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님.”
윤도가 인사를 했다.
“어서 와요. 채 실장.”
김 전무가 반가이 맞았다. 엄 부장도 인사를 해왔다.
“쉬는 날 나오게 해서 미안하군.”
“별 말씀을... 그러는 전무님은 왜 나오셨습니까?”
“나야 오 이사에게 책임감도 있고 여기 직원 아닌가?”
“저도 직원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윤도가 응수했다. TS전자 의무실장. 비상근이지만 틀림없는 직함이었다.
“그렇군. 그럼 휴일근무 수당만 챙겨주면 될 일인가?”
“그래주시면 고맙죠.”
“가세.”
김 전무가 앞장을 섰다. 의무실로 가는 길은 이제 낯설지 않았다. 몇 몇 직원들이 인사를 해왔다. 출근한 직원들이 여럿이었다.
“......!”
의무실에 들어서자 오 이사의 아내가 발딱 일어섰다. 그녀는 초등학생 두 딸을 데리고 있었다. 벌써 윤도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마침내 그 분이 오셨습니다.”
김 전무의 말에는 긍지가 서려 있었다.
“선생님!”
오 이사 아내가 고개를 숙였다. 두 딸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남편을 구해주세요.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세 사람의 눈동자가 합창을 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염려치 마세요.”
가족들을 위로하고 가운을 입었다.
끼익!
치료실 문이 열렸다. S대학병원이나 SS병원 못지 않은 시설을 자랑하는 TS전자 의무실이었다. 환자는 자동침대에 있었다. 그를 간호하던 간호사가 자리를 비켰다.
“......”
첫 인상은 좋지 않았다. 얼굴이 아니라 상태였다. 차분하게 진료차트와 진단서를 집어들었다. 극한의 저혈압이 먼저 눈을 차고 들어왔다. 의식 또한 명료하지 않아 무의식과 의식을 오가고 있었다.
“나흘 전부터 혈압이 더 떨어지고 호흡이 나빠졌다고 하는군.”
옆에 선 김 전무의 말이 무거웠다.
진맥부터 했다. 맥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 정 대리와는 또 다른 경우였다. 정 대리의 맥이 좁은 사막의 모래알이었다면 오 이사의 맥은 망망대해의 습기 한 방울이었다. 동시에 위태로웠다. 모르핀의 대표적인 부작용을 다 갖춘 것이다.
의식불명, 발한, 발열, 호흡곤란, 변비...
이대로 두면 얼마 가지 못할 생명 같았다.
‘후우!’
겨우 맥의 흔적을 찾아낸 윤도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한의사로서 만나기 원치 않는 맥이 보였다. 단단한 유리알이 굴러다니는 듯 한 맥... 진심맥이 되기 직전의 맥이었다. 이 맥이 진샘맥으로 변하면 환자는 죽는 것이다.
서둘러야했다.
<새로 고침>
정 대리에게 쓴 진단의 길을 참고했다. 심장의 모혈인 거궐혈. 오 이사의 인체 비례를 따져 거궐혈자리를 찾았다.
‘후우!’
숨 고름과 함께 윤도의 첫 장침이 들어갔다. 하지만...
툭!
장침이 부러져 버렸다. 분명 왼손으로 주변을 충분히 풀어준 상태. 그런데 느닷없는 경직감이 나온 것이다. 살짝 자리를 비껴 다시 시도했다. 침이 겨우 들어갔다. 이어 두 개의 장침이 더 보태졌다.
‘쉣!’
다시 소리 없는 낭패가 밀려나왔다. 혈자리가 아니었다. 아니, 혈자리라고 한들 알 도리가 없었다. 완전하게 다운된 경맥과 낙맥 등이 신호를 주지 않는 것이다. 납작 엎드린 혈자리. 윤도의 장침이 凸라면 혈자리는 凹이다. 들어가면 반응하고 결합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작용을 해야 한다. 그런데 묵묵무답...
한 번 더 시도를 했다. 이번에는 관원혈이었다. 이번에는 영약 언산을 묻힌 약침이었다. 두 혈자리는 표리관계에 있으니 관월혈을 잡으면 거궐혈의 자리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쉿!’
윤도는 다시 헛발질을 할 뿐이었다.
물을 한 컵 마시고 다리를 살폈다. 이렇게 되면 축빈혈이라도 잡아야했다. 주변의 기세고 뭐고 다 차치하고 본진에 한 방 먹이려는 것이다. 원인부터 잡기가 곤란하다면 병세 자체를 공략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
축빈혈도 헛발이었다. 축빈혈자리로 예상되는 곳을 기점으로 세 개의 약침을 넣었지만 반응이 오지 않았다.
고요...
그것도 위태로운 고요...
