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265)

두 번째 시침 역시 침대가 놓인 차례는 아니었다. 장침의 자리는 곡지혈에서 소해혈이었다. 기혈이 낙맥까지 퍼지도록 조절하며 두 번째 환자를 끝냈다. 이어 맨 끝의 침대로 가서 신기를 선보였다.

신기-상성-신회-전정-백회혈까지 일침오혈을 넣은 것이다. 그 긴 장침이 겨우 손잡이만 남았으니 그 또한 주저 없는 원샷이었다.

그 옆의 환자는 합곡에 이어 신문혈에 장침을 넣었다. 네 명 모두 다른 갈래의 처방이었다.

마지막으로 살집 많은 여자 환자가 남았다. 혈자리가 작은 환자였다. 혈압도 가장 높았다. 윤도가 기억하기로 그녀의 혈압은 140Hg-230mmHg에 달했다. 혈자리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이미 광희한방대학병원에서 티끝의 혈자리까지 경험하고 온 윤도였다.

“조금 걸릴 겁니다. 편안히 계세요.”

미리 양해를 구하고 장침을 넣었다. 풍지혈과 곡지혈, 그리고 태충과 용천혈이었다. 장침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환자가 들숨을 쉴 때 단숨에 찌르고, 날숨을 쉴 때 약간 들었다가 다시 넣었다. 이렇게 여덟 번을 반복한 후에야 침을 뽑았다. 뻣뻣하던 여자의 목에서 긴장이 풀리는 게 보였다. 마지막 시침이 끝나자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침을 뽑아주었다.

“어우, 목덜미가 개운하네?”

“나는 눈까지 시원해요.”

환자들은 가뜬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혈압 체크팀이 들어왔다. 윤도가 시침한 환자 다섯의 혈압은 모두 정상 범위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85mmHg에서 130mmHg 사이였으니 자침 이전의 140Hg에서 230mmHg 사이의 수치를 감안하면 굉장한 사건이었다. 변화수치는 세밀하게 기록이 되었다. 수치의 변화폭도 판단기준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럼 다음 과정으로 가겠습니다.”

피디가 첫 촬영 마감을 알렸다.

“잠깐만요.”

윤도가 그 말을 막았다.

“왜 그러시죠?”

“잠깐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두 분에게 침이 더 필요합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혈압 체크라기에 혈압을 떨어뜨리는 침만을 썼습니다. 하지만 두 분은 신장과 간장에 문제가 있는데 거기에 장침을 놓으면 차후에도 큰 문제가 없을 일이라...”

“하지만 촬영 스케줄이...”

“15분이면 됩니다만...”

“그럼 그렇게 하세요.”

피디의 수락이 떨어지자 윤도는 할아버지와 여자 환자에게 다가섰다.

“두 분은 침이 더 필요합니다. 고혈압의 근원이 보이거든요. 원치 않으시면 그냥 가겠습니다만 기왕 맞은 침이니...”

효과를 본 둘이 반대할 리 없었다. 할아버지는 신장혈에 장침을 넣고 여자는 간혈에 장침을 넣었다. 그제야 윤도의 표정이 편안하게 변했다. 고혈압만 달랑 떨어뜨리자니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찝찝하던 차였던 것이다.

“어, 시원하다. 시원해...”

할아버지 입에서 콧노래가 나왔다. 윤도 기분도 그만큼 좋아졌다.

하지만!

두 번째 병실에서 윤도의 촉각이 곤두서고 말았다. 이번에는 어린이들이었다. 나이로 치면 두 살에서 일곱 살 사이...

콜록콜록!

훌쩍훌쩍!

‘부비동염...’

부비동염은 천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어른도 힘겨운 질병이다. 하물며 어린 아이들에게는...

엄마아!

다섯 침대에서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가 쉬지 않았다. 당연히 훌쩍이는 아이도 있었다.

“시작하세요.”

피디가 촬영개시를 알렸다. 조명이 더 밝아졌다. 윤도는 보호자들에게 인사하고 아이들 진맥에 들어갔다.

