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수술 같은 거 하신 적 있나요?”
“네. 10년 전에 교통사고가 나서...”
“그 수술로 인해 신장이 약해졌습니다. 탈모도 아마 그 즈음부터 시작되었을 겁니다.”
“맞아요. 수술 그 다음 해부터 머리카락이 가출하기 시작했어요.”
“까만 건 신장의 색입니다. 정수리의 머리카락은 신장과 비장이 주관하지요. 신장과 비장의 기혈이 좋아지면 탈모도 멈추고 머리카락도 나게 될 겁니다.”
“우와. 말만 들어도 좋군요. 하지만 다들 그렇게 말씀하고는 결국 머리카락은... 그래서 실은 이식까지 생각중이거든요.”
“이식도 나쁘지 않지요. 하지만 원인을 잡지 않으면 비싼 돈 주고 머리카락 심어도 다시 빠질 겁니다.”
“......”
“새벽에 일어나 여기까지 왔을 때는 기대감이 있지 않았을까요? 한 번 믿어보시고 정 안 되면 그때 이식하도록 하세요. 이식 자체를 말리지는 않습니다.”
환자는 결국 침구실 침대에 누웠다.
탈모...
털이 빠지는 증세, 그 중에서도 특히 머리카락이다. 인간의 몸에서 나는 털의 총칭은 모발이다. 여러 부위에서 털이 나다보니 이름도 따로 있다.
[머리카락-발.]
[눈썹-미.]
[턱수염-수.]
[구레나룻-염.]
[콧수염-자.]
[사타구니-음모.]
[종아리-경모.]
[겨드랑이-액하모...]
이들 중 턱수염과 구레나룻을 합쳐 수염이라고 한다.
털을 주관하는 부위도 전부 다르다.
[머리카락-심장.]
[눈썹-간.]
[턱수염-신장 소장.]
이렇게 부위별 소관이 다르기에 머리카락과 눈썹, 턱수염 등은 한꺼번에 하얗게 쇠지 않았다. 궁금하면 지금 확인해 보시라. 백발의 어르신 중에도 눈썹 까만 사람이 많다.
또한 고환을 제거하면 턱수염이 나지 않는다. 환관이나 내시들이 수염이 나지 않는 까닭이다. 반대로 여자의 몸으로 턱수염이나 콧수염이 나면 월경이 불규칙하거나 불임증일 수 있다.
털은 40대가 되면 하얗게 쇠기 시작한다. 사계절로 치면 가을이 온 것이니 피할 수 없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이때 혈기를 보하면 흰머리 방지에 큰 도움이 된다.
위에서 분명 머리카락의 주관 장기는 심장이라고 했지만 ‘탈모는 신장’이 약해짐으로써 발생한다.
이 환자의 혈자리는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넉넉하게 장침을 넣었다. 신주혈을 시작으로 심수, 비수, 신수혈을 지나 중완과 황수, 곡지와 족삼리, 태계혈까지 장침을 세웠다.
기혈의 조화는 황수혈에서 맡았다. 원래도 신경에 속해 신을 좋게 하는 곳이지만 기세가 좋아 장침이 꽂힌 혈자리를 호령할만 했다.
“머리카락 보세요.”
발침을 하고 손거울을 건네주었다. 남자가 머리카락을 보았다. 아까보다는 검은 빛이 맴돌았다.
“기분이 그런 건지 모르지만 정수리도 근질근질한데요?”
남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내원 예정일을 잡아주고 신장과 비장을 보하는 약재를 처방해주었다.
“왜 이렇게 신장이 중요할까요?”
촬영 말미에 인터뷰 질문이 나왔다.
