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265)

“부탁드립니다.”

다시 간청 공세가 나왔다. 윤도가 고개를 젓기 전이었다.

‘할 수 없지. 일단 시도는 해보는 수 밖에...’

장침을 넣었다. 양 손바닥 끝이었다. 거기로 들어간 장침이 네 혈을 동시에 꿰었다. 태능혈에서 시작해 내관혈, 간사혈을 지난 침 끝이 극문혈에 닿았다. 심장에 기를 넣는 일침사혈이었다. 동시에 말초순환의 자극이었다. 침감은 전에 없이 강력했다.

원래는 약한 침감으로 찔러야 하는 환자. 하지만 그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일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심장까지 도달해야 하는 침감. 하지만 지 회장에게는 겨우 팔꿈치 부위까지 올라가는 것도 허덕거렸다.

‘역시...’

고개를 젓고 다른 방도를 찾았다. 이번에는 각 혈자리의 모혈들이었다. 차곡차곡 찌르며 기혈 흐름을 보았지만 반응은 미미하고 또 미미했다. 슬프게도 이 침은 그저 세 남매를 위한 위로에 불과했다. 지 회장의 목숨은 마감직전. 여명에 불과했다.

이제 남은 건 산해경 뿐이었다.

마음을 정리했다. 세 자녀의 성의를 봐서 산해경을 열어볼 생각이었다. 만약 불사약이 허용된다면, 그럴 리 없지만 허용된다면 그 또한 하늘의 뜻으로 생각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진웅과 아내는 차까지 따라 나왔다. 오빠와 남동생 부부들도 대문까지 나왔다. 여섯 사람이 나란히 윤도에게 인사를 했다.

촤아아!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아유, 우리 채 의원 얼굴 보기 힘드네.”

나흘 만에 돌아온 집, 어머니가 타올을 건네주며 애달픔을 토로했다.

“죄송해요. 워낙 환자들이 밀려서...”

윤도는 얼굴의 물방울을 닦았다. “죄송은, 엄마가 아무 도움도 못 주니까 그렇지.”

“개시를 잘 해주셔서 대박인데 그보다 더 어떻게 도와요?”

“말이라도 고마워.”

“아버지는요?”

“그 양반은 일에 미친 사람 아니니? 괜찮은 기회가 있을 거 같다면서 너처럼 날밤이다. 이러다 생과부 되게 생겼어.”

“아버지 너무 무리하지는 마셔야할 텐데...”

“밥 먹어. 고등어 식겠다.”

어머니가 고등어구이를 내밀었다. 기름이 쏙 빠지게 구워져 풍미가 좋았다.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 역시 한의원의 약제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디서고 눈만 뜨면 신약과 침술연구에 몰두하는 윤도였다.

세상의 시각이란 참 달랐다. 갈매도의 일이 생각났다. 윤도의 사수 이창승. 처음 윤도가 한의서를 어질러놓고 공부하자 빈정을 날려 왔었다.

“꼭 초짜들이 표시를 내요.”

하지만 지금 윤도를 보는 평가는 180도 달라졌다.

“이야, 역시 명침은 공부에서 나오는 거로구나.”

며칠 전 다녀간 동창의 말이었다. 그는 지방 한방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밟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숨을 돌리고 의서를 뒤졌다. 천수를 다한 노인을 살리는 비방. 윤도에게는 그게 필요했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 말도 틀렸다. 지 회장은 이미 천수 이상을 살고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약속은 약속이니...’

신비경을 꺼내들었다. 산해경을 펼쳤다.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대황남경의 무산이었다.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덟 궁전은 그대로였다.

‘꿀꺽!’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도 뇌리에 생생한 가공의 불침번 황조... 보는 것만으로도 십 년은 감수할 것 같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두근...

쿵당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거울을 비쳤다.

쒸엑!

바람소리와 함께 황조가 강철의 부리로 쪼았다.

“......!”

