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엄마와의 약속이라 꼭 소방관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채 선생님과도 약속을 했으니 기필코 소방관이 되어 국민을 지킬 겁니다.”
구대홍이 주먹을 쥐어보였다. 윤도도 같은 포즈로 힘을 실어주었다. 두 주먹이 클로즈업되었다. 그것으로 방송은 끝이 났다.
짝-짝-짝!
윤도가 박수를 쳤다. 안미란도 그 뒤를 이었다. 간호사와 다른 환자들도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구대홍 씨.”
윤도가 환자를 바라보았다.
“그 말 하려고 그러죠? 침 맞아야지!”“아네요?”
“이제 선생님 눈빛만 봐도 알아요. 어제보다 컨디션 더 좋으니까 빨리 놔주세요. 저 걷기하고 윗몸 일으키기 연습해야 하거든요.”
“오케이!”
진맥을 했다. 어제보다 좋았다. 웅황이 들어간 것이다. 혈자리를 찌르는 게 아니라 연주를 하는 기분이었다. 구대홍의 쾌속 회복, 그건 곧 윤도의 보람이었다.
방송의 반향은 굉장했다. 이내 유튜브에 올라가고 인터넷에도 사연이 퍼졌다. 사연마다 댓글이 폭주했다.
-천생 소방관 탄생.
-소방청은 구대홍 무조건 뽑아라.
-구대홍 안 뽑으면 소방청 폭파할거임.
-국대급 레전드 소방관 예약.
-이런 청년이 있어 그나마 헬지옥 살맛이 난다.
-1년 연봉은 주치 한의사에게 줘라.
-너 나랑 사귀자.
-소방청장이 특채라도 해야겠네.
윤도는 상담실에서 댓글 구경을 했다. 화면은 안미란이 띄워놓았다. 간간히 윤도에 대한 칭송도 엿보였다.
“선생님.”
“예?”
“그러고 보니...”
환하던 안미란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왜요?”
“선생님 연수가 거의 끝나가잖아요?”
“......”
“계속 같이 계시면 좋은데...”
“제가 뭐 외국이라도 나갑니까? 가끔 제 한의원에 오셔서 같이 토론하고 공부하면 되지...”
“정말 그래도 돼요?”
“그럼요.”
“약속하신 거예요. 나중에 가면 모른 척 하시면 안 돼요.”
“걱정마세요.”
“아, 아예 선생님 한의원에 따라가서 배우면 안 될까요?”
“......”
“농담이에요. 제가 무슨 자격이 있겠어요?”
“별 말씀을...”
대화가 오갈 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안미란이 답하자 문이 불쑥 열렸다. 문 사이로 들어온 건 엄청난 꽃다발이었다.
“채 선생님.”
꽃다발 뒤에서 구대홍이 얼굴을 내밀었다.
“대홍씨.”
“받으세요. 방송 때문에 꽃다발이 어마무시하게 들어왔어요. 선생님에게 제일 먼저 보여드리고 싶어서 가져왔어요.”
구대홍이 다가와 꽃다발을 윤도 품에 안겼다.
“여기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구대홍의 아버지였다. 희소식도 가져왔다.
“방송 덕분에 오늘은 통닭굽기가 무섭게 매진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사도 드릴 겸...”
“잘 됐네요.”
윤도가 좋아할 때였다. 구대홍의 아버지가 꾸벅 절을 해버렸다.
“고맙습니다. 우리 아들 살려주셔서... 정말이지 다리 자르는 줄만 알았는데...”
닭똥 같은 눈물까지 뚝뚝 흘린다. “왜 이러세요. 아버님.”놀란 윤도가 아버지를 말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부전자전이라더니 구대홍까지 절을 한 것이다. 둘을 말리느라 꽃다발이 다 흩어져 버렸다. 셋은 꽃 위에서 웃었다. 꽃보다 환한 미소였다.
**
이틀 후, 아침 해가 밝았다. 윤도에게는 두 가지가 특별한 날이었다. 구대홍의 체력시험과 중국 상무위원의 영약 3일 차...