“사람 몸에서 혈액을 정화하는 장기는 두 개가 있습니다. 바로 폐와 신장입니다. 하지만 폐에서 하는 일은 가스 정화 뿐입니다. 나머지 모든 노폐물은 신장이 걸러냅니다. 물론 피부에서도 일부 돕기는 하지만 신장이 메인이죠. 그래서 신장이 중요합니다. 생수의 여과지 같은 것이죠. 여과지가 망가지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좋은 원수를 취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장에 고장이 생기면 혈액이 더러워지고, 그렇게 되면 인체에 어떤 일이 생길 지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윤도의 답은 명쾌했다.
하루가 지나갔다.
정신이 없었다. 점심시간은 줄였고 퇴근 시간은 늘였다. 실장에게 지시해 연장 근무시간을 기록하도록 했다. 직원들 월급계산은 확실한 게 좋았다. 어물쩡 30분, 어물쩡 1시간. 그렇게 시켜먹으면 종국에은 불만만 나을 뿐이다.
“수고하셨어요.”
간호사 둘이 퇴근을 했다. 피곤하지만 행복한 얼굴이었다. 만족도 때문이었다. 병이 나은 환자가, 확 좋아진 손님이, 윤도는 물론이고 직원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했다. 덤덤하게 왔다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가는 환자들. 그런 병원이나 한의원에서는 느낄 수 없는 보람이었다. 첫날 공식 진료는 이것으로 마감이었다.
하지만!
윤도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TS전자의 정 대리가 주인공이었다. 덕분에 실장 정나현은 남았다. 감투를 쓴 덕분에 책임감도 가져야 하는 그녀였다.
**
“아저씨!”
윤도가 약제실로 들어섰다. 탕약 냄새가 등천을 했다. 오늘 하루 진경태도 얼마나 바빴을지 짐작이 갔다.
“퇴근 안 하세요?”
“예약환자가 있어서요.”
“그럼 이 약이 필요하겠군요?”
진경태가 약탕기를 가리켰다. 황토로 빚어진 약탕기에서 아련한 향이 배어나왔다.
“으음... 냄새 한 번 신묘한데요?”
“왜 아닙니까? 그 녀석은 주변 약탕 냄새를 다 밀어내더라고요. 가히 신약(神藥)급입니다.”
“그래요?”
“그나저나 오늘처럼 환자가 밀려들면 원장님이 골병 들지 않을까요?”
“아저씨는 아니고요?”
“저야 뭐 워낙 강골인데다 좀 아프다고 해도 원장님 장침이 있으니 걱정 없지만 원장님은 중이 제 머리 못 깎잖아요?”
“그럼 아저씨가 좋은 약재 골라서 다려주시면 되잖습니까?”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이제 좀 쉬세요. 예약환자 진료 마치고 식사 같이 해죠.”
“그러죠.”
진경태가 영약을 내밀었다.
최악의 모르핀 중독자...
영역과 함께 장침을 챙겼다. 윤도의 시선이 장침에 쏟아졌다. 손가락이 후웅 반응을 했다.
쫄 거 없어.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는 거야.
온몸을 휘도는 맹렬한 긴장감. 윤도는 그걸 즐겼다.
역사가 된 개업식-3
역사가 된 개업식-3
‘온다!’
윤도의 시선은 먼 차도에 있었다. 저만치 구급차량이 보였다.
끼익!
차량이 주차장에서 멈췄다.
“채 실장님.”
인솔 책임자는 오 이사가 대표로 있는 오라개발의 엄 부장이었다. 그 역시 이라크 현장에 있었던 사람. 그러나 먼저 출발하는 바람에 폭격을 피해 큰 부상은 없었다. 옆에는 TS전자 이진웅이 동행하고 있었다. 이 회장의 특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고생 많으시네요.”
윤도가 인사를 했다.
“고생은요. 요즘 채 선생님 침술 뉴스 덕분에 하루가 즐겁습니다.”
이진웅이 화답하는 사이에 환자가 내렸다.
“이쪽으로...”
정나현이 구급 침대를 안내했다. 환자는 침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정 대리 조모십니다.”
