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265)

“이제 들을 수 있나요?”

끄덕!

윤도는 고갯짓으로 답하고 한 발 물러서 주었다.

“은정아...”

남편이 환자의 손을 잡았다.

“오빠 목소리 들려?”

“......”

“오빠 목소리... 들리냐고?”

“......”

“들리면 끄덕 해봐. 아니면 손짓이라도...”

“......”

“은정아.”

끄덕!

거기서 환자의 고갯짓이 나왔다.

“들리는 거야? 내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끄덕!

한 번 더 반복되는 고갯짓.

“으아악,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남편은 더 말하지 못하고 환자를 껴안아버렸다.

“고백... 하셔야죠?”

유재덕이 주의를 환기 시켰다. 그제야 남편은 오열을 멈추고 환자의 양 볼을 잡았다.

“은정아.”

끄덕!

“사랑해. 내 목소리 들려?”

끄덕!

“나 돌봐줘서 고마워. 나랑 결혼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이렇게 귀가 들려서 너무 고마워.”

남편은 다시 환자 품에서 무너졌다. 그러자 환자가 톡톡 남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응?”

남편이 고개를 들었다. 환자의 손은 윤도를 가리켰다. 그녀는 남편을 끌고 윤도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 다음 더 할 수 없이 정중한 태도로 합장한 채 윤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짝짝짝!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 여기저기서 눈물보따리도 함께 터졌다.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한 이농을 고친 윤도. 채윤도 한의사. 윤도 얼굴 아래로 감격의 자막들이 이어졌다. 방송은 초대박이었다.

시청률 42.6%.

명의열전 사상 최고를 찍고 말았다.

**

1 채윤도 ⟰

2 명의열전 ↑

3 장침 ↑

4 한의사 ↑

5 평창 온라인스토어

6 뮤직뱅크

7 시바견

8 내진설계 조회

9 국가 장학금

10 아이폰

녹화방송이 나가자 전국이 들끓었다.

-채윤도가 누구냐?

-저거 조작이냐 실화냐?

-한의사가 아니라 한의神?

-일침 한의원 어디냐?

-이 분 여객선 심장마비자 살린 그 한의사네?

-간만에 명의열전 핵꿀잼.

-레알 기적의 손.

-헬조선의 개실수 진짜 명의 등장.

기사 아래 달리는 댓글은 셀 수도 없었다. 곧 바로 포탈 검색순위에 지각변동이 일었다. 윤도가 일등이고 명의열전이 2등을 찍었다. 같은 날 화제가 된 유한도전보다도 압도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1위부터 4위까지 한의 관련어가 싹쓸이를 했다. 단 한 순간에 한의학에 대한 관심을 핵탄두급으로 증폭 시켜놓은 윤도였다.

빠라빠라빵!

윤도 전화기가 불이 났다. 방송 탓다고 건방 떤다 할까봐 차마 끄지 못했다. 장 박사를 위시해 노 차관과 황녹수, 은세희 간호사, 송재균, 안미란, 마혁 등 축하전화는 이루 셀 수도 없었다.

한의사협회 회장의 전화가 오고,

길상구 부원장의 격려가 오고,

조수황 과장의 응원이 날아왔다.

결국 윤도는 전화기를 꺼버렸다. 방송이 끝난 후의 이 회장과의 식사자리였다. 부용도 끼었다. 이 회장은 녹화방송이 끝나는 1시간 후에 약속을 잡고 정확하게 지켰다. 김 전무도 동석이었다.

“축하하네. 내가 복이 터졌지. 대한민국 최고 명의를 의무실장으로 두게 되다니...”

이 회장이 인사를 건네왔다.

“나도 오늘 임원들 전화 받느라고 진땀을 뺐네. 채 실장이 진짜 우리 의무실장로 오는 게 맞냐고...”

김 전무도 고무된 표정이었다.

“다 제 덕인 줄 아세요.”

부용이 괜한 힘을 주었다.

“으음... 그렇게 따지면 네 오래비는 자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만. 오래비가 쓰러지는 통에 채 선생이 달려온 거라며?”

