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265)

“고맙습니다.”

윤도가 인사를 받았다. 윤도 눈에 아이들의 환한 얼굴이, 창을 넘어온 햇살과 함께 들어왔다.

“......!”

순간 윤도는 보았다. 아이들...

그 얼굴에 어리는 헤이싼시호의 중국 아이...

그 시린 빛의 출렁임...

아까와는 달리 어쩐지 웃는 듯 한 느낌...

그러자 거짓말처럼 하나의 각성이 윤도를 스쳐갔다. 다섯 환자들... 천식과 축농증에 비염, 아토피 피부염... 그러나 이런 아이들이 전국에 한둘일까? 이 자리의 윤도는 명의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지만 알고 보면 질병에 고통 받는 아이들 중에서 극소수를 구제했을 뿐이었다.

[고질병을 고치면 명의.]

[죽을 병을 고치면 신의.]

[죽은 사람도 고치면 천의.]

윤도가 아는 공식이었다. 그걸 다르게 해석했다.

[한 사람을 고치면 명의.]

[만인을 고치면 신의(神醫).]

타이틀은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윤도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각성이었다.

‘계시다.’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계시가 분명했다. 이제 한 사람의 난치병을 고치는데 만족하지 말고 만인의 질병을 돌아보라는...

‘그래...’

윤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 하나를 고치며 추앙 받는 일은 할 만큼 했다. 그렇기에 이제는 더 큰 걸 바라볼 때였다.

순간의 각성은 윤도의 의술에 등대가 되었다. 한의사로서 책임감에 대한 등대... 한두 사람을 위한 명의가 아니라 수천, 수만을 살리는 치료제의 길을 마음에 품게 된 것이다.

적어도 한 질환이라도, 한두 사람의 환자가 아니라 만인을 위하여.

한방병원을 나올 때였다. 복도 끝에서 상대 한의사가 다가왔다.

“어이!”

그가 윤도를 불렀다. 윤도가 걸음을 멈췄다.

“당신이 그 채윤도였어?”

상대의 말투는 굉장히 까칠했다.

“......”

“젊은 분이 그러시면 안 되죠.”

말은 존대지만 가시가 느껴졌다.

“무슨 뜻인지...”

“시청자 투표 말입니다. 그런 쪽에 잔머리가 빠삭하신 모양이네?”

“......?”

“젊으신 분이 정치 좋아하면 못 씁니다. 뭐 안 그래도 그 나이에 명의열전에 나온다기에 뭔가 있지 싶던 일이긴 하지만...”

“요지를 말씀해 주시죠.”

윤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선배라고 무조건 예우를 갖출 마음은 없었다.

“됐습니다. 나가서 한의사 망신이나 시키지 마세요.”

상대는 냉소를 남기고 돌아섰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가 바로 탁상명이었다. 윤도의 한의원에서 가까운 화암한의원 원장...

최근 미용침과 난치병 침술로 기치를 올리는 그 사람...

그는 까칠함 자체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사실 방송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윤도 촬영장에 사람을 보내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윤도가 헛발질을 했다. 그 보고를 받고서 마음을 놓았다. 관찰자를 철수 시켰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윤도는 풋내기 한의사였다. 어쩌다 여객선 사고로 뜬 까닭에 불려나온 것으로 판단했다. 탁상명에게 있어 윤도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다 된 밥에 코가 빠졌다. 알고 보니 그 코가 보통 코가 아니었다. 그가 임기응변으로 막은 질환을 원천에서 치료한 것이다. 믿기지 않았다. 그의 경험상, 윤도 나이에 이룰 수 없는 침술이었다. 하지만 방송이다 보니 대놓고 항의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핏대를 올리는 것으로 유감을 대신한 탁상명이었다.

윤도는 그냥 웃었다. 이제 그 정도 여유는 있었다

.

“부용 씨는 알고 있었어요?”

부용의 차 안에서 윤도가 물었다. 윤도의 한의원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미리 말하지 않아서 죄송해요. 피디하고 약속을 했거든요.”

“잘 하셨습니다.”

부용을 탓하지 않았다. 사실 미리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일도 없었다.

“그나저나 얼굴 확 구겨졌던데요?”

운전하던 부용이 윤도를 돌아보았다.

“나오면서 만났어요.”

“뭐라고 해요?”

“핏대 오른 거 같더라고요.”