이진웅이 동행한 할머니를 가리켰다. 할머니는 성큼 다가와 윤도 손을 잡았다. 말 없는 얼굴에서 눈물부터 쏟아졌다.
“엄 부장님 말이 정 대리가 일찍 부모를 잃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답니다. 할머니께서 이 일에 충격을 먹어 그만 실어증에...”
‘실어증?’
“선생님만 믿습니다.”
이진웅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까지도 할머니는 윤도 손을 놓지 않았다.
“걱정마시고 기다리세요. 손자분 일어나게 될 겁니다.”
윤도가 할머니를 위로했다. 할머니는 그제야 손을 놓아주었다. 멋대로 떨어진 눈물은 이미, 그녀의 목덜미까지 내려온 후였다.
티슈를 몇 장 건네주었다. 그런 다음 침구실로 향했다. 동요하지 않았다. 한의사의 본문은 치료지 보호자와 함께 우는 게 아니니까.
남자, 32세, 정기택.
그는 눈을 뜨고 있었다. 초점은 없었다. 눈 위로 손바람을 일으켜보지만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모르핀 중독...’
윤도는 그 단어를 내려놓았다.
‘병명에 휘둘리지 말 것.’
진맥에 앞서 신앙처럼 되뇌던 신념이었다. 정나현이 의자를 권했다. 옆에는 진경태도 와 있었다. 윤도의 신침을 믿는 멤버들. 하지만 환자는 특급병원도 포기한 최악의 모르핀 중독자였다.
“진맥 좀 하겠습니다.”
환자에게 정중히 통보했다. 당연히, 환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손목을 잡았다.
“......”
맥이 제대로 뛰지 않았다. 실망하지 않았다. 목의 인영맥으로 옮겨갔다. 세맥이 나왔다. 그나마 좀 나았다.
‘사막...’
겨우 손끝으로 옮겨온 맥으로써 환자의 상태를 가늠했다. 첫 느낌은 사막이었다. 그것도 스산하고 마른 바람이 부는 사막... 황량의 극치였다.
사막 다음에 온건 ‘다운(Down)’이었다. 추락이다. 느리게 느리게, 그러면서 아래로 아래로. 마치 몸무게의 두 배 쯤 되는 추를 달고 심연의 바다로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후우!’
한숨을 쉬며 인영맥을 놓았다. 모르핀이 골수까지 들어간 상황. 이대로는 전체 혈자리 파악이 쉽지 않았다.
“침통 좀 집어주세요.”
윤도가 정나현에게 말했다.
뽑아든 장침은 거궐혈로 들어갔다. 심장의 모혈이었다.
<새로 고침>
그걸 노리는 것이다.
장침을 꽂고 진맥을 새로 했다. 큰 변화가 없었다. 정나현에게 지시해 발 마사지에 들어갔다. 심장의 문제는 발과 통한다. 만보 정도 걸어주면 심장이 좋아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후우!’
그래도 진맥은 가물거렸다. 그렇다고 포기할 윤도는 아니었다. 두 번째 장침은 소장의 모혈인 관원혈로 향했다. 관원혈과 거궐혈은 표리관계에 있다. 둘은 안팎의 관계로써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룬다.
하지만!
그 또한 큰 효험을 주지 않았다.
별 수 없이 환자의 옷을 다 벗겼다. 윤도가 뽑아든 건 13개의 장침이었다. 폐의 모혈인 중부혈을 시작으로 오장의 모혈에 장침을 더했다. 오장의 기를 최대한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다음으로 궐음수, 담수, 위수, 삼초수 등을 모혈을 빠짐없이 찔렀다. 진맥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모혈 자리가 틀릴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제발...’
각오를 다지며 재진맥에 돌입했다.
“......!”
