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습니다. 시간을 맞춰둘 테니 그때까지 얌전히 누워 계세요.”
시침은 그렇게 끝났다. 윤도가 돌아보자 안미란이 웃었다. 어느새 얌전해진 까칠 환자. 장침의 효과처럼 신기한 일이었다.
“고마워요. 역시 큰 병원이 다르네.”
침을 뽑자 환자가 거듭 인사를 해왔다. 그도 병을 고치는 한의사 앞에서는 순하디 순한 환자였다.
‘역시 선생님...’
안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더 올라가는 윤도의 위상이었다.
초대박 의술 비즈니스-1
초대박 의술 비즈니스-1
퇴근 직전 부용에게서 문자가 들어왔다.
[선생님, 오늘 혹시 시간 되요?]
[만들어보죠.]
[아버지가 여쭤보라고 해서요.]
‘이 회장님?’
잠시 생각하다 답 문자를 보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의무실 보여드리려고 그러실까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한 번 물어봐 드려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차를 보내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제 차로 가겠습니다.]
문자를 끝내고 윤철에게 문자를 때렸다.
[스포츠카 무보수 운짱 할래, 말래?]
3초 안에 답 문자가 날아왔다.
[할래.]
그리고 30분 후에 흰색 스포츠카가 날아왔다.
“형, 타!”
윤철이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운전을 맡겼더니 풀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생이었다. 그만큼 윤철은 스포츠카에 목을 매고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닥터님?”
“그냥 닥터가 아니고 코리아 메디신 닥터!”
윤도가 바로 잡아주었다.
“오케이, 어디로 모실까요? 코리아 메디신 닥터님? 아, 디립따 어렵네...”
“TS 전자 본사.”
“예썰!”
윤철은 부드럽게 핸들을 꺾었다.
스포츠카를 부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차는 이 회장의 선물이었다. 선물을 받았으니 한 번 쯤은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준 선물을 잘 사용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사람의 심리이기에 예의를 갖춘 것이다.
‘무슨 일일까?’
도로 위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TS 전자에는 윤도의 의무실 방이 마련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일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이 회장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침을 맞고 싶은 것...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차가 광화문에 가까웠다.
“잠깐, 차 좀 돌릴래.”
윤도가 계획을 바꾸었다.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가까운 한의원 현장을 볼 생각이었다.
“우와, 여기가 형 한의원 자리?”
번듯해져가는 현장을 본 윤철이 뒤집어졌다.
“얌전히 차에서 기다려라. 어머니 아버지께는 아직 비밀로 하고.”
“우워어, 우리 형, 우리 형이 아니네.”
“뭐?”
“위대하신 분이라고.”
“짜식...”
등짝을 쳐주고 안으로 걸었다. 공사는 훌쩍 진척이 되어 있었다. 방해가 될까봐 입구에서 구경을 했다. 그때 인부 한 사람이 쓰레기를 가져와 구석에 모았다. 바람이 불자 종이조각들이 날렸다. 종이를 따라 작은 나무장식 하나가 윤도 발까지 굴러왔다.
“......?”
무심결에 집어든 윤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땟물이 꼬질꼬질한 옛날 침통이었다. 열어보니 놀랍게도 침이 들었다. 낡디 낡았지만 침이 맞았다. 그 옛날 한의사가 쓰던 것일까? 그게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실내 대공사로 인해 쓸려나온 것일까?
침통에는 8개의 구멍이 있었다. 각기 다른 침을 넣는 용도다. 먼지를 털고 주머니에 넣었다. 누가 쓰던 것이건, 쓰레기가 될 물건은 아니었다.
얼마 후에 윤도는 TS전자 본사 건물에 도착했다.
“10분 반경 안에서 놀아라.”
“땡큐!”
윤철은 거수경례까지 붙이고 쏜살처럼 멀어졌다.
‘짜식...’
“채 의무실장님?”
산뜻한 정장 남자가 윤도에게 다가왔다.
“그렇습니다만.”
“저 회장님 모시는 비서실장입니다. 권 실장이라고 불러주십시오.”
