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265)

“내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선생님 장침이 딱 들어올 때 폐의 병세가 확 쫄아드는 거 느꼈거든요. 이 몹쓸 놈의 폐암이 임자 제대로 만났다 아닙니까?”

“믿어주신 덕분입니다.”

“아, 이 사람 뭐해? 내 은인이셔. 그동안 장침 놓으시느라 얼마나 애 쓰신지 알아? 오실 때마다 땀으로 가운 다 적시고 나가신 분이야. 동혁아, 은지야. 너희도 인사해라. 아빠 은인이시다.”

가족들을 재촉하는 류수혁의 눈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몇 번의 인사를 받는 동안 윤도 눈도 따라 젖었다.

“기분 좋다고 너무 무리 마시고... 적당한 산책 잊지 마세요.”

“걱정마세요. 선생님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겁니다. 암요.”

환자의 전폭적 신뢰를 들으며 윤도는 병실을 나왔다.

구대홍 쪽은 처음부터 윤도가 앞섰다. 조 과장이 뒤로 빠진 것이다. 낭보를 들은 장작구이 통닭 트럭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넘어갔다. 윤도가 급히 백회혈을 잡아 정신줄을 세웠다.

“선생님...”

구대홍은 울지 않았다. 대신 표정이 불덩이처럼 밝아졌다.

“고맙습니다. 저 꼭 소방관 될 게요.”

“그래야죠.”

“오늘은 침 안 맞아요?”

“왜요, 당연히 맞아야죠.”

“놔주세요. 저 이번 체력검사 갈 거예요. 그때까지 최소한 걸을 수는 있게 해주신다고 그랬죠?”

“그럼요.”

윤도가 장침을 잡자 따라왔던 수련의들이 박수를 보내왔다. 물론 안미란이 시작이었다. 박수는 마혁에게서 송재균까지 옮겨갔다. 안미란이 송재균을 바라보았다. 송재균의 입가에도 ‘인정’이 주렁주렁 열렸다. 하긴, 누구라도 승복하지 않은 수 없는 침술이었다.

뒷줄의 조 과장과 부원장, 간호사들도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박수와 함께 장침이 환부로 들어갔다. 혈자리들은 이제 익숙하게 윤도의 침을 받았다.

“어떠신가?”

부원장이 조 과장에게 속삭였다.

“신기(神奇)죠.”

“신기...”

“저도 옷 벗고 채 선생 밑으로 침술 배우러가야 할 판입니다. 이건 한 수 앞이 아니라 열 수 앞을 내다보는 침술과 진맥을 펼치고 있으니... 인간의 오장육부를 들여다보며 치료하던 중국 명의 순우의의 절맥(切脈) 비기라도 빙의된 것 같습니다.”

순우의의 절맥.

이는 사람의 몸을 들여다보는 진단을 말한다.

“순우의보다 젊으니 더 좋은 거 아닌가?”

“그렇군요.”

“우리 한의학에 내린 벼락 같은 축복이야. 보물이라고.”

“원장님. 저 좀...”

조 과장이 부원장 가운 깃을 당겼다. 둘은 창가에서 뭔가를 숙의했다.

“어떻습니까?”

“으음... 될까?”

“그러니까 원장님 결단이...”

“알겠네.”

부원장의 표정에는 비장미까지 감돌았다.

오후 시간, 세미나실이 가동되었다. 윤도의 침술요법에 대한 안미란의 간이 보고였다. 그녀의 PPT 연출은 기가 막혔다. 침술 10여일 간의 여정을 데이터화 시킨 것이다. 보아하니 밤 잠 시간을 줄여 투자했을 게 분명했다.

환자들이 호전되는 과정이 그래픽으로 나왔다.

폐암은 4일차까지 완만한 상태를 그리다 5일, 6일, 7일에 가속이 붙었다. 골종양은 반대였다. 5일차까지 완만한 악화를 보이다 주식의 상한가처럼 가파른 호전을 보인 것이다. 불덩이 몸의 몸살 환자가 그 다음날 가뜬하게 회복되는 듯 한 기적이었다.

맥과 혈자리 발표는 윤도가 직접 맡았다.

“한의학의 기본원칙에 따라...”

근본부터 고려하고 시침한 침술전략을 밝혔다. 흔적 뿐인 폐암환자의 혈자리 취혈법도 함께 부연을 했다. 안미란의 체험기가 설명을 도왔다.

짝짝짝!

