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265)

침 끝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기혈이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시간은 꽤 걸렸다. 차관의 허리병이 너무 오래 된 까닭이었다.

딸깍!

얼마나 지났을까? 혈자리의 문소리들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면서 조화가 끝났다. 윤도가 손을 떼었다.

“허리가 조금 시원하실 겁니다.”

긴장하고 있는 차관에게 위로를 보냈다.

“맞아요. 방금 그런 느낌이 왔어요.”

“기혈이 몇 바퀴 돌아서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런데... 눈은요?”

“눈은 아직이죠?”

“예, 뭔가 느낌이 오는 듯 마는 듯...”

“거기는 마지막 과정이 남았습니다.”

윤토가 침통을 들었다. 그 손에 장침이 하나 더 딸려나왔다. 시간을 짚어본 윤도가 환자의 팔을 걷었다. 선택된 혈자리는 곡지였다.

곡지혈.

쓰임새가 많은 효자혈이다. 피부병에도 좋다. 하지만 안검염에도 특효로 쓰일 때가 있다. 차관의 경우가 그랬다. 맥을 짚으니 안검염을 일으킨 혈자리의 주관 혈이 바로 곡지혈이었다. 그러니까 견중수와 고황혈은 곡지의 기를 받게 하기 위한 사전조치였다.

“숨 내쉬세요.”

톡!

윤도의 지시와 함께 곡지혈에 장침이 들어갔다. 정확히는 곡지혈자리에서 조금 위쪽이었다. 혈자리 안에서 왼쪽으로 침을 감았다. 역으로 돌리는 건 하부의 기를 상부로 올리려는 계산이었다. 손가락을 멈춘 윤도가 차관을 바라보았다.

“눈의 기분 어떠세요?”

“눈이요?”

“한 번 꿈뻑거려 보세요.”

“이렇게요? ···?”

윤도 말을 따라하던 차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몇 번이고 더 눈을 꿈뻑거렸다. 그러더니 아이 같은 경탄을 밀어냈다.

“세상에...”

“눈이 시원해진 모양이군요?”

언제 들어왔을까? 옆에 선 장 박사가 물었다.

“맞습니다. 기분 탓인지... 눈의 피로가 확 풀린 거 같아요.”

“기분이 아니고 장침 탓입니다. 채 선생이 눈 맑아지는 청명 침술에 안검염 특효 혈자리까지 잡았으니 그 질병이 배겨날 리 없지요.”

“이야, 이거 정말...”

차관은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안검염.

고질병이다. 눈꺼풀 피부와 속눈썹 부위가 너저분하다. 가려울 뿐더러 이물감에 충혈, 눈곱까지 낀다. 술이라도 한 잔 걸치면 시뻘건 게 가관이다. 당연히 삶의 퀄리티가 확 떨어진다.

“보세요.”윤도가 손거울을 건네주었다. 그 거울에 비친 차관의 눈꺼풀에 충혈이 보이지 않았다. 십수 년째 눈을 괴롭히던 괴물이 사라진 것이다.

“고맙습니다. 내 이 놈의 안검염 정말 지긋지긋했는데...”

차관은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채 선생...”

차관이 옷을 입는 동안 장 박사가 윤도를 끌었다. 좋은 소식이 들어왔다. 한의학계가 바라던 서울한방의료원 건이 긍정적으로 되어간다는 말이었다. 그 소식은 차관이 가져왔다. 침을 맞기 전에 선물보따리를 풀어놓은 모양이었다.

“아, 내일 명의열전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대화의 말미에 장 박사가 물었다.

“예... 그게...”

“뭐가 그렇게 부끄럽나? 내가 볼 때 채 선생은 이 시대 어떤 한의사에게도 꿀리지 않아. 아, 의사들까지 포함해도 마찬가지고. 내가 이 회장을 도운 얘기도 이미 들었네.”

“그게 벌써 알려졌습니까?”

“내가 그 양반하고 사이가 하루 이틀이 아니잖나? 부용이 진웅이 다 자식처럼 지내다보니 바로 소식이 온다네.”

“그래도 저는 조금 부담스러운 자리입니다. 아직 명의로 비쳐지기엔...”

“그럴 거 없네. 사실 방송국 쪽에서 나한테도 확인 체크가 들어왔었는데 무조건 밀었지, 채 선생은 타고 난 의원이야. 만들어지는 의원처럼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부용이 말을 들으니 나름 쟁쟁한 한의사와 경쟁을 붙이는 모양이던데 꼭 넘어서시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개업도 얼마 안 남았지?”

“예.”

