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265)

“원장님께도 재가를 받았네. 연봉은 연구비나 논문지원비 명목으로 더 생각해 줄 수도 있고.”

“부원장님!”

“채 선생이 개업을 준비 중이라는 거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채 선생은 우리처럼 큰 병원에서 더 많은 사람과 더 다양한 질환을 다루면서 의술을 펼치는 게 더 바람직하네.”

“......”

“채 선생처럼 하늘이 내린 침술을 가진 사람이야 말로 전국의 고질병이 다 모여드는 우리 병원이 어울린다 이 말일세.”

“......”

윤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광희한방대학병원.

전국 최고다. 부원장 말처럼 온갖 고질병 환자들이 몰려든다. 지금도 그렇다. 내원하고 입원한 환자들 중에는 윤도도 모르는 질환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그저 희망의 끈 하나를 가지고 마지막 손을 내미는 사람들...

구대홍도 그 중의 하나였다.

윤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무릎 아래를 절단했을 지도 모르는 구대홍...

하지만 윤도는 혼자 고개를 저었다. 어마무시한 제의지만 시스템 안에 갇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부원장님!”

마음을 정리한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제의를 받아주시겠나?”

“죄송하지만 고사하겠습니다.”

“......”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시는 부원장님 말씀이 아름답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 병원에서 일하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전국 한의과 대학 학생들 대다수가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잘 된 거 아닌가?”

“여기서 일하면 모든 게 좋겠죠. 안정되고 체계화된 시스템에 양방 한방의 협력 시스템, 거기다 각 분야의 베테랑 한의사들이 포진된 병원이니까요.”

“내 말이...”

“반대로 제가 시스템에 안주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제 길을 가겠습니다.”

“채 선생...”

“방금 하신 말씀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른 한의사들이 들으면 박탈감과 상실감이 들 테니까요.”

“채 선생...”

윤도가 돌아섰다. 방에는 부원장만 덩그라니 남았다.

“허헛!”

부원장이 웃었다. 웃음은 점점 더 얼굴 가득 번져갔다.

‘정녕 대물이군. 천리마처럼 결코 가둘 수 없는...’

부원장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거절 당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부원장은 알았다. 윤도의 마음과 머리 속에는 더 큰 의술이 들어있다는 걸. 그건 3억이나 허튼 보장 따위로 묶어놓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띠로띠롱!

테이블 위의 전화기가 울렸다.

“아, 조 과장?”

부원장이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됐습니까?”

조 과장이 물었다. 파격적인 제의의 출발은 조 과장이었다. 개업을 준비 중이라는 걸 알지만 놓치기 싫은 사람이었다. 조 과장이 나서 과장단 분위기를 조성하고 원장의 재가를 받았다. 그런 다음에 부원장이 총대를 맨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보시다시피’였다.

“새장이 크다고 대붕을 가둘 수 있겠나? 마굿간이 넓다고 천리마를 키울 수 있겠나? 내 답은 그걸세.”

“채 선생이 거절했군요?”

“보기 좋게!”

딸깍!

부원장은 수화기를 놓았다. 허전하다. 그래도 여전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

오늘 윤도의 마무리는 오십견 환자였다. 오십견은 흔한 질환이다. 너무 흔해 그러려니 하고 방치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팔을 들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다.

이 환자도 그런 쪽이었다. 며칠 있으면 괜찮아지겠지 하며 파스만 붙이고 떼다가 악화된 후에야 치료에 나선 것이다.

그럴만 한 배경도 있었다. 환자는 백수건달 출신이었다. 자칭 깡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니 팔 조금 아픈 건 대범한 척 허세로 넘어갔고, 어쩌다 동네 병원이나 한의원에 가면 살벌한 태도를 취하며 자기 마음대로 요구했던 것이다.

병원에서는,

“닥치고 주사나 한 방 놓고 약 주쇼.”

한의원에서는,

“나 침빨 안 받으니까 좋은 한약이나 주쇼. 싸고 퀄리티 좋게.”

···하는 식이었다. 그러니 효과를 보았을 리 없었다. 의사보다 잘난 환자였으니 편작의 육불치 중의 하나에 속했다.

