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265)

장침을 뽑았다. 부자용액을 발랐다. 생약학적으로 독성의 성분은 Aconitine이다. 적당히 잘 쓰면 강심 및 혈압상승, 신진대사 촉진, 혈관확장에 유용하다.

‘부탁해.’

윤도의 왼손이 다시 거궐혈자리로 추정되는 주변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긴장을 풀었을까? 왼손가락 끝에 땀이 맺힐 때 쯤 윤도의 장침이 거궐혈자리를 찾아들어갔다.

장비가 귀신을 쫓는 심정, 그 심정이 윤도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게 또 의술의 자세였다. 티끌만한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놓을 수 없었다.

“......!”

첫 장침은 매가리가 없었다. 윤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혈자리. 그러나 제 아무리 은혈이라고 해도 혈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길까?

여기가 아닌가?

그 마음을 비웠다. 다시 오 이사의 인체비례를 따졌다. 날씨와 체온도 감안했다. 그렇게 계산한 판단을 믿었다. 그 자리에 장침을 넣었다. 부자를 듬뿍 묻힌 약침이었다.

반응 무.

두 번째 장침은 이향투자침으로 넣었다.

반응 무.

또 하나의 장침을 꺼내들었다. 이번에는 미량의 웅황 용액을 묻혔다. 그 장침은 이향투자로 들어간 침 가운데에다 넣었다. 삼향투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

윤도 손 끝에 미미한 반응이 닿았다. 숨을 멈춘 윤도가 마지막 장침을 조심스레 돌렸다. 그러자 손 끝으로 생명의 신호가 옮겨왔다. 마치 공기가 낚시줄을 물듯 미세한 느낌이었다.

‘여기다.’

윤도 피가 확 끓어올랐다. 마침내 감을 잡은 것이다. 양 옆으로 들어간 두 침을 뽑아 위치를 수정했다. 혈자리에서 0.5mm 정도 어긋난 자침이었다.

후웅!

혈자리가 반응해 왔다. 윤도가 그걸 놓칠리 없었다. 정신없이 장침을 넣었다. 장침마다 부자용액을 묻혔다. 거궐혈 위의 구미혈, 아래의 상완과 중완혈... 그렇게 확보된 혈자리를 따라 장침을 꽂아나갔다. 가다보니 임맥 거의 전체에 침을 넣은 윤도였다.

임맥은 몸의 앞 중앙부를 흐르는 생명의 길이다. 큰 대문으로 통하는 거궐혈을 중심으로 가운데 마당으로 불리는 중정혈, 자줏빛 궁전 자궁혈, 인체의 얼굴이라는 천돌혈...

다음으로 경외기혈 몇 자리를 확보했다. 측면 지원을 하려는 것이다. 그 전략이 먹혔다. 경외기혈 다섯 자리에 장침을 넣자 임맥의 문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게 신호였다. 인체의 작용은 신비 그 자체였으니 한 작용은 다음 작용을 도왔다. 마침내 몸의 뒷부분에 속하는 독맥도 따라 열렸다.

‘아아!’

윤도는 또 한 번 감탄하고 말았다. 침을 잡은 손끝을 따라 전해오는 인체 혈자리의 점등. 점등, 점등... 그건 불 꺼진 지구에 전기를 밝히는 것과도 같은 감격이었다.

화악!

마지막 혈자리까지 기혈이 닿고서야 윤도가 진맥을 잡았다.

‘진심맥...’

어느새 코앞까지 내려와 있었다. 오 이사의 심옹도 이제는 느껴졌다. 심옹은 심장 쪽에 살이 부어오른 질환이다. 평소에 과음을 했거나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면 생길 수 있는 병이었다. 하지만 혈자리를 확보한 윤도, 이제는 거칠 게 없었다.

거궐혈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기세를 보았다. 부자의 약성은 쓸만했다. 심장이 벌떡거리고, 혈압이 오르고, 기혈순환이 빨라졌다.

