챙!
잔을 부딪쳤다. 샴페인은 저 깊은 심연까지 통쾌하게 자극했다.
“많이 드시게. 이 호텔 메뉴 전부를 먹어도 좋네.”
이 회장은 여전히 흥분 상태였다. 흐트러짐 없는 얼굴에서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음식은 고루 먹지 못했다. 이빨 때문이다. 이 회장은 사실 이빨을 양보할 처지가 아니었다.
“저는 회장님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윤도가 운을 떼었다.
“내가?”
“이빨 영약 말입니다. 실은 회장님에게 더 필요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나도 필요했지.”
이 회장이 웃었다.
“그런데...”
윤도가 뒷말을 흐렸다. 그는 이미 대한민국 대표기업가의 한 사람. 돈으로 치면 아쉬울 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중국 제2공장 진출이 중요하다지만 사세에 비춰볼 때 목숨 걸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젊은 나이도 아닌 이 회장... 윤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현재 목숨이 경각에 달린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 몇 사람. 단 하루의 건강한 생활이 그리운 그 사람들. 그들에게 건강을 돌려준다고 하면 중국에 지은 공장을 팔아서라도 응할 일이었다.
그렇게 보면 이 회장도 자신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건강을 잃은 자, 모든 것을 잃은 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영약은 그가 먹는 게 옳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영약조차 사업에 투자를 한 것이다.
“채 실장.”
이 회장이 고개를 반듯이 세웠다.
“예.”
“채 실장 같은 의재는 예외지만 한의사도 쟁이가 아닐까싶네만.”
‘쟁이?’
“간단히 말해서 기술자 말일세. 의술... 경영술... 그런 선상에서 보면 다 쟁이가 되는 거지. 자기 일에 승부욕을 가지고 매진하는...”
“......”
“쟁이들은 말일세, 소위 근성이라는 게 있지 않나? 예감이다 싶으면 어떻게든 성취하고 싶은 거. 이를 테면 채 선생이 여러 고난을 무릅쓰고 환자를 고친 후에 도달하는 숭고한 성취감 말일세. 나도 마찬가지라네.”
“......”
“그렇기에 때로는 자신의 몸을 해쳐서라도 배팅을 하는 거지. 그 투자가 성공했을 때의 쾌감이란 한의사가 죽은 사람 살렸을 때의 기쁨과 다르지 않을 걸세. 그러니 어찌 내 몸을 앞세우겠는가?”
‘아!’
윤도 뇌리에 감탄이 스쳐갔다. 한의사로 치면 그 역시 명의 위의 신의였다. 아니 천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경지였다. 과연, 세계적인 대기업의 수장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만 가봐야겠네. 내일 전략도 좀 짜야하고... 부용이 네가 좀 수고를 하려무나. 우리 채 실장 팍팍 좀 챙기고.”
이 회장이 먼저 일어섰다.
“걱정 마시고 들어가세요.”
부용이 화답했다.
“그럼 연수 끝나고 보세나.”
이 회장은 각별한 인사를 남기고 레스토랑을 나갔다.
“선생님.”
옆자리의 부용이 윤도 쪽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네?”
“얘기 좀 자세히 해주세요. 진짜 이빨이 났어요? 진짜 중국 한의사까지 와서 선생님을 몰아붙였어요?”
“그건...”
“말해주세요. 굉장히 궁금해요.”
“중의는 대인의 주치의인데 제 처방과 침술에 호기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본시 영약이란 나눠먹으면 안 되는 것인데 중의가 일부를 떼어내는 바람에 탈이 났던 거죠.”
“와아, 나쁜 사람이네요.”
“대개 난치병이나 불치병 비방은 다들 궁금해 합니다. 중의 말대로 혹시나 허튼 처방으로 대인의 건강을 해칠까 싶은 의심도 있기는 했겠지요. 하지만 그건 정말 불손한 생각입니다. 의술을 펼치는 자라면 환자를 해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대단해요. 장침 하나 품고 혈혈단신으로 중국의 백만대군을 물리치다니...”
“백만대군까지는...”
“아니면요? 상무위원이 보통 권력인 줄 아세요. 솔직히 그 분 하나면 백만대군보다도 더 강력한 파워라고요. 우리 아버지도 물로 보는 거 보면 아시잖아요? 다른 나라라면 대통령이 와서 아버지 만나려고 난리를 치는 판인데...”
“아무튼 잘 되어서 다행입니다.”
“아버지도 없으니 우리 본격적으로 달려요. 오늘은 진짜 술 땡기는 데요?”
“그럴까요?”