“개업식 날은 꼭 가겠네. 벌써부터 기대도 되고 말이야. 우리 환자 중에서도 내 힘에 부치는 사람은 채 선생에게 보낼 테니 그리 아시게.”

“고맙습니다.”

“큰 의술을 펼치시게. 채 선생 어깨에 한의학의 중흥이 달렸어.”

장 박사가 윤도 어깨를 잡았다. 그 따뜻함을 안고 병원을 나왔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명의열전 출연만 넘기면 개업이었다.

개업!

윤도의 심장은 스포츠카의 엔진처럼 격정적으로 뛰었다.

“열겠습니다.”

일침한의원 정문, 공사감독이 윤도와 부용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단장을 끝내고 주인을 기다리는 한의원이었다.

“비밀번호와 손가락 지문은 나중에 따로 세팅하세요.”

감독이 통제키판의 번호를 눌렀다.

스릉!

현관문은 자동이었다.

“들어가세요. 원장님.”

부용이 윤도 등을 가볍게 밀었다. 그 날 이후의 첫 만남이라 다소 어색할까 싶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만의 마법이었다.

“......!”

윤도의 시선이 멈췄다. 접수실이자 대기실 공간은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설계도로 볼 때와도 아주 달랐다. 은은한 한약방 소품들에 이어 자연미를 살린 공간. 소박과 안락의 극치를 보이고 있었다.

“선생님 진료실이에요.”

원장실은 부용이 직접 열어주었다.

“......!”

윤도의 시선이 또 한 번 멈췄다. 조선시대, 어느 편안한 한의원이 고스란히 옮겨와 있었다. 창틀조차 한옥문의 그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연 채광을 최대한 살린 방은 음양이 저절로 조화를 이룰 것 같았다.

게다가...

‘냄새...’

편백원목 벽에서 나오는 향은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편하게 만들었다.

“뭐해요? 앉아보셔야죠.”

넋을 놓은 윤도를 부용이 재촉했다. 윤도가 원장석에 앉았다.

“멋져요.”

부용이 박수를 쳐주었다. 이번에는 윤도가 부용을 원장석에 앉혔다.

“제가 여기 앉을 자격이...”

부용이 얼굴을 붉혔지만 그녀는 거기 앉을 자격이 충분했다.

그리고...

스릉...

침구실과 상담실, 검사실, 입원실, 휴게실 등을 지나 한방약제실이 열렸다. 윤도가 가장 기대하는 곳이었다. 거기서 윤도의 오감이 작동을 멈춰버렸다.

‘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가지런히 배열된 분석기와 그 앞으로 펼쳐진 약제실. 자연과 과학이 공존하는 방은 시공을 초월한 과학자의 방처럼 보였다. 광희한방대학병원에서 보았던 최신 분석기들이 축소판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작지만 최첨단의 극치였다.

“부용 씨...”

윤도가 부용을 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선생님이 의술을 펼치는데 부족함이 없을까요?”

그녀가 물었다.

“과분합니다.”

“그럼 여기서 높은 성취를 이루세요. 건강이 절실한 분들 많이 고쳐 새 삶을 찾아주시고 대한민국, 아니 세계적인 한약도 개발해내시길 바래요.”

“약속드리죠.”

윤도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이 정도면 바랄 게 없었다. 윤도가 바라던 꿈의 포진이었다. 여기에 한약사 아저씨 진경태만 들어앉는다면 겁날 게 없었다.

“직원들 문제는요?”

“아름아름 준비 끝났습니다. 마무리 단계예요.”

“그럼 나가실까요? 손님들이 올 거예요.”

“손님?”

“프로그램 진행자들 말이에요.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부용은 깍듯한 인사로 임무를 끝냈다.

끼익!

아담한 주차장에 방송국 차량들이 멈췄다. 피디와 진행자들이 내렸다.

“이 대표님!”

피디가 부용에게 아는 체를 했다. 그 다음은 윤도였다.

“채윤도 선생님? 처음 뵙겠습니다. 새로 명의열전을 책임진 용은수 피디입니다.”

30대 후반의 용 피디가 인사를 해왔다.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윤도가 인사를 받았다. 그러자 스태프 일동도 인사에 동참했다.

“한의원이 고풍스럽고 운치가 넘치는 데요?”

피디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신 분이니까 간단하게 설명을 드릴 게요. 진행은 간단합니다. 저희는 두 팀으로 나뉘어 촬영을 합니다. 모든 과정은 공평무사하며 진료결과만을 참고해 방송에 나갈 명의를 결정합니다.”

“......”