비명도 없이 물러났다. 이 공포는 면역도 되지 않았다. 지난번보다 더 오싹한 느낌이었다. 두 번을 더 시도했다. 그때마다 윤도는 기겁을 하며 물러설 뿐이었다. 전략을 바꿔 후미의 방을 노렸다. 하지만 무산의 검은 뱀을 막기 위해 혈안이 된 황조는 한 치의 틈도 없었다. 전시안이라도 가진 모양이었다.

신선의 파수꾼 황조가 지키는 여덟 방 안의 불사약. 구경도 못했지만 포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환자 치료도 중요하지만 손가락을 잃을 수는 없었다.

‘포기!’

신의 뜻으로 알았다. 윤도가 산해경을 옆으로 밀었다. 그때 책이 다른 의서 모서리에 걸리면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윤도가 집어올렸다.

“......!”

손에 잡힌 산해경의 내용. 하필이면 해내서경이었다. 하필이면 봉황과 난새가 무리를 이루어 날고 있는 개명이었다. 신성한 새들은 모두 흰 뱀을 등에 태우고 날았다. 어디로 가는 걸까? 호기심에 새 무리를 따라 신비경을 비추었다. 새들은 동쪽으로 날다 땅 위에 내렸다. 거기 가물거리는 안개를 밟고 선 여섯 신의(神醫)의 자태가 보였다.

‘아!’

저절로 경탄이 나왔다. 여섯 신의는 모두 청랑서를 들고 청랑박을 차고 있었다. 청랑박에서는 신이한 빛이 나온다. 그 청랑박에 불사약이 들어있었다.

혼신장침, 저승행 열차를 세우다-2

혼신장침, 저승행 열차를 세우다-2

여섯 신의는 죽어가는 환자를 보고 있었다. 환자는 놀랍게도 이무기의 몸에 사람의 머리에 달렸다. 신의들은 돌아가면서 불사약을 뿌렸다. 온몸에 고루 뿌리고 마지막은 얼굴이었다. 환자에게 달려오는 죽음을 몰아내는 것이다.

불사약...

피가 멎는 것 같았다.

오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인간이 그토록 원하는 불사약... 그 불사약의 치료 현장을 보게 되다니...

윤도는 숨을 죽였다. 침조차 넘기지 않았다.

봉황과 난새가 태워온 백사들이 환자의 몸으로 몰려들었다. 환자 몸을 덮었다. 환자는 마치 백의를 입은 듯 하얗게 변했다. 그 틈새가 빈 곳이 없자 신의들이 한 발 물러섰다. 환자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내 불사약 통이 비었군.”

북쪽 방위에 버티고 있던 신의 무팽이 말했다.

“제 박은 너무 오래 되어 속이 삭았는지 아까부터 바닥입니다.”

서쪽의 무양 역시 청랑박을 흔들어보였다. 그가 청랑박을 거꾸로 하자 한두 방울이 대지에 떨어졌다.

“뱀족의 제사장은 살았습니다. 불사약을 채우러 가시죠.”

마지막 방위에서 무상이 고개를 숙였다.

“그보다는 가서 선주(仙酒)나 한 사발들 하시세.”

무팽이 수염을 쓸며 말했다. 여섯 신의는 뱀 인간을 내려다보더니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뒤를 이어 봉황새와 난새들도 하늘로 멀어졌다.

그제야 흰 뱀들이 환자에게서 내려왔다. 정신이 깃든 환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뚱이는 뱀에서 사람의 형체로 바뀌어갔다. 흰 뱀들 역시 날렵한 사람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제사장을 모시고 신단으로 옮겨갔다. 모든 것이 한편의 영화 같았다.

상황이 정리되자 안개가 차츰 걷혔다. 순간, 윤도의 눈이 대지에 고정되었다.

‘저건...’

윤도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안개 속에 드러난 청랑박 때문이었다. 무양이 거꾸로 들었던 그것이었다. 오래 된 청랑박이기에 버리고 간 모양이었다.

‘잡힐까?’