“술 바꿔요. 샴페인으로 달리기는 좀 그렇잖아요?”
“그러죠, 뭐.”
부용의 선택은 꼬냑이었다. 그녀답게 개성만점인 레미 마르땡이 나왔다. 향이 좋아 거부감이 없었다.
“건배!”
부용이 잔을 들었다. 그녀가 잔을 비우면 윤도도 비웠다.
“부용 씨.”
술잔을 내려놓은 윤도가 부용을 바라보았다.
“왜요?”
“촬영 지도는 진짜 안 해줄 거예요?”
“걱정되세요?”
“프로그램이 명의열전이라니 조금은...”
“그렇잖아도 담당 피디에게 경고 들어왔어요.”
“예?”
“구대홍 환자 나오는 거 본 모양이더라고요. 선생님 이미지가 순수하면서도 의술 카리스마가 넘친다고 공연한 테크닉 같은 거 입히지 말아달라던데요.”
“......”
“그러니 편안하게 술이나 드세요. 단 내일부터는 금주예요. 연짱으로 달리면 화면빨이 안 받을 수 있어요.”
“이거 뭔가 음모에 말려드는 느낌인데...”
“음모라면 시청률이겠죠. 제가 보증하는데 선생님은 잘 해낼 거예요. 다른 프로그램에 나오는 일부 명의처럼 만들어진 명의가 아니잖아요.”
“명의도 만들어져요?”
“이건 비밀인데... 방송은 뭐든 만들 수 있어요.”
부용이 생긋 웃었다.
“......”
“하지만 선생님 상대는 허접이 아닐 거예요. 피디들이 선생님 실력 인정한데다 개편 첫회 아니면 2회 차 방영분이라서 제대로 된 상대를 붙일 게 확실해요.”
“......”
“겁나요?”
“아뇨. 의술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제 앞의 환자에게 최선을 다할 뿐.”
“그럴 줄 알았어요. 마셔요.”
부용은 원샷으로 달렸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의 주량은 생각보다 세지 못했다. 징조는 화장실이었다. 볼 일을 위해 일어서던 그녀가 삐끗 흔들렸다. 그 바람에 엉거주춤 윤도 품에 안기고 말았다.
“괜찮아요?”
그녀를 부축한 윤도가 물었다.
“노 프로브럼.”
부용은 꿋꿋한 척 웃었지만 결코 노 프로브럼이 아니었다. 거푸 원샷으로 들이킨 꼬냑. 그게 결정타가 되었다. 부용은 결국 화장실에서 많은 것을 반납하고 돌아왔다. 윤도를 위해 무리수를 둔 부용이었다.
“괜찮아요?”
“어우,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저도 늙었을까요?”
“푸웃.”
귀여운 모습에 윤도가 빵 터지고 말았다. 이럴 때는 그녀도 결국 천상 여자였다.
“그만 나가요.”
윤도가 부용을 부축해 세웠다. 또 한 번 그녀의 몸이 닿자 윤도 가슴이 벌떡거렸다. 그녀의 향이 윤도의 정신을 아뜩하게 흔들었다.
땡!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부용은 비틀, 윤도에게 기댔다. 기댄 시선이 윤도에게 올라왔다. 자연스레 밀착된 부용. 단아한 향수 냄새와 함께 그녀의 독특한 인향이 후각을 치고 들어왔다.
심쿵!
밀폐된 공간 때문일까? 그 단어가 윤도의 심장 안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힘들어요?”
윤도가 물었다. 마음을 감추려는 의도였다.
“채 선생님이 더 힘들어 보이는 데요?”
“내가요?”
“네.”
“나는 안 취했어요.”
“술 말고요.”
“......”
잠시 어색한 찰라, 그녀의 손이 버튼을 눌러버렸다. 호텔 층이었다.
“부용 씨.”
“촬영 팁 알려드릴 게요.”
“지금요?”
“네.”
“여기서요?”
“겁나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됐어요.”
윤도를 올려보는 부용의 눈은 갈매도 신새벽 하늘에 뜬 샛별 같았다. 너무 맑아 뭐라 말할 수 없는. 너무 잔잔해 오히려 끌려들 것만 같은... 윤도를 마비시키는 그 별빛...
이심전심(以心傳心).
촬영 팁...
부용의 뜻은 단어에 있지 않았다.
촬영 팁.
윤도 역시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이 순간 두 젊은 몸과 마음은 말없이도 저절로 통하고 있었다.
딸깍!
문이 열렸다. 호텔층이었다.
딸깍!
문이 닫혔다. 호텔방이었다.