박수가 나왔다. 박수는 오래 오래 세미나실에 울려퍼졌다.

윤도는 그 길로 납치(?)를 당했다. 부인과 레지던트의 요청이었다. 마혁이 중재하자 송재균도 함께 부탁을 해왔다. 윤도가 수락을 했다.

침구실에 임산부가 있었다.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였다.

“완전 둔위입니다.”

레지던트가 말했다. 옆에는 송재균도 함께 있었다.

둔위!

아이가 거꾸로 들어섰다는 말이었다. 이미 37주를 지나 자칫 제왕절개를 해야 하는 상황. 임산부들에게 잘 알려진 고양이 자세를 취하고 조산사의 외회전술까지 받으며 태아 머리를 아래로 돌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임산부의 어머니가 마지막 수단으로 침술에 기대보고자 딸을 데려왔다.

부인과에서는 주로 뜸을 떴다. 발바닥 사람 인(人)자가 새겨지는 용천혈이었다. 용천혈은 족소음신경의 출발점인 혈자리였다. 여기에 꾸준히 뜸을 뜨면 태아의 위치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이 혈자리는 고혈압의 혈압조절에도 한 몫을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태아가 요지부동이었다. 뜸을 뜰 때는 은근한 반응을 보이다가 다시 주저앉는 것. 그대로 자리를 잡으면 좋지 않을 터였다.

송재균도 참석을 했다. 부인과 레지던트는 송재균과 친했다. 덕분에 송재균의 뜸이 시도된 적이 있었다. 효과는 별로 없었다.

윤도가 진맥을 잡았다.

“......!”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경맥(異經脈) 끼가 있었다.

‘이경맥...’

이 맥이 나타나면 죽는다. 윤도가 다시 집중했다. 그리고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것은 출산맥이었다. 보통 사람에게 이경맥이 나타나면 죽지만 출산을 앞둔 임산부에게 나타나면 머잖아 출산을 할 거라는 신호였다. 그렇다면 더욱 서둘러야했다.

“당장 시침해야겠네요. 이경맥이 보입니다.”

윤도가 침통을 잡았다.

“이경맥이라고요?”

레지던트가 물었다.

“한 번 짚어보시죠.”

윤도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레지던트의 진맥은 오래 걸렸다. 그러다 겨우 감을 잡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송재균과 마혁도 차례로 맥을 확인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레지던트는 더욱 비장해졌다.

“힘드시죠?”

윤도가 산모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네... 좀... 겁도 나고요.”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우세요.”

“이렇게요?”

산모는 두 손을 모아 봉긋한 배 위에 올렸다.

“외회전술 받아보셨다고 했죠?”

“네.”

“그 마음으로 손바닥을 돌리세요. 아가야 돌아라 기도하시면서...”

“네...”

산모가 따라하는 순간, 윤도의 장침이 발바닥 용천혈로 들어갔다. 죽은 사람도 일어난다는 용천혈. 순간 산모가 움찔 반응을 했다. 윤도는 확신했다. 이 장침은 반드시 먹힌다고. 산모 뱃속의 아기까지 무사 출산을 도운 침이었다. 신침은 경험을 받아 노하우로 쌓으니 흔들릴 리 없었다.

“아기가 움직여요.”

산모가 소리쳤다.

“괜찮습니다. 차분하게 계속 손을 돌리세요. 착한 아기라 엄마 말을 잘 들을 겁니다.”

윤도의 시선이 장침으로 옮아갔다. 손가락이 뜨끈해지는 화침이었다. 짜릿하게 몰린 기를 태반 쪽으로 올려보냈다. 아기의 반응이 느껴졌다. 출렁거린다. 움직인다. 그 물결을 따라 윤도의 손도 장침과 박자를 맞췄다. 방향은 엄마의 손바닥 회전과 같았다.

‘옳지.’

아기의 출렁임이 조금 더 힘을 받았다. 윤도의 손이 멈췄다.

침묵.

병실에도 장침에도, 심지어는 지켜보는 의료진들도 모두 침묵이었다. 그렇게 10분여를 기다린 윤도가 장침 하나를 더 뽑아들었다. 혈자리 부근에서 추세를 보더니 거침없이 새끼발가락 쪽에 장침을 꽂았다. 이 혈자리는 지음혈이었다. 옛 의서에 태아의 역위를 바로 잡는 혈이라고 나오는 혈자리...

‘지음혈...’

