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265)

“한방에서는 기혈의 조화가 우선이니 기의 순환이 원활해지면 자잘한 병은 함께 사라집니다.”

“허헛, 채 실장의 출근을 학수고대해야겠군. 나도 그 장침 한 번 맞아보아야겠어.”

“그렇게 하시죠.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할까요?”

윤도가 봉투를 들어보였다.

“그거야 당연히...”

김 전무가 봉투를 윤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봉투 속에 든 건 위안화가 아니라 100달러 지폐였다. 나중에 세어보니 무려 8800불이었다. 체류비로 가져온 돈 전부를 꺼내준 모양이었다.

3일.

태산전자에게 천년 같은 시간이 되고 말았다.

3일.

윤도에게도 그럴 것 같았다.

의사의 로망 명의열전 캐스팅 확정.

의사의 로망 명의열전 캐스팅 확정.

김 전무와 헤어진 윤도는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에서 부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콜이었다. 아버지를 도와준데 대해 답례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콜을 받아들였다. 윤도도 할 말이 있었다.

‘치아...’

물을 마시며 상무위원의 일을 생각했다.

이빨!

왜 소장이나 대장과 관련이 있을까? 그건 입으로 지나가는 혈자리 때문이었다. 위경과 대장경이 주로 지나간다. 그렇기에 이빨과 잇몸과 연관이 되었다.

건강한 이빨을 가지려면 소장의 기능도 좋아야했다. 진맥으로 파악된 시침 혈자리는 위장경의 내정, 해계, 충양혈이었고 대장에서는 이간과 양계, 합곡혈이 꼽혔다. 소장은 전곡과 양곡혈... 윤도는 그중에서 가장 맞춤한 혈을 골라잡았다. 그 정도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3일 후에 가겠다는 건 의도된 시침이었다. 마지막 자극을 아낌으로써 잇몸출혈의 2%를 남겨둔 윤도였다. 3일 째 되는 날 다시 미량 출혈이 될 것이다. 윤도 자신도 궁금했기에 현장을 지켜볼 기회를 만든 것이다.

새 이빨...

날까?

산해경 영약을 의심하지 않지만 이 또한 워낙 엄청난 일이라 조바심까지 일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오래지 않아 부용이 등장했다.

“아뇨. 금방 왔습니다.”

“어떻게 됐어요?”

부용이 물었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 분이 채 선생님 진료를 받았어요?”

“뭐 처음에는 깐깐하게 굴다가...”

“와아, 운 대박이다.”

“그렇죠? 제가 좀 어려 보여서 신뢰가 좀 안 갔던 거 같아요.”

“아니, 채 선생님 말고 그 중국 귀빈 말이에요.”

“네?”

“솔직히 어디 가서 채 선생님 같은 명의를 만나요? 게다가 새 이빨이 나는 일인데...”

“그런가요?”

“아무튼 정말 고마워요. 그 일 잘 되면 아버지가 그냥 안 계실 거예요.”

“하핫, 진료비는 벌써 중국 환자에게 받았습니다.”

“정말요?”

“그래서 오늘 밥은 내가 쏘려고요. 굉장히 많이 넣었더라고요.”

“어, 안 되는데... 제가 사야하는데...”

“좀 봐주세요. 부탁할 일도 하나 있고...”

“그럼 부탁부터 들어보고 결정할 게요.”

부용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일단 한 모금해요.”

윤도가 세팅된 와인잔을 들었다.

챙!

맑은 글라스가 부딪치면서 투명한 소리를 냈다. 시원하게 입을 축인 윤도가 입을 열었다.

“애틋한 사연을 가진 환자가 있어서요. 방송에 소개 좀 안 될까요?”

“누군데요?”

“광희한방대학병원 환자인데...”

잔을 놓은 윤도가 손깍지를 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윤도가 소개하는 건 골종양의 주인공 구대형이었다. 말라붙은 논바닥처럼 정서가 말라가는 사회. 위로는 만연한 부패와 한탕주의, 포퓰리즘으로 폭주하는 정치권. 아래로는 미래 상실로 시들어가는 청년 백수들.

쓰리 잡을 하면서도 소방공무원의 꿈을 키우는 구대형이라면 아름다운 사연이 될 거 같았다. 더구나 그는 골종양이라는 시련에 온몸으로 맞서 싸우는 청년이었다.

“우와, 콘셉트 죽이는 데요?”

“진짜요?”

“스토리가 되잖아요. 화재로 죽은 엄마, 그 엄마와 한 약속을 지키려는 청년. 거기에 플러스, 가난한 집안에 쓰리 잡, 암 투병까지 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한 방에 합격하고 대한민국 국민을 화마로부터 지키고 싶어한다.”

“맞아요.”

“이거 완전히 인간승리예요. 피디들이 좋아할 스타일이라고요.”

“그럼 되는 건가요?”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잘 나가던 부용이 표정을 고쳤다.