“하느님!”

보호자들에게서 기도소리가 나왔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도 아프다. 아니, 부모들은 더 아프다.

진맥...

그렇다고 따로 심혈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환자는 다 같다. 모든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면 굳이 아이들이라고 특별할 이유는 없었다. 한 아이가 윤도를 보고 방긋 웃었다. 목에서는 쌕쌕 소리가 나왔다. 거기에 기침이 딸려나오고 아토피 피부염도 심했다.

그런데...

진맥을 위해 아이 손을 잡던 윤도가 소스라쳤다.

‘윽?’

윤도는 눈을 의심했다. 아이 얼굴 때문이었다.

그 얼굴은...

헤이싼시호에서 보았던 중국 아이의 얼굴이었다. 시린 듯한 두 눈에서 튀어나오는 여의주의 섬광...

“많이 안 좋아요?”

넋을 놓은 윤도 귀에 보호자의 말이 들어왔다. 그제야 겨우 정신을 수습했다. 다시 보니 착각이었다.

“밤이나 아침에 기침 많이 하죠?”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호자에게 물었다.

“네.”

“쌕-쌕 거리는 소리는 어때요? 자주 하나요?”

“네.. 처음에는 어쩌다 그랬는데...”

‘천식... 축농증... 중이염...’

첫 환자는 천식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려 3종 세트가 나왔다. 어린 아이들이 숨을 쉴 때 쌕쌕거리는 증상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오장육부가 다 작고 좁기 때문이다. 거기에 호흡기에 문제가 생기면 쌕쌕거리는 천명음을 낸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나오면 소아천식일 가능성이 훌쩍 높아진다. 특히 3세 이후 기침과 동반되는 천명음은 방치하면 좋지 않다.

다른 경우는 아토피 피부염이나 알레르기성 비염 등의 알레르기 질환과의 연관 관계다. 천식 역시 대표적인 알레르기 질환임을 상기하는 윤도였다.

두 번째 아이는 다행히 천식 뿐이었다. 기침소리가 나쁘지만 비염이나 중이염 같은 건 없었다.

“......!”

세 번째 아이에서 윤도의 진맥이 멈췄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 아이는 아토피 피부염을 포함한 3종 세트를 달았지만 그 출발이 좋지 않았다.

“메롱 해볼래?”

윤도가 아이 앞에서 혀를 내밀었다.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경계심 때문이다. 보호자가 나서서 어르자 겨우 혀가 나왔다. 혀의 색깔이 검었다. 예상대로 신장의 기혈이 좋지 않았다. 그 다음 아이도 그 족이었다. 앞의 아이보다 조금 더 심했다. 윤도가 고개를 저었다. 침으로 천식을 멈출 수는 있지만 바람직한 처방이 아니었다.

“선생님...”

맥을 놓는 순간 보호자가 울먹거렸다.

“잘 부탁합니다.”

그 말이 담긴 애원이었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는 이중고를 겪는다. 아이 때문에도 마음이 아프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개가 숙여진다. 혹여 자신이 건강하지 못해 아이에게 나쁜 유전자를 준 것인가 자책하는 것이다.

‘......!’

마지막 아이, 그 앞에 또 윤도 몸이 굳었다. 첫 아이와 같은 환상이었다.

‘뭐지?’

정신을 가다듬었다. 시린 빛의 환상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윤도에게는 더 이상 신기루가 아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우연으로 보기 어려웠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진맥에 돌입했다. 이 아이 역시 심한 경우의 천식이었다.

천식과 축농증, 아토피 피부염은 대개 신장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원천처방은 신장이 우선이 되어야했다. 말하자면 신장의 기혈이 조화를 이루면 기어이 나을 질환이었다. 마지막 아이는 살까지 홀쭉했다. 이는 비장의 기혈조차 문제라는 뜻이었다.

하긴 예상된 일이었다. 명의열전이라는 프로그램의 권위를 알기에 자처하고 나온 부모들. 어떻게든 아이들을 낫게 하려는 염원이 담겼으니 동네 병원에서 치료될 수준이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일이었다.