그 성깔은 대학병원에서도 죽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조심하는 눈빛이더니 바로 저렴한 허세 각이 표출되었다.

“뭐여? 여기 과장이나 원장 없어?”

윤도와 송재균, 안미란을 본 환자가 눈알에 힘을 주었다. 나이가 어려보이니 깔보는 것이다.

“팔 좀 주시죠.”

윤도가 진맥에 나섰다.

“아, 씨발... 유명하다고 해서 왔더니 마루타여 뭐여? 완전 실습각이네? 당신들 내가 누군 줄 알아?”

결국 허세 폭주를 시작하는 환자.

“오십견 때문에 오신 거 아닌가요?”

“허, 모르네. 내가 이래 봬도 소싯적에는 한 번 떳다 하면 대한민국 흔들던 주먹이야. 지금도 전화 한 통이면 후배들이 한 트럭은 몰려오거든.”

“그럼 그분들에게 안마나 받지 여긴 왜 오셨어요?”

윤도의 응수는 초연했다. 이제는 병원의 전폭 지지를 받는 몸. 환자의 저렴한 허세에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뭐라?”

“진료 취소해 드려요? 환자 굉장히 많이 밀렸거든요.”

“뭐? 최소? 지금 진료 거부하겠다는 거야? 뭐야?”

“팔 주세요.”

윤도가 환자에게 시선을 겨누었다. 부드럽지만 틈이 없는 눈빛이었다. 허세 환자는 콧등을 실룩거리더니 마지못해 손을 내주었다. 동네 병원과는 다른 분위기. 대학병원의 권위에는 허세가 통하지 않음을 안 것이다.

진맥을 했다. 윤도 손길이 환자의 맥을 따라 온몸을 돌았다. 혈자리들의 상황을 알았다. 그로 말미암아 질환을 알았다.

‘견응증...’

견응증(肩凝證).

오십견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견응증이었다. 목줄기를 타고 어깨까지 뻗치는 근육통의 통칭이다. 피로나 무리가 주된 원인이며 어깨에 격통이 올 수 있다. 처음에는 통증으로 괴롭고 고질이 되면 팔을 들 수 없는 기능장애를 동반한다.

“팔 올려보세요.”

진단을 끝낸 윤도가 확인에 들어갔다.

“아아!”

환자가 자지러졌다. 핏대 올리던 조금 전 태도와는 완전 달랐다. 그 역시 환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발병은 이미 수년전부터였다. 최근 들어 더 악화되면서 격통에 팔 마비증세까지 동반되었다.

환자는 습관성 일방통행을 잊지 않았다.

“나 침은 안 맞아. 한약이나 잘 지어줘.”

침을 안 맞아?

배석하고 있던 안미란이 고개를 들었다.

“용하다는 침쟁이 놈들 다 찾아가 봤는데 전부 개구라더라고. 침도 침 같지도 않은 거 가지고 장난도 아니고...”

“걱정마세요. 우리 채 선생님 침은 다르니까요.”

안미란이 분위기를 잡았다.

“뭐가 다른데? 여기 침은 금침이라도 돼? 응, 그럴지도 모르지. 대학병원이랍시고 진료비 왕창 뜯어먹으려면...”

환자의 빈정은 점점 농도가 심해졌다.

금침...

윤도가 혼자 웃었다. 침술의 문제는 민간요법으로도 많이 쓰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병원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나라 차원에서 권하기도 했었다. 급할 때 요긴하게 쓰이는 게 침술이기 때문이었다.

그게 현대까지 이어졌다. 문제는 관리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 일부 민간의 침술가들 경우에는 침술을 과대포장해 비방은 물론, 암 만병통치인양 선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까지 맞은 침이 이거죠?”

윤도가 4호 호침을 들어보였다.

“허, 저렇다니까. 그저 살갗이나 슬쩍 찌르는...”

“오늘 맞을 침은 이겁니다.”

이번에는 장침이었다.

“......!”

침 길이에 놀란 환자가 움찔 움츠렸다.

“금은 아니지만 금침보다 좋은 효과를 얻게 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예.”

“놓을 줄은 알고?”