30대 중반의 남자가 명함을 건넸다.
“아, 네. 저는 채윤도라고 합니다.”
“모시겠습니다.”
권 실장이 앞서 걸었다. 윤도는 그 뒤를 따랐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회장님이 오실 겁니다. 지금 중역들의 보고를 듣는 중이라서요.”아담한 휴게실에서 권 실장이 말했다. 그가 나가자 여비서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좋네?’
차를 마시며 휴게실을 구경했다. 전문서적이 가득 찬 벽이었다. 테이블과 소파도 자유분방해 보였다. 최고의 기업이기에 다소 경직되었을 줄 알았던 분위기는 상상과 달랐다. 서적 중에서 중국 전문서 하나를 뽑았다. 중국 문화와 기업문화에 대한 내용이었다.
‘헤이싼시호...’
명의순례가 생각났다. 거기 참가한 건 정말이지 신의 한 수였다. 그때 말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여, 채 선생!”
이 회장이 반색을 하며 들어섰다. 권 실장은 문까지 수행을 하고는 나갔다.
“미안하네. 중대한 일이 생겨서 말일세.”
“괜찮습니다.”
“앉지.”
이 회장이 자리를 권했다.
“차는 마셨군?”
“예...”
“바쁜 사람 불러서 미안하네. 부용이 말이 대학병원 연수다 개업준비다 해서 눈코 뜰 새도 없다고 하던데...”“회장님 의무실에서도 일하게 되었으니 인사 차 들리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어 아시나?”
이 회장의 시선이 윤도가 꺼내놓은 책에 머물렀다.
“예, 조금...”“허어, 한의학 공부만 해도 벅찰 텐데 언제 중국어까지?”
“한의학을 하려면 한문을 많이 알아야하거든요. 해서 대학 동아리에 들어 몇 년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딱이긴 한데...”
이 회장은 뭔가 생각난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그게 말이지...”
이 회장이 잠시 주저했다. 쉽게 꺼낼 수 있는 얘기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한의학에 관한 거라면 뭐든 괜찮습니다.”
“어찌 보면 한의학에 관한 일이긴 하네만...”
“건강에 이상이 생겼습니까?”
“그것도 맞긴 하네만...”
“그럼 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오늘부터 의무실에 근무하는 걸로 쳐주시면 될 일 아닙니까?”
“호오, 그거 합리적인 제안이군? 그럼 염치 불구하고 의견을 구해볼까?”
“예.”
“실은 우리가 지금 중국 공장 확장을 추진 중에 있다네. 중국이 예전 같지 않아 굉장히 불안정하지만 그 시장만큼 매력적인 곳도 없으니...”
“......”
“그래서 입지가 좋은 곳에 두 번째 공장을 지으려고 하는데 성 서기장이 깐깐해서 인허가 과정에 걸림돌이 많다네.”
“......”
“지금 중국 상무위원 한 사람이 주석의 특사로 한국에 들어와 있는데 그 사람이 우리 제2 공장이 진출하려는 성의 전(前) 당 서기장 출신이라네. 현재의 서기장을 천거한 사람이니 직통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지.”
“예...”
“밀담을 가져보려고 선을 댔는데 절반의 성공에 그쳤네. 만날 의향은 있는 거 같은데 몸이 좋지 않으니 다음으로 미루자는 거야. 그러니까 건강에 이상이 생긴 사람은 내가 아니고 중국 상무위원이라네.”
‘중국 상무위원?’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이 회장의 복안을 알 것 같았다. 태산전자가 마음을 사야하는 중국 상무위원. 그런데 몸이 좋지않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윤도가 고쳐준다면 자연스러운 케미를 촉발할 수 있는 상황...
“회장님이 아니라 그 분에게 제가 필요하군요?”
윤도가 알아서 회장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바로 그거라네.”
“어디가 편찮은 지도 알고 계십니까?”
“핵심은 이걸세.”
이 회장이 뭔가를 꺼내놓았다. 그건 윤도가 건네준 ‘영약’ 환약이었다. 새 이빨을 나게 하는 영약환...