이 회장이 팩트를 짚어주었다.

“쳇, 아버지 회사에 다리 놓아준 게 누군데요? 미인계까지 써줬더니 하시는 말씀하고는...”

“네가 미인계까지?”

“오늘 채 선생님하고 오붓하게 한 잔 때릴까했더니 눈치없이들 오셔서 너무 하시는 아니에요.”

“어이쿠, 너까지도 애비 늙었다고 타박이냐?”

“뭐 그건 아니지만 제 공을 모르니까 그러죠.”

“흐음... 채 실장 안 챙긴다고 염장은 아니고?”

“아시네요.”

“채 실장.”

부녀설전(?)을 벌이던 이 회장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네?”

“중국 제2공장 건 말일세. 확정이 되었네.”

“그렇습니까?”

“자네 덕분일세. 자칫하면 큰 차질이 있을 뻔 했는데 이제 한숨 돌렸어.”

“아닙니다. 제가 뭐 한 게 있다고...”

“이 사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나중에 나 빼고 혈혈단신으로 뛰어들어 대첩을 올려서 회장님께 핀잔을 받게 하고는...”

김 전무가 웃었다.

“죄송합니다. 그건 그저 진료 확인이라서...”

“괜찮네. 그거야 우리 김 전무가 좋아서 하는 말이지. 채 실장은 누구의 지시도 받을 필요 없네. 그저 지금처럼 특별한 진료만 감당해줘도 감지덕지야.”

“......”

“그리고... 이거 받으시게.”

이 회장이 서류봉투를 꺼내놓았다.

“이게 뭐죠?”

“계열회사 TS호텔 주식일세. 이번 일이 회사 전체에 큰 영향을 주는 프로젝트였거든. 게다가 오늘 방송에서 우리 회사 홍보까지 해주었기에 성의 좀 표시했네.”

“회장님...”

“채 실장 내일 한의원 개업식까지 한다며? 우리 회사 가족이 되는 것과 더불어 축하의 의미까지 담았으니 아무 소리 말고 넣어두시게.”

“중국 상무위원 일은 그쪽에서 이미 충분히 사례를 받았습니다.”

“그거야 그 양반이 이빨 난 사례로 치룬 거 아닌가?”

“얼른 챙기세요. 이런 건 무조건 받는 거예요.”

보고 있던 부용이 윤도 품에 서류봉투를 안겨주었다.

“......”

“주식 1만주 양도증서일세. 많지는 않지만 자부심은 가질만 할 걸세.”

“......!”

이 회장의 말에 윤도 정신줄에 불이 번쩍 들어왔다.

TS호텔 주식 1만주.

엊그제 대략 본 가격이 주당 72000원.

72000×10000을 하니 대략 7억이 넘는 금액이었다.

“너무 과분합니다.”

“어허, 넣어두라니까. 만약 국제 로비스트를 세웠으면 그 돈의 10배도 넘는 금액으로 딜이 들어왔을 걸세. 그러니까 우린 싸게 먹힌 셈이고... 실은 뇌물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네.”

‘뇌물?’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그 얘기는 김 전무께서 해주시겠나?”

공이 김 전무에게 넘어갔다.

“원 회장님도... 기왕 말씀 꺼내신 거 계속 하시지 않고...”

김 전무가 바통을 받았다. 여기서 분위기가 미묘하게 무거워졌다. 윤도는 직감했다. 뭔가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는...

“그 일이군요?”

이슈를 아는지 부용이 끼어들었다.

최악의 모르핀 중독 환자.

최악의 모르핀 중독 환자.

“그래...”

물을 마시는 이 회장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김 전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 진짜... 내가 말해야겠네요. 괜찮죠?”

부용이 김 전무의 허락을 구했다.

“나쁘지 않지.”

김 전무 역시 입이 마른 듯 물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윤도의 촉각은 이제 부용에게 돌아갔다.