“그렇겠죠. 장난질을 치고도 낙마를 했으니...”

“장난질이라고요?”

“시청자 투표 때 문제가 있었어요. 수상한 몰표가 들어왔거든요.”

“몰표?”

“그 사람 장난질이에요. 지난번에 다른 프로그램에서 출연진 선택할 때도 선례가 있었거든요. 간호사들과 환자를 동원해서 몰표로 몰아가는... 제가 방송국 직원에게 몰표 아이디 확인을 부탁했더니 그때의 아이디들이 상당수라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핏대 오를만 하군요.”

“더 놀라운 건 선생님이에요. 촬영팀에게 듣기는 했는데... 오늘 일, 의도한 거 아니죠?”

“전혀요. 저는 솔직히 출연 포기하고 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포기까지는...”

“투표로 결정한다면서요? 거기다 상대방은 몰표 투표단까지 준비하고 있었고...”

“저는 뭐 폼으로 있나요?”

부용이 웃었다.

“무슨 뜻이죠?”

“저 그런 꼴은 못 보거든요. 엄마들 표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제가 나섰을 거예요.”

“부용 씨...”

“승부란 정정당당하게 겨뤄야죠. 몰표로 치자면 누가 저를 당하겠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제가 그런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주지 않았으니 더 대단하다는 거예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고마우면 침 좀 부탁해요.”

“어디 아파요?”

“제가 아니고 찬조출연할 애들요.”

“찬조라면?”

“기왕 나가시는 거면 제대로 해야죠. 해서 전의 약속대로 우리 소속사 애들 일부 출연대기 시켜놓았어요. 그랬더니 얘들이 출연료 대신 선생님 장침 맞게 해달라고 징징거리고 있어요.”

“......”

“안 될까요?”

“안 될 거 없죠. 당장 와도 문제 없습니다.”

윤도의 응답에는 주저가 없었다.

**

점심시간, 부용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갔다. 윤도는 한의원 터에 혼자 남았다.

<일침한의원>

간판을 만져보았다. 나무의 촉감과 향이 좋았다.

원장실로 돌아와 짐을 풀었다. 일단 산해경의 영약 샘플부터 약제실 샘플칸에 넣었다. 다음으로 한의서와 침통 등을 정리했다. 짐 사이에서 오래 된 침통 하나가 나왔다.

“......!”

그 침통이었다. 집수리를 할 때 버려졌던 침통. 윤도가 잘 닦아 간직해두었던 침통... 장식장 유리 안에 고이 모셔두었다. 어쩐지 잘 어울려 보였다. 진경태는 오후에 오기로 했으니 시간이 좀 남았다.

이제 같이 일할 여직원들을 만날 시간이었다. 상담실장과 간호사들은 추천을 받았다. 광희한방병원에서 지병과 출산 등으로 그만 둔 두 명이었다.

첫 방문자는 상담실장 후보 정나현이었다.

윤도가 일부러 지명한 케이스였다. 그녀는 유사경력이 있었다. 다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구취였다. 구강청정제를 뿌리고, 향기 나는 사탕을 먹고, 하루 열 번씩 양치를 해도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때로는 마스크 도움을 받았지만 그녀 자신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해 병원을 그만 두었다.

소개한 사람은 광희한방대학병원의 간호사였다. 능력 있는 그녀가 구취 때문에 사회활동을 접은 게 안타까워 윤도에게 구취 장침을 상담해 왔던 것.

“저랑 같이 일한다고 하면 고쳐드리죠.”

조금 속 보이는 옵션을 내걸었다. 친구의 극찬을 들은 그녀가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제 면접이라는 이름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가 도착하자 윤도는 장침부터 시침했다. 손목 아래의 대능혈과 새끼손가락에 가까운 전곡혈이었다.

“결과 보고 얘기하자고요.”

땡!

정나현을 위한 타이머가 꺼졌다.

“어때요?”

침을 뽑은 윤도가 물었다.

“하아, 후아, 후!”

정나현은 입김과 후각을 총 동원해서 구취를 확인했다.

“......”

그녀의 얼굴이 확 굳었다가, 확 펴졌다. 구취가 사라진 것이다.

“신기해요. 솔직히 친구가 신침이니 뭐니 할 때는 별로 믿지 않았는데...”

실장으로 낙점된 정나현은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OK가 떨어졌다. 침 하나로 원하는 사람을 얻었다.

