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명의는 자기 입으로 칭하지 않는 법.”
“아름다운 말씀이지만 진정한 명의라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어떤 불명예도 감수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명의란 어떤 사람인가?”
“명의는 한두 가지 정의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명의란...”
윤도는 상무위원을 반듯이 바라보며 말을 이어놓았다.
“자기 병을 고쳐주는 사람이지요.”
“......!”
상무위원의 눈동자가 잠시 출렁거렸다.
기살명의(氣煞名醫).
그런 말이 있었다. 명의의 기를 죽인다는 뜻이다. 상무위원의 공세는 묵직했지만 윤도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게 어떤 비방을 쓸지 말해주겠나? 침과 그 영약 말일세. 당신 말이 환자와 의사는 소통해야 한다는 것 같으니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러자면 마땅히 대인의 진료가 선행되어야합니다.”
“그렇군.”
웃음을 머금은 상무위원이 손을 내주었다. 내공 겨루기는 일단 윤도의 승이었다.
상무위원의 손목은 짧고 다부졌다. 윤도가 손목을 잡았다. 진맥, 진맥의 시작이었다. 집중했다. 시간은 적당한 선에서 끊었다. 오래 끌면 부족하다 할 것이고 짧게 끓어도 실력의 의심을 살 일이었다.
“잇몸에 출혈이 있으시군요?”
“그런가?”
“류머티즘도 중증입니다.”
“그런가?”
“모두 소장에서 기인한 병입니다.”
“그런가?”
“대장경은 치료한 흔적이 있군요. 나쁘지 않지만 근본은 거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가?”
“중국에 있는 주치 중의(中醫)에게 확인하시고 싶으면 이렇게 전하십시오.”
진맥을 끝낸 윤도가 설명을 시작했다. 주변을 압도하는 목소리였다.
초대박 의술 비즈니스-3
“새 이빨이 나게 하는 처방은 경옥고와 신침법(神枕法)에서 왔으나 묘방이기에 공개는 불가하다. 이는 고래의 처방으로 두 처방 공히 검은 머리가 희어지고 이빨이 새로 나니 고서를 참고하면 될 것이오, 당장의 잇몸 출혈은 곡지혈을 중심으로 잡을 것이며 류머티스를 위해 소장수를 취혈할 것이다. 두 혈의 염전(捻轉)은 혈자리의 기혈 기세에 따라 보사를 맞출 것이며 제삽(提揷)의 시작은 부드럽되 마지막은 활을 겨누듯 할 것이다.”
“......!”
상무위원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여기서의 염전제삽(捻轉提揷)은 침을 잡고 돌리는 법과 환부에 넣고 빼고 하는 손기술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병소는 대장경이 아니라 신장이니 주치의께서는 대인이 귀국하면 신장을 보하는 약재로써 체질을 달래 개선해주길 바란다. 이는 신장에서 출발한 기혈 작용이 대장에 미치고, 그 다음에 삼초에서 소장에 미치기 때문인데 대인의 치은과 치조는 대장경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렇기에 대장경 치료에 치중하기 쉬우나 근원을 달래지 않으면 새로 이빨이 난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빠질 수 있으며 나아가...”
마지막 말은 상무위원의 귀에다 속삭여 주었다.
단호한 설명에 주저 없는 행동. 그 언행에 주변 사람들 모두가 초긴장이었다.
김 전무와 진 비서, 그 둘은 숨도 쉬지 못하고 윤도와 상무위원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었다.
윤도 얘기를 들은 상무위원의 입술 주변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는 결국 객실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와하하핫!”
“......”
“과연 이 회장이시군. 젊은 의재이기에 내 그 깊이가 궁금했는데 헐렁한 곳이 없소이다. 결례를 용서하고 자리에 앉으시오.”
칼날 같던 상무위원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어투도 경어로 바뀌었다. 윤도의 의술을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차를 내오거라.”
상무위원이 수행원에게 말했다.
“대인의 질환이 오래 되었으니 치료가 우선입니다.”
윤도는 한의사의 본분을 지켰다.
“좋아요. 그게 바로 의원의 자세지. 어디에서 시작할까요?”
“아무 데고 편안히 누울 수 있는 곳이면 됩니다.”
상무위원은 진 비서의 안내를 받아 자기 침대로 향했다.
“이거...”
상무위원의 망침통을 바라보며 윤도가 말을 이었다.
“제가 써도 될까요?”
“......?”
윤도 물음에 진 비서가 먼저 반응을 했다. 그녀는 윤도와 상무위원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그렇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윤도의 망침 경험은 단 한 번 뿐이라는 것을.
“그건...”
“원하시면 쓰시오.”
허락은 상무위원 쪽에서 나왔다. 거물답게 흔쾌했다. 윤도가 망침을 꺼내 침날을 휘어보았다.
티잉!
침날에서 탄주가 나왔다. 울림은 가늘고 길었다. 침의 길이만큼이나 긴 여운. 그러나 오직 윤도만 듣는 그 여운...
후웅.
손가락이 반응을 했다. 화침의 반응이었다.
‘원래는 뜸을 뜨면 좋은 곳...’
