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담은 못하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 회복까지는 가능할 거 같습니다.”
기대치는 낮춰놓았다. 진맥도 잡아보지 않고 회복을 장담하는 건 의술의 자세가 아니었다.
“고맙네. 부탁하네.”
“그럼 일단 오 이사부터 살려야죠?”
김 전무가 이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건 채 실장이 결정할 일이지.”
이 회장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정 대리라는 분부터 하겠습니다.”
윤도의 선택은 주저가 없었다.
“채 실장, 오 이사는 우리 회사에 끼친 공이 혁혁한 사람이고 정 대리는 말단 하위직이네. 일이란 순서가 있는 것이니 오 이사가 우선이야.”
김 전무가 한 번 더 강조하고 나섰다.
“정 대리도 USB를 같이 삼킨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네만.”
“오 이사님은 부하직원을 아끼십니까?”
“그거야 당연하지. 그러니 부하들이 그런 지역에 자원하는 것 아니겠나?”
“그렇다면 더욱 정 대리부터입니다.”
“채 실장.”
“오 이사님이라는 분 말입니다. 그렇게 부하 직원에 대한 애정도 강하다면 이런 순간 누굴 먼저 진료대로 올리길 바랄까요? 제 생각에는 부하를 먼저 올렸을 거 같습니다만.”
“......!”
김 전무가 흠칫 흔들렸다. 윤도의 돌직구에 제대로 맞은 것이다.
“김 전무가 판정패로군. 채 실장 말이 백 번 맞네. 나도 오 이사 생각만 하느라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는데 이런 것도 배우게 되는군.”
이 회장은 윤도를 지지했다.
“환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멀지 않은 요양병원에서 따로 간병을 받고 있네. 회사 의무실로 후송해올 수도 있고 채 실장 한의원으로도 보낼 수 있네만.”
김 전무가 답했다.
“그럼 정 대리부터 제 한의원으로 부탁합니다.”
윤도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이 회장과의 번개회동은 이렇게 끝이 났다.
**
집으로 돌아온 윤도는 가족들과 조촐한 파티를 했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 책상에 앉았다. 호텔 주식 1만주... 믿기지 않는 선물은 잘 챙겨두었다. 윤도의 마음은 벌써 모르핀 중독에 가 있었던 것이다.
모르핀 중독...
간단히 말해 독성물질이다. 진통약으로 들어갔지만 과량투여로 독이 된 것이다. 사실 모든 약은 독이 될 수 있다. 복용 기간이 길고, 효과가 높은 약일수록 의존과 금단증상이 동반될 가능성도 높다. 우리가 흔히 아는 신경안정제나 항우울제, 마약성 진통제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수면제나 스테로이드 연고도 독이 될 수 있다. 모든 약은 양날의 칼일 수 있었다.
약으로 사용한 것이 독이 되었다면 해독을 시켜야했다. 약을 잘못 먹고 중독현상이 일어나면 몇 가지 대처법을 쓸 수 있었다. 칡즙과 달걀노른자, 지장수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심각한 경우라면 처방이 될리 없었다.
신비경을 잡았다. 처음 비춰진 곳은 남산경의 청구산이었다. 무심결에 비춰진 건 늪지대의 물고기였다. ‘적유’라는 이름의 이 물고기는 피부병에 특효였다.
조금 더 넘기니 서산경 송과산이 나왔다. 냇가에 새가 보였다. 그 새 역시 피부병의 영약이었다. 두 번이나 피부병 영약이 보이자 천식 실험군에 나왔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아토피 피부염... 알레르기성 비염...’
현대에 들어 문제가 되는 질환이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질병이다. 두 영약을 유념하며 신비경을 옮겼다.
중산경의 고종산이었다. 이곳에서 노란 꽃을 피우는 ‘언산’이 해독의 영약이었다.
하지만 언산의 꽃은 많지 않았다. 꽃 봉오리 자체가 귀한 것이다. 다 해야 10g이 조금 넘을 정도였다. 다시는 구하기도 힘든 영약 같았다.