오 이사 몸의 상태였다. 바닥난 체력과 바닥난 혈압... 나날이 사위어가는 기혈...
‘설마...’
골똘하던 윤도 뇌리에 벼락 하나가 내리꽂혔다.
‘은혈(隱穴)?’
생각만으로도 윤도의 피가 서늘해졌다.
은혈...
단어 그대로 숨은 혈자리다. 혈자리의 기묘함은 기의 조절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마다 다른 혈자리. 표준을 정해 놓았다지만 장담할 수 없는 혈자리에는 몇 개의 난공불락 혈자리가 전하고 있었다.
[존재하되 잡히지 않는 은혈(隱穴)]
[강철처럼 단단해 침을 박살내는 철혈(鐵穴)]
[원래의 혈자리에서 떠 있는 부혈(浮穴)]
[그리고 진짜 혈자리처럼 보이는 가혈(假穴)]
흔히 4대 기혈(奇穴)이니 8대 기혈이니 불리는 희귀 혈자리. 이제 보니 오 이사의 혈자리가 그 난공불락의 하나인 은혈이었다.
‘크헐!’
오싹한 소름과 함께 전율이 스쳐갔다. 대충 덤벼서 될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어떻게 혈자리를 찾아야할까? 의서들을 곰곰 떠올렸다. 내경부터 침구집성방까지 더듬지만 기혈에 대한 언급만 나오지 은혈 취혈법은 없었다. 이건, 순전히 윤도 힘으로 해결해야 할 난제였다.
장침을 몽땅 꺼내놓았다. 은혈이라고 해서 혈자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혈자리 하나를 찾으면 그걸 기준으로 삼을 수 있었다.
작심하고 찾아나선 혈자리는 역시 거궐혈이었다. 조금 전 넣었던 혈자리를 기준으로 계산했다. 환자의 몸, 모르핀 중독 기간, 그리고 그로 인해 변화된 환자의 건강상태... 그런 다음에야 침을 넣었다. 윤도는 손가락의 말단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하나.
둘.
셋...
다섯 침이 더 꽂히고서야 미세한 반응을 받았다.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혈자리 위치는 맞았다. 하지만 혈자리로 작용하지 않았다. 은혈이기에 그런 것이다.
장침 두 개를 더 꺼내 삼향으로 다향자침했다. 장침이 그물처럼 들어가지만 혈자리는 복지부동이었다.
복-지-부-동!
은혈(隱穴)을 잡아라-2
남은 언산 일부를 오 이사의 입으로 흘려 넣었다. 얼굴빛이 조금 나아지나 싶었지만 그것 뿐이었다. 언산의 복용법 때문이었다.
<피가 온몸을 도는 시간의 100배를 더해 6회 나눠 마시기.>
그러자면 정량이 필요했다. 하지만 언산의 꽃이 다시 피려면 시간이 필요했으니 그걸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늦은 건가? 원래 이어질 말은 그거였다. 하지만 상상을 끊어버렸다. 포기란, 포기하는 순간 현실이 되기 때문이었다.
“어려운가?”
뒤쪽에서 관망하던 김 전무가 무겁게 물어왔다.
“오래 걸릴 것 같으니 나가 계시죠.”
윤도의 대답은 묵직했다. 질환과의 전장에서 최전선에 선 야전사령관. 그 무게감과 비장함이 김 전무를 의무실 밖으로 밀어냈다. 혼자 남아 오 이사를 바라보았다.
정 대리는 살렸다. 같은 모르핀 중독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주가 달랐다. 면역체계를 비롯해 체질이 다른 것이다.
산해경...
오늘 내일, 다른 영약을 찾아볼까?
유혹이 왔다. 언산이 아니면 다른 영약에 기대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산해경을 다 뒤지면 또 다른 영약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건 혈자리를 잡지 못해 대처할 수 없는 상황. 이렇게 꼬리를 내리는 건 한의사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지.’
고개를 젓고 다시 집중했다.
모르핀...
팩트는 모르핀 중독이었다.
중독이라는 게 그랬다. 비근한 예가 많았다. 진달래꽃술이 그렇다. 많은 사람이 아는 것과 달리 진달래꽃도 철쭉의 주요 독성인 GTX라는 독성물질이 있다. 이는 사약재료로 잘 알려진 성분이다. 이 술을 나눠먹어도 병원에 실려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절로 깨어나는 사람도 있다.
모르핀의 경우에도 동물에 따라 다르다. 인간에게는 도취작용을 안겨주기만 고양이나 말에게 투여하면 극도의 흥분상태를 만든다. 에페드린의 경우, 황인종에게는 작용이 약하고 흑인에게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반면 백인들은 센시티브하다.