손의 반응으로 감을 잡은 윤도, 망침을 거침없이 소장수혈에 밀어넣었다. 혈자리는 편안하게 침을 받았다. 장침이 그랬듯이 칼집을 찾아가는 칼날 같았다.
긴 침을 잡고 말단에 화기(火氣)를 밀어넣었다. 손가락은 침의 길이에 비례해 다른 날보다 조금 더 뜨거웠다.
이어 또 하나의 망침을 뽑아들었다. 이 침이 백미였다. 달리 망침일까? 달리 장침보다 길게 만들었을까? 윤도의 망침은 믿기지 않게도 손목 위의 외관혈에서 팔목 안쪽의 곡지혈을 찾아 들어갔다.
이른 바 투침법, 외관 투 곡지의 시침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으니 시침을 바라보던 진 비서는 놀란 입을 막을 뿐이었다.
침의 삽입은 들숨에서 이루어졌다. 목적하는 깊이까지 단숨에 찌르고 날숨으로 바뀔 때 침의 3할을 살짝 뽑았다. 다시 들숨이 나오면 더 들어가고 날숨 때 뽑기를 반복하며 혈자리를 들락거렸다. 원래는 여섯 번을 하면 좋을 자리. 그러나 침을 맞은 흔적이 있기에 다섯 번을 하고 끝냈다.
소장수는 류머티스를 위한 침이었고 곡지혈은 치조 출혈을 잡기 위한 침이었다. 거기에 덧붙은 외관혈은 몸의 중심유지와 소소한 두통을 위한 서비스였다.
‘45분.’
타임은 길게 맞췄다. 정신은 충만하지만 육신은 부실한 상무위원이었다. 소장과 대장이 좋지 않아 생긴 구강의 질환이었다. 당연히 건강과 반대 쪽으로 갈 수 밖에 없는 몸이었다.
찰칵!
진 비서가 사진을 찍었다. 어디론가 전송을 했다. 잠시 후에 답이 오자 그걸 상무위원에게 보여주는 진 비서. 상무위원의 표정은 한 겹 더 풀어졌다. 사진의 전송지는 중국이었다. 상무위원의 주치 중의에게 보여 확인을 받은 모양이었다. 중의의 이의는 당연히 없었다.
소장수혈은 상무위원의 류머티스에 특효였다. 세팅한 시간이 다 되어가자 손목과 발목 붓기가 빠지는 게 보였다.
“침을 뽑겠습니다.”
안내 말과 함께 망침을 뽑았다.
“손가락 어떻습니까?”
“......?”
상무위원의 눈이 손가락에 멈췄다.
늘 찌뿌둥하던 손가락. 비라도 올라치면 손가락 관절에 녹이 슨 듯 뻑뻑하면서 유리칼로 찌르는 듯 한 통증이 수반되던 손가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름을 칠한 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디가 시원하구려.”
“발목의 붓기도 확인하십시오.”
“오!”
상무위원은 허리를 굽혀 발목을 쓰다듬었다. 늘 허풍선이처럼 부풀어 있던 붓기가 사라진 것이다.
“입의 출혈도 멈췄을 겁니다.”
“퇘에!”
상무위원이 침을 뱉었다. 혈흔이 나왔다.
“......”
그가 윤도를 바라보았다.
“물을 마시고 해보십시오. 그 혈흔은 이미 나왔던 혈흔입니다.”
상무위원은 윤도의 말에 따랐다. 이후 서너 번이나 침을 뱉고 티슈를 물어보지만 혈흔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니 시 주빵데!”
상무위원이 마침내 엄지를 세웠다. 당신이 최고라는 뜻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제 처방약을 위한 침을 좀 놓겠습니다.”
“그러시오.”
허락이 흔쾌하게 나왔다.
“이제 제 침을 써도 될까요?”
“그것도 그러시오.”
상무위원이 말하자 장침을 뽑아들었다. 네 장침이 그의 손으로 향했다. 목적혈은 양곡과 양계혈, 후계와 합곡혈이었다. 이들은 소장경과 대장경에 속하는 혈자리였다.
장침 중 하나는 일침사혈로 들어갔다. 합곡으로 들어가 노궁혈과 소부혈을 지나 후계혈에 닿았고, 양계에서 들어가 양곡에 닿았다. 양손 가지런히 들어간 침은 보기에도 좋았다.
<일침사혈.>
찰칵.
진 비서의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찰칵찰칵!
각도를 바꿔가며 몇 장이고 거푸 찍어댔다.
“어, 몸이 가뜬하네?”
네 장침을 발침하자 상무위원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입주변의 기혈을 원활하게 만들었습니다. 약빨을 잘 받게 하기 위한 사전조치죠. 침을 넣는 김에 다른 두 혈을 잡아 일침사혈의 시침을 했습니다. 기혈 작용이 촉진될 일이니 컨디션이 좋아질 겁니다.”
“일침사혈이면 침 하나로 혈 넷을?”
“예.”
“......!”
상무위원의 입이 벌어질 때 진 비서가 다시 핸드폰 문자를 보여주었다. 중의가 보낸 문자였다. 상무위원은 저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분위기를 탄 윤도가 영약을 꺼내놓았다.