송재균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가 뜸을 뜬 혈자리였다. 위치는 약간 다르지만 지음혈이 분명했다. 하지만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어머!”

윤도가 침을 돌리는 순간 산모가 짧은 비명을 터트렸다.

높아지는 위상-2

“잠깐만요.”

윤도가 환자를 진정 시켰다. 그 상태에서 장침을 조율했다. 후끈, 이번에도 끝이 뜨끈해지는 화침(火鍼)이었다. 그 파장이 용천혈의 장침과 합치를 이뤘다고 생각될 때 조금 남은 침의 끄트머리를 마져 밀어넣었다.

“어머!”

산모의 눈이 한 번 더 휘둥그레졌다.

“괜찮으세요?”

레지던트가 산모에게 물었다.

“아기가... 아기가...”

“......”

“움직였어요. 자리를 바꾼 거 같아요.”

“네?”

레지던트 눈이 휘둥그레졌다.

“돌았어요. 분명히 돌았어요.”

산모는 거의 확신에 차 있었다.

“초음파 한 번 의뢰해보시죠. 아마 돌아간 거 같습니다.”

윤도가 침을 빼며 웃었다.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지만 피로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김 샘, 초음파실에 응급검사 좀 연락하세요. 환자는 내가 모시고 갈 게요.”

간호사에게 지시한 레지던트가 침대를 밀며 복도로 나갔다.

“진짜 대단하네요.”

마혁이 윤도에게 인사를 전해왔다.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닌가요?”

윤도가 웃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뭐...”

“송 선생님이 뜸을 뜨고 침을 놓았었다고요?”

윤도가 송재균을 돌아보았다.

“......”

“그 덕분에 혈자리가 말랑해진 거 같습니다. 기혈 흐름이 원만하니 침 놓기가 수월했거든요.”

윤도는 송재균을 챙겨주었다. 뜸의 덕을 본 것도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할 말 없네. 뜸자리까지 침으로 장악하다니... 비법이 뭐야?”

“침에 따뜻한 마음을 실었죠. 그러면 화침이 되거든요.”

“하핫, 채 선생만의 비법이군. 나는 언제 그런 재주가 생기나.”

“제 생각에는 침이 0.2mm 쯤 덜 들어가서 그렇지 않았나 싶습니다.”

“으음, 그거였군. 아무튼 고마워.”

송재균의 인사를 받았다. 이제는 윤도와 거리낌이 없는 그였다.

빠라빠방!

그때 부원장의 호출이 들어왔다. 마혁에게 양해를 구하고 부원장 방으로 걸었다.

“부르셨습니까?”

“앉으시게.”

부원장은 윤도를 반가이 맞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당연히 있지.”

“예...”

“암 환자들 치료 말일세, 영상을 다시 보고 있는데 차마 믿기지 않더군. 불과 열흘만에 이런 차도라니...”

“병이란 게 나으려면 하룻밤만에 낫기도 하잖습니까?”

“그것하고 같나? 무려 암이었네. 그것도 하나는 폐암...”

“암도 질병의 하나일 뿐입니다. 인체의 기혈이 조화를 이루면 어떤 질병도 퇴치할 수 있지요.”

“허어, 명언이군.”

부원장이 무릎을 치며 동의했다.

“그래서 말인데...”

잠시 일어선 부원장이 서재 쪽으로 향했다. 그는 조선 침술의 대가 허임의 침구경험방을 뽑아들었다.

“채 선생 입장을 아는 처지에 이런 말하기 그렇네만... 내 생각이 아니라 모두의 의견이라서 말이야...”

‘모두?’

“자칫하면 채 선생 때문에 내 모가지가 날아가게 생겼어요.”

“......”

“조선의 침 명의 허임 말일세. 그 양반을 우리 병원에 데려오려면 연봉을 얼마 쯤 줘야할까?”

“......”

“의견 한 번 주겠나?”

“제가 그걸 어떻게...”

“그냥 말일세. 편하게 개인적인 의견으로...”

“그 정도 분이라면 연봉 5억이나 10억이면 될까요?”

“젊은 허임이라면?”

“2-3억?”

“그럼 채 선생, 연봉 3억에 우리 병원에 와주지 않으시려나? 1-2년만 침술 특진을 봐주면 병원 규정을 고쳐서 진료과장자리 보장해 주겠네. 그 후로 침구학 교수 자리도...”

“......!”

1-2년 뒤에 진료과장 보장!

파격적인 제안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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