“진료과정은 임팩트 있게 편집되어 일정 시간 동안 실시간 시청자 투표에 붙여집니다. 개편 프로그램부터 새로 적용하는 시스템으로 투표결과 또한 그대로 공개하며 방영 결정이 되면 오늘 진료녹화 장면은 편집해서 사용합니다. 즉, 선생님이 승자가 된다면 그대로 프로그램의 일부가 되는 것이죠. 만에 하나 시청자의 선택을 못 받는다 해도 말미에 일부 소개되는 시간에 편집본으로 나가게 될 겁니다.”

“......”

“저희가 여러 한의사님들의 자문을 거쳐 결정한 질환은 천식과 고혈압입니다. 다른 것도 많지만 객관적으로 침구효과를 입증하려면 천식과 고혈압이 효과적이고 극적일 것 같아서입니다.”

“......”

“환자들은 각종 병원에서 신청자를 받아 선발해 두었고 질환 정도 역시 양방, 한방 공히 크로스 체크를 거쳐 어떤 분에게 유불리하지 않도록 배치할 예정이니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

“환자들은 저희가 섭외한 한방병원에서 대기 중입니다. 선생님과 자웅을 겨룰 명의가 누구인지 또한 촬영이 끝난 후에야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현재 인기 절정으로 막강 명의로 꼽히는 분이라는 건 말씀드립니다.”

인기절정의 명의?

윤도의 피가 후끈 반응을 했다.

“선생님 특유의 진료법이나 탕제 등의 치료법은 시청자 투표에 선택을 받으면 본 녹화에서 선보일 수 있으며 그때 필요한 추가분의 촬영은 이 한의원에 오셔서 하셔도 됩니다.”

“......”

침구.

테스트의 과제는 침구였다. 침과 뜸으로 천식환자와 고혈압환자를 치료한다. 천식은 기침이 잦기에 침구효과를 알 수 있다. 고혈압 역시 그랬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바로 대답했다. 인기 절정의 명의? 그게 누구건 두렵지 않았다. 윤도는 윤도의 길을 갈 뿐이었다.

“그럼 타시죠.”

피디가 방송차량을 가리켰다. 속전속결 진행이었다.

부릉!

방송차량이 움직였다.

명의열전.

또 하나의 도전을 위한 출발이었다.

위대한 포기-2

방송차가 도착한 곳은 삼초한방병원이었다. 주차장 끝에 또 다른 방송차량이 보였다. 상대방 한의사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환자 추첨이 시작되었다. 환자군은 고혈압과 천식, 축농증군이었다. 각 10명 씩의 환자를 두고 무작위로 하는 선정방식이었다. 환자나 보호자가 나와 밀폐된 상자 안에서 공을 뽑아 병실을 찾아갔다. 색깔 선택은 상대방에게 양보했다. 그가 빨강을 택했다는 말을 들었다. 윤도의 환자는 파란색이 되었다.

“선생님!”

환자가 정해지자 부용이 다가섰다.

“부용 씨.”

“팁 하나 드려요?”

“......?”

“그냥 선생님 하던 대로 하세요. 제 경험으로 볼 때 그게 가장 좋아요.”

“명답이군요.”

“선생님을 믿으니까요.”

부용이 손을 내밀었다. 건투를 비는 손이었다.

“이쪽입니다.”

방송 스태프들이 윤도를 안내했다. 윤도의 촬영장은 큰 병실이었다. 그 안에 파란 공을 뽑은 고혈압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명과 카메라는 이미 자리를 잡은 후였다.

“1번 환자부터 시작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촬영중지를 요청하세요. 편집은 저희가 알아서 하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피디가 마지막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다섯 환자.

각양각색이었다. 20대의 살집 두툼한 여자부터 80대초의 할아버지까지 있었다.

“시작하세요.”

조명이 들어오자 피디의 콜이 떨어졌다. 윤도의 시작은 진맥이었다. 촬영이라고 특별히 겉멋은 부리지 않았다. 고혈압의 치료 혈자리는 많았다. 하지만 개개인에 따라 효용도가 다르다. 윤도는 다섯 환자의 혈자리를 파악하고 정리에 들어갔다.

‘테스트...’

핵심을 생각했다. 심사자들은 결과만을 볼 것이다. 그렇다면 당장의 혈압수치를 떨어뜨리는데 목적을 두어야했다.

[곡택+풍융+합곡혈 세트.]

[풍지+곡지+태충혈 세트.]

잘 알려진 고혈압 혈자리 조합과 윤도의 장침은 갈래가 달랐다.

원샷!

천료혈에 딱 한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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