신비경을 대자 노란꽃의 언산이 튀어나왔다. 모난 줄기에 세 겹의 입을 가진 언산은 대략 보면 들국화처럼 보이기도 했다. 언산을 바라보자 채윤도표 약전분석이 주르륵 이어졌다.
[원산] 산해경
[약재수령] 55년
[약성함유등급] 上中품
[중금속함유] 무
[곰팡이독소] 무
[약재사용유무] 가능
[용법용량] 꽃 서 돈을 따서 살짝 볶은 뒤 약누룩 6돈에 산자고 1냥에 사향 서 푼을 넣고 약수 9홉과 함께 달여 물이 3분의 1로 줄어들면 따뜻할 때 마신다. 복용은 피가 온몸을 도는 시간의 100배를 더해 6회 나눠 마신다. 지상의 만독에 대해 해독효과를 낸다.
[약효기대치] 上上
“......!”
분석표를 본 윤도의 머리가 세 방향으로 갈라졌다. 첫째는 시간계산이었다. 피가 온몸을 도는 데는 보통 1분이 걸린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르다. 환자에 따라 45초가 걸리기도 하고 70초가 걸릴 수도 있었다. 이걸 계산하지 못하면 엇나간다.
두 번째는 약누룩이었다.
약누륵.
한방에서는 신곡(神麯) 혹은 신국(神麴)이라고도 하며 여섯 가지 재료로 만든다고 해서 육신곡으로로 불린다. 약누룩인 신곡은 훌륭한 해독제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약누룩은 돈 주고도 사기 어렵다. 그런데 산해경에서 언급하는 약누룩이 대충 만든 것일 리 없었다.
누룩의 특별함은 종교에서도 확인된다. 성서에 나오는 다음 말도 우연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누룩과 같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나라로 직유가 되었을까?
마지막은 기타 약재였다.
‘산자고와 사향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처방이었다. 어디였을까? 어떤 탕제의 처방이었을까? 의서를 넘겼다. 비방이 언급된 고의서를 뒤적이다 이름을 떠올렸다.
사향, 오배자, 산자고, 속수자,,,
바로 만병해독단으로 불리는 자금정의 약재들이었다. 만병해독단 자금정. 그러나 그 법제가 까다로워 잘 전하지 않는 비방. 그 갈래를 찾은 윤도였으니 피가 후끈 끓어올랐다.
다시 언산을 보았다. 저울에 올리니 12g이 나왔다. 처방의 서 돈은 맞출 수 있는 양이었다.
‘어휴!’
안도의 숨이 나왔다. 봉오리 숫자로 보아 다시 피려면 기약도 없는 꽃. 산해경의 영약은 헤프지 않다는 걸 또 한 번 절감했다.
그날 밤, 윤도는 꿈을 꾸었다. 온통 까만 세상이었다. 발밑에는 시든 꽃이 바다를 이루었다. 갈 곳을 몰라 헤맬 때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내려왔다. 시리고 경건한 빛이었다. 빛이 시든 꽃에 닿았다. 꽃 한송이가 활짝 피었다. 신기해 그 꽃을 꺾어들었다. 순간 한 줄기 빛이 퍼지며 너울너울 들판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시들었던 꽃 수천 송이가 생생하게 살아났다.
수많은 꽃 중의 한 송이.
방금 전까지는 그렇게 신기하던 꽃 하나가 그리 신기해보이지 않았다. 순간 윤도 발밑의 대지가 푹 꺼져들었다. 윤도는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깨었다.
‘꿈...’
꿈이었다. 하지만 생생했다. 윤도 시선에 침통이 닿았다. 장침을 꺼내보았다.
장침...
많은 기적을 수놓아온 윤도의 장침... 이 침 한 방이면 난치병도, 고질병도 문제가 아니었다. 침을 맞은 환자가 가뜬하게 일어서는 것이다.