윤도의 손 끝에 감각이 왔다. 희미하지만 짜릿했다. 저 심연의 반응이었다. 정신을 모으고 집중했다. 진맥을 바탕으로 몇 개의 장침을 뽑아 혈자리를 수정했다. 환자의 혈자리는 인체 비례와 빗나간 곳이 많았다. 모르핀 중독으로 인한 부작용이었다.
‘오케이!’
그제야 맥이 제대로 잡혔다. 정상인에 비하면 턱도 없지만 윤도의 손가락이 감지할 정도는 되었다.
‘거궐, 중부, 관원, 그리고...’
축빈혈.
네 개의 답이 윤도 머리로 들어왔다. 윤도가 장침을 뽑기 시작했다.
[축빈혈.]
족소음의 축빈혈... 대개 발뒤꿈치에서 무릎 사이에 위치한다. 환자의 혈자리는 무릎 쪽으로 잡았다. 원래의 혈자리보다 밀린 측면도 있지만 그곳이 포인트로 보였다.
그제야 윤도가 약병을 꺼내놓았다. ‘언산’이 들어간 영약용액이었다. 첫 장침에 그걸 묻혔다. 장침은 거궐혈부터 뚫었다. 절반 쯤 침을 넣고 잠시 멈췄다. 다시 절반을 더 들어갔다. 거기서부터 피를 말리는 미세조정이 시작되었다. 영약과 기혈의 포인트를 맞추려는 윤도였다.
0.1mm...
0.1mm...
0.1mm...
윤도의 손가락은 초정밀 작업을 하는 테크니션의 그것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렇기에 옆에서 지켜보는 정나현과 진경태 역시 침조차 넘기지 못했다.
‘여기...’
겨우 포인트가 나왔다. 거기서 침을 돌렸다. 모르핀아, 네 숨통을 조일 저승사자가 왔노라. 그 선전포고였다. 중부혈과 관원혈자리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이미 포인트 감을 맛본 손이었으니 거궐혈에서 뻗어온 영약의 기세를 이어주면 되었다.
마지막 침이 문제였다. 이제 화룡점정을 찍어야하는 것이다.
[해독의 명혈 축빈혈.]
축빈혈은 매독이나 약독을 없애는 데 명혈이었다. 웬만한 독이라면 윤도의 장침 한 방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사실 모르핀 중독도 그랬다. 하지만 이 경우처럼 최악의 중독은...
스슥!
마침내 윤도의 손이 움직였다. 후끈 달아오른 화침이었다. 장침은 종아리 위의 축빈혈에 제대로 들어갔다. 윤도의 얼굴은 앞선 시침보다도 더욱 경건해 보였다. 영약의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해결이 아니었다. 적의 심장부, 간신히 들어왔지만 마지막 관문 앞에 멈춘 것이다.
이 축빈혈에서 모르핀 중독을 박살낼 수 있는 비밀번호를 풀어야했다. 모르핀이 온몸에 새겨놓은 중독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비밀번호...
침을 놓은 윤도가 두 개의 장침을 더 뽑아들었다. 두 침 역시 영약을 묻혀 축빈혈에 넣었다. 축빈혈에는 세 개의 장침이 삼향투자침으로 들어갔다. 그 마지막 침이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
덜컥!
윤도 손 끝에 느낌이 올라왔다. 느닷없이 등짝을 후려치는 듯 한 느낌이었다.
‘왔다!’
피가 확 끓어올랐다. 대어를 낚는 확신이었다. 동시에 환자가 꿈틀 움직였다.
“원장님!”
잠시 나갔다 들어온 정나현이 소리쳤다.
“쉿!”
윤도가 손가락으로 ‘조용’ 사인을 냈다. 윤도가 손을 들었다. 그 손을 환자의 눈 위에서 흔들었다.
“정기택 님.”
“......”
“제 손 보이세요?”
“......”
“안 보여요?”
“보...”
환자 입에서 첫 마디가 나왔다. 한국으로 이송된 후로 비명 비슷한 소리 외에는 말을 못하던 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