손을 내미는 척추에 미칠 것 같은 긴장감이 맺혀왔다. 손끝이 떨렸다. 그 끝이 청랑박에 닿자... 청랑박이... 잡혔다.

‘으헉!’

놀란 윤도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청랑박이 허공에 떴다. 이제는 현실의 윤도 방이었다. 거꾸로 기우는 그 박을 온몸을 던져 받아냈다.

쿵!

머리부터 벽에 닿았다. 그래도 다행히 청랑박은 건졌다.

‘후우...’

멸균된 샘플통을 열었다. 내용물이 있을까? 혹시 단 한 방울이라도? 지구를 구하는 심정으로 청랑박을 기우렸다. 그저 오래된 조롱박처럼 생긴 청랑박. 한참을 기우려도 나오는 게 없었다.

‘없는 건가?’

갈등이 살짝 솟구칠 때였다. 박의 목 언저리에 반짝이는 물기가 보였다.

‘있다!’

늘어지던 긴장감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 기대감을 안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톡!

톡!

딱 두 방울이었다. 그러자 청랑박은 놀랍게도 안개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놀란 윤도가 재빨리 샘플병을 보았다. 다행히 물방울은 그대로 있었다.

두근!

윤도는 감히 생체분석기를 가동하지 못했다.

불사약...

꿈이나 꾸던 약이었을까? 전설 속에서나 듣던 약이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고작 두 방울... 하지만 오래 참지 못했다. 맹렬한 호기심이 윤도를 잡아끈 것이다.

‘분석.’

두 글자를 마법처럼 외웠다.

[원산] 산해경

[약재수령] 19365년

[약성함유등급] 측정불가

[중금속함유] 무

[곰팡이독소] 무

[약재사용유무] 가능

[용법용량] 인체를 6등분 하여 한 번에 여섯 방울씩 뿌린다. 마지막으로 눈 코 입의 구멍에 한 방울씩 적하하면 영생을 누릴 수 있다.

[약효기대치] 측정불가

“......!”

분석을 마친 윤도가 풀썩 무너졌다. 용량 때문이었다. 6등분에 여섯 방울이니 6×6=36 방울, 거기에 더해 눈 코 입의 구멍이라면 2+2+1=5이니 도합 41방울이 필요했다. 그러나 윤도에게 주어진 건 단 두 방울...

‘쉿!’

머리가 하얘지는 윤도였다.

두 방울...

샘플병 속에 든 두 방울...

어떻게 하면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침대에서 벽에 등을 기댄 윤도는 까맣게 밤을 새우고 있었다. 우연히 불사약을 얻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단 두 방울이었다.

‘성분분석...’

답은 하나였다. 불사약의 성분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가장 유사한 성분을 찾아 지 회장의 모든 모혈에 약침으로 넣는 것. 설령 수포로 돌아간다고 해도 성분분석은 남는다. 그렇다면 언젠가 명약을 개발하는데 커다란 재산이 될 것 같았다. 썩어도 준치이니 영생약이라면 불치병 정도는 낫게 해주지 않을까?

이른 새벽, 어머니 몰래 문을 닫고 거실을 나섰다.

부릉!

단숨에 시동을 걸었다.

“......!”

“......!”

진경태의 눈이 우묵하게 깊어졌다. 윤도의 눈도 한없이 깊었다.

“다시 한 번 해보세요.”

윤도가 분석기가 토한 결과지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샘플이...”

진경태가 실험 튜브를 들어보였다. 분석을 위해 넘겨준 한 방울. 희석법을 썼건만 남은 양은 거의 없었다.

“딱 한 번 분량입니다. 원장님이 해보시죠.”

진경태가 마이크로 파이펫을 넘겼다. 1000분의 1ml까지 취할 수 있는 파이펫이었다.

‘후우...’

떨리는 손을 감추며 샘플을 취했다. 청랑박에서 나온 불사약. 수십 종 자동분석기에 걸었지만 나오는 게 없었다. 벌써 네 번째 그랬다.

