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265)

<신약개발>

윤도 입에서 처음 나온 단어였다. 그러나 분위기로 보아 그냥 한 번 뱉는 말도 아니었다. 대충 한의원만 운영할 일이라면 이런 규모의 약제분석실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진경태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신침과 약재를 보는 신안.>

진경태가 아는 윤도였다. 산해경의 일은 까맣게 몰랐다. 하지만 앞의 두 가지만으로도 가능한 일이었다. 상상불허 이 남자. 윤도는 무심하지만, 가히 압도적이었다. 진경태는 이마를 스쳐가는 서늘함에 온몸을 떨었다.

대화하는 사이에 첫손님이 도착했다. 윤도의 가족이었다. 아침에 윤철에게 남긴 특명. 그게 바로 부모님 모셔오기였다.

“인사하세요. 저희 부모님과 동생이에요.”

윤도가 가족을 소개했다.

“우와... 여기가 우리 채 의원 한의원?”

어머니는 절반 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아버지 역시 놀라는 건 다르지 않았다.

“침구실로 들어가세요. 개시로 두 분 침 좀 놔드리고 환자 받으려고요.”

“채 의원...”

어머니의 눈시울은 금세 젖었다. 사양하는 두 사람이지만 윤도가 양보하지 않았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온갖 투정과 짜증을 다 받아준 부모님. 집에서 대략 침을 놓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시침하고 싶은 게 윤도의 마음이었다.

아버지가 시작이었다. 다시 자잘한 질환이 쌓여 있었다. 소화기도 그렇고 눈도 그랬다. 장침을 넣었다.

“어휴, 시원하구나.”

아버지의 말을 뒤로 하고 어머니에게 다가섰다.

“윤도야.”

어머니가 손을 잡았다.

“왜요?”

“그냥... 꿈만 같아서...”

“뭐가요?”

“우리 채 의원 말이야... 공중보건의 가서 섬에 떨어진 후에 상심하길래 엄마 마음이 많이 아팠거든. 엄마 아빠가 빽이 없어서 그런 데로 밀렸나 하고 말이야.”

“어머니는... 거기 제 사수는 S대 나온 사람이었어요.”

“아무튼 그 어려움 잘 이겨내고 이렇게 반듯하게 개업하니까 너무 고맙다. 엄마 아빠가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하긴 하지만...”

“저 사람, 또 쓸 데 없이...”

듣고 있던 아버지가 핀잔을 날려 왔다. 윤도는 차분히 장침을 찔렀다. 어머니 역시 잔병 투성이였다. 그래도 큰 병이 없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머니.”

“응?”

“실은 저 내일 명의열전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어요.”

“어머, 정말?”

어머니가 상체를 발딱 세웠다.

“스튜디오에 환자를 모셔서 치료시범을 보여야할 거 같은데 어떤 환자를 모시면 좋을까요? 방송국에서 저보고 선택하면 섭외해 오겠다던데..;.”

“그 자리에서 치료를 하는 거야?”

“아마...”

“채 의원 생각은 어떤데?”

“제 생각은 쉬운 사람 데려다 헛폼 잡는 것보다는 좀 어려운 분을 도왔으면 해요.”

“하지만 그런 사람은 치료효과가 없어 보일 수도 있잖아?”

어머니는 어머니다. 그녀는 윤도 걱정부터 앞세웠다.

“제가 열심히 해야죠.”

“그럼 채 의원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무조건 채 의원 편이야.”

“아버지는요?”

“동감이다. 우리가 뭐 한의학에 대해 아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도 윤도를 지지해주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한 윤도가 멀뚱히 선 윤철을 바라보았다.

“너는 왜 안 눕는데?”

“나? 나도 침 맞아?”

“당연하지. 너는 뭐 다리 밑에서 주워온 자식이냐?”

“난 아픈 데 없어. 나한테 장침 꽂으면 과잉진료거든.”

“미안하지만 의료보험 청구 안 한다. 그러니 빨리 누워.”

윤도가 윤철의 목덜미를 끌었다.

“아, 씨... 그럼 나는 머리 좋아지는 침이나 놔줘. 다른 건 정말 필요없거든.”

“한 가지 필요한 게 있을 걸?”

“뭐?”

“정력저하. 너 요즘 방 안에 티슈가 너무 빨리 없어지더라. 정기 너무 방출하면 집중력 떨어지거든. 그거 확 줄여놓으면 머리도 좋아질 거다.”

“형...”

버둥거리는 윤철의 몸에도 장침이 들어갔다.

팍팍팍!

“으아악!”

비명도 울려퍼졌다. 아직 침을 놓기도 전이었다.

“어우, 이 겁쟁이 놈. 군대는 어떻게 갔다 왔을까?”

“쳇, 군대에서는 그런 침 안 놓거든.”