“뭐죠?”

“공무원 채용규정 말이에요. 혹시 암에 걸리면 임용부적격 사유가 되지는 않나요? 만약 그렇다면 방송에 나가면 쥐약이에요.”

부용은 역시 달랐다. 감성적이면서도 팩트만은 놓치지 않았다.

“암은 완치 단계입니다. 재직 중인 공무원들도 암에 걸렸다고 해직 사유가 되지는 않아요. 문제는 체력검사일 뿐이죠.”

“그때까지 완치가 가능하다?”

“현재 치료 속도로 보아 걷는 건 가능할 거 같아요. 다만 전력질주처럼 완전한 체력이 회복되는 데는 시간이...”

“용기를 주자는 거로군요?”

“맞아요. 이번에는 체력점수가 안 돼서 떨어지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걸 알면 충분한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팩트가 상큼하네요.”

“안 될까요?”

“안 되긴요. 이런 소스 못 먹으면 피디 자리 내놔야죠.”

부용은 그 자리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임 국장님, 저 SN의 이부용인데요...”

그녀의 추진력은 광속 로켓이었다. 그 자리에서 국장과 담당 프로그램 피디의 ‘OK’를 얻어내고 말았다. 윤도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더 부탁할 일은요?”

통화를 끝낸 부용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없습니다. 부용 씨는 정말 대단하네요.”

“아, 그래도 오해는 마세요.”

“오해?”

“저 이거 실력이에요. 남들은 다 제가 아버지 재력과 후광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한다고 생각하지만 요즘 그런 거 걸리면 적폐니 갑질이니 난리가 나잖아요? 그러니 행여라도 오해는 마시라고요.”

“오해 안 합니다. 나도 바보는 아니거든요.”

“절대 아니죠. 대한민국 최고의 명침 명의시니...”

“고맙습니다.”

“아뇨. 제가 고마워요. 좋은 소스 제공하는 것도 피디들과의 돈독한 관계에 도움이 되거든요.”

부용이 잔을 들었다. 윤도는 기꺼이 그 잔에 부딪쳐주었다. 목을 넘어가는 와인이 더 달게만 느껴졌다.

“와아, 오늘은 별이 잘 보이는데요?”

투명 엘리베이터로 내려올 때 부용이 하늘을 가리켰다. 그 바람에 그녀의 몸이 윤도에게 닿았다.

“선생님.”

“네?”

“미래에 말이에요, 화성도 가고 목성도 간다던데 우리도 거기 어디서 건배할 수 있을까요? 거기서 이 지구별을 바라보면서 말이에요.”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럼 미리 예약해둘 게요. 제가 티켓 보내면 같이 가는 거예요?”“티켓은 제가 보낼 게요.”윤도가 웃었다. 하늘의 별... 그건 부용의 눈동자 안에도 초롱거렸다.

두근!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칠 때...

땡!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연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내려요.”

윤도는 부용이 나갈 공간을 확보해주었다. 그녀를 먼저 보냈다. 밤이 깊어갔다.

웅황!

윤도는 웅황의 용액을 멸균병에 담았다. 거기 장침의 끝을 적셨다. 구대홍의 병상이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부용은 전격적이었다. 그녀의 추진력은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윤도를 찾아온 피디는 병실 촬영협조를 부탁했다. 그 말은 곧 부원장에게 전달되었다. 부원장은? 닥치고 OK였다.

피디는 다음 요청사항을 전해왔다. 윤도의 찬조출연이었다. 지정의이자 주치의의 역할까지 수행한 침술의 명인. 그 장면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별 수 없이 구대홍과 함께 몇 장면을 촬영하게 되었다.

카메라와 조명이 자리를 잡는 사이에 달력을 보았다. 구대홍의 신체검사는 이틀이 남았다. 윤도의 연수 또한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래서 뽑아든 웅황이었다. 구대홍의 골종양은 회복세가 완연했다. 하지만 신체검사 당일에 정상인처럼 뛰고 달리는 능력까지 나오기는 힘든 상황. 그렇기에 승부수를 띄웠다.

웅황!

그 힘을 보태는 것이다. 최소한 보행이라도 확실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복도에 몰려든 사람들은 방송 스태프들 어깨 뒤에서 넘겨보느라 바빴다. 앞줄은 안미란과 송재균이 차지했다. 둘은 도우미를 자청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떨려요?”

준비를 마친 윤도가 구대홍에게 물었다.

“아뇨.”

구대홍이 웃었다. 소방왕을 꿈꾸는 사람답게 여전히 씩씩했다.

“아버님은요?”

“떨리네요.”

침대 옆의 아버지가 대신 얼굴을 붉혔다.

“큐!”

피디의 사인이 떨어졌다.