덕분에 잠을 좀 설쳤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선생님!”
윤도가 출근할 때 구대홍이 현관 쪽에서 소리쳤다. 그는 아버지의 장작구이 통닭 트럭 앞에 있었다. 아들을 시험장으로 픽업하려고 온 아버지였다. 어떻게 보면 쪽팔릴 수도 있는 일. 하지만 구대홍은 전혀 그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윤도가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시험장 가는 거예요?”
“넵!”
구대홍의 대답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다리는요?”
“좋아요. 달리기도 흉내는 낼 수 있어요.”
구대홍이 몸을 움직여 보였다. 무릎은 잘 올라갔다.
“좋아요. 잘 보고 오세요. 대신 무리는 절대 금물.”
“걱정마세요. 오늘은 간만 보러 가는 거니까.”
구대홍이 웃었다.
부릉!
장작구이 통닭트럭에 시동이 걸렸다. 트럭은 그렇게 멀어졌다. 장작구이 통닭냄새를 폴폴 풍긴 채...
‘파이팅.’
윤도는 오래오래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날 구대홍은 꽃길을 걸었다. 수험장에 내리자 수많은 응원단이 나와 있었다. SNS의 힘이었다. 그들은 구대홍이 가는 길에 꽃을 깔아주었다. 이 세상 어떤 소방관의 다리보다 아름다운 다리. 부활한 다리를 위한 축복이었다.
시험장에는 소방청 고위 간부진도 나왔다. 방송의 위력은 굉장했다. 그 장면들은 윤도도 나중에 볼 수 있었다. 응원나온 팬(?)들이 동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린 것이다.
소방공무원 체력검사는 모두 6종류로 나뉜다. 약력, 배근력, 앉아 윗몸 앞으로 굽히기, 제자리 멀리 뛰기, 윗몸 일으키기, 왕복오래달리기 등이다.
다리로 하는 것만 제외하면 합격이었다. 구대홍은 약력과 배근력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냈다. 다만 제자리 멀리 뛰기는 기본에 그쳤고 오래달리기 또한 참가에 만족했다. 그래도 구대홍은 수많은 경쟁자들 가운데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달렸다. 꼴찌조차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에게는 이제 내일이 있었다.
영상을 보는 윤도 콧날이 시큰해졌다.
상담실에 들어서자 부용의 전화가 들어왔다.
큼큼!
조용한 창가로 옮긴 후에 목청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굳모닝, 부용 씨.”
“선생님.”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진료 중이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어휴, 다행이네요. 행여나 진료 방해할까 싶어서...”
“부용 씨라면 용서해 드리죠.”
“구대홍 환자는요? 오늘이 체력검사 하는 날 아닌가요?”
“어, 그걸 다 기억하고 있어요?”
“선생님 일이잖아요?”
“......”
“음... 지금 설마 감동 먹은 거?”
“솔직히 그렇네요.”
“침 놓을 때는 범접하기도 어려운 아우라를 뿜지만 알고 보면 선생님도 휴머니스트라니까요.”
“한의사 해먹으려면 그런 것도 조금은 있어야 해요.”
“그건 그렇고 이제 선생님 차례예요.”
“제 차례요?”
“개업 전 방송출연 말이에요. 사실 그 다음 날에 스케줄 들어왔는데 너무 닦아세우는 거 같아 말씀 못 드렸어요.”
“......”
“연수, 며칠 후에 끝나죠?”
“네.”
“그 다다음 날 녹화 뜨고 개업 직전에 방송 나가게 될 거 같아요.”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
“부용 씨.”
“TBS 명의열전요.”
“뭐라고요?”
“명-의-열-쩐!”
부용이 또렷하게 강조했다.
‘으억.’
윤도의 입이 쩍 벌어졌다. 명의열전은 굉장한 프로그램이었다. 의사와 한의사 구분 없이 출연하지만 의술의 레전드가 아니면 명함도 못 내미는 프로로 알려진...
그 명의열전!