상상 끝에 단어 하나가 끌려왔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다스린다는 것으로 식상할 정도로 유명한 말이었다. 한방에서는 그 말을 이독제독(以毒制毒)으로 바꿔 치료에 응용해왔다. 현대에서는 주로 암 치료에서 많이 쓰였으니 복어 독, 전갈, 부자, 옻 등이 대표적이었다.
‘부자(附子)’
윤도 뇌리를 파고 든 건 그 이름이었다. 부자는 열이 많다. 돌아다니는 성질이다. 멈추기를 싫어하며 차가운 데서 양기를 돌리는 작용이 강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삼국지의 장비와 비슷했다.
‘엇!’
생각 속에서 또 하나의 약제가 꼬리를 물었다. 바로 웅황이었다. 그 또한 독을 제거할 수 있는 효력을 가지고 있는 약재였다.
윤도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수신자는 진경태였다.
통화를 마치고는 오 이사의 발을 주물렀다. 그저 주무르기만 했다. 오랜 긴장감을 이기지 못한 김 전무가 의무실 문을 열었다. 윤도의 모습이 그 눈에 들어왔다. 김 전무는 문을 닫고 나왔다.
“후우!”
밖으로 나온 김 전무가 담배 연기를 뿜었다. 끊은 지 2년 만의 흡연이었다.
“전무님...”
오라개발 엄 부장이 다가왔다.
“왜 그러나?”
“어렵...습니까?”
엄 부장의 목소리도 무거웠다.
“한 대 피려나? 나도 얻은 건데?”
김 전무가 담뱃갑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오 이사...”
“......”
“엄 부장도 이라크 현장에 있었지?”
“죄송합니다. 제가 모시고 나왔어야했는데...”
“누가 보면 엄 부장은 왜 안 다쳤냐고 질책하는 줄 알겠군.”
“오 이사님이 마지막까지 현장을 단속하고 나오시는 통에...”
“저 양반 스타일이잖나? 일과 부하직원 챙기기. 그렇기에 회장님도 저 양반 내세우면 믿음이 생기는 거고.”
“......”
“담배연기 말일세...”
김 전무의 눈은 자신이 뿜어낸 담배연기에 꽂혀 있었다.
“......?”
“이게 처음 내뿜으면 굉장히 자욱하지만 서서히 흩어지지.”
“예...”
“오 이사의 의식도 이렇게 될 걸세. 지금은 안개 속에 있지만 곧 다 사라지고 명쾌해지는... 나는 그렇게 믿네.”
“전무님.”
“지금 저 안에 있는 한의사가 누군 줄 아나?”
“채윤도라고...”
“이름 말고 저 사람의 실력 말일세.”
“......”
“아무도 손 못 쓰는 회장님 따님의 병을 고쳤고, 이진웅 부장의 멈춘 심장도 채 실장이 살려냈네.”
“......”
“그리고... 중국 공장 건설문제가 어려웠을 때 천하의 비방으로 중국 상무위원의 질환을 고쳐 해결해주었고 정 대리도 일상으로 돌려놓았지.”
“......”
“엄 부장, 자네 말일세, 혹시라도 가족들 앞에서 절대 낙담한 표정을 비춰서는 안 되네. 그건 우리 채 실장에 대한 모욕이야.”
“전무님...”
“채 실장은 할 수 있네. 내가 보증할 테니 그렇게 아시게.”
“......”
“하지만 만약... 만약 말일세...”
담배를 비벼 끈 김 전무가 단호하게 뒷말을 이어놓았다.
“채 실장이 못하면 하느님도 못 하네!”
그 사이에 진경태가 도착했다. 그는 의무실로 달려가 상자 하나를 내려놓았다. 윤도는 그때까지도 오 이사의 발을 지압하고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윤도가 답했다.
“괜찮습니까? 원장님?”
진경태가 물었다. 윤도의 얼굴은 한의원을 나서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힘들어 보여요?”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지금 원장님 얼굴 차마...”
“그렇다고 이 환자만이야 하겠어요?”
윤도가 웃었다. 진경태는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완전한 압도였다. 윤도는 이미 환자 치료에 무아지경을 보이고 있었다.
딸깍!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건 부자와 미량의 웅황이었다.
‘왔구나.’
양이 많은 부자용액부터 집어들었다. 부자는 독성이 강하다.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주요 부작용만 해도 안구 이상, 신경계통, 출혈증, 손발이 차가워지는 궐냉증 등이 꼽힌다. 그렇기에 한의사라고 해도 주의를 다 해야 하는 약재였다.
오늘 윤도가 선택한 건 법제를 마친 놈이었다. 하지만 기본 법제만 시행해 독성을 많이 낮추지는 않은 부자를 염두에 두었다. 강력한 독성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