짤락!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장침 하나가 윤도 손에 잡혔다. 카메라는 그 장면을 클로즈업해 들어왔다. 윤도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수삼리혈을 취했다. 카메라가 다가왔다. 장침은 자리를 찾아가듯 스르르 들어갔다. 종기의 명혈 수삼리였다.

다음은 당연히 무릎 치료의 1순위로 꼽히는 복토혈이었다. 침은 딱 일곱 개였다. 방송에 맞춰 행운의 숫자를 세운 것이다. 손을 떼자 장침은 신전의 기둥처럼 우뚝했다. 기적을 불러오는 신전의 기둥...

“수고하셨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자 안미란이 커피를 내밀었다. 촬영진은 이제 구대홍과 아버지를 찍고 있었다. 윤도의 출연은 거기까지였다.

“채 선생.”

구경 나온 환자와 간호사들 뒤에서 부원장이 손을 들어보였다. 윤도가 꾸벅 인사로 답했다.

“수고했네.”

부원장 역시 고무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좋은 이슈로 병원이 소개되는 것. 마다할 경영자가 없었다.

구대홍의 방송은 다음 날 나왔다. 시침 준비를 하던 윤도가 병실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나와요.”

광고방송이 끝나자 간호사가 소리쳤다. 화면에 구대홍이 비쳤다.

“오늘은 불굴의 의지를 가진 소방공무원 지망생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인공은 올해 치러진 소방공무원 필기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체력시험을 앞두고 아쉬운 일이 생겼습니다. 시험 직후, 미루었던 다리 검사를 받았는데 청천벽력으로 골암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암의 부위가 좋지 않아 양방 · 한방 공히 무릎 아래 절단 진단을 내놓았습니다.”

리포터 뒤로 광희한방대학병원이 보였다.

“하지만 이 주인공은 꿈을 꺾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에 화재로 인해 죽은 엄마와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소년은 병상의 엄마와 손가락을 걸었고 나중에 소방관이 되어 시민의 목숨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했던 겁니다.”

리포터는 이제 병실 복도로 접어들었다.

“그 간절한 의지가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그 기적을 만나보시겠습니다.”

리포터가 구대홍의 병실에 들어섰다. 구대홍은 거기 두 발로 서있었다.

“오늘의 주인공 구대홍 수험생입니다. 보시다시피 그는 두 발로 서있습니다. 몇 주 전만 해도 휠체어신세에 절단의 위기였는데 말이죠. 뿐만 아니라...”

구대홍이 걸었다. 화면은 그 보폭을 따라갔다.

“이제 걸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암도 소년의 꿈을 뺏어가지는 못했으니 담당 의료진의 총력 진료와 침술이 기적을 불러왔습니다.”

화면에 MRI 비교 영상이 나왔다. 처음 진단 받을 때와 촬영 전날 찍은 회복사진이었다.

“보세요. MRI 영상입니다. 골암 부위가 현저히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기적의 주인공을 모시겠습니다.”

리포터의 멘트에 이어 구대홍이 클로즈업되었다. 클로즈업 위로 몇 장면이 오버랩 되었다. 악력 연습과 윗몸 일으키기 등으로 몸을 만드는 모습이었다.

화면이 바뀌자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엄마와의 사연에 이어 쓰리 잡을 뛰면서 공부한 사연이 나왔다. 더불어 통닭구이 트럭행상 아버지를 돕는 재현 장면까지 나오자 병실은 숙연해졌다.

주치의로서 윤도가 나오고 침술과정도 간단히 소개가 되었다.

“어떻게 골암을 치료하게 되었나요?”

리포터가 윤도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환자의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 의지라는 불씨에 바람을 조금 불어 불꽃을 피워준 것 뿐입니다. 구대홍 환자의 못된 골종양이 다 타버리게 말이죠.”

“침이 들어올 때 낫는다는 생각이 들었나요?”

마이크가 구대홍에게 넘어갔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채 선생님을 처음 보는 순간 스파크가 일었어요. 천국에서 내려온 의사처럼 말이죠.”

“참고로 이 주치의가 바로 남해 여객선 참사 때 기적의 침술로 일곱 생명을 살린 그 분입니다.”

윤도가 클로즈업 된 후에 방송이 이어졌다.

“이번 체력검사에 참여할 거라고요?”

“네.”

구대홍이 답했다.

“아직은 무리가 아닐까요?”

“무릎이 썩어가던 때를 생각하면 절대 무리 아니죠. 최선을 다하고 안 되면 내년에 다시 도전할 겁니다.”

“주치의로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이크가 윤도를 향했다.

“당장 소방관 체력검사를 다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맞습니다. 하지만 골암의 사선을 넘어온 의지를 가졌으니 한 번 참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아, 이거 엄청나네요. 제 생각 같아서는 소방청에다 구대홍 수험생은 특별히 다뤄달라고 요청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모쪼록 완쾌하셔서 멋진 소방관이 되기를 바라고요, 마지막으로 각오 한 말씀하세요.”

리포터가 구대홍에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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