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원장님...”
“아, 한 가지 더 있긴 하군.”
“......?”
“구대홍 환자 말이야 입원비 받지말라고 그랬지? 딱 그렇게 하면 너무 야박한 거 같아서 그 아버지와 함께 평생 무료진료권을 주기로 했네.”
“네?”
“채 선생이 직접 전하시게. 채 선생이 이룬 쾌거의 보상이니 말이야.”
“부원장님...”
“싫은가?”
“아,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유후!
복도로 나온 윤도가 쾌재를 불렀다. 구대홍의 무료진료권에 더불어 남은 기간의 자유 시침. 이거야 말로 윤도가 바라던 일이었다.
당장 안미란을 불렀다. 그녀 역시 조 과장의 통보를 받은 후였다. 환자 선별은 그녀에게 부탁했다. 고질병이나 특별한 질환을 골라다 달라고.
‘구대홍 씨가 가져온 행운인가?’
상담실로 돌아와 장침을 준비했다. 열이든 스물이든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선생님!”
동영상이 끝나갈 때 안미란이 들어왔다.
“선생님, 구대홍 환자 체력검사 동영상 봤어요?”
“그럼요. 선생님은요?”
“당연히 봤죠. 간호사들도 다 그거 보더라고요.”
“그래요?”
“구대성 씨, 왠지 합격할 거 같지 않아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다리로 하는 종목이 좀 약해서...”
“제가 아까 인터넷에서 읽었는데 소방청에서도 고민 중이래요. 우리나라 관리들, 여론에 약하잖아요?”
‘여론...’
그 말이 희망 하나를 당겨놓았다. 윤도가 경험자였다. 윤도의 특별 제대도 어쩌면 여론이 출발이었다. 여객선의 심장마비자들을 구하고, 중대 범인을 잡고... 이 회장과 부용이 뒤에서 힘을 쓴 거라지만 여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음, 그럼 저도 댓글 열심히 달아야겠는데요?”
“댓글요?”
“소방청은 이런 인재를 특채하라, 특채하라!”
“어머,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저도 폭풍 댓글로 지원할 게요.”
“이러다 우리도 댓글조작으로 잡혀가는 거 아닐까요?”
“쳇, 이런 조작은 좀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공무원들이 돌대가리지. 공무원 시험 왜 보는 데요? 우수한 공무원 고르느라 뽑는 거잖아요? 그런데 구대홍 씨 같은 인재가 어디 있어요? 뽑기만 하면 소방을 천직으로 알고 근무할 텐데...”
안미란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나도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그건 그렇고, 환자 명단 뽑아 왔어요?”
“보세요.”
안미란이 환자 차트를 펼쳐놓았다. 자그마치 20명이 넘었다. 윤도가 차트를 받았다.
장침!
한의학에는 장침을 맞아야 치료효과가 좋은 질병이 따로 있었다.
정신병.
위장병.
협늑통.
중풍마비.
각종 신경통.
각종 풍습비통...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 한의사들의 경우였다. 윤도의 신침은 풍한서습(風寒暑濕)을, 질병을, 기혈을,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일반 한의사들이 금침(禁鍼)으로 여기는 혈까지 다룰 수 있는 윤도이기 때문이었다.
[이명.]
[불면증.]
[산후어혈.]
[소아천식.]
[자궁경련.]
[안면근경련.]
신침이 필요한 환자 차트를 가려냈다. 침 한 번으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면 마지막 수고를 아끼지 않을 윤도였다. 그러다 한 차트에서 시선이 멈췄다. 성기능장애나 생식기 애로 환자들이었다.
[M 48. 양위(陽痿)]
[M 58. 양위(陽痿)]
양위는 발기부전을 말한다. 두 남자는 48세와 58세였다. 윤도가 안미란을 바라보았다.
“둘 다 사연이 기구해서 끼워 넣었어요.”
안미란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떤 사연인데요?”
“62세 아저씨는 다섯 번이나 이혼을 당했대요. 48세 아저씨는 여섯 번이고요. 둘이 합해서 열한 번.”
열한 번.
진짜 기구했다. 한편으로는 재주가 좋기도 했고...
“그렇게나 많이요?”
“본인들 말로는 거시기에 불이 안 들어와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고...”
안미란이 얼굴을 붉혔다.
“조금 더 정보를 주세요.”
“48세 아저씨는 밤무대 가수예요. 그래서 여자가 많이 따르나 봐요. 자기 말로는 그쪽 분야에서 나름 잘 나간다고... 노래 끝나면 팬클럽이 줄을 선다나요. 그런데 여자들이 죄다 빠이빠이고, 58세 아저씨는 작가래요. 얼굴이 분위기 있게 생겨서 여자가 붙는 것 같고... 하지만 작품이 잘 나가지 않아 워낙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발기가 잘 안 되고 결국 이혼을 하게 된다고...”
“발기불능이야 요즘 좋은 약 많잖아요?”
“이 환자들은 심장이 그리 좋지 않아 약 혜택을 받을 수 없다네요.”
“회춘침 맞으러 오신 거네요? 과장님이 시침하셨고...”
차트를 보며 윤도가 말했다. 치료과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처방된 탕제도 그랬다.
“계속 하셨는데 조금 나은 듯 하지만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고 해요. 채 선생님이 맡으면 굉장히 조 과장님도 짐 더시는 거예요.”
“다섯 번, 여섯 번 이혼이라...”
“작가 아저씨 말은 이번에 정말 좋은 여자를 만났는데 거시기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고 해요. 지금도 벽지에서 작품 구상한다고 핑계대고 입원 중이시거든요. 이번에 안 되면 다 포기하고 자연인으로 사시겠다고 하시니 딱해서...”
