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265)

“압니다. 하지만 오늘 일을 또 보니 어쩌면 선생님이라면 한순간 정도는 기적을 불러오실 것도 같아서...”

“부장님.”

“이성으로는 저도 불가능하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시도라도 해보면 자식 도리를 다했다는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거 같아...”

“......”

“결혼 안 해보셔서 모르시죠? 이런 일은 평생 바가지로 작용할 수도 있거든요.”

이진웅이 웃었다. 어쩐지 쓸쓸함이 묻어나왔다.

“진료비는 최대한 생각해 드리겠습니다. 만약... 만에 하나 한순간이라도 정신이 돌아올 수 있다면... 그때는 아내가 자기 지분의 풍용푸드 주식, 일부를 잘라 드릴 지도 모릅니다.”

“봐드리죠.”

“예?”

“시간 비워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보는 거야 큰 수고가 드는 게 아니니 진료비는 이 식사로 갈음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돈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

“선생님!”

“제가 자선사업가는 아니지만 모든 일을 돈과 결부하지는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저는 그냥...”

“식사하시죠. 음식 다 식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내에게 잠깐 전화 좀 하겠습니다. 굉장히 좋아할 거거든요.”

이진웅은 반색을 하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사실 이날의 윤도는 이 문제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늙어서 죽어가는 사람까지 살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선택이 얼마나 빛나는 선택이 될지 이날의 윤도는 알지 못했다.

**

오라개발 오 이사와 정 대리의 치료는 윤도에게도 터닝포인트를 안겨주었다. 웅황 때문이었다. 신약의 개발은 과연 쉬운 게 아니었다. 흡사 손에 쥐면 빠져나가는 안개 같았다. 공통분모를 찾았나 싶으면 살짝 비껴가고 벗어났다.

A 타입의 활성농도가 잘 듣는 아니가 있는가 하면 B 타입에 맞는 아이가 있었다. 신장 기능을 강화하면 폐의 작용, 폐의 기능을 강화하는 약제 성분 비율을 올리면 비장이 주춤거리는 식이었다. 그걸 넘어가게 해준 게 웅황이었다.

산해경의 웅황.

온갖 독을 밀어내고 몸을 가뜬하게 해준다. 현대의 웅황과는 아주 다르다. 그러나 현대의 웅황도 쓸모 없는 돌덩어리는 아니었다. 동의보감에 올라간 족보 있는 약재기 때문이었다. 산의 양지 쪽에서 캔 것은 웅황이고, 음지 쪽에서 캔 것은 자황이다. 본초강목에도 출연하는데 깨끗하고 투명하면 웅황이고, 겉이 검은 것은 훈황이라고 명하고 있다.

효능은 피부 개선과 피부가 헌 데 사용한다고 나온다. 가래를 삭히고 벌레를 죽인다. 사기를 없애고 버짐에도 쓴다. 주의점은 산해경의 웅황과 달리 비소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 하지만 그걸 분리하는 법제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법제의 달인 진경태는 괜히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장벽을 만났다.

[웅황=비소]

진경태가 문제점을 짚어주었다. 법제로 비소를 없애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의 소비자들의 정서는 그렇지 않았다. 혹시라도 비소 운운하는 말이 나오면 바로 철퇴를 맞을 수 있었다.

“......!”

윤도의 맥이 풀릴 때 진경태가 다른 대안을 내놓았다. 유황오리였다. 웅황의 주성분도 황, 그렇다면 인체에 유익하다는 유황은 어떨까? 그거라면 오히려 소비자들의 감수성까지도 살 수 있었다. 윤도는 유황오리 쪽으로 원료를 틀었다.

류수완의 협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윤도와 개발협정 계약을 체결한 류수완, 걸핏하면 약제실에 들러 개발에 대한 조언을 잊지 않았다.

거기에 진경태의 노력이 더해졌다. 뚝심의 진경태는 마침내 웅황의 대안으로 내세운 유황오리에서 활성물질을 분리해냈다. 생약과 분자한의학적 방법으로 엮어낸 쾌거였다. 활성검색과 작용기전의 규정도 밝혔다. 독성 안정성도 문제가 없었다.