“밤에 잘 때 물고 자십시오. 3일 지나면 이가 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마지막 3일 차에는 다시 출혈이 있을 것이니 한 번 더 시간을 내주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라도 특별한 문제가 생기면 연락하시고요.”
“이걸 먹으면 새 이빨이 난다?”
상무위원이 영약환을 바라보았다.
“약재가 귀한 것들이라 다시 만들기 힘든 것입니다. 흠이 가지않게 주의해서 복용하시기 바랍니다.”
“기가 막히군. 전통의학은 우리 중국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상무위원은 영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중국이 최고인 것도 있고 한국이 최고인 것도 있으니 서운해 마십시오.”
“내 주치의가 한국의 옛 문헌도 자주 공부하거니와 한국의 의사들은 대개 심의는 드물고 약의만 득실거린다고 하였는데 선생을 보니 달리 생각해야 할 것 같소.”
상무위원...
역시 허접한 내공은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심의와 약의는 세조실록에 나오는 팔의론(八醫論)이었다. 흔히들 의사를 평가할 때 명의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 위로 선의, 신의, 천의 같은 수식어도 나온다. 조선에서도 한의사에게 등급을 매겨 불렀다.
1) 심의(心醫)-환자로 하여 마음을 편하게 만드니 환자는 의원의 눈빛만 보아도 마음이 안정된다. 이렇듯 품격 있는 한의사를 심의라 한다.
2) 식의(食醫)-환자의 병세를 판단할 때 정성이 부족하고 환자가 말하는 병명만 생각해 약을 지으니 식의라 칭한다.
3) 약의(藥醫)-환자 질환의 경중은 신경 끄고 환자가 호소하는 곳의 약만 먹이며 차도를 기다리니 이를 약의라 부른다.
4) 혼의(昏醫)-병자에 따라 부화뇌동하며 오로지 비싼 약만 팔려하니 이를 혼의라 명한다.
5) 광의(狂醫)-환자의 호소는 늘 과장됨을 모르고 강한 약을 함부로 지어먹이니 이를 광의라 부른다.
6) 망의(妄醫)-신분에 따라 환자를 대우하며 누구를 자신이 고쳤다고 강조하며 비싼 약을 권하니 이를 망의라 명한다.
7) 사의(詐醫)-멀쩡한 사람을 유혹해 자신의 약을 비방이자 만병통치약이라 선전하니 이를 사의라 한다.
8) 살의(殺醫)-환자나 질병퇴치에는 별 관심 없고 다른 의원의 약처방에 대해 감놔라 배놔라 하며 이름을 팔며 사니 이를 살의라 칭한다.
그러고 보니 조선시대에도 약 가지고 장난치는 인간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인의 주치의께서 본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걸 말미암아 폄하하신 모양인데 21세기 한국에는 식의 밑의 한의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윤도가 잘라 말했다. 설령 그런 한의사나 의사가 있다고 한들 일부에 불과할 일로 생각했다.
“그럼 저는 이만...”
설명을 끝낸 윤도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 잠깐.”
상무위원이 발길을 세웠다. 금고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상무위원은 뭔가 주섬거리더니 봉투를 만들어 내놓았다.
“받아주시오.”
“이게 뭔지...”
“진료비로 알고 가져가시오. 당장은 가져온 외환이 그것 뿐이고... 당신 말대로 이빨이 난다면 돈으로 계산할 수도 없는 일. 그건 그때 다시 생각해 드리겠소.”
“진료비는 필요 없습니다. 대인의 망침을 빌렸으니까요.”
“우리 말에 영약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소용이 있다는 말이 있어요.”
상무위원 눈매에 다시 힘이 실렸다. 대륙 최고 정치가의 한 명. 호의를 무시하면 역작용이 생길 것 같았다.
“정 그러시다면...”
윤도가 봉투를 받았다. 볼륨감이 제법 두툼했다.
**
“채 실장.”
엘리베이터 안에서 김 전무가 입을 열었다.
“네.”
“내 생전 의술 때문에 애가 타기는 처음이었네. 의술을 앞 세워 비즈니스를 하기도 처음이고...”
“그랬습니까?”
“어떻게 되는 건가? 분위기는 좋던데?”
“일단 신뢰를 형성했으니 3일을 기다려야합니다.”
“하루나 이틀만에는 안 되는 일인가? 3일이면... 그 다음 날 저들이 중국으로 돌아갈 일이라...”
“원래는 3개월인데 3일로 당긴 일입니다.”
“허어!”
“이빨이 나는 일입니다. 작은 상처가 낫는 게 아니거든요.”
“미안하네. 이게 워낙 큰 프로젝트다 보니...”
“괜찮습니다.”
“그건 그렇고 상무위원 귀에 속삭인 건 무엇 때문이었나?”
김 전무가 물었다. 그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남자들의 문제입니다.”
“정력?”
“예.”
“그런데... 그 처방은 해주지 않은 것 아닌가?”
“미리 말씀드린 처방에 들어있으니 따로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또한 신장의 기혈이 좋아지면 차츰 좋아질 문제거든요.”
“오, 그렇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