“가수 환자는요?”
“그 분은 선수처럼 좀 느끼하기는 한데 사람이 미워도 병은 미워하지 말랬잖아요.”
“......”
“뺄까요?”
“아뇨, 당첨입니다. 주치의들에게 통보해주세요. 오늘은 제가 좀 바쁘니까 내일 아침부터 시작할 게요.”
“둘 다요?”
“네.”
윤도의 대답은 명쾌했다.
하루가 어떻게 갔을까? 정말이지 정신 없는 하루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구대홍의 이야기는 오후까지 이어졌다. 시험에서 돌아온 구대홍이 제일 먼저 윤도를 찾은 까닭이었다. 윤도는 부원장이 준 선물을 안겨주었다. 아버지와 함께 평생 무료진료권이었다.
“선생님!”
구대홍이 감격에 떨었다.
“올해는 몰라도 내년에는 필 합격하는 겁니다?”
윤도는 그 말로 축하를 대신했다.
하지만!
윤도는 구대홍의 감정에만 휘둘릴 수 없었다.
3일.
긴장하던 3일이 돌아온 것이다.
‘상무위원...’
그와 약속한 3일차였다.
조 과장에게 보고하고 칼퇴근을 하게 되었다.
‘새 이빨...’
났을까?
안 났을까?
심장이 쫄깃해졌다. 암을 고치는 장침보다도 더 짜릿한 긴장이었다. 옆에서 지켜보지 못한 까닭도 컸다.
“저 채윤도라는 한의사입니다.”
호텔 로비에서 진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행원이 내려와 윤도를 안내했다.
“어서 오시오.”
상무위원은 객실 소파에 있었다. 의자 깊숙이 자리한 그는 한층 더 묵직해 보였다.
“혼자 오셨나?”
상무위원이 물었다.
“진료차 왔기 때문에...”
“아침부터 잇몸 출혈이 있었소.”
상무위원의 목소리는 조금 까칠했다.
“멈추게 해드리겠습니다.”
윤도가 침통을 꺼내들었다. 그때 뒤쪽에서 낯선 중국어가 들려왔다.
“그럴 필요 없소. 출혈은 내가 잡았으니!”
‘응?’
윤도가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을 한 사람이 치고 들어왔다.
‘중의(中醫)?’
60 초반의 중국인. 그러나 윤도는 본능으로 알았다. 그는 중의사가 분명했다.
“당신이 우리 대인께 시침한 한의요?”
묻는 목소리에 각이 섰다. 윤도를 아래로 보는 눈빛이었다.
“그렇습니다.”
“대인께 새 이빨이 나는 묘방을 주었다기에 달려왔소이다. 대인은 미래 중국을 이끌어나갈 귀하신 몸. 그 안위를 위해 처방을 확인해야겠소.”
“......?”
“그대의 영약이 경옥고와 신침법의 묘방을 따랐다고 들었소만?”
“그렇습니다.”
“그 말을 책임질 수 있겠소?”
“무슨 뜻입니까?”
“묻는 말에 대답하시오. 경옥고와 신침법의 묘방을 따른 게 틀림없는 것이오?”
“그렇다고 했습니다.”
“3일 후면 새 이빨이 난다고 했다 들었소.”
“그렇습니다.”
“한국의 3일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 거요? 내 시계로는 72시간이 경과한 것 같은데?”
“그래서 지금 확인 차 들린 겁니다.”
“확인이라... 그건 내가 조금 전에 했소만.”
“묘방을 쓴 건 납니다. 확인도 내가 합니다.”
“묘방이란 건 말이오, 누가 확인하든 같은 결과가 나와야하는 것 아니오?”
중의가 윤도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당연한 말씀.”
“그런데 왜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요? 당신이 장담한 새 이빨 말이오.”
“대인!”
윤도가 상무위원을 돌아보았다.
“말하시오.”
“입을 한 번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상무위원이 입을 벌려주었다. 윤도가 확인에 들어갔다. 하지만...
“......!”
이내 굳고 마는 윤도의 시선이었다. 입 안에는 출현의 흔적이 있었다. 그건 당연했다. 오늘 확인할 명분을 위해 침 끝 조절을 해두었던 윤도였다.
하지만 듬성듬성 빈 상무위원의 잇몸에는 새 이빨의 징조가 ‘전혀’ 없었다.
‘이럴 수가?’
윤도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면서 척추가 빳빳하게 곤두섰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하필 이번 영약이 통하지 않는단 말인가?
철심석장鐵心石腸-흔들림없는 카리스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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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 끝났소?”
골똘한 사이에 상무위원이 물었다.
“영약환을 틀림없이 물고 잤습니까?”
“당연하지요.”
“진맥을 좀 보겠습니다.”
“그러시든지.”
상무위원이 손을 내주었다.
“......”
윤도는 정신을 집중 시켰다. 실패는 생각지도 않았었다. 지금까지 산해경의 영약이 빗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상에 ‘보장’이라는 건 없었다. 언제든 사고가 날 수 있는 게 인생이었다. 그걸 실감하는 윤도였다.
‘이런...’
맥을 추적하던 윤도가 이유를 알았다. 그 이유는 2% 부족에 있었다.
그 2%가 일을 망친 것이다.
“대인!”
손을 놓은 윤도가 상무위원을 바라보았다.
“말하시오.”
“대인의 중의께서도 대인의 맥을 짚어보셨겠지요?”
“물론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