다시 세팅된 약성물질로 탕제를 만들었다. 환자의 증세 정도에 따라 농도 조절을 했다. 결과는 좋았다. 탕제를 먹은 환자들이 3일 안에 일제히 호전을 보인 것이다.

‘나이쓰.’

윤도가 쾌재를 불렀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더니 어린아이들을 위해 시작한 신약개발은 이제 사정권에 있었다.

비가 오는 목요일, 윤도의 한의원은 여전히 붐볐다. 아무리 예약제를 강조해도 막무가내 환자들이 있었다. 경중을 보아 눈치껏 진료를 해주어도 수효는 줄어들지 않았다.

좌골 신경통 환자를 원샷 장침으로 일어나게 했을 때였다. 간호사 배연재가 침구실로 들어섰다.

“원장님.”

“배 샘, 왜?”

“밖에 좀...”

“왜? 또 막무가내 환자야?”

“그게 아니고...”

연재가 말을 아꼈다. 시침을 마친 윤도가 한약 처방을 내고 대기실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원장님...”

대기하던 환자들이 인사를 전해왔다. 윤도는 그 인사를 하나하나 다 챙겨 받았다. 환자들에게 필요한 건 병이 낫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관심이었다. 관심을 주지 않아도 병을 고쳐주면 환자들이 온다. 하지만 그런 한의사는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고맙지도 않다.

“저 돈 벌어 처먹자고 한 짓이지.”

그렇게 치부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윤도는 괜히, 침 잘 놓고 뒤통수를 맞고 싶지 않았다.

“저기...”

현관으로 나온 연재가 주차장을 가리켰다.

“......!”

거길 바라본 윤도가 소스라쳤다. 태산처럼 앞을 가로막은 버스 때문이었다. 버스는 장례차였다.

“장례차가 왜?”

윤도가 연재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유족 한 사람이 다가왔다.

“이 분이 원장님이세요.”

연재가 윤도를 가리켰다. 그러자 유족이, 대뜸 허리부터 조아렸다.

“무슨 일이신지?”

윤도가 물었다.

“죄송합니다. 원장님. 실은 어머니 유언이 있어서...”

“유언이라고요?”

“저희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흉통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원장님 장침 한 번 맞기가 소원이었는데 다 늙으신 데다 저희가 맞벌이라 묵살해 버렸는데...”

“......”

“동네 할머니들에게도 버릇처럼 말씀하셨더군요. 단 하루라도, 단 한 숨이라도 흉통 없이 숨 쉬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여기 장침 맞으면 그럴 것 같은데 늙어 짐 덩어리다 보니 갈 수가 없다고...”

“......”

“어제 장례식장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시니 어머니 말씀이 떠올라... 마지막 가는 길에 한의원하고 원장님 얼굴이라도 보게 해드릴까 싶어서 이렇게 무례하게...”유족이 부스럭 뭔가를 꺼내보였다. 할머니의 메모였다.

<일침한의원 장침 한 번 맞아봤으면...>

삐뚤 빼뚤 눌러써진 글자. 그걸 본 윤도는 숨이 터억 막혀왔다. 인생의 마감을 앞둔 병자와 노환의 어르신들. 그 단 하루의 소원... 그걸 생각하니 말문이 막히는 윤도였다.

“죄송하지만 선생님이 쓰시는 장침 하나 얻을 수 있을까요?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장침...”

“어머니를 매장하게 되었습니다. 흙 덮을 때 관에 꽂아드리려고... 거기서나마 아프지 마시라고...”

설명하는 유족의 눈에서도 빗물이 나왔다. 기꺼이 장침 한 세트를 내주었다. 봉투는 받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장례차가 머리를 돌려 빠져나갔다.

“배 샘, 눈에 빗물 튀었네.”

연재에게는 티슈를 뽑아주었다. 그 빗물이 연재 눈에만 튀었을까? 윤도 역시 돌아서며 남 몰래 눈시울을 붉혔다. 장침이 아무리 영험하대도,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었다.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너무 많았다.

“......!”

원장실로 향하던 윤도가 걸음을 멈췄다. 바닥에 떨어진 과자봉지 때문이었다. 풍용푸드의 제품이었다.