“오 이사님이라고 계세요. 아버지께서 난이도 높은 해외시장을 개척할 때 투입하는 외곽 법인의 대표신데 미친 불도저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계시죠.”

부용이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미친 불도저?’

“말하자면 시크릿 비즈니스 전문으로 위험지역 시장개척을 전문으로 맡는 팀인데...”

“......”

“저번에 이라크에서 그만 사고를...”

“......”

“그때도 초대형 빅딜을 위해 현지에 들어가 그쪽 정부인사들과 협상 중이었는데 돌연 반군의 총공세가 펼쳐졌어요. 우리 쪽에서 일단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그 이사님 성격에 그러지 못한 거죠. 경쟁사들이 다 나가니까 오히려 계약을 유리하게 관철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신 거예요.”

“......”

“유엔과 주변국들이 총반격을 벌이면서 며칠만 지나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전략적인 문제로 오 이사님이 있던 지역이 반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어요.”

“......”

“결국 야간에 탈출을 감행하다가 반군들에게 피격을 당하고 말았어요. 직원들이 두 팀으로 나눠 탈출했는데 오 이사님은 현지어에 능통한 정 대리와 함께 탄 차에서 로켓탄을 맞아 중상을 입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응급처리를 받았지만 골든타임은커녕 최악의 상황이었어요. 더 안타까운 건 대량의 교전 부상자들로 인해 적절한 치료조차 불가능했다는 거죠.”

“오 이사님과의 연락이 끊기자 아버지 회사가 나서 유엔군 라인을 통해 신상파악에 들어갔고 한 달 쯤 후에 신병을 확보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

“너무 늦었죠. 내전 와중의 이라크 의사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 결과는 모르핀 중독 뿐이었다고 해요. 밀려드는 부상자들로 인해 특별히 해줄 게 없던 터라 통증 제어를 위해 모르핀만 잔뜩 투여했던 거죠.”

‘아!’

“그 길로 주변국을 통해 한국으로 이송해 왔어요. 한국 의료진들의 총력 치료로 총상과 외상은 대략 회복되었는데 모르핀 중독만은 아무리 해독제를 넣어도...”

해독불능!

그게 팩트였다.

“의식이 없나요?”

“의식은 있다고 해요. 하지만 말도 못하고... 넋을 놓고 있는 거죠.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이대로 가면 사회복귀는 불가능하고 자칫하면 머잖아...”

“......”

“아버지가 오 이사님을 내려놓지 못하는 건 시장 개척에 도움을 준 것도 있지만 당시의 사연 때문에도 더 그래요.”

‘사연?’

“나중에 정밀 검사과정에서 알게 된 일인데 두 분의 배에 USB가 들어있었어요. 오 이사님과 정 대리님...”

“......!”

“TS전자의 협상 가이드 라인이 담긴 건데 혹시라도 반군에게 넘어가 공개가 되면 해외 시장개척에 큰 타격이 생길까싶어 삼켜버린 거죠. 그것 때문에 아버지께서 마음의 빚을 놓지 못하는 거예요.”

꿀꺽!

설명을 끝낸 부용이 물을 마셨다. 목젖 울렁대는 소리만이 실내에 남았다. 이 회장도, 김 전무도 무거운 마음에 빈 시선만 지향없이 움직였다.

모르핀 중독...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혈자리 중에는 해독혈도 있었다.

“해보죠.”

침묵하던 윤도가 수락의사를 밝혔다. 가치가 있는 진료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주겠나?”

이 회장이 총알처럼 반응했다.

“환자를 보는 건 의술의 사명입니다. 경중을 가릴 이유가 없지요.”

“환자를 직접 봐야겠지만 소견은 어떤가? 이런 경우에도 채 실장 장침이 통할까?”

이 회장의 질문은 한없이 진지했다.

모르핀 중독...

한국의 최상급 병원 의료진이 해독제로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면 보통 심각할 일이 아니었다.

사안을 보아 산해경의 영약을 동원해야 할 수도 있었다. 거기에 장침의 가세... 환자의 상태를 잘 모르지만 아주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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