장침에 꿈의 꽃 한송이가 겹쳤다. 시린 빛이 닿아 피워낸 꽃 한송이는 신성했다. 하지만 그 빛이 물결이 되어 들판을 쓰다듬자 더 많은 꽃이 피었다.
잠에서 깨었다.
깨우침 같았다.
장침은 한 명을 살린다. 제 아무리 기고 날아봤자 한 번에 한 명이다.
‘하지만...’
시선이 산해경으로 갔다. 거기서 꺼내온 언산을 보았다. 약은 침과 다르다. 잘 만들어 나누면 한 번에 여러 명을 구할 수 있다. 아니 수백 명도, 수만 명도 가능한 게 약물의 힘이었다.
개업을 앞두고 일어난 사건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토피, 천식 아이들에게 겹쳤던 중국 아이... 그리고 지금 꾼 예지몽...
‘한 명이 아니라 만인을 살리라는 것...’
윤도는 그 뜻을 새겨들었다. 그제야 산해경의 용도를 알 것 같았다. 단지 한 사람을 위한 비방으로는 아까웠다. 더구나 윤도는 이제 준비가 갖춰진 상태였다. 최고의 한약사 진경태를 모셔왔고, 약제실도 최상급으로 갖추었다. 거기에 더해 탕제를 시험할 수 있는 자신의 한의원도 갖췄다.
‘때로는 한 사람을, 때로는 만인을...’
그 말을 되뇌이자 윤도의 피가 끓어올랐다. 예지의 끈을 잡은 윤도가 가뜬하게 일어섰다.
부릉!
스포츠카 시동이 걸렸다.
마음이 급했다. 당장 언산도 볶아야했고 약누룩에 대한 체크도 필요했다. 그러자면 진경태를 만나야했다. 앞으로 나갈 방향도 상의해야 했다.
역사가 된 개업식-1
역사가 된 개업식-1
“......!”
한의원에 도착한 윤도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화환 때문이었다. 입구부터 현관까지 이어진 화환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겨우 차를 대고 내렸다.
“......!”
한의원으로 들어서서도 또 한 번 뒤집어지는 윤도. 그 안도 온통 꽃천지였다. 밖에는 화환, 안에는 꽃다발과 꽃바구니...
멍한 정신줄을 수습할 줄 모를 때 진경태가 약제실에서 나왔다.
“어, 원장님!”
“아저씨...”
“어이구, 난 화환이 또 도착했나 했더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무슨 일은 무슨 일입니까? 다 원장님 인기 덕분이죠. 이 꽃다발들 사실 어제 방송 끝난 직후부터 밀려들어왔어요. 다들 어떻게 알았는지...”
“그런데 왜 저한테 연락 안 하시고...”
“처음에는 몇 개 오다말려나 했었죠. 그러다 보니 이 지경이 되었는데 원장님도 쉬어야할 판에 전화하기도 그렇고...”
“허얼!”
“어쩝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꽃인데... 며칠 꽃 속에 파묻혀 살아보죠 뭐.”
“그래야겠네요.”
선채로 시선을 돌렸다.
이 회장과 이진웅, 김 전무, 노차관, 안행부 차관, 장 박사, 길 부원장, 조 과장, 황녹수 원장...
윤도의 시선이 화한의 이름을 따라 돌아갔다. 한 쪽 줄은 연예인들 화환이었다. 부용을 위시해 장현서와 이가인, 해피 프레지던트, 용은수 피디... 거기에 더해 맘 카페와 광희한방대학병원 수련의들... 마지막 시선은 구석의 꽃다발에서 멈췄다.
<갈매도 차명균>
<갈매도 이장 김명수>
<갈매도 어촌계장 강명준>
그리고... 공보의 이창승과 은세희 간호사...
윤도는 그 화환 앞으로 걸어갔다. 이름이 쓰인 리본을 쓰다듬었다. 갈매도의 일상들이 잠시 뇌리를 스쳐갔다. 피로가 사라졌다.