윤도의 장침도 다시 가세했다. 정 대리처럼 모혈을 잡았다. 그런 다음 전체의 기혈조화를 살핀 후에 축빈혈을 확보했다.

독을 없애는 명혈 축빈혈. 이번에는 언산과 웅황의 약침을 차례로 찔렀다. 이독제독으로 들어간 독 부자. 병을 주었으니 약을 주어 내치는 것이다.

‘부탁한다.’

윤도의 손이 장침 끝을 돌리기 시작했다. 안정되게 들어간 장침은 혈자리 안에서 윤도의 마음을 받았다.

조금...

조금 더 조금...

몇 번의 조율 끝에 포인트를 잡았다. 나머지는 자동이었다. 혈자리를 차고 들어간 두 영약은 장침의 기세를 등에 업고 오 이사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찬란한 번짐이었다.

그제야 윤도는 길고 긴 날숨을 쉬었다. 몸이 축 늘어졌다.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이제 하늘에 맡길 일이었다.

한 시간...

해독 때문에 조금 긴 시간을 투자했다.

윤도는 앉은 채로 환자를 보고 있었다. 세팅한 타이머가 울리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발침을 했다. 본능적으로 환자를 보았다. 아직은 변화가 없었다.

‘한 번으로는 역부족인가?’

병은 대개 간 길을 돌아온다.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일단 혈자리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고무적인 윤도였다. 그러다 윤도가 막 일어서려할 때였다. 뭔가가 윤도 손에 닿았다.

‘응?’

무심코 시선이 내려갔다. 거기서 시선이 굳어버렸다. 환자의 손이었다. 그 손이 윤도 손 위에 있었다. 무의식에 움직인 게 아니라... 윤도 손을 잡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걸 실감이라도 시키려는 듯 오 이사의 목소리가 윤도 귓청을 때렸다.

“물... 좀...”

“......?”

“물...”

윤도는 보았다. 분명하게 움직이는 환자의 입술... 분명하게 들렸다. 환자의 목에서 나오는 목소리...

‘오, 하느님.’

물 줄 생각도 잊은 채 윤도는 두 손을 모아쥐었다. 마침내 또 한 번의 기적을 연출하는 윤도였다.

“아빠!”

“여보!”

가족들이 감격의 절규를 터트릴 때 윤도는 바깥의 나무 아래 있었다. 울긋불긋한 나무잎에서 이는 바람이 시원했다. 큰 보람을 이루고 나온 때라 산해경의 영목 ‘난’ 아래 서있는 것 같았다. 이빨이 나는 영약을 준 나무...

하긴 산해경 속에는 ‘불사약’도 있었다. 그러나 윤도를 거부했던 그 불사약...

불사약이라는 게 정말 불사(不死)인지, 아니면 장수인지는 모르지만 오늘 같은 순간에는 늘 아쉬움이 남는 윤도였다.

“아빠, 사랑해. 나 이제 아빠 말 잘 들을게.”

“나도. 심술 안 부리고 언니처럼 공부 잘 할게.”

두 딸의 목소리가 창을 타고 나왔다.

나무는...

알까?

지금 이 마음...

윤도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싱그런 잎사귀를 하늘거리는 나무. 어쩌면 나무처럼 윤도의 의술이 안으로 한 바퀴 테가 생기는 날이었다. 나이테처럼 의술테가...

“원장님.”

진경태가 다가왔다. 아까 약을 가져와서는 돌아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안 가셨어요?”

“미안합니다.”

“뭐가요?”

“아까 보니까 신이 내려와도 불가능한 치료 같아서 조금 하다 말겠거니 하고 모시고 가려고 기다렸는데... 제 생각이 역시...”

“맞아요.”

“네?”

“아저씨가 왔을 때까지는 분명 그랬어요.”

“원장님.”

“저 애들 소리 들리세요? 아마 그때부터 애들 기도가 더 간절해졌을 거에요. 그게 환자를 깨운 걸 테죠.”