간호사 후보들도 마음에 들었다. 간호사 둘과 미화원 아줌마는 윤도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제 스카우트에 응해준 점에 감사를 드립니다.

스카우트!

그 말로 네 사람의 기를 살려주었다.

한의원에 사람 온기가 퍼질 때 쯤 방문객이 들어왔다.

“아저씨!”

양손에 한약재를 가득 들고 등장한 사람은 진경태였다. 장터의 명물 한약쟁이 진경태...

“한의원 죽이는 데요?”

진경태가 웃었다.

“일찍 오셨네요.”

윤도가 그를 맞았다. 마침내 산골 생활을 정리하고 올라온 진경태였다.

“그건 뭐죠?”

윤도가 짐꾸러미를 보며 물었다.

“약성 좋은 놈들만 추린 한약입니다. 선생님 올라가고 나서 부지런히 산 좀 탔죠.”

진경태가 꾸러미를 펼쳐보였다.

“......!”

윤도가 휘청 흔들렸다. 심산유곡에서 캐낸 각종 한약재들... 요즘 세상에 보기 힘든 귀물과 대물들의 위용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세상에... 허리도 안 좋으셨는데 쉬지도 않고...”

“몸뚱이라는 건 안 움직이면 망치는 겁니다. 잘 아시면서 그러세요.”

“그래도...”

“어때요? 쓸만합니까? 선생님 눈이 자동분석기잖아요?”

“좋네요.”윤도가 웃었다. 실제로 그랬다. 각종 항암버섯부터 진귀한 약재들은 최소한 中中을 찍어댔다. 현대의 기준으로는 上中급 이상이라는 뜻이었다.

“약재분석실이 있다고 했었죠? 알려주시면 거기다 정리하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약제실이 꽉 차는 느낌이겠는데요?”

인사가 끝나자 윤도가 보따리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야!”

약제실에 들어선 진경태가 감탄을 토했다. 첨단장비와 더불어 최적의 한약장, 그건 그가 상상하던 이상이었다.

“선생님, 정신 많이 나가셨군요?”

진경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가요?”

“이 시설 유지하려면 돈 많이 버셔야할 텐데...”

“벌면 되지요.”

“대학병원 연수는 끝난 겁니까?”

“저도 아저씨처럼 준비완료입니다. 아, 이제부터는 진 선생님으로 부르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아저씨라고 하세요. 원장님!”

“싫은데요? 게다가 정식 한약사시잖아요? 원래 병원에서는 가운 입으면 다 선생님 호칭이고...”

“그럼 저 바로 내려갑니다?”

“......”

“아저씨, 아셨죠? 원장님!”

“뭐 그렇게까지 협박을 하시면...”

“어, 그런데 이건 뭐죠?”

진경태의 시선이 투명 샘플칸으로 옮겨갔다.

“제가 구한 약재들입니다. 나름 영약이에요.”

“좀 봐도 될까요?”

“그러세요. 다만 사용하거나 할 때는 제게 허락을 구하셔야합니다.”

“그야 당연하죠. 처방은 원장님이 내시는 거니... 음... 약성이 기막힌데요. 뭔가 아련하면서도 산삼의 느낌처럼 심오한 향...”

진경태는 진지했다. 더불어 능력 또한 놀라웠다. 정확한 팩트는 짚어내지 못하지만 영약을 알아보는 것이다.

“역시 원장님은 명의로군요. 명약은 명의가 아니면 따라붙지 않거든요.”

“고맙습니다.”

“제가 가져온 약들은 약전기준에 맞춰 분석하고 샘플분석 의뢰도 보내겠습니다. 장터라면 그냥 팔아도 되지만 한의원은 그러는 게 좋습니다.”

진경태는 시스템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러세요.”

“알겠습니다.”

“분석기 사용법은 그쪽에서 오기로 했으니 직접 연락해서 미팅 잡으세요. 시간이 되면 저도 같이 배울 게요.”

“원장님도요?”

“제가 아저씨 같은 능력자 모실 때 탕약이나 끓이자고 모셨겠어요? 우리 의학계 한 번 뒤집어보자고요.”

“원장님...”

“저 장침이나 놓으면서 폼 잡고 살지는 않을 겁니다. 가능하면 천 명, 만 명을 고치는 신약도 만들어낼 거라고요. 장침만으로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는 데 한계가 있잖아요.”

‘신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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