가방을 놓기 위해 방으로 들어서니 거기도 꽃바구니가 있었다. 아버지가 보낸 꽃이었다. 아버지 이름을 아는 진경태의 배려였다.
“아저씨...”콧날이 시큰해진 윤도가 진경태를 돌아보았다.
“꽃은 도착한 순서대로 쌓았습니다. 하지만 부모님 거는 좀 특별해야 할 거 같아서...“
“고맙습니다.”
“이거... 나도 조그만 거 하나 준비했는데...”
진경태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아저씨...”
“나야 말로 꽃을 한 트럭 보내도 모자랄 사람이잖아요? 눈 고쳐주고 이렇게 번듯한 약제실까지 준비해줬으니...”
“아저씨가 좋아하니 저도 좋네요.”
“그나저나 왜 이렇게 일찍 나온 거죠? 설마 카리스마 짱짱한 명의께서 환자 안 올까봐 걱정되어 나온 건 아닐 테고...”
“카리스마는 과찬이시고... 일이 있어 나온 건 맞습니다.”
“이렇다니까.”
“혹시 약누룩 가진 거 있으세요?”
“있죠.”
진경태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하게 나왔다.
“아저씨가 법제하신 건가요?”
“네. 심심해서 좀 만들어두었는데 다들 꽁 먹으려 하길래 처박아 두었다가 오는 길에 넣어왔어요. 원장님이라면 가치를 알 것 같아서...”
“잘 됐네요. 좀 보여주세요.”
“따라오시죠.”
진경태가 앞장을 섰다.
“......!”
약제실에서 약누룩을 받아든 윤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산해경 기준 분석표에 中上으로 잡혔다. 그것은 곧 최상급이라는 의미였다.
“그럼 혹시 산자고는?”
“있죠.”
“사향은?”
“없죠.”
“그렇죠?”
“그렇잖아도 사향 취급 약재상에 주문은 넣어두었습니다. 필요하면 지급으로 보내라고 할까요?”
“그래주세요. 최상품으로 말입니다.”
“하핫, 그건 걱정 마세요. 거래 튼 약재상 홍 사장에게 어제 전화가 왔는데 방송 봤다고 반색을 하더군요. 명의 한의사님과 거래하게 되어서 영광이라고 신경 제대로 쓰겠다고 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또 필요한 거 있나요?”
“약재는 다 준비되셨죠?”
“대략 많이 쓰이는 약재는 구비했고... 나머지는 오늘 내일에 맞춰서 계속 들어올 겁니다.”
“좋은 약재를 받아주세요. 제가 탕제 처방을 많이 낼 겁니다.”
“당연하죠. 한의원에서는 탕제가 돈을 법니다. 침구만으로는 이 규모 한의원 운영하기 힘들어요.”
“돈보다는 더 많은 환자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침으로는 한 사람을 살리지만 약을 개발하면 만인을 살릴 수 있으니까요.”
만인의 명의.
윤도의 신념이 강철처럼 튀어나왔다.
“원장님!”
진경태의 시선이 굳었다. 윤도의 배포에 압도된 것이다.
“놀라시긴요. 아저씨 같은 분을 모셔다가 고작 약이나 달일 줄 아셨어요? 아저씨와 저는 더 큰 길을 가야합니다.”
“허어.”
“같은 질환이라도 환자에 따라 다양한 화제를 낼 겁니다. 그때마다 성분과 구성을 잘 파악해서 약을 다리시기 주시기 바랍니다. 그 데이터가 쌓이면 약제개발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거 피가 확 솟구치는데요? 역시 원장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로군요.”
“방송출연하면서 아이들 진료했는데 느끼는 게 많았습니다. 아이들이라면 침보다도 약이 좋을 거 같아서요.”
“그렇긴 하죠. 아이들은 특히 침이나 주사를 싫어하니까요.”
“그리고 이거 시간 나실 때 좀 볶아주세요. 성분분석은 물론이고요. 구하기 힘든 약재니까 신경 많이 쓰셔야합니다.”
윤도가 내민 건 언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