“원장님...”

“저는 그저 장침과 약을 보탰을 뿐이에요. 인명은 재천이지 한의가 좌우하는 게 아니잖아요?”

“원장님만은 인명이 한의라고 해도 됩니다. 어쩌면 죽은 사람도 살릴 것 같은 명의입니다.”

“별 말씀을... 아저씨가 제 시간에 와준 공이 크지요.”

“이제 마음 좀 가셨으면 의무실에 가보시죠? 여기 높은 분들이 찾는 것 같던데.”

“그래요? 고맙습니다.”

윤도가 걸음을 떼었다. 진경태는 말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의사...

진경태에게 있어 한의사란 냉소의 대상이었다. 쥐뿔도 모르면서 폼만 잡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윤도는 그들과는 레벨이 달랐다.

‘늙으막에 인복이 있을 거라더니...’

한의원을 등지고 시골행을 택할 때 역전에 돗자리를 편 돌팔이 역학자에게 들었던 말. 그 말이 생각나 혼자 웃는 진경태였다.

죽은 자의 소원.

죽은 자의 소원.

“많이 드세요. 오늘은 제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나왔습니다.”

저녁 시간, 질박한 한정식집에서 이진웅이 말했다. 앞에는 윤도가 앉아있었다.

“쉬는 날 많은 민폐를 끼칩니다.”

“민폐라니요 아버지도 오시려고 했는데 호주 총리와 약속이 잡혀서요.”

“예...”

윤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호주 총리가 입국해 있었다. 뉴스에서 들었지만 흘려버린 윤도였다.

“실은 부용이도 온다는 걸 제가 강제로 막았습니다.”

“예...”

“아무튼 굉장합니다. 저는 선생님 볼 때마다 믿을 수가 없군요.”

“뭐가 말입니까?”

“뭐든지 다요. 제 목숨을 구한 것부터 부용이, 상무위원 이빨, 그리고 오늘 오 이사님 살려낸 것까지 말입니다.”

“오 이사님은 죽었던 게 아닙니다.”

“하지만 죽은 거나 다름 없는 목숨이었죠.”

“그건...”

“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채 선생님에게서 배우라고. 불치나 난치병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도전하는 정신. 그 정신이 있기에 높은 성취를 이루었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거야 말로 이 시대의 기업가들이 갖춰야할 덕목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그냥 한의사의 기본일 뿐입니다.”

“실은 제가 두 가지 청탁이 있어 김 전무님을 못 오시게 했습니다.”

“청탁이라고요?”

“하나는 사내 중간간부들 강연입니다. 제가 과부차장들 재교육 프로그램에 관여하고 있지 않습니까? 언제 한 번 오셔서 강연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무슨 자격으로...”

“왜 이러십니까? 선생님이 자격 없으면 저희 회사에 강연 나올 사람 없습니다.”

“강연료는 많이 챙겨주실 건가요?”

윤도가 웃었다.

“허락하신다면 다섯 장까지는 준비하도록 지시하겠습니까?”

“저한테 5백만 원이나 쏘신다고요?”

“5천만 원입니다만!”

“......?”

윤도 얼굴에서 미소가 가셨다.

5천만원...

보통 재벌기업 강연료는 3백만 원에서 1천만 원 사이가 많았다. 특별한 명사라면 5천만 원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 정도 중량감은 우리나라에 거의 없었다. 그런데 윤도에게 5천이라니?

“농담 아닙니다. 당장이라도 담당 대리 불러서 강연초청서 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정 필요하시면 주제 넘지만 한 번 정도는...”

“고맙습니다. 아버지에게 제 체면이 서겠네요.”

“하지만 멋진 강연은 장담 못합니다.”

“명의열전 보았습니다. 그만큼만 하시면 대박 강연으로 기록될 겁니다.”

“또 하나는 뭐죠?”

“또 하나는...”