투덜거리던 윤철은 어느새 혈자리에 들어선 장침을 보았다. 귀여운 엄살 비명이 또 한 번 한의원을 흔들었다.

다음 날 면허증 전시식을 거행했다. 윤도 뿐만 아니라 진경태의 한약사 면허, 여직원들의 간호사 면허증도 나란히 걸었다. 윤도 것만 건 것보다 보기에 좋았다. 멤버들의 자부심이 쑥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부용 소속사 연예인들이 오는 동안 각오를 다졌다. 밤에 뽑아둔 환타 커뮤니티의 댓글들이었다.

-의사가 도무지 얘기를 들으려 하지를 않아요. 두어 마디 하면 딱 끊고 처방을 때리네. 의사 만나려면 증상을 달달 외워서 빼먹지 말고 말해야 하는 스킬 과외가 필요하다니까, 젠장.

-병원가기 겁난다. 차도가 없다고 하면 의사들이 인상부터 쓴다. 불편을 호소해도 한 쪽 귀를 흘려버린다. 지들 가족도 이렇게 치료할까?

-나이 들면 병원가지 마라. 짐짝 취급 받는다. 그래봤자 소염진통제나 안겨주는데 무슨 치료? 수치 내려갔다고 좋아할 거 없다. 약 끊으면 다시 원점이다.

-애당초 근본치료가 아니라 임시변통인데 무슨 병이 나을까? 기대하는 게 ㅂㅅㅇㅈ.

-의사들은 하지마라를 달고 산다. 술 먹지 마라. 담배 피우지 마라. 커피 마시지 마라. 탄산음료 마시지 마라. 자극적 음식 피하라. 규칙적으로 살아라. 꾸준히 운동해라... 애당초 그렇게 살 수 있는 팔자였다면 누가 병에 걸릴까?

환자들의 불만을 읽다보니 겸허해졌다. 윤도라고 그런 적이 없는 게 아니었다. 한 번은 하소연을 들어주었더니 그 히스토리가 갓난아이 때까지 이어졌다. 반 원장에게 눈총 꽤나 받았다.

‘의술...’

그 단어를 곱씹으며 각오를 다졌다. 이제는 개업의가 된 윤도. 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접수실 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놀라지 않았다. 짐작 가는 일이 있었다.

“원장님!”

막내 간호사 승주가 뛰어들어왔다. 예상대로 해피 프레지던트의 일곱 아이돌이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장현서와 이가인까지 동행한 스타 부대였다.

미녀들 시침이 끝나갈 무렵에 용 피디 팀이 도착했다. 진맥과 시침장면, 약제실에서 약재를 고르는 장면 등을 찍고 한의원 촬영분량을 끝냈다.

“이제 본편 촬영장으로 갑니다.”

용 피디가 윤도에게 말했다. 본편... 윤도의 긴장감이 살짝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보시죠.”

방송차량 안에서 피디가 진행표를 보여주었다.

“환자들 말입니다. 선생님 요청에 맞춰 대기를 시키기는 했는데...”

운을 떼는 피디 얼굴이 무거워 보였다.

“그런데요?”

“클라이막스로 선택 환자는 무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미리 만나보시고 어려울 거 같으면 교체를 하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제 입으로 드린 말씀인 걸요.”

“하지만 그 질환은 대학병원에서도 손을 못 대는 불치병이라...”

“시청률 떨어질까봐서요?”

“......”

“한 번 믿어보세요!”

윤도의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방송 차량은 어느새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이 방송 실화냐? 1

이 방송 실화냐? 1

“안녕하세요? 명의열전 진행자 유재덕입니다.”

와아아!

함성과 함께 녹화실에 박수가 쏟아졌다.

“오늘부터 제가 제 3대 진행자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고생해주신 강오동 씨와 김워니 씨도 프로그램의 더 큰 발전을 위해 자리를 같이 해주셨습니다.”

진행자의 말과 동시에 앞쪽에 포진했던 강오동과 김워니가 일어섰다.

짝짝!

둘을 위해 또 한 번의 박수가 쏟아졌다.

“오늘부터 저를 도와주실 진행자들도 함께 소개합니다.”

유재덕이 보조진행자석을 가리켰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여섯 사람이 공개되었다. 다들 다른 프로그램에 가면 메인 진행지가 될 사람들. 그 중량감에 방청석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최고의 진행자를 투입하던 프로그램. 하지만 이번에는 소위 SSS급 진용의 포진이었다. 그건 TBS가 이 프로그램을 계속 간판으로 키워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용 피디는 1번 카메라 옆에 붙어있었다. 노련한 진행자와 달리 그녀는 상당히 상기된 표정이었다.

“오늘 자로 명의열전은 진행자도, 진행방식도 싹 바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을 바라며 대폭 개편된 프로그램의 첫 출연 명의를 모실까합니다. 먼저 화면부터 보시죠.”