“장침 달인이세요.”

안미란이 거들고 나섰다.

“달인 같은 소리. 효과 없으면 어쩔 건데? 손해배상 해줄 거야?”

“......”

“저 봐. 의사 놈들은 전부 뻥쟁이라니까. 그저 입으로만 벙긋거리고 치료 안 되면 특수체질입네 스트레스네, 신경성이네...”

“고독대 님.”

윤도가 환자 이름을 호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뺀질이들. 하지만 병원 규칙이 그랬다. 환자가 하늘인 것이다.

“왜?”

“여길 잠깐 보시죠.”

환자가 고개를 들자 윤도가 그 앞 침대의 커튼을 살짝 들었다. 침대에는 초등학생 환자가 누워있었다. 모로 누운 아이 등에 빼곡 장침이 보였다.

“제가 조금 전에 놓은 침입니다.”

“......”

“혹시 아이의 비명을 들으셨습니까?”

“......”

환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는 소리는요?”

한 번 더 고개를 젓는 환자.

“만약 제가 서툴다면 아이가 소리를 질렀겠지요. 아이들은 더 솔직하니까요.”

“......”

“침을 놓아도 되겠습니까?”

“뭐?”

“한 대만 놓아드리죠. 고독대 님의 특유한 스타일대로 간을 보시고 효과가 없으면 다른 데 가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있다?”

“예.”

“좋아. 기왕 온 거니 속는 셈치고...”

환자가 자세를 바로 했다. 혈자리는 이미 짚어두었다. 침을 놓을 수 있는 곳은 많았다. 척택혈, 곡지혈, 견우혈... 거기에 신관혈에 외삼관혈, 사화중, 족오금, 견중혈... 개중에는 강한 자극이 필요한 혈자리도 있었다. 일단 팔을 들 때 고통이 가장 크므로 척택으로 낙점을 보았다.

“끝났습니다.”

혈자리를 잡기 무섭게 윤도가 말했다.

“......?”

잔뜩 긴장하고 있던 환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팔꿈치 안 쪽에 우뚝 선 장침이 전봇대처럼 보였다.

“그, 그새?”

“팔 들어보세요.”

“팔?”

환자가 엉거주춤 팔을 들었다. 말투에 비해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까칠한 척 하지만 실은 겁이 많은 환자였다.

“......!”

팔을 올린 환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설프게 올라갔지만 아프지 않았다.

“다시요.”

윤도의 주문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조금 더 빨리 올라갔다. 역시 아프지 않았다.

“안 아프네?”

팔을 올리던 환자가 소리쳤다. 그는 여러 방향으로 팔을 움직였다. 그러다 우뚝 동작을 멈췄다. 통증이었다.

“......?”

환자가 동작을 멈춘 채 윤도를 보았다.

“팔을 올릴 때 통증만 잡았습니다.”

“......?”

“침 맞기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윤도 얼굴에 카리스마가 들어왔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타입의 환자. 치료에 집중하려면 기를 꺾어놓아야만 했다.

“아, 아니 내 말은...”

“더 맞으시겠습니까? 가시겠습니까?”

“......?”

“치료를 받으시려면 제대로 협조를 하세요. 병원을 사기꾼 집단으로 생각하면 침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 내가 언제 또 그랬다고...”

환자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내려갔다.

“더 맞으시겠습니까?”

“그, 그럼요. 사실 아까 한 말은 농담입니다. 내가 원래 말재주가 없어서 입이 좀 거칠어요.”

급변한 환자가 윤도 가운을 잡았다.

“그럼 침을 놓겠습니다.”

“예!”

환자는 이등병처럼 각 잡힌 목소리로 절도 있게 화답했다. 윤도가 침통에서 장침을 골라들었다. 그 침은 슬안과 독비를 뚫고 들어갔다. 침이 자리를 잡자 침 끝을 조절해 막힌 혈자리 문들을 열었다. 혈자리는 장침의 신력(神力)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이제 팔을 옆으로 움직여보세요.”

“옆으로?”

“천천히...”

“움마?”

팔이 통증 없이 올라가자 환자가 입을 쩌억 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