“회장님...”
“어떻게 하면 이 플랜을 빨리 매듭지을 수 있을까 하다 보니 상무위원의 정보를 수집하게 되었네. 그 양반이 의치라더군. 그런데 나처럼 잇몸뼈가 좋지 않아 임플란트가 아니고 부분 틀니라고 들었네.”
‘틀니?’
“채 선생, 한의사시니 잘 알겠지만 이빨 없는 사람의 소원이 뭔지 아나?”
“그야... 새 이빨...”
“그렇지. 그거만한 선물이 없지.”
“하지만 이 환은...”
“채 실장이 내게 준 선물이지.”
“......”
“그냥 선물이 아니라 채 실장 마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네. 정말 이빨이 난다면 그거야 말로 지상 최고의 보물이 아니겠나?”
“......”
“중국통인 우리 김 전무를 통해 좋은 약이 있다는 의사를 전달했는데... 상무위원이 웃었다고 하더군. 믿을 수 없다는 거지.”
“예...”
“그러니 채 실장이 한 번만 나서주면 안 될까? 이 양반들이 나흘 후면 중국으로 돌아갈 일정이라 말이지.”
‘나흘...?’
“분위기 상 내가 전달하는 것보다 채 실장이...”
“......”
“이 건이 성사만 된다면 보너스도 두둑하게 안겨드리겠네.”
“그 분은 어디 계시는지요?”
“가까운 호텔에 묵고 있네. 치은통이 심하다고 하더군.”
치은통...
잇몸이 아픈 상태를 말한다. 치통이나 치은통은 상상보다 심각한 통증이었다.
“제가 할 일은 이빨이 나게 해주는 거로군요.”
“맞네. 다만...”
이 회장은 담담하게 우려를 이어놓았다.
“이빨이 나지 않는다면...”
쪽박!
이 회장의 우려는 그것이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과 자본을 모두 버리고 제3의 장소를 물색해야 할 수도 있었다. 상무위원 입장에서는 농락을 당했다고 생각할 소지가 있는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의사의 제안이었으면 생각지도 않았을 이 회장. 그러나 자신의 딸과 아들을 구한 기적을 몸소 겪었으니 모험을 거는 것이다.
“안 될까?”
“아닙니다. 보내주십시오.”
“채 실장...”
“태산전자 의무실장 직함을 받은 기념으로 한 번 해보죠.”
“고맙네. 다만 이 사람이 늙어 기우가 심하다 보니 마지막으로 확인하는데...”
이 회장의 목소리는 심각하고도 묵직하게 이어졌다.
“이빨이 나는 게 확실한가?”
**
“준비 되셨나?”
상무위원 자오후닝의 호텔 로비에서 김 전무가 물었다. 이 회장이 특별히 붙여준 사람. 그는 중국 제 2공장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사령탑이기도 했다.
“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게.”
김 전무가 핸드폰을 꺼냈다. 오면서 미리 상무위원 비서관과 연락을 한 상황. 중국 측은 다소 미온적인 태도로 나왔지만 방문 강행을 한 김 전무였다.
“내려오겠다는군.”
김 전무가 통화를 끝냈다. 윤도의 시선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중국 상무위원...
중국 정치는 잘 모르지만 권력의 핵심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한국의 웬만한 장관도 거들떠보지 않는 거물. 태산전자조차도 저자세인 걸 보면 그 위세를 알만했다.
짧은 시간, 윤도는 이 회장을 떠올렸다.
‘이빨이 나는 게 확실한가?’
그 한 마디는 더 없이 비장했다. 사운을 건 정도는 아니지만 조 단위의 예산을 준비한 제 2공장. 한 마디로 총성 없는 전장이 아닐 수 없었다.
때엥!
엘리베이터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남자와 여자였다. 전무는 여자를 향해 극진한 예를 갖췄다. 상무위원 수행책임자 진 비서였다.
“이 분이 회장님께서 대인께 추천하는 한의사입니다.”
김 전무가 중국어로 말했다. 진 비서의 시선이 윤도에게 옮겨왔다. 윤도도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