진행자가 중앙을 가리켰다. 화면이 떠올랐다. 서울의 한약거리로 불리는 제기동이었다.

“침술하면 누가 떠오릅니까?”

리포터가 시민들에게 물었다.

허준입니다.

허임입니다.

화타입니다.

편작입니다.

“그럼 이 시대의 침술 명의는 누가 있을까요?”

이번에는 대구 약령시장 앞에서 질문이 이어졌다.

김남우입니다.

조수황입니다.

탁상명입니다.

공광태입니다.

시민들의 대답이었다.

“첨단의학이 날로 발전을 거듭하는 21세기입니다. 이 시대에도 화타나 편작에 버금가는 침술명의가 있을 수 있을까요?”

화면은 부산 자갈치 시장으로 옮겨갔다. 시민들이 대답했다.

“천지빼가리에 침술 명의가 어딘노? 내사 마 낯빼기도 몬 봤다아이가?”

“아놔, 내가 몸이 대서 침 좀 맞고 싶은데 그런 사람 있으면 소개 좀 시켜도.”

“엥가이 해라 마. 요즘 침쟁이들 영 파이다.”

화면에 마지막 리포터가 나왔다. 그녀도 비슷한 멘트를 던졌다.

“우리나라에 침술 명의는 누구?”

질문이 허공을 차고 나갔다.

“채윤도 선상님!”

화면이 급 변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떼창'하는 영상이 나왔다. 갈매도였다. 보건 지소 앞에서 수십 명이 모여 외친 이름이었다. 세희도 있고 차 선장도 있고 이장과 어촌계장도 보였다.

“다시 한 번 말해주세요.”

“채에유운도!”

어르신들의 함성은 갈매도 앞 바다로 달려가 파도와 섞였다. 화면은 속도감 있게 방송국으로 옮겨왔다.

“이 시대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영웅, 장침의 마법사로 불리는 채윤도 한의사를 초대합니다!”

진행자가 무대를 가리켰다. 장중한 음악과 함께 커튼이 열렸다. 색이 깃든 가운을 입은 윤도가 등장했다. 종이 꽃술이 쏟아지고 음악이 고조되면서 박수가 절정을 이루었다.

“채윤도, 채윤도!”

목 터지는 연호는 실험군에 참가했던 엄마들이었다. 그 다섯 명만이 아니었다. 그녀들과 커뮤니티를 이루는 맘 까페의 젊은 맘들이 수십 명 자원했다. 그녀들은 소녀의 감성으로 윤도에게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개중에는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도 있었다.

“아, 시작부터 압도적이군요. 혹시 선생님의 응원부대인지?”

진행자가 위트 섞인 질문을 던졌다.

“죄송합니다. 아직 부대조직할 능력이 없어서 말이죠.”

윤도 역시 조크로 비켜갔다. 윤도의 멘트 중에 화면에 프로필 자막이 나왔다.

[일침한의원장.]

[TS전자 의무실장.]

“오늘 출연하신 채윤도 한의사는 사실 아는 분들에게는 이미 기적의 명침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방송관계상 일일이 열거하지는 못하지만 확인 결과 사실로 모두 드러났습니다.”

유재덕은 특유의 멀건 웃음으로 멘트를 이어갔다.

“하지만 오늘부터 대폭 체인지된 명의열전. 침술은 현장검증이 가능하니 바로 검증에 들어가 봅니다. 선생님, 자신 있습니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삐거나 신경통처럼 단순한 환자들이 아닙니다.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아, 역시 소문처럼 내공이 빵빵하시군요. 그럼 지금부터 검증에 착수합니다. 간호사 선생님들, 환자분들 모시고 나와주세요.”

유재석이 무대의 커튼을 가리켰다. 아련한 배경음과 함께 환자의 침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담한 침대는 모두 네 개. 그 위에는 환자 넷이 앉아 있었다.

“모시겠습니다. 오늘의 명의 채윤도 한의사입니다.”

진행자의 멘트를 따라 윤도가 일어섰다.

“와아아!”

엄마부대들이 환호를 했다. 윤도의 부모와 윤철도 박수로 응원했다. 반대편 두 번째 줄에 착석한 부용은 깊은 날숨을 쉬며 시선을 가다듬었다.

“참고로 이 환자들과 채윤도 한의사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이 분들은 현재 각 병원이나 한의원에서 치료 중이지만 차도가 없어 저희 프로그램에 자원하신 분입니다.”

유재덕의 멘트를 뒤로 하고 윤도가 첫 환자 앞에 섰다. 차분하게 진맥에 들어갔다.

“오른쪽 팔이 아프시군요?”

진단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맞습니다. 신경통 같은데 죽어도 낫지를 않아요.”

환자가 대답하자 방청석에서 박수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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