리가 어렵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야.”

“......”

“뭐 느끼는 거 없나?”

“나이는 비슷하지만 제게는 너무 하늘 같은 분이라...”

“하늘은 몰라도 태산 정도는 되지. 적어도 진맥과 침술은.”

“......”

“레지던트 몇이 이 친구 갈궜었지?”

“......”

“나도 눈치 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내가 왜 그냥 두고 보는지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그래봤자 이 친구에게는 안 돼. 말하자면 차원이 다른 의재(醫才)거든. 설익었다면 실력을 믿고 설치기도 하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친구니까.”

“네...”

“안 선생은 행운인 줄 알아. 이 친구 도와주는 동안 폐암 환자의 혈자리만 읽어내도 두세 단계 업그레이드 될 거야.”

과장은 그 말을 끝으로 휴게실을 나갔다.

안미란은 다른 상담실로 옮겨와 동영상을 열었다. 진맥부터 시침까지의 장면이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윤도의 자세는 환자와 침을 더해 일체감 그 자체였다.

‘일침동체(一鍼同體...)’

어느 혈자리를 찔러도 마찬가지였다.

‘부럽다. 나는 언제...’

바라바밤.

턱을 괴고 한숨을 쉴 때 핸드폰이 울렸다. 윤도였다.

“실은 선생님 잘 때 조 과장님 다녀가셨어요.”

안미란이 윤도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그래요?”

윤도가 돌아보았다.

“걱정마세요. 뭐라고 하신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근무시간에 졸아서...”

“하긴 옵션을 걸기는 하셨어요.”

안미란이 생글거리며 복선을 깔았다.

“어떤 옵션요?”

“안미란에게 폐암 환자 혈자리 잡는 비방 좀 알게 해줘라. 그럼 못 본 걸로 한다.”

“푸훗!”

안미란의 애교작렬에 윤도 웃음보가 터졌다.

“안 될까요?”

“가서 한 번 더 해볼까요?”

“정말요?”

“대신 나도 옵션이 있습니다.”

“어떤?”

되묻는 안미란의 얼굴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

“......”

“......”

“......”

병실에는 세 사람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을 맞으려는 류수완과 안미란, 그리고 윤도였다. 안미란은 혈자리를 찾고 있었다. 불면증을 위한 침자리였다.

힌트는 윤도에게서 받았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안미란은 환자의 손목과 어깨를 낱낱이 흩어 내렸다. 그러다 겨우 혈자리 비슷한 걸 찾아냈다. 윤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윤도가 자리를 이어받았다. 장침이 환자 어깨의 천종혈과 손목의 신문혈로 들어갔다. 한의학에서 불매(不寐), 혹은 목불명(目不暝) 등으로 불리는 불면증의 혈자리들이었다.

사실 안미란이 찾은 혈자리는 틀렸다. 환자의 혈자리는 그보다 반 치 씩 밀려나 있었다. 윤도는 침으로 그 차이를 수정했다. 안미란에게 자신감을 주려는 배려였다.

“제가 찾은 혈자리가 정말 맞았어요?”

복도로 나온 안미란이 들뜬 목소리를 냈다.

“네, 딱이던데요?”

“와아...”

“내일은 다른 혈자리를 찾아보세요. 태연혈과 폐수혈...”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어려운 신문혈과 천종혈도 찾았는데.”

윤도는 안미란의 기를 살려주었다.

첫날 장침은 그렇게 끝났다.

둘째날도 그랬다.

셋째날도 그랬다.

일요일 하루를 쉬고 다섯 째 날이 되었다. 이날 시침부터 폐암 환자에게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불면증이 사라진 후로 숨 쉬기가 편해졌다고 했다. 맥도 조금씩 활력을 찾아갔다.

“좋은데?”

조 과장도 맥으로 확인을 해주었다. 혈자리도 조금 변했다. 계속 침을 맞은 때문인지 처음보다 탱글해져 있었다. 침을 놓기가 수월해졌다.

“......!”

윤도의 눈짓으로 혈자리를 짚은 안미란도 놀랐다. 그녀는 처음으로 혈자리를 제대로 찾아냈다.

“선생님.”

복도로 나오자 안미란이 진실을 재촉했다. 오늘 찾은 혈자리와 저번의 감은 확연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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