‘아, 지 회장님...’

장례차와 풍용푸드 포장지를 보자 이진웅이 떠올랐다. 아차 싶었다. 그날 약속을 하고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이진웅은 재촉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여보세요.”

다음 환자가 들어오는 사이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윤도였다.

혼신장침, 저승행 열차를 세우다-1

혼신장침, 저승행 열차를 세우다-1

촤아아!

오후 5시, 비는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드세졌다. 시동을 끄려다 윤도는 알았다. 한의사 가운 그대로라는 걸.

‘푸웁!’

혼자 살짝 뿜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도 대충 먹은 날이었다. 그나마 진경태가 보조를 맞춰줘서 혼밥은 면했다. 환자가 늘면서 일은 더 많아졌다. 신약개발까지 더한 결과였다. 환자도 그렇지만 약재 감별과 납품 확인도 일이 많았다. 진경태가 알아서 하지만 윤도의 관심 때문이었다.

“아저씨 도와줄 사람 하나 더 쓰세요.”

결국 진경태에게 구인을 지시하게 되었다.

윈도우 브러시는 빗물에 허덕였다. 네비게이션에서 안내종료를 알려왔다. 지창용 회장의 저택이었다.

‘응?’

침통을 챙기려던 윤도 시선이 대문으로 향했다. 거기 우산이 두 개 있었다. 실루엣만으로도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진웅과 그 아내였다.

딸깍!

문을 열자 이진웅이 우산을 받쳐주었다.

“고맙습니다.”

사양해도 소용 없을 것 같아서 친절을 수용했다. 아내가 빗속에서 인사를 해왔다. 재벌가의 여자답지 않게 단정하고 소탈한 차림, 지상에서 가장 극진한 자세였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첫 마디를 꺼냈다.

“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녀가 앞서 걸었다. 문은 자동으로 열렸다. 현관에 들어서자 그녀의 오빠와 남동생 부부가 보였다. 그들 역시 정중한 목례로 윤도를 맞았다.

“이 방입니다.”

그녀가 거실 옆의 방을 가리키자 상주 간호사가 문을 열었다. 지창용 회장은 침대에 있었다. 산소 마스크를 착용한 몸이었다. 하얗게 뜬 얼굴은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오랜 병구완으로 방안 가득 서린 칙칙한 주검의 향. 얼핏 보아서는 사람인지 마네킹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아버지.”

그녀가 무릎을 접고 지 회장 손을 잡았다. 지창용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이었다.

“제가 말씀드렸던 한의사 선생님이 오셨어요. 아버지 옛날에 이천에서 침 한 방으로 가슴병을 고쳐준 명의가 그립다고 했잖아요? 그 분보다 나은 분이세요.”

이천의 침 명의는 누굴까? 한의사다운 호기심이 솔깃했다.

“......”

지창용은 대답이 없다. 뒤에서 지켜보는 이진웅은 고개를 떨군 채 숨을 죽였다.

“한 번 봐도 될까요?”

윤도가 말하자 그녀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윤도가 다가섰다. 방 안에는 오빠와 남동생 부부까지 들어와 있었다.

92세.

어찌 보면 천수를 누렸다. 하지만 가진 게 많은 재벌. 어찌 목숨을 놓고 싶을까? 지창용 회장 정도라면 그 옛날 진시황 부럽지 않을 자리였다. 저 바다 건너 어느 섬에 장생불로약이 있다면, 저 화성에 치료제가 있다면 몇 천억을 들여서라도 사신을 보낼 것 같았다.

“......!”

맥을 짚은 윤도 시선에서 힘이 빠졌다. 예상대로 맥이고 말 것도 없었다. 저승에 한 발이 들어간 상태였다. 다만 좋은 약과 의료기구 덕분에 ‘연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틀렸어.’

윤도 혼자 고개를 저었다. 희망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애써 볼 생각이었다. 그건 한의사의 의무이자 긍지였다. 하지만 이 환자는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윤도가 돌아섰다. 뒷말은 ‘늦었습니다’로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진웅의 아내가 느닷없이 무릎을 꿇어버린 것이다.