갈등이 생겼다.

방송...

게다가 경쟁이었다. 고혈압은 심사기준에 맞춰 치료를 했다. 하지만 이건 좀 달랐다. 어린 아이들이다. 기침을 잡고 막힌 코를 뚫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근본처방이 아니었으니 미봉책이 될 뿐이었다. 미봉책이 오래 되면 더 심해질 수도 있는 질환들... 그건 방송에 눈이 멀어 의술을 파는 일이 될 수 있었다.

그 생각 속으로 중국 아이의 시린 빛이 들어왔다.

왜!

왜 느닷없이 그 환상이 보였을까?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계시일까? 진짜 명의의 길을 가라는?

‘채윤도...’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명의열전...

중요하지...

한의사나 의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 나가고 싶어 해.

여기 나가서 대박치면 한의원이 미어터진다잖아.

하지만 비겁하지는 말아야지.

비뉵(鼻衄:코피)을 잡으려면 용철혈을 취해야지 솜으로 코를 막을래?

눈 가리고 아웅은 한의사가 할 짓이 아니잖아.

그러면 쪽 팔린다.

“컷!”

윤도의 갈등을 알았는지 피디가 촬영 중지를 선언했다.

“문제가 있나요?”

그녀가 다가와 물었다.

“......”

“선생님.”

“아닙니다.”

“그럼 계속 진행해도 될까요?”

“이거 시간이 얼마나 허용됩니까?”

“저희가 전문가 분들에게 들은 말로는 2시간이면 넉넉할 거라고... 그래서 실시간 시청자 투표를 그때로 맞춰두었어요.”

‘두 시간...’

윤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술의 길...

명의순례에서 다지던 그 초심...

<무엇보다 환자 우선.>

마음속에 들어온 결정. 그 결정을 따라 두 장침을 뽑아들었다.

그 장침은 허리 쪽의 신수혈에 대칭으로 넣었다. 손가락이 열을 내는 화침이었다. 두 번째는 조금 위쪽의 명문혈이었다. 그 또한 화침을 넣었다. 그 다음 침은 신장 부근의 혈에 하나를 찔렀다. 이어질 신주혈의 보조로 세운 것이다.

마지막으로 뽑은 침은 목 아래 양 견갑골 사이의 신주혈로 들어갔다. 신주혈은 면역력을 높이기도 하는 혈자리. 신장 기혈의 조화와 함께 아이들의 혈자리로는 만병통치에 가까운 명혈이었다.

아이들은 침 놓기 어렵다. 어른처럼 인내심이 없는 까닭이다. 하지만 윤도의 침은 깃털처럼 들어갔으니 아이는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 그 상태로 기혈을 조절했다.

‘우측 신장...’

신경이 쓰였다. 이 아이가 1타로 선택된 이유였다. 말하자면 다섯 중에 가장 나쁜 상태였다. 게다가 우측... 한방은 음양의 조화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 조화는 좌양우음으로 읽힌다. 기혈로 치면 좌기우혈이었다. 우측이면 음에 속한다. 음이 부족한 질병은 양이 부족한 질병보다 치료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아이의 신장이 망가진 건 아니었다. 기혈의 부족은 일반 이화학검사에서 나오지 않는다. 초음파로도 알 수 없다. 그런 면에서는 한방의 맥과 혈자리가 유리했다. 제대로 짚을 수만 있다면 최첨단의료기기로도 못하는 걸 인체의 이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침을 돌려 보사를 맞췄다. 아이라 오히려 어려웠다.

툭!

윤도 이마에서 땀이 떨어졌다.

툭!

또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 장면이 카메라의 앵글에 잡혔다. 윤도는 오직 집중했다. 하지만 지금 윤도의 타겟은 축농증이나 천식이 아니었다. 그 병의 근원... 신장을 노리는 것이다.