반응액을 떨구었다. 대조액도 떨구었다. 대조액은 노랑색을 띄지만 샘플은 무색이었다.

지잉!

분석 버튼을 눌렀다. 런닝 타임은 고작 10분 안쪽. 그 시간 동안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진경태의 실수로 생각했었다. 산삼이든, 사향이든, 웅담이든... 기존 약재에서 나오는 성분들의 하나가 기가 막힌 농도로 나올 걸로 생각했던 청랑박의 불사약. 분석표 가득 ‘분석불가’를 달고 나온 것이다. 기본 물질부터 그랬다.

“반응이 안 일어났나본데요?”

진경태가 기존 반응 시간을 두 배로 늘렸다. 처음보다 신중하게 분석기로 들어갔다. 결과는 같았다.

두 번째 실패.

이때까지도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다른 영약 때문이었다. 산해경의 다른 영약들은 약성분석이 되었다. 다만 현존하는 약재와 비교불가로 우월한 성분함량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무엇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10분.

그 어느 날보다 초조했다. 보다 못한 진경태가 오미자 끓인 차를 내밀었다. 아무 생각 없이 원샷해 버렸다.

“푸웁!”

너무 뜨거워 뱉어버렸다.

“원장님.”

“괜찮습니다.”

찬 물 한 컵을 다시 마셨다. 그래야 지난 시간은 꼴랑 3분이었다. 한참 후에 시계를 보지만 겨우 4분... 그 10분은 거의 일 년처럼 길었다.

“나옵니다.”

분석기의 알람과 함께 진경태가 말했다. 윤도의 시선은 이미 분석기의 화면에 있었다.

지이잉!

프린터를 통해 분석결과가 출력되고 있었다. 윤도는 움직이지 않았다. 결과는 이미 보였다. 화면에 보이는 붉은 색의 ‘측정불가’였다. 알람은 명심하라는 듯 깜빡거렸다. 진경태가 다가가 화면 알람을 꺼버렸다. 고문이 아닐 수 없었다.

<분석불가>

분석기는 고장이 아니었다. 대조용액은 분석기의 성능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무엇 하나 놓치는 게 없는 초정밀 분석이었다.

“더 할까요?”

진경태가 물었다. 그의 시선은 남은 한 방울에 가있었다. 희석법을 사용하면 다시 5회 정도는 분석이 가능했다.

“아닙니다.”

윤도가 고개를 저었다. 산해경이 허락하지 않던 최상의 영약 불사약. 어렵게 그걸 얻었다. 그러나 양이 작았다. 성분이라도 분석해 두면 나중에라도, 유사한 성분을 찾거나 혹은 과학의 힘으로 합성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랬다. 분석이 되지 않음으로써 윤도에게 기막힌 고민거리를 던져주고만 것이다.

<분석불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었다.

첫째, 양이 모자라므로 유효 약성을 내지 못 해 의미가 없는 약이다.

그렇다면 이건 불사약으로서 작용하지 않는다.

둘째, 하늘이 인간에게 영생을 허락하기 않기에 분석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건 인체의 기를 생각하면 어렵지 않았다. 기라는 건, 분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경우라면 불사약의 효능 자체는 기대가 가능했다.

남은 한 방울을 들어보았다. 이제는 정말 두 눈 부릅 뜨고 봐야 확인될 미량이었다.

“도움이 못 돼 죄송합니다.”

진경태가 웃었다.

“아뇨. 괜히 새벽부터 요란을 떨어서 죄송합니다.”

“특별한 지장수인가요?”

“그렇죠. 아주 특별한...”

“주워들은 말인데 신선의 물은 분석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건 하늘이 허락하는 게 아니라고...”

“알겠습니다.”

위로를 받아들고 원장실로 돌아왔다. 시간은 겨우 아침 7시를 지났다. 지회장을 떠올렸다. 그는 아침을 맞았을까? 이렇게 싱싱한 아침이 새로운 날인 줄 알고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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