불은 켜지 않아도 되었다. 대형 창을 타고 도시의 야경이 넘어왔다. 저절로 분위기 있는 조명이었다. 부용이 윤도에게 안겼다. 아득한 객실 분위기가 윤도의 심쿵을 자꾸만 끌어올렸다. 심장은 윤도 스포츠카의 W 타입 엔진처럼 제대로 뛰었다. W 타입 엔진은 막강하다. L 타입이나 V 타입과는 비교조차 거부한다. 달리고 달려도 지치지 않은 최고의 명품 엔진...
그녀와 밀착되자 남자의 상징에 불이 들어왔다. 파랑주의보가 내린 날, 갈매도 파도처럼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파도는 이내 거친 해일로 변했다.
윤도가 그녀를 안아들었다. 이제 둘은 침대에 있었다. 옷은 다 벗기지 않았다. 침대 밑으로 흘러내린 건 부용의 스커트와 얇은 속옷이었다. 윤도 역시 하의만을 벗어던졌을 뿐이다.
윤도가 준 영약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피부는 은은한 빛이 났다. 그 빛을 따라 쇄골을 지났다. 그 아래로 이어지는 봉긋한 가슴을 거칠게 헤쳤다. 브래지어를 올리고 봉긋한 가슴을 애무했다. 부용은 격정적이었다. 윤도 못지않은 크고 높은 해일이 그녀의 온몸에 있었다.
상전벽해.
그 단어가 실감났다.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이 된다더니 부용의 그곳은 갈매도 별장에서 정신병을 내치려고 장침을 놓으며 본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윤도의 중심은 마침내 하나의 장침이 되었다. 그 장침이 겨누는 혈자리는 오직 하나였다.
부용의 중심.
촉촉하게 긴장을 풀고 윤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끝난 혈자리. 이름하여 지상에서 가장 황홀한 혈자리. 약간의 자극에도 출렁거리는 혈자리를 향해 윤도의 장침이 공세를 뿜었다. 부드럽지만 임팩트가 강력한 공세였다.
“아!”
부용의 입에서 신음이 새었다. 동시에 그녀의 두 손이 깍지를 끼고 윤도 등을 당겼다. 혈자리의 끝까지 장침을 받으려는 몸짓이었다. 혈자리 안에서 윤도의 장침은 이제 W 엔진이 되었다. 부용은 한 몸이 되어 엔진을 자극했다. 무한 폭발 직전이었다.
“아아!”
부용의 신음이 폭발을 재촉하는 촉매가 되었다. 촉매와 함께 윤도는 마침내 폭발했다. 그녀의 가장 깊은 곳. 그 안에서의 작렬이었다.
콰쾅-쾅!
폭발은 홍수를 쏟아냈다. 부용의 빈 곳을 다 채우려는 듯.
그녀의 촬영 팁은 파라다이스 이상이었다. 천국을 보여준 것이다.
쪽!
폭발이 마무리 되었을 때 부용의 키스가 들어왔다. 윤도도 그녀의 입술에 화답했다. 그런 다음에야 그대로 늘어졌다. 연수생활의 긴장과 부용에 대한 긴장, 거기에 중국 상무위원과의 승부수에 취기가 겹치자 노곤해진 것이다. 그녀의 위... 부용의 냄새는 이제 나른했다.
고마워요.
나의 일상들...
선생님이 돌려준 모든 일상들...
고마워요.
꿈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꿈인지 생시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그 판타지 같은 기분은 모닝벨소리가 밀어내주었다.
“......?”
눈을 떴다. 잠시 멍을 때렸다. 집이 아니었다. 병원도 아니었다.
“......!”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벌떡 몸을 세웠다.
“......!”
옆 자리는 비어있었다.
‘꿈?’
멍한 시선으로 핸드폰을 잡았다. 문자가 있었다.
<아침 스케줄이 있어서 먼저 가요. 너무 좋은 밤이었어요. 선생님도 그랬기를 바래요.>
새벽 2시 40분.
부용의 문자였다.
문자에서 그녀가 아른거렸다. 냄새가 났다. 두 해일로 충돌하며 열정을 불 사른 부용, 그녀답게 쿨한 퇴장이었다.
어쩌면 윤도에 대한 배려일 수 있었다. 이 아침, 그녀와 함께 눈을 뜨면 얼마나 어색했을까?
<좋은 밤이었어요. 부용 씨도 그랬기를 바래요.>
부용과 같은 답문을 보내고, 그녀처럼 쿨하게 일어섰다.
대한민국.
아픈 사람은 많고 윤도의 장침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