이진웅이 잠시 말을 더듬었다. 곤란한 이야기로 보였다. 결명자차를 한 컵 더 마신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사적으로 진료 한 번 부탁했으면 해서요.”

“누구를 말입니까?”

“이게 진짜 어려운 일인데...”

“어차피 꺼낸 말 아닙니까? 해보세요.”

“혹시 광용푸드 지창명 회장님 아십니까?”

‘지창명?’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광용푸드라면 그 또한 대한민국 굴지의 기업이었다. 거기 지 회장은 92세의 고령. 그러나 심장병에 치매 중세까지 겹쳐 한정치산자 이야기마저 나돌고 있는 마당이었다.

“그 분이 제 장인 되십니다.”

“......?”

“그분 또한 거의 식물인간에 가깝죠. 못할 말로 똥오줌 받아내는...”

“부장님...”

“죄송합니다. 아버지께서 행여라도 선생님께 부담이 될까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내 보기가 딱해서 말입니다.”

“사연이나 한 번 들어볼까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이진웅은 또 찻잔을 들었다. 두어 모금을 마신 후에야 사연이 이어졌다. 지창명 회장. 혈혈단신으로 세계적인 푸드기업을 세웠다. 기업가로서 꿈이 있었다.

강남 한 복판에 풍용스카이벨트를 세우는 거였다. 66층짜리 빌딩만 여섯 개가 서는 대공사. 그 빌딩에 직원을 가득 채우는 게 꿈이었다. 그 꿈을 위해 차곡차곡 땅을 사들였다.

인허가가 문제였다. 서울은 하고 많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곳. 인허가를 신청하면 매번 반려가 되었다. 정권이 바뀌는 동안 신청료(?)가 천문학적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10여 년 전에야 겨우 허가를 따내게 되었다. 이때 지 회장의 나이 82세. 현장에서 첫 삽을 떴을 때 중풍을 얻어맞았다. 2년여의 재활을 거치고 나오자 이번에는 심혈관 증세가 찾아왔고 다시 1년 후에는 치매 증세가 겹쳤다.

지창명은 끝났다.

재계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불사신처럼 일어섰다. 때로는 휠체어를 타고, 또 때로는 임원들에게 부축된 채 기공식의 첫 삽을 떴다.

그 타운은 이제야 준공식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은 지 회장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작년부터 완전하게 다운된 육체는, 그를 천하의 지창명이 아니라 추레한 노환의 병자로 만들어버렸다. 숨은 붙어있되 의지와 자아가 없는 허깨비에 불과한 삶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벽에 붙여둔 풍용스카이벨트 조감도를 바라보았다. 의식 없는 사람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밤에 잠들기 전, 그는 말없이 조감도를 바라보며 자장가와 모닝벨로 삼았다.

“아버지, 저거 알아요?”

그때마다 딸이 물었다.

“저거 아냐고? 아버지가 직접 결정한 설계도잖아요?”

딸의 질문은 간절하지만 지창명의 대답은 똥오줌 뿐이었다. 이진웅도 보았다. 뭔지 모르지만 간절한 시선. 그렇기에 때로는 저게 한이 되어 못 죽고 있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눈빛마저 스러진 상황. 모든 기능은 거의 다 정지되고 그저 숨결만 남은 세기의 사업가 지창명...

“우리 집사람 소원이 그거거든요. 아버지가 단 하루만이라도, 아니, 단 한 순간만이라도 제정신으로 풍용스카이벨트를 보고 가시면 좋겠다는...”

“......”

“채 선생님 얘기를 듣고는 또 그래요. 선생님께 진찰이라도 한 번 받아봤으면... 하지만 아버지 의사가 강하다보니...”

“부장님.”

경청하던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예.”

“죄송하지만 저는 신이 아닙니다. 병이 들어 신음하는 사람은 고칠 수 있지만 천수를 누리고 노환으로 죽어가는 분은...”

윤도가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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