“사모님...”

놀란 윤도가 그녀를 잡았다.

“어려운 거 압니다. 하지만 저희 아버지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사모님...”

“더도 바라지 않습니다. 딱 하루만... 아니, 그것도 안 되면 딱 한 시간만이라도 안 될까요? 설령 마약을 쓰더라도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그저 우리 아버지, 저 분의 필생의 꿈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제정신으로 보고 갈 수만 있도록...”

“부탁합니다!”

뒷줄의 오빠가 동참을 했다. 옆에 있던 이진웅까지도 고개를 숙였다. 윤도 하나를 둘러싸고 애원의 포위망이 형성된 방. 윤도는 입 안에 든 말을 차마 꺼내놓지 못했다.

“이제 곧 메인 빌딩이 완공됩니다. 그 장면을 아버지가 보시면 우리 소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사모님, 하지만 환자의 상태가...”

“알고 있습니다. 잘못된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주치의께서도 한 달을 못 넘길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 부장님.”

“부탁드립니다.”

윤도는 이부장에게 진정을 요청했지만 그 대답 역시 그녀의 소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별 수 없이 한 번 더 진맥을 하게 되었다.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산해경...’

부득 영약 쪽으로 틀었다. 노화로 인해 온몸의 기능이 바닥으로 떨어진 육체. 오장육부에 남은 기혈이 티끌이니 침만으로는 무리였다.

산해경이라면 물론 해결책이 있었다.

하나는 대황남경 무산에 있는 8개 천제의 방. 그 안에는 불사약이 있다. 호기심에 집어내려했던 윤도. 그러나 불사약을 지키는 가공스러운 불침번 황조 때문에 범접도 못했다. 그건 허용된 약이 아닌 것 같아 그 후로 욕심내지 않았던 윤도였다. 불사는 의술의 범주가 아니었다.

또 하나의 불사약은 해내서경에 있는 개명의 동쪽이었다. 거기 무팽과 무지, 무양과 무리, 무범과 무상으로 불리는 신의(神醫) 여섯이 모두 불사약을 지니고 있다.

여섯 신의.

숫자가 위안을 주었다.

‘만약 그 중 하나를 구할 수 있다면.’

지창용 회장은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윤도가 고개를 저었다. 그 약은 불사(不死)였다. 그 말은 곧 지 회장이 죽지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그건 의술에 허용된 일이 아니었다. 한 인간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 지 회장이 깨어나 엘프나 드래곤처럼 천 살까지 살고 만 살까지 산다면?

윤도가 고개를 저었다.

재앙이다.

그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위해 윤도를 허용하지 않은 황조가 분명했다.

지 회장은 필요하고 산해경은 거부한다.

약이 있으되 욕심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 회장...

보아하니 세 남매는 반듯하게 자랐다. 속 사정은 모르지만 지 회장이 이런 지경인데도 재산분쟁 같은 뉴스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 그동안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사모님.”

“네, 선생님.”

“혹시 그동안 회장님이 드신 약을 알 수 있을까요?”

“병원 처방 말인가요?”

“아뇨. 처방 외에... 따로 구해주신 거 없으신가요?”

“있... 어요.”

이진웅 아내의 대답은 다소 주저가 있었다. 재벌가의 사람들. 돈이 아쉬운 건 아니니 공식 비공식 진료를 다 받았을 일이었다. 전담 간호사가 진료일지를 가져왔다. 공식 처방 외에 수 많은 영약들이 있었다. 산삼에서 최상품 노루궁뎅이 버섯까지. 다른 나라의 진귀한 약재들도 빼곡했다. 그 중에서 웅담이 눈에 띄였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구하기 힘든 약이었다. 어떻게 구했을까?

“중국과 러시아 주재원들에게 부탁해서 구해왔어요. 몇 번이고 실패한 끝에 겨우 두 개를...”

그녀가 대답했다.

“네...”

여러 번 시도 끝에... 그 말이 심장 깊숙이 박혀왔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있을까? 어쩌면 하나도 없을 것 같지만 의외로 많았다. 진품 웅담 또한 그 범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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