철심석장鐵心石腸-흔들림없는 카리스마 1
철심석장鐵心石腸-흔들림없는 카리스마 1
“부용 씨. 거기는 제가 스펙상...”
“제가 아니고 방송국에서 결정한 거예요.”
“네?”
“저는 오퍼만 냈는데 그쪽에서 무조건 그 프로그램을 밀더라고요. 그렇잖아도 초기와 달리 고만고만한 의사출연진 때문에 시청률 바닥이라 대전환하려던 참에 잘 되었다고 해요. 진행자도 김워니에서 유재덕으로 바꾼다고 하던데 잘 하면 선생님이 개편되는 첫 회 방영분이 될 지도 몰라요.”
‘유재덕?’
머리카락이 삐죽 솟구쳤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예능의 신이었다.
“저 빽 안 썼어요. 이게 지금 선생님 현주소거든요.”
“좋아요, 그렇다고 쳐요. 그럼 저 촬영 지도는 언제 해주고요?”
“이미 해드렸잖아요?”
“예? 언제요?”
“구대홍 씨 방송 나갈 때 체험하지 않았어요? 방송이라는 거 크게 다를 거 없어요. 단지 선생님 비중이 커질 뿐이죠.”
“......!”
“실전이 최고의 연습. 모르세요?”
띠잉!
윤도 머리에 긴 울림이 남았다. 부용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구대홍 촬영에 느닷없이 찬조출연을 통보 받은 윤도. 부담감에 혼자 거울을 보며 멘트 연습을 했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환경은 그렇게 체험했다. 뭐, 막상 해보니 별 것 아니었다.
‘부용 씨...’
그녀가 다시 보였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방송경험을 갖게 해준 것이다.
허얼!
“하지만 조금은 긴장하세요. 이게 옵션이 있나 봐요.”
“옵션요?”
“그 왜 미션 같은 거 말이에요, 눈치를 보니 실전 테스트를 할 거 같아요. 일종의 실력검증인 것 같던데 두 명을 동시 섭외해서 기본 촬영을 한 후에 시청자 투표로 방송분을 결정하는 시스템을 고려 중인 거 같아요. 저야 뭐 선생님 실력 아니까 동의해주었어요.”
‘시청자 투표요?’
“상대가 누군지는 녹화 당일, 녹화가 끝난 후에나 알 수 있대요. 궁금한 건 그날 만나서 코치해드릴 수 있는데 제가 조언할 건 많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한의학과 침술에 대한 걸 테니 그건 선생님이 전문가잖아요.”
“아, 네...”
“그럼 나중에 봬요.”
딸깍!
전화가 끝났다.
‘명의열전?’
헐!
웃픈 미소가 나왔다. 꿈 같기도 하고 낯이 뜨겁기도 했다.
명의열전...
거길 나가게 되다니...
기출연진들을 돌아볼 겸 책상의 노트북을 켰다. 검색을 했다. 쟁쟁한 출연진들이 나왔다. 심장명의, 폐암명의, 통증명의, 임플란트 명의, 미세성형 명의, 소아암 명의...
그 사이사이에 한방 명의도 보였다. 침구 명의, 한방비만 명의, 한반 통증 명의, 한방 탕약 명의... 침구 명의로 나온 사람이 바로 이 병원 조 과장이었다.
그런데...
실전 테스트는 뭘까?
침술...
그 가능성이 높았다. 비방 한약 같은 건 치료효과를 알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침이나 뜸이라면 짧은 시간에 가능한 것도 많았다.
그리고...
누가 나올까?
설마 조수황 과장?
그때 부원장의 호출이 들어왔다. 부원장은 여기서 뜻밖의 옵션을 내주었다.
“채 선생 연수가 며칠 안 남았지?”
“예.”
“이제부터는 연수 끝날까지 프리로 시침하시게.”
“네?”
“채 선생 마음대로 하라는 걸세. 조 과장처럼 말일세.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부원장님.”
“연수도 며칠 안 남았고 채 선생 실력도 다들 인정일세. 그러니 침 놓고 싶은 환자 마음대로 골라서 해보시라고. 내가 줄 선물은 그것 밖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