위대한 포기-3

시간이 흘러갔다. 땀방울이 늘어났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아이의 혈자리 조절은 맞을 듯 비껴갔다. 36문도 그랬다. 이 문이 열리면 저 문이 닫혔다. 그러다 겨우 문 전체의 개폐를 조절하게 되었다. 최상은 아니지만 그 정도면 되었다 싶어 손을 떼었다.

‘후우!’

늑골 사이에 머물던 날숨을 길게 밀어냈다. 겨우 한 아이의 시침이 끝났다. 나머지 세 아이의 시침도 대동소이했다. 수월한 건 한 아이 뿐이었다. 그 아이는 신장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족삼리와 상거허혈에 침을 넣어 단숨에 잡아냈다. 기혈 조화의 순간에 기침이 잦아들던 아이는 콧물까지도 확 줄어들었다. 기도하던 보호자 얼굴이 꽃처럼 밝아졌다. 카메라가 또 그 장면을 잡았다.

하지만, 감격의 장면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나머지 네 아이들... 기침이 잦아들기는 했지만 첫 아이 같지는 않았다. 촘촘한 시간 간격으로 침을 뽑아주었다.

“선생님...”

피디가 다시 말을 건네 왔다.

“네?”

“죄송하지만 이제 실시간 시청자 투표에 올려야 할 때라서...”

“그러세요.”윤도는 개의치 않고 침을 뽑았다.

“그런데...”

“말씀하시죠.”

“침이... 제가 이 촬영분 때문에 혈자리 공부를 좀 했는데 선생님의 침은 마지막 아이만 빼고는 천식과 축농증 혈자리가 아니라...”

“맞습니다. 신장과 비장 혈자리였습니다.”

윤도가 웃었다.

“혹시 진단을 잘못하신 건 아닌지...”

“그럴 리가요. 아이들이 축농증과 중이염, 천식이 있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피디는 말을 아꼈다. 부용의 말과 달랐다. 방송국에서 채집한 자료와도 달랐다. 용 피디는 윤도의 침을 맞은 몇 사람을 비밀리에 만났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채 선생 침은 신침이에요.”

신침(神鍼)...

고혈압 환자들에게서는 그 말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이 환자들에게는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 사람, 축농증이나 천식은 못 고치는 걸까?’

그런 생각까지 드는 피디였다.

“실시간 투표 시간이라면서요? 바쁘실 텐데 진행하세요.”

“용 피디님, 방송국 연락입니다.”

대화 사이에 진행팀에서 피디를 불렀다. 피디가 창가에서 전화를 받았다. 눈치를 보니 상대방 한의사 촬영분 편집이 끝난 모양이었다.

“예... 그냥 진행해야할 것 같습니다. 네, 프로그램 돌려주세요.”

피디가 전화를 끊었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녀는 베테랑이었다. 가끔 어처구니 없는 경우가 있었다. 최고의 전문가라고 모셔보니 그저 입만 나불거리는 인간들... 남들도 다 알만 한 사실을 예측이나 분석이라고 내놓는 전문가... 결국 윤도도 그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피디였다.

‘이부용 대표도 다시 봐야겠군.’

피디가 전화를 끊을 때였다. 윤도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호자들이었다.

“어머, 어머!”

“기침이 뚝 그쳤어요.”

“콧물도 안 나와요.”

웅성거림은 점점 커져갔다.

‘뭐야?’

피디가 그쪽으로 다가섰다.

윤도는 네 아이들 중에서 두 번째 환자에게 시침을 하고 있었다. 족삼리와 상거허였다. 다리는 간호사가 잡아주었다. 거기서 아이의 기침이 줄어들자 중완혈에도 장침이 들어갔다. 아이의 목에는 얇은 커버가 채워져 침을 볼 수 없었다. 겁을 먹고 움직일까 배려한 조치였다. 마지막 침은 비장혈을 위한 자리였다. 혈자리 표에 나오지 않지만 윤도는 알 수 있었다.

‘자, 이제 끝장을 볼까?’

침 끝이 혈자리를 차지하자 남은 부분을 다 밀어넣었다. 아이는 큰 기침을 한